대보적경-2445-489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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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인연(因緣)을 순종하기 때문이요, 할 일을 다 마친 데에 머물러서 구경청정(究竟淸淨)하기 때문이니라.
장자야, 마치 아무도 없는 빈곳의 약나무[藥木]와 우거진 숲은 두렵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은 것처럼 장자야,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 마치 초목과 벽과 같다는 생각을 내야 하고, 또 마치 환술과 같다는 생각을 내야 하리니, 이 안에서는 무엇이 두렵고 그 누가 무섭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두려움이 없으므로 몸을 관찰하되 '이 몸은 나[我]가 아니고 내 것[我所]도 아니며 중생(衆生)도 없고 수명(壽命)도 없으며 사람[人]도 없고 장부(丈夫)도 없으며 소년(少年)도 없다'고 하여야 하느니라.
말한 바의 두려움[畏]이라 함은 공하여 진실이 없다는 것이니, '나는 이제 진실이 없는 것에서 두려움을 내서는 안 된다. 마치 아무도 없는 빈곳의 약나무와 우거진 숲에는 주인도 없고 보호하는 이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온갖 법을 안 뒤에는 아란야의 처소에 잘 머물러야 하나니, 왜냐하면 근심과 다툼을 끊기 때문에 아란야라 하고 생기는 것도 없고 보호하는 이도 없는 데를 아란야라 하기 때문이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니, 점차 계율[戒聚]에 순종하고 다음에는 선정[定聚]을 닦는 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지혜[慧聚]를 쌓는 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해탈[解脫聚]을 익히는 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해탈의 지견[解脫知見聚]을 내는 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보리의 법을 펴며 돕는 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12두타(頭陀)의 공덕을 쌓는 것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니라.
진실한 방편이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5음(陰)을 잘 알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법계(法界)와 평등하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모든 입(入)을 깎아 없애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보리의 마음을 잊지 않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공을 관찰하면서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니라.
모든 선근을 잃지 않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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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서 찬탄하셨으므로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보살들이 칭찬하였기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요, 모든 성인들이 칭찬하였기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며, 해탈하려는 이의 의지할 곳이기 때문에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니, 일체지(一切智)를 바라는 이는 마땅히 이곳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 조그마한 일로써도 6바라밀을 원만하게 하느니라. 왜냐하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게 되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 보시[檀]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어떻게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인욕[忍]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 하느냐 하면, 모든 중생들에게 성내는 마음 없이 참는 온갖 지혜이니,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있으면서 인욕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어떻게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정진[進]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 하느냐 하면, 이 보살은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으며 반드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으리라'고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니,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정진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어떻게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선(禪)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 하느냐 하면, 장자야,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선정을 버리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모든 선근을 닦나니,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선정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어떻게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반야(般若) 바라밀다를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한다 하느냐 하면, 장자야, 이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나의 이 몸과 같아서 공한 것도 그러하고 나의 이 몸과 같아서 보리 또한 그러하며, 진여[如]와 같아서 허망한 생각도 없고 공과 같아서 허망한 생각도 없다'고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니,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반야바라밀다를 닦아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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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원만하게 한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이와 같이 6바라밀을 닦아 익혀 원만하게 하느니라.
장자야, 출가한 보살이 네 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아란야의 처소를 아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청정한 계율[淨戒]과 법을 많이 들어 앎[多聞]과 생각함[思惟]이 상응하면서 법대로 수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아란야의 처소를 알고 머무른다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설령 번뇌가 왕성하여도 그것에 친근하지 않아야 하며 아란야에 머무르면서 그 번뇌를 꺾고 조복해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면서 마땅히 다섯 가지의 신통을 닦아야 하나니, 그것은 하늘·용·야차·건달바 등을 교화하기 위해서이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아란야의 처소에 머물러야 하나니, '이 안에서 나는 온갖 청정한 선(善)을 원만하게 하여 그 선법(善法)에 훈습되었으니 이후에 성읍(城邑)이나 마을로 가서 설법을 해야겠다'고 하느니라.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이 이와 같은 네 가지의 법으로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른다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아란야의 처소로부터 일어나 가서 법을 받고 독송하려고 화상이나 아사리에게로 나아가게 되면 '상·중·하에 앉아 있는 이들은 바로 나의 복밭[福田]이니 게을러서는 안 되며 이것은 나 스스로의 업(業)이다'라고 하면서 그들을 시샘하지 말고 그들의 심부름을 해야 되느니라.
또 관찰하기를 '여래·응공·정변각께서는 온갖 하늘과 세간 사람과 악마와 범천과 사문과 바라문이 공양하는 복밭이며, 부처님께서는 온갖 중생의 아버지이시나 부처님께서는 마음에 남이 봉사하여 주기를 바라지 않나니, 나는 지금 그것을 배우려 한다. 나 또한 일체 중생을 위하여 심부름꾼이 되어야 하나 나는 다른 이들에게 나를 위해 심부름꾼이 되어 주기를 바라지 않으리라'고 해야 하나니, 왜냐하면 장자야, 만일 어떤 비구에게 남의 거들어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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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으면 법의 공덕을 잃게 되기 때문이니라. 만일 재물로써 그를 거두어 줄 때에는 어떤가 하면 나의 도움을 이용하기 위해 재물로써 나는 거두어 준 것이요 법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믿음을 잃게 된 것이니, 만일 재물로 거두어 주면서 부리게 된다면 큰 과보의 이익이 없게 되느니라.
만일 화상이나 아사리의 처소에 가게 되면 그 마음과 뜻을 알아차린 뒤에 할 바 그대로를 하여야 하며, 화상이나 아사리로 하여금 나를 믿지도 않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게 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니라. 그들은 몸과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법을 찬탄하고 독송하여 주기 때문이며, 그들의 뜻을 만족시키고 공덕과 이익을 위하여 이익을 버리면서 법을 찬탄하기 때문이니라.
장자야, 만일 이 보살이 다른 사람에게서 네 글귀로 된 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면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와 상응하게 되어 보리의 도를 쌓는 것이므로 이런 스승에 대하여는 법을 위하여 공경해야 할 것이니라. 위와 같은 모든 스승에게서 문자와 장구(章句)와 게송을 받아 지니게 되면 한량없는 겁 동안 그들을 위하여 봉사하여야 되고 아첨이나 거짓된 마음을 내지 않으면서 온갖 것으로 공양해야 되느니라.
장자야, 알아야 하느니라. 그의 은혜조차 갚지 못하거늘 하물며 법까지 공경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장자야, 혹시 믿음으로 착한 생각을 일으켜 불·법·승을 생각하고 무루(無漏)를 생각하고 고요한 조복을 생각하면서 한량없는 겁 동안 모시며 화상에게 공양하게 해도 오히려 화상의 은혜는 만족하게 갚지 못하리니, 장자야, 이러한 것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장자야, 만일 법을 듣고 나면 한량없는 과보가 있어서 한량없는 지혜를 얻게 되는 줄 알아야 하나니, '나는 한량없이 화상께 공양해야 한다'고 하여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출가한 이의 법대로 머물러야 하는 것이니라. 장자야, 어떤 것을 출가한 이의 법대로 머무른다 하느냐 하면, 이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계율[淨戒]을 들은 뒤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성종(聖種)에 머물러서 두타(頭陀)를 즐기는 것이요, 집에 있는 이나 출가한 이를 친근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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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며, 아첨이나 비굴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요 아란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것이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들은 뒤에 다시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몸의 청정한 계율로도 역시 몸을 얻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요, 입의 청정한 계율로도 역시 입을 얻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며, 모든 소견을 여의는 것이요, 온갖 지혜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들은 뒤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나라는 생각을 여의는 것이요, 내 것을 버리는 것이며, 단견(斷見)·상견(常見)을 멀리하는 것이요, 인연의 법을 이해하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들은 뒤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음(陰)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요, 계(界)는 법계(法界)와 같다는 것이며, 입(入)은 허공의 무더기와 같다는 것이요,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들은 뒤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나는 나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요, 다른 데서 듣고 깨달아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며, 마음이 온갖 세간법 등에 즐겁게 머무르지 않는 것이요, 동요함이 없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출가한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들은 뒤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이른바 공을 아는 것이요, 모양이 없는 데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며, 온갖 중생에게 대비(大悲)를 일으키는 것이요, 나 없음[無我]에 들어가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을 출가한 보살의 네 가지의 청정한 계율이라 하느니라.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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