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연기

어찌할 수 없는 법과 어찌할 수 있는 법

근와(槿瓦) 2018. 1. 31. 00:53

어찌할 수 없는 법과 어찌할 수 있는 법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부처님께서 원인 탐구를 위해 세우신 세 번째의 기준은 원인은 법칙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불교는 신교(神敎)에 비교하여 법교(法敎)라고 불릴 수 있다.

 

이 말은 곧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법칙이라는 말이 되겠다. 세상을 신이 지배하는가? 또는 법칙이 지배하는가? 이에 대해 신학은 전자를 지지하고 과학은 후자를 지지한다. 또 건전한 이성 또한 후자를 지지한다. 그러므로 과학 또한 불교와 마찬가지로 법교이다. 예컨대 과학은 불교와 형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만일 신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만유인력의 법칙도 신의 뜻에 의해서 있는 것이요, 자동차가 나아가는 법칙도 신에 의해서 그런 것이며, 내가 태어난 것도 신에 의해서 그런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럼으로써 세상은 그저 신에 의해서 연출된 거대한 연극에 지나지 못한 것이 된다. 또 그럴 때 신은 우리에게 그 어떤 죄도 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같은 지력·체력 등 여러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신에 의한 것이었고, 나를 이렇게 키운 부모 또한 신의 뜻에 의해 나를 키웠으며,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 읽었던 책, 보았던 사물 따위가 다 그렇다고 할 때, 내가 지금 이런 식으로 신을 모독한다 하더라도 그 또한 신의 의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나, 재판한 빌라도 또한 죄가 없다. 오히려 그들은 이 위대한 연극의 완벽한 조연자로서 신으로부터 큰 칭찬을 들었으리라 짐작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신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법칙이 세상을 지배한다. 만일 신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신의 뜻에 의해 구구단이 바뀔 수도 있어야 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이 변하기도 해야 할 터이지만 그런 일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해 신께서는 한번 정하신 법칙을 바꾸지 않으신다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더군다가 우리는 신의 뜻보다는 법칙을 배워 살아감으로써 더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어차피 신이 세상을 법칙의 지배하에 두고 손을 뗀이상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법칙이지 신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법칙을 중심으로 괴로움의 원인을 탐구하셨다. 이것은 결코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즉 부처님은 무신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신 문제가 고와 그 지멸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보신 부처님께서는 아예 신의 문제 따위에 대해 생각지 않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생각지 않은 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하실 말씀도 없으셨다. 그리하여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잠잠이 침묵하시곤 하셨다. 그런 질문 자체가 문제의 핵심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거북의 털이라든가 토끼의 뿔과 같은 문제여서 말을 해도 이익됨이 없고, 결론을 얻어 보아야 고와 그 지멸에 기여하지 못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논의가 이익이 있고, 우리 삶에 기여하는가. 부처님께서는 이런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한결같이 말씀하곤 하셨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이렇게 논의하라. 이런 논의만이 이익이 있는 논의인 것이다”¹라고.

 

즉 사성제의 법칙을 탐구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법칙의 경직성 여부가 문제가 된다. 법은 경직된 것인가? 만일 경직된 것이라면 그 또한 또 하나의 신()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애써 신으로부터 얻어낸 주체적인 자유가 이번에는 법에 매여 버림으로써 무의미해져 버린다. 그러나 다행이게도 법은 그렇게 경직된 것이 아니다.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절대적으로 확립되어 있어서 그 어떤 존재도 바꿀 수 없는 경직·고정된 것이고, 둘째는 인간(중생)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 바꿔 나갈 수 있는 유연한 법이다.

 

잎에서 다루었던 고성제의 여덟 괴로움 등은 첫째 법에 속한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이어서 부처님조차도 바꿀 수 없다. 태어난 존재는 반드시 늙어야 하고, 죽어야 한다. 또 살아가는 존재는 반드시 좋은 정황과 헤어져야 하고, 싫은 정황과 만나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법을 알아서 그런 법과는 다투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울부짖고 탄식해도 한 번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울게 되는데, 실은 이것이야말로 법과 다투는일이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노 · · (老病死)의 법은 구구단의 법보다도 유연하다. 우리는 노력에 의해 늙음 · 병듦 · 죽음을 어느 정도까지 지연시키거나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지연 · 약화시킬 수 있는 정도만큼의 유연성이 노병사에는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그런 유연성이 있다고는 해도 노병사 자체를 근본적으로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노병사의 법이 부동 · 불변하다는 원칙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에 대해 두 번째 법이 그 대응책이 되어 준다. 즉 그 어찌할 수 없는 법을 두 번째 법인 어찌할 수 있는 법으로써 해결하게 된다는 말이다.

 

무엇을 어찌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이가 죽었을 때 그 죽음 자체는 어찌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내 마음은 어찌할 수 있다. 즉 같은 죽음을 놓고 울부짖으며 괴로워할 수도 있지만, 괴로워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내 마음을 바꾼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마음를 바꾸면 괴로움이었던 사실이 괴로움이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 두 번째 법에 의지하여 우리의 마음을 바꿔 나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최후에는 모든 괴로움을 모조리 괴로움 아닌 것으로 바꿀 수 있기에 이른다. 이것이 유연하여 경직되지 않은 가변적인 법이다.

 

마음 바꾸기는 도자기를 고무 그릇으로 바꾸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여기 도자기(중생을 상징) 하나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을 잘못 다루어 떨어뜨려 깨져 버렸다. 이 때 사람들은 깨어짐(여덟 괴로움)의 원인을 떨어뜨림에서 찾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한 도자기가 깨어지지 않은 상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찌어찌하여 이번에는 도자기가 떨어져 깨어지지 않게끔 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도자기란 언젠가는 깨어지게 마련인 연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도자기가 깨어진 근인(根因)은 떨어짐이라는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떨어짐은 어디까지나 깨어짐의 간접적인 원인일 뿐이요, 직접 원인은 그것이 도자기였다는 그 점에, 즉 도자기 자신에게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도자기가 완전하게 보호되려면 도자기 자신이 깨어지지 않는 재질로 바뀌어야만 한다. 예컨대 고무 그릇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도자기는 제 스스로 고무 그릇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고쳐 나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을 바꿔 고무 그릇화()할 수 있다. 이 때문에라도 우리는 나 자신에서 여덟 괴로움의 원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도자기가 깨어진 원인을 외부에서가 아니라 도자기 자신에게서 찾듯이, 이렇게 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은 자신에게 문제의 근원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고무 그릇화하는 마음 바꾸기 또한 법칙에 의거하여 달성된다. 이것은 곧 마음 또한 법칙에 의해서 일어나고 그 법칙에 의해서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저것이 일어난다. 또한 같은 법칙에 의해서 이것이 없어지면 그에 따라 저것이 없어지며, 이 법칙을 이용하여 우리는 여덟 괴로움이라는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법칙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법칙의 노예가 될 필요는 없게 되었다. 노예는커녕 우리는 여전히 법칙 앞에 주체적인 존재로서 당당하게 서 있다. 왜냐하면 그 법칙을 보는 자도 우리들 자신이요, 그 가운데 어찌할 수 없는 법을 가려내어 그것과 다투지 않는 것도 우리들 자신이며, 어찌할 수 있는 법을 의지하여 있는 힘을 다해 괴로움의 지멸을 지향해 나가는 것도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1. 중아함 60

2. 소부 자설경 1-3

3. 소부 법구 165

 

참고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근본불교의 가르침(불광)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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