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를 여의는 일 100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그로부터 또다시 사위성으로 들어가 잠시 기원 정사에 머무셨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순타(純陀)는 선정에서 일어나 세존을 찾아 뵙고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간에는 자아에 관해, 세계에 관해 온갖 생각이 행해지고 있습니다만, 불제자는 여하히 생각해야 이 같은 생각을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순타여, 세간에는 자아 또는 세계에 관해 갖가지 의견이 있고 그 누구에게나 작용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관하면 이러한 의견을 버릴 수가 있다. 순타여, 어떤 자가 모든 선정에 들어, 나는 지금 번뇌를 버린 상태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가르침에 있어서는, 이것은 번뇌를 버린 상태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눈앞에 즐거움의 주거라고 불리는 것이며 혹은 정적의 주거라고 불리는 것이다.
순타여, 번뇌를 여의려면 이와 같이 해야만 한다. ‘타인은 남에게 해로움을 주고 살생을 하며 도둑질하고 사음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며 두 혓바닥을 놀려 입도 더럽히거니와 헛된 말을 하고 탐하여 노여운 마음을 품고 사견(邪見)으로 비뚤어진 생각을 가지고 그 밖의 여러 가지 나쁜 짓을 하며 나쁜 마음을 품을 테지만, 나는 결코 이와 같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번뇌를 여읜다 함은 이와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순타여, 착한 마음을 일으키기만 하여도 큰 이익이 있는 법이다. 하물며 이를 몸과 입으로써 행함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비유하면 높고 낮은 길 옆에 평평한 길이 있고 울퉁불퉁한 나루터 곁에 평평한 나루터가 있듯이, 남을 해치고 죽이는 사람의 주위에 목숨을 뺏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도가 있으면, 그 사람은 이 좋은 가르침의 도에 들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또 모든 나쁜 행은 아래로 끌어내리고, 착한 행을 위로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지만, 남을 해치고 살생을 하는 자라 할지라도 해치지 않고 불살생의 사람은 위로 오르게 하는 길이 되어 주는 것이다. 순타여, 자신이 진흙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 남을 진흙 속에서 끌어올릴 수는 없다. 자기가 오관을 길들이고 번뇌를 멸하지 못하는데 남으로 하여금 그 오관을 길들여 제압하고 번뇌를 멸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이것처럼 남을 해치고 살생을 하는 자 때문에 해치지 않고 살생 않는 자는 그 번뇌의 경지에 드는 인이 되는 것이다.
순타여, 이와 같이 나는 번뇌를 멸하는 방법과 착한 마음을 일으키는 방법과 착한 도로써 나쁜 도를 에워싸는 방법과 위로 올라가는 방법과 번뇌가 멸한 경지에 들게 하는 방법을 설했다. 순타여, 나는 이것으로 제자를 어여삐 여기고 가엾게 여기는 스승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했던 것이다.”
어느 날 나이 먹어 허리가 굽은 바라문이 세존을 뵙고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나이가 많아서 죽음에 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는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두려움을 여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디 오래도록 저의 이익이 될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바라문이여, 참으로 그대의 말과 같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으로 옮겨가는 세계에서는 신, 구, 의의 세 가지를 제압하는 것이 죽어가는 자신의 비호가 되고 의지처가 되고 등불이 되고 지탱이 되는 것이다.”
목숨은 짧은데 세월은 흐른다. 늙음으로 옮겨지는 사람에게 비호(庇護)란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앞에 두고 공덕 있는 행을 하면 그 사람의 은신처가 되리라.
또 어느 날, 한 바라문이 세존을 찾아 뵙고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가르침은 이 현세에 과보가 있는 것이라고 하옵니다만, 어떤 양으로 현세의 과보가 있는 것이옵니까. 즉각 효험이 있어, 와서 보라고 제시할 수가 있고 마음에 지닐 가치가 있는 법이란 어떠한 것이옵니까?”
“바라문이여, 탐욕으로 불타고 있는 마음은 스스로를 해치고 남을 해치고 자타 양쪽을 해치는 것이라 생각하며 마음 속에 괴로움과 번뇌를 느끼는 법이다. 탐욕을 없애면 이와 같은 고뇌는 없다. 바라문이여, 진에에 의해 미쳐버린 마음도, 우치에 헷갈려 있는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그 진에를 버리고 우치(愚癡)를 여의면, 이와 같은 해로운 생각은 없어진다. 이것이 현세의 과보이다. 이것이 직접의 효험인 것이며, 와서 보라고 남에게 제시할 수가 있고 마음에 지닐 가치가 있는 법이다.”
어느 날, 또 산가라와라는 바라문이 세존을 찾아 뵙고 아뢰었다.
“존자 교답마시여, 저는 바라문이기 때문에 스스로 제물을 바치고 바치게 하면 그 제물을 갖춘 인에 의해 그 제물이 된 동물의 몸에서 나온 공덕의 도에 들어갑니다. 참으로 자타가 공히 받는 큰 공덕이옵니다. 이와 반대로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는 자는 단지 자기의 몸만을 억제하고 자기의 몸만을 진정시키고 자기의 욕심을 멸할 뿐이기 때문에, 다만 자기 한몸만이 공덕의 도에 들어가는 것이옵니다.”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내가 묻는 바를 생각대로 대답하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세상에 부처가 나타나 이와 같이 설법하기를 ‘오너라, 이것이 도이다. 내가 스스로 깨달은 더없는 열반을 보여 주리라. 너희들도 이것을 행하면 그 더없는 열반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이 부처의 가르침에 많은 대중들이 좇고 수백 명 수십만 명이 이 도를 행한다. 바라문이여, 이것에 의해서도 출가의 공덕이 내 몸 하나에 한한다고 하는가?”
“존자 교답마시여, 만일 그리하면 출가의 공덕이 많은 중생들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때 곁에 있던 아난이 말하였다.
“바라문이여,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어느 쪽이 곤란이 적고 큰 보답이 있으며 이익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바라문은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존자 교답마시여, 존자 아난 같은 사람은 저의 공양에 응할 만하여 제가 칭찬할 만한 사람입니다.”
고 질문을 피하였다. 아난은,
“바라문이여, 나는 그대가 누구를 공양하고 창찬하고 있는가를 듣고 싶은 게 아니다. 이 두 가지의 길 중 어느 것을 좋게 생각하는가 묻고 싶은 것이다.”
하고 두 세 번 물었지만, 바라문은 같은 대답을 하여 그 물음을 피하려고 하였다.
세존은 이 광경을 보시고 바라문의 궁지를 도울 생각에서 물으셨다.
“바라문이여, 오늘 왕궁에 대중들이 모였을 때 어떠한 이야기가 나왔는가?”
“존자 교답마시여, 오늘 왕궁에서는, 옛날에는 출가자의 수가 지금보다 적었지만 신변(神變)을 가진 사람이 지금보다 많았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바라문이여, 네가 말하는 신변에는 세 종류의 구별이 있다. 신통 신변(神通神變), 기심 신변(記心神變), 교계 신변(敎誡神變)이다. 신통 신변이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신통을 보인다. 하나이면서 여럿이 되고 여럿이면서 하나가 되고 혹은 나타나고 혹은 숨고 담장을 통하고 벽을 통하고 산을 꿰뚫더라도 장애가 없이 마치 허공을 달리는 것과 같고, 혹은 땅 속에 드나들기를 물 속에 들어가는 것 같고, 물 위를 빠지지 않고 가는데 땅 위를 걸어가는 것 같고 큰 위덕과 큰 힘이 있는 일월(日月)도 손으로 만지고 신들의 세계까지도 이 육체로서 간다고 하는, 이것이 곧 신통 신변이다.
기심 신변이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어떤 표적에 의해 너의 마음은 이러이러하고 너는 이러이러한 걸 생각하고 있다. 너의 생각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제시한다. 또 표적에 의하지 않고 사람이나 신이나 짐승 등의 소리를 듣고서 사람의 마음을 알아맞춘다. 이것이 기심 신변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교계 신변이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와 같이 생각하라, 이와 같이 생각하지 말라, 이것을 버려라, 이것에 마음을 두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교계 신변이다. 이 세 가지의 어느 것이 뛰어났다고 생각하느냐?”
“존자 교답마여, 신통 신변과 기심 신변은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에게만 있는 이치로서 환상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계 신변은 자타가 함께 누리며 자타가 공존하며 따라서 세 종류의 신변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교답마시여, 참으로 훌륭한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저는 존자가 이 세 종류의 신변을 갖추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자 외에도 이것을 갖춘 분이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그것은 물론이다. 이 세 종류의 신변을 갖춘 제자는 백 명이나 이백 명이나 오백 명뿐이 아니라 더욱 많이 있다.”
“존자 교답마시여, 그 같은 제자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그들은 이 승가 중에 있다.”
산가라와 바라문은 이 가르침을 기뻐하고 평생 신자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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