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세존을 모시는 아난과 인간성의 덤불 99

근와(槿瓦) 2014. 10. 14. 00:23

세존을 모시는 아난과 인간성의 덤불 99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다시 왕사성에 돌아가 죽림 정사에서 이 해의 안거에 들었다. 이때 세존의 연세는 쉰 다섯, 성도하신지 12년째이다. 이 안거하실 때 세존은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나도 점점 나이를 거듭하여 노경에 이르렀다. 이제부터 늘 옆에 있을 시자를 하나 두고 싶다. 너희들 중에 한 사람을 천거해 다오.”

세존의 이 말씀에 대해 사리불도 목련도 아나율도 가전연(迦旃延)도 모두 자청하여 시자가 되어 섬기겠다고 원했으나 세존은 이것을 물리쳤다. 목련은 세존의 마음이 아난에게 있음을 알고 제자들에게 말했으며, 아난에게 자진하여 시자가 되도록 권했지만, 아난은 소임을 다할 수 없다 하면서 사양하였다. 몇 번인가 목련의 권유를 받아, 아난은 마지막으로 세 가지 소원을 내놓고, 만일 이 소청의 허락을 얻게 된다면 시자로서 섬기겠다고 했다.

 

세 가지 원이란 첫째, 세존께 공양된 옷이나 음식을 비록 내리신다 하더라도 사양할 수 있을 것. 둘째, 세존이 속인(俗人)의 집에 가실 때에는 반드시 수행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 셋째, 언제라도 세존께 배알이 허락될 것 등이었다. 세존이 세 가지 원을 허락하셨으므로 이로부터 아난은 세존의 시자로서 마치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 세존을 모셨다.

 

 

세존은 그 이후 비사리를 떠나 다시 동으로 나아가 참파(膽波)에 이르셨고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그 교외인 가가라(伽伽羅) 호반에 머무셨다.

어느 날, 펫사라는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과 칸다라카라는 유행자와 함께 호반으로 세존을 찾았는데, 칸다라카는 이상하게도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세존의 주위에서 모시고 있는 제자들을 보고 말하였다.

“세존께서 숱한 제자들을 이렇듯 바르게 훈련시키는 일은 놀랄 만한 일이다. 옛날의 부처도 지금의 세존처럼 그 제자들을 훈련시켰고 미래의 부처도 지금의 세존처럼 제자들을 훈련시키게 될까요?”

“칸다라카여, 그대로이니라. 이 제자들 중에는 오래 전에 고뇌를 멸하고 해야 할 일을 다하고 올바른 지혜에 의해 해탈되어 성자의 깨달음을 얻은 자도 많다. 또 이 중에는 수행중으로서 계행도 아름답고 지혜도 명민하고 사념주에 항상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자도 많다. 사념주란 열심히 마음을 하나로 하여, 첫째로 몸의 부정을 관하고, 둘째로 수념(受念)은 괴로움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셋째로 마음의 무상을 관하고, 넷째로 법의 무아함을 꿰뚫어 보고서 세간의 탐욕과 실망을 정복하는 일이다.”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펫사는 이 말씀을 듣고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뛰어난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사념주는 중생들의 청정을 위해 괴로움과 슬픔과 고뇌를 초월하여 지혜를 열며 열반의 실현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재가의 신분입니다만 평소 이 사념주를 닦아 세간의 탐욕과 실망을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세존께서 이 인간성의 덤불 속에서 인간의 악함과 속임수 속에서 사람들의 이(利)와 불리(不利)함을 아셨음은 참으로 기이하다 하겠습니다. 인간의 일은 덤불마냥 알기가 어렵고, 그 점에 있어서는 짐승의 성질을 알기가 쉽사옵니다. 이러한 걸 아뢰는 것은 제가 코끼리를 부리는 법을 생각하기 때문으로서, 조련장에서 참파의 성문까지 데려오는 동안에 모든 그 비뚤어진 성질, 꾸부러진 성질, 거짓된 성질, 교활한 성질을 나타내고 맙니다. 그렇건만 저희들이 부리는 머슴, 하인, 고용인 등은 그 마음과 입과 행이 모두 달라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이 인간성의 덤불 속에서, 사람의 악함과 속임수 속에서 사람들의 이익과 불리를 아셨음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옵니다.”

 

“펫사여, 참으로 그러하다. 인간의 성질은 덤불과 같고 짐승의 성질은 오히려 알기 쉬운 법이다. 이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스스로 괴로워하는 사람, 둘째는 남을 괴롭히는 사람, 셋째는 자기나 남의 양쪽을 괴롭히는 사람, 넷째는 자기와 남을 다같이 괴롭히는 일 없이 이 세상에서 욕심을 여의고 적정하고도 시원스럽게 안락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이 네 종류의 사람들 중에서 어느 것이 너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느냐?”

“세존이시여, 스스로 괴로워하는 사람, 남을 괴롭히는 사람, 자타 양쪽을 괴롭히는 사람은 저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지 못합니다. 자타를 괴롭히는 일 없이 이 세상에서 욕심을 여의고 적정하고도 시원스럽게 안락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저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옵니다.”

펫사는 세존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나갔다.

 

펫사가 떠나고 나서 세존은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펫사는 현명한 자이다. 내가 이 네 종류의 사람을 좀더 자상히 설하기까지 잠시 이곳에 앉아 있었더라면 큰 이익을 얻었으리라. 그러나 지금까지 것만으로도 큰 이익을 얻고서 돌아간 것이다.

 

제자들이여, 스스로 괴로워하는 사람이란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몸을 괴롭히며 식사를 끊고 허술한 옷을 걸치고서 고행(苦行)을 하는 자이다.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란 양과 돼지, 백정, 어부, 사냥꾼, 도둑, 옥졸 등 모두 잔혹한 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자타를 괴롭히는 사람이란 왕자(王者)들이 그릇된 가르침에 의해 출가자 흉내를 내되 사슴 가죽을 걸치고 버터나 기름을 몸에 바르고 사슴 뿔로 몸을 긁고 왕비나 측근을 데리고서 신궁으로 옮기고, 아무 것도 깔지 않은 땅바닥에서 자고 송아지가 먹을 젖을 빼앗아 스스로 마시고 왕비나 측근에게도 주고 소, 양, 염소를 신의 제물로 바치게 하고 나무를 베거나 풀을 베도록 하고 머슴, 하인, 고용인 등이 모두 처벌을 두려워 일을 하게 한다. 이것이 곧 자타를 괴롭히는 사람이다.

 

제자들이여, 자타를 괴롭히지 않고 이 세상에서 욕심을 여의고 적정하고도 시원스럽게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란 부처의 바른 가르침을 듣고 집을 버리고서 부처의 제자가 되어 살생을 않으며 자비를 가지고 도둑질을 않고 청정한 행을 닦아 거짓말을 않고 초목의 생명을 빼앗지 않고 욕심이 적고도 족함을 알고 바른 계를 갖추어 스스로 죄 없음을 아는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람은 만물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향기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더라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며, 또 오관을 억누르고 상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이 사람은 가는 것도 머무는 것도 앉는 것도 눕는 것도 늘 의식을 가지고서 이를 행하며, 욕심을 멀리 여읜 자리를 즐기고 번뇌를 여의고 선정(禪定)에 들어 마음이 청정해져서 스스로 번뇌가 다했음을 알고 이 생을 초월하여 망집의 생은 없다는 지혜를 낳는다. 이와 같이 하여 조용하고도 시원하게 안락을 누리고 가장 뛰어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