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자아(自我)의 실현(實現) 87

근와(槿瓦) 2014. 9. 18. 00:49

자아(自我)의 실현(實現) 87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또 사위성의 기원 정사로 들어가셨다. 그때 유행자(遊行者)인 보타바루(布吒婆樓)는 많은 유행자들과 함께 말리가(末利迦) 왕비가 세운 유행자 동산의 강당에 머물고 있었다.

세존은 이른 아침 탁발 도중 보타바루를 방문하셨고, 보타바루는 동료의 잡담을 중지시키고 세존을 맞이하였다.

인사가 끝나자 보타바루는 세존께 물었다.

“대덕이시여, 저희들은 전에 자주 이 강당에 모여 여러 학파들과「상념의 소멸」이라는 것에 관해 서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상념의 소멸에는 인(因)도 연(緣)도 없다. 태어날 때에 태어나고 사라질 때에 사라질 뿐이라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상념이란 사람의「아」로서 아가 올 때에는 상념이 일어나고 아가 사라질 때에는 상념이 없어진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신통력이 있는 사람이 상념을 남에게 쏟아넣든가 끌어내든가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그때 이 자리에 세존이 계셨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세존은 그와 같은 일을 자세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상념은 어째서 소멸되는 것이옵니까?”

 

 

“보타바루여, 상념이 없어지는데 있어 인도 연도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상념은 수양에 의하여 나기도 하고 또 멸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보타바루여, 그 수양이란 무엇이겠는가. 여기에 사람이 있어 부처를 믿고 출가하여 그 가르침을 지키고 오관을 다스리고 작은 죄에도 두려움을 보고 번뇌의 부개(覆蓋)를 없애고서 第一의 선정에 들어갔다고 하자. 그는 여기에 이전의 욕심인 상념을 없애고 욕심부터 멀리함으로써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참된 상념, 기쁨과 즐거움이 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양에 의해 어떤 상념이 일어나고 어떤 상념이 멸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第二, 第三, 第四로 점차 선정에 나아가게 하고 第四의 선정에 있어 비로소 거칠은 상념이 소멸되고 고락을 벗어난 미묘하고도 참된 상념이 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양에 의해 어떤 상념이 일어나고 어떤 상념이 소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타바루여, 다시 나아가 공무변처(空無邊處)라는 선정에 있어서는 모든 물질과 장애와 차별과 상념이 멸하여 ‘공만이 무변이다’라는 상념이 생기고, 식무변처(識無邊處)라는 선정에 있어서는 ‘공만이 무변(無邊)이라’는 상념도 멸하여 ‘식만이 무변’이라는 상념이 생기고 무소유처(無所有處)라는 선정에 있어서는 식만이 무변이라는 상념도 멸하여 ‘아무 것도 있음이 없다’라는 상념이 생한다. 이것이 수양에 의해 어떤 상념은 일어나고 어떤 상념은 소멸된다고 하는 것이다.

 

 

보타바루여, 이렇듯 차례차례로 나아가 나의 제자는 상념의 정점에 이른다. 여기까지 이른 자는 다시 생각한다. ‘이 생각하고 있는 일 자체가 틀린 일이다. 생각한다는 일이 없는 게 옳은 것이다. 자꾸만 생각하고 나아가면 이 상념이 소멸될 테지만 또 다른 거칠은 상념이 일어나리라.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그리하여 그는 자꾸만 생각하는 것을 멈추어 상념을 멸하자 다른 상념은 일어나지 않았고, 상념은 전혀 없어졌던 것이다.“

 

 

“세존이시여, 상념과 지식은 어느 것이 먼저 나는 것이옵니까?”

“보타바루여, 상념이 먼저 생하고 지식은 나중에 생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상념은 자아입니까, 또 전혀 다른 것이옵니까?“

“보타바루여, 그대는 자아를 믿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물질에 의해 이루어지고 먹을 것에 의해 길러지는 이 육체의 자아를 믿습니다.“

‘보타바루여, 비록 자아는 그대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일지라도 상념이 생하든가 소멸되든가 하는 일로 말미암아 상념과 자아는 다른 것임을 알 수가 있느니라.“

“세존이시여, 저는 사지(四肢)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바른 마음으로 이루는 자아를 믿습니다.”

‘보타바루여, 자아는 그대가 말하는 것과 같을지라도 위와 똑같은 까닭에 의해 다른 것임을 알게 되느니라.“

“세존이시여, 저는 물질이 아닌 상념으로서 이루어진 자아를 믿습니다.”

 

‘보타바루여, 그렇긴 하더라도 똑같은 까닭에 의해 상념과 자아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가 있느니라. 보타바루여, 그대처럼 다른 의견을 가지고 다른 가르침을 받들고 다른 목표로 나아가는 자에게는 이 일이 심히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세계는 상주(常住)하는 것이옵니까?”

“보타바루여, 그것은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니라.”

 

 

“그렇다면 세계는 무상한 것이옵니까?”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니라.”

 

 

‘그렇다면 세계는 무변하는 것이옵니까, 변이 있는 것이옵니까?“

“보타바루여, 그것도 설하지 않는 바이니라.”

 

 

“목숨은 몸뚱이와 하나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그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니라.”

 

 

“사람이 죽은 뒤 존재하는 것입니까, 존재치 않는 것입니까. 사후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옵니까. 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듯한 것입니까?”

“보타바루여, 이것도 내가 설하지 않는 바이니라.”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 일들을 설하시지 않습니까?“

“보타바루여, 이것은 의(義)가 없고 법에는 맞지 아니하고 수행과 관계없을 뿐 아니라 집착을 끊고 욕심을 버리고 정지(正智)를 열어 열반으로 이끄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존은 무엇을 설하시옵니까?”

“보타바루여, 나는 괴로움을 설하고 괴로움의 인을 설하고 괴로움의 멸을 설하고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을 설하느니라.“

 

 

“세존은 무엇 때문에 그것을 설법하시는 것이옵니까?“

“보타바루여, 이것은 의가 있고 법에도 맞고 수행과도 관계 있을 뿐 아니라, 집착을 끊고 욕심을 버리고 정지를 열어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세존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셨다. 뒤에 남은 유행자들은 세존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사방에서 보타바루에게 비웃음의 소리를 퍼부었다.

“보타바루여, 그대는 교답마가 말하는 바는 무엇이든 옳다옳다하여 긍정하고 있는데, 교답마는 세간이 상주인지 무상인지, 유변(有邊)인지 무변(無邊)인지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조금도 분명한 말을 하지 않찮는가?”

보타바루는 말하였다.

“과연 교답마는 세간의 상주 등의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법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법에 의하여 법에 입각한 참된 도를 시현하였다. 내가 어찌 이 훌륭한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 나서 2,3일이 지난 뒤 보타바루는 코끼리 사육사의 아들 질다(質多)와 함께 세존을 찾아 뵙고 유행자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드렸다. 세존은 많은 눈먼 사람이 한 사람의 눈뜬 사람을 비웃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자아란 죽고난 뒤 이 몸뚱이를 떠나고야 병이 없는 그야말로 행복한 것이 된다’고 설을 깨뜨리시고, 그것은 마치 사랑을 이야기하되 연인을 모르고, 사다리를 만들되 올라갈 높은 다락이 있는 곳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보타바루여, 자아의 존재를 말하는 중생들에게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물질로써 만들어진 자아,

두 번째는 사지를 빠짐없이 갖춘 마음으로서 이룬 자아,

세 번째는 물질이 없는 순수한 상념으로 이루는 자아이다.

 나는 이 세 종류의 자아를 버리는 법을 설하리라. 그대가 만일 그 법을 좇아 도를 닦는다면 더러움을 여의고 청정해지고 이 눈앞에 지혜의 충족과 발전을 얻게 되리라. 보타바루여, 그대는 그 경지(境地)에 아직도 고뇌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고뇌란 없고 기쁨과 행복과 평화가 있어 오직 한 마음으로 평안케 머물 수 있는 것이다. 보타바루여,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당신이 버린다고 하는 그 자아란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 그대가 그대의 옆에서 보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고 대답하겠다. 보타바루여, 이와 같이 내가 설법하는 방편은 근저(根柢)가 없는 것일까?”

“세존이시여, 그것은 근저가 있는 설법의 방편입니다. 사다리를 만들어 울라가기 위한 높은 다락을 가리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저가 있는 설법의 방편입니다.”

이 세존의 간곡한 가르침에 움직여 보타바루는 평생 삼보에 귀의하는 신자가 되고 코끼리 사육사의 아들 질다는 세존의 족하에 출가하여 도를 닦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또 세존이 탁발 도중 공작 동산에 들르셨는데, 유행자들은 여러 가지 잡담에 열중하고 있었다. 세존을 보더니 이야기를 중지하고 맞이하였고 세존의 물음에 대해서 사쿨우다이가 말씀을 올렸다.“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이 사람들은 잡담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만, 제가 왔으므로 저에게서 무엇인가를 듣고자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세존께서 오시게 되자 먼저 세존으로부터 듣고 싶다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다이여, 무엇이든 마음에 떠오른 일을 묻도록 하라.”

“세존이시여, 훨씬 전의 일입니다만 어떤 전지전능을 주장하는 사람이 행주좌와에 대해 언제라도 전지전능하다 하므로 제가 옛 일을 물어 보았더니 다른 이야기를 하고 나아가서는 까닭도 없이 화를 낸 일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세존께서 이러한 일에 자상하시다는 것을 생각하고 동경한 일이 있습니다.”

“우다이여, 그게 누구이지?”

“니건타이옵니다.”

“우다이여, 나는 숙명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나간 일에도 자상하다. 또 천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일도 자상히 알고 있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의 일을 접어 두는 게 좋다. 나는 법을 설하겠다. 이것이 있으므로써 그가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써 그가 생하고, 이것이 멸하므로써 그가 멸하고 이것이 멸하므로써 그도 멸한다고 하는 인연의 법을 설하리라.”

‘세존이시여, 저는 현재 이승에서 생생히 경험한 일조차 기억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전생의 일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또 저는 이 세상에서 영귀(靈鬼)조차 볼 수가 없는데 어찌 중생들의 죽은 앞 일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세존은 저에게 이것이 있으므로써 그가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써 그가 없다는 가르침을 설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만, 그것은 한층 저로서는 알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의 스승에게서 들은 가르침을 세존의 물음에 의해 설명하고 싶습니다.“

“우다이여, 그대의 스승의 가르침이란 무엇이냐?”

“저의 스승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것은 최상의 색채가 있는 빛이라는 것이옵니다.”

“그 최상의 색채 있는 빛이란 무엇이냐?”

“이것보다 뛰어난 색채가 있는 빛이 없다는 것이옵니다.”

“이것보다도 뛰어난 게 없다는 색채가 있는 빛은 무엇이냐?”

“그것은 이것보다도 오묘한 색채가 있는 빛은 없다는 것이옵니다.”

‘우다이여, 그대는 언제까지라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마치 나는 지금 세계 제일의 미인을 연모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 미인은 어떤 태생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살갗이 흰지 검은지 키는 큰지 작은지를 질문 받고서 그것도 모른다, 이것도 모른다 하는 것과 같지 않는가. 최상의 색채있는 빛이라고 말하면서 그대는 그 색채있는 빛이 무엇인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세존이시여, 질이 좋고 깨끗이 잘 닦인 팔각의 유리를 미색(美色) 털의 천위에 놓으면 찬란하게 빛나듯, 자아가 죽은 뒤 이와 같은 색채가 있는 빛이 있어 병이나 재난이 없는 것이옵니다.”

‘우다이여, 그 털 천 위에 빛나는 유리와 암야의 반딧불과는 어느 것이 수승하다고 생각하느냐?“

“어둔 밤의 반딧불 빛이 수승하옵니다.”

“어둔 밤의 반딧불과 등잔의 불빛을 비교하고, 등불과 커다란 불덩어리의 빛을 비교하고, 큰 불덩어리의 빛과 구름이 없는 하늘에 나타난 새벽녘 샛별의 빛과 비교하고, 그 샛별의 빛과 밤중의 달빛을 비교하고 밤중의 달빛과 여름 하늘의 햇빛을 비교하여 어느 빛이 수승하다고 생각하느냐?”

“그야 물론 반딧불 빛보다도 등잔의 불빛, 달빛보다도 햇빛이 뛰어납니다.”

“우다이여, 이 달이나 해보다도 빛이 수승한 신들은 수없이 많다. 나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이것보다도 오묘한 색채가 있는 빛을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대는 반딧불 빛보다도 못한 것을 최상의 색채가 있는 빛이라고 말한다.”

‘세존이시여,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 두겠습니다. 세존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이것은 최상의 광채 있는 빛이라고 하는 자체가 전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마옵니다.“

‘우다이여, 그저 즐거움만 있는 세계가 있느냐, 또 단지 즐거움만 있는 세계를 나타내는 방법이 있느냐?“

“살생, 투도, 간음, 망어를 하지 않고 계율의 고행을 수행하는 것이 오직 즐거움만 있는 세계를 나타내는 방법이옵니다.”

“우다이여, 그 살생, 투도, 간음, 망어를 하지 않고 어떤 고행을 닦을 때, 자기는 오직 즐거움뿐이겠느냐, 또는 고락이 뒤섞여 있는 것인가?”

“고락이 뒤섞여 있습니다.”

“우다이여, 다만 즐거움뿐인 세계를 나타내기 위한 방법에, 고락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냐?”

“세존이시여, 이 이야기도 그만 두겠습니다. 세존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제가 하는 말은 의미 없는 것이 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만 즐거운 세계를 나타내는 길이 있습니까?”

“우다이여, 욕심을 여의고 불선(不善)을 버리고 초선(初禪)에 들어 다음에 이선(二禪),삼선(三禪)으로 나아가는 게 그 길이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이미 그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단지 즐거움만 있는 세계가 나타났기 때문이옵니다.”

“우다이여, 그렇지가 않다. 이것만으로선 아직 즐거움뿐인 세계는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그 길뿐이다.”

이때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유행자들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오오, 이렇게 되면 이미 우리들 스승의 가르침에는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보다 더는 모르니까.“

그들은 제삼의 선정(禪定)을 다만 즐거움뿐인 세계라고 가르침을 받고서 불살생, 불투도 등 오법(五法)을 닦고 그 경지에 도달코자 해왔다. 그러므로 여기에 공황을 가져 왔던 것이다. 사쿨우다이는 이것을 가라앉히고 다시 세존께 물었다.

“세존, 그렇다면 얼마만큼 하면 오직 즐거움뿐인 세계를 나타낼 수가 있습니까?”

‘우다이여, 여기에 괴로움, 즐거움, 기쁨, 걱정의 모든 것을 버리고 치우침이 없는 바른 마음으로 주하고, 청정한 第四의 선정에 들어가 신들과 섞여서 이야기할 때에 다만 즐거움뿐인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제자들은 이 오직 즐거움뿐인 세계를 나타내기 위해, 세존 밑에서 청정한 행을 닦는 것이옵니까?“

“우다이여, 그렇지는 않다. 그것보다도 오히려 수승한 법이 있어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제자들은 나한테서 청정한 행을 닦는 것이다. 여기에 부처가 이 세상에 나오고 재가자들이 믿음을 일으켜 출가하며 번뇌의 부개(覆蓋)를 없이 하고서야 비로소 첫선정에 들어가고, 차츰 나아가 제사의 선정에 들어가고 선정에 의해 고요하고 단련된 마음으로 숙명과 타심(他心)과 누진(漏盡)의 지혜를 얻되, 내 생은 끝났다, 청정한 행은 이루어졌다, 이것이 마지막의 생으로 앞으로는 또다시 망집의 생을 받지 않고 해탈하는 그 수승한 법을 나타내기 위하여 내 밑에서 청정한 행을 닦는 것이다.”

“세존, 세존께서 하시는 말씀은 참으로 수승합니다. 어둠 속에 빛을 가져다 주시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세존의 삼보에 귀의하고 세존께 출가하고 싶습니다.”

사쿨우다이가 출가하고 싶다고 청했을 때, 많은 유행자들은 놀라며 이것을 간하여 말하였다.

“존자 우다이여, 교답마에게 출가하지 말라. 당신은 물병과 수저처럼 스승으로서 임하는 동시에 제자로서 배우는게 좋지 않은가?”

이리하여 사쿨우다이는 그 출가의 뜻이 남의 방해로 실천되지 못하였으나, 그 마음은 깊이 세존께 귀의하는 바가 되었다.

 

 

어느 날, 바라문인 사노소인(師奴蘇仁)은 기원 정사에 계시는 세존을 찾아 뵙고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재가자들은 세존에 대한 신심에서 출가하여 세존을 선도자로서 스승으로 받드는 자는, 세존의 선례(先例)를 좇고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그러하다.”

‘세존이시여,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 산다는 일은 곤란이 많이 따르시겠죠? 은둔한다 하는 일은 참으로 이루기 어려운 것, 아직도 선정을 얻지 못한 자에게 있어서는 숲속은 참으로 씁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라문이여, 그대로이다. 내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을 때, 선정을 얻지 못한 자에게 있어 숲속은 씁쓸한 곳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또 생각했다. 어떠한 출가자라도 몸과 입과 뜻의 삼업(三業)이 청정하지 않고 생활의 방법이 청정하기 때문에 숲속이 무서울 턱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숲속의 거처는 나에게 적정의 즐거움을 주었던 것이다.

바라문이여, 나는 또 생각했다. 만일 출가자로서 천한 육욕과 심한 탐욕을 가지고 노여운 마음과 나쁜 생각을 가지며 게으름과 졸음에 빠져 경박하고 시기심이 있으며, 스스로 칭찬하거나 남을 헐뜯고 이익이나 명예에 사로잡히고 게으른데다가 용기가 부족하고 바른 마음과 염(念)이 없으며 마음이 흔들려 어지럽고 지혜가 없는데도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 머문다면, 이 이유만으로 숲속은 무서운 것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자가 아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에 의해 나는 숲속의 생활에 더욱더 정적의 즐거움을 찾았던 것이다.

바라문이여, 그것에 관해 나는 생각한다. ‘나는 초승달의 밤이라든가, 보름달의 밤이라든가, 또는 달이 뜨기 전의 엿새 뒤의 여드레와 같은 특이한 밤에 공포로 몸서리가 쳐지는 숲속이나 숲속의 묘지에 들어가 보라. 그렇게 할진대 대개는 저 공포심에 부딪치리라.’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그 특이한 밤에 숲속이나 숲속의 묘지에 들어가 보았지만, 밤이 이슥해지자 짐승이 찾아온다. 새가 나뭇가지를 떨어뜨린다. 바람이 쌩쌩 불어 나뭇가지를 울려준다. 무서움이 점점 몸에 닥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무서움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듯한 심정은 어리석은 일이다. 공포심이 몰아쳐 옴에 따라 정복하면 좋지 않겠는가’라고.

그래서 바라문이여, 걷고 있을 때에 무서움이 덮쳐오면 걸으면서 무서움을 정복했다. 앉아 있을 때에 닥치면 앉은 채로 정복했다. 머물러 서 있을 때에 오면 머물러 서 있는 채로 정복했다. 그 때문에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하지 않았다.

바라문이여, 어떤 출가자는 애써 밤은 낮과 같고 낮은 밤과 같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망집이다. 나로서는 역시 밤은 밤이고 낮은 역시 낮이다.

바라문이여, 많은 유정(有情)의 이익을 위해, 행복을 위해, 인천(人天)의 애련(愛憐)을 위해 나타났다고 하는 말이 다른 것에 대하여 진실이다고 한다면, 나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면려(勉勵)하고 배짱있게 정념으로 무엇에도 현혹되지 않고, 몸은 느긋하니 조용하게, 마음을 한 경지에 모아서 애욕을 버리고 불선(不善)한 법을 버리고 선정에 들어가 부드럽게 다스려 조용하면서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번뇌가 다했음을 알고 무명(無明)이 깨어져 명(明)이 생하고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나타났던 것이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와 같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교답마는 탐욕, 진에, 우치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그 번뇌를 끊기 위해 마을에서 떨어진 숲속에 머무르는 것이다’라고.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두 가지 이유에 의해 숲속에 주하는 것이다. 하나는 자기의 현재 생활의 평안을 위해서이고 하나는 미래의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바라문인 사노소인은 세존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중생에게 애련을 시현함을 기뻐하며 그곳을 떠났다.

 

 

앞서 세존은 일일 일식을 취하도록 가르치셨을 때, 발타리(跋利)는 이 가르침을 거역하며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하루 한끼의 식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같은 소식으로는 평생토록 행을 닦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발타리여, 초대를 받은 곳에서 일부를 먹고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 먹는 게 좋으리라. 그걸로써 몸을 보양할 수가 있으리라.”

“세존이시여, 그것도 저로선 할 수가 없습니다.”

발타리는 세존이 정하신 규칙을 다른 제자들이 지키는데도 불구하고 ‘못합니다’고 딱 잘라 말하고 지키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부끄러워하여 안거의 석달 동안을 세존 앞에 나올 수가 없었다.

이윽고 우기인 3월이 지나고 의복 손질도 끝나자 세존께서 유행을 떠나고자 하실 무렵, 발타리는 다른 제자의 간언에 의해 세존앞에 나아갔다.

“저는 어리석게도 고약한 마음씨로 정하신 계율을 지키지 않고 죄를 범했습니다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청했다. 세존은 말씀하셨다.

“발타리여, 참으로 그대의 말과 같다. 이 석달 동안 제자들도 신자들도 이교도들까지도 발타리는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는 자라고 경멸을 하고 있었던 일을 그대로선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발타리여, 여기서 나의 제자에게 진흙탕에 들어가라고 내가 말한다면 그들은 싫다고 말할까?”

“세존, 그렇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발타리여, 진흙탕에 들어가라고 명령할 것은 못된다. 더구나 이 명령을 받고 싫다고 하는 거칠은 말을 하는 자는 없다. 그렇지만 그대는 그 덕을 상실하여 바른 명을 받았으면서도 싫다고 거칠은 말을 하고 있다. 발타리여, 스승의 계율을 지키지 않는 자는 깨달음을 얻고자 숲속에 있는 빈집에 들어가 그곳에서조차 스승을 욕하고 동료를 욕하고 자기를 욕하는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율을 지키지 않는 자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발타리여,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는 자로서 숲에 들고 빈집에 들어 스승을 욕하지 않고 동료를 욕하지 않아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승가 사람들은 어떤 제자의 죄는 고치게 하고 어떤 제자의 죄는 보아 넘겨 고치도록 책하지 않고 버려두는 것이옵니까?”

“발타리여, 비난 받자 모순된 변명을 하고 터무니 없는 노여움에 악의를 나타내고 승가의 기뻐하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는 승가가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은 자이다. 또 믿음이 얕고 사랑이 적은 제자를 너무 책하여 그 믿음과 사랑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마치 한쪽 눈, 즉 애꾸눈을 가진 사람을 주위 사람들이 돌보아 주고 아끼는 것과 같다. 책망을 받고도 부드러운 태도로 당장 노여움과 악의를 나타내지 않는 자를 승가는 회개시키려고 책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계율 수가 적을 때 각을 얻는 제자가 많고 계율이 많으면 도리어 깨달음을 얻는 자가 적은 것은 어떠한 까닭입니까?”

“발타리여, 중생들의 행이 쇠하고 정법(正法)의 소멸에 의해 계율이 더욱 더 많아지게 되고 깨달음을 얻는 자는 더욱더 적어지게 되는 것이다. 승가에서 번뇌가 일어나야 할 것이 시현되지 않는 동안은 계획을 만들지 않으나, 승가가 커지고 가르침이 많아지고 세월이 쌓이면 거기에 번뇌가 일어날 수가 있으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계율을 늘리는 것이다. 발타리여, 제자들의 수효가 아직 적을 무렵 나는 양마(良馬)의 비유로써 법을 설한 일이 있다.

그대는 지금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계율을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발타리여, 그것만이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그대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그대가 나의 가르침에 대해서 마음을 쏟지 않고 귀기울여 듣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지금, 저 양마의 비유를 설명해 들려 주리라. 발타리여, 비유한다면 교묘한 조마사(調馬師)가 좋은 말을 얻어 재갈을 물린다. 그때에 말은 전에 하지 않았던 일을 강제하므로 뛰든가 소란을 피우든가 하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면 온순해진다. 이번에는 안장이나 정강이받이를 댄다. 다시 그것에 익숙해지면 이번에는 채찍질 한번에 네 발을 한꺼번에 뛰어들고 날으며, 마상에 있으면서 지상의 무기를 취할 수 있게 말로 하여금 원을 그리게 하는 일, 말발굽 끝으로 가볍게 걷는 일, 재빠르게 달리는 일, 어떠한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일, 왕의 덕을 알고 왕자의 수레에 어울리는 일, 채찍질하는 골자를 깨닫고 주인의 생각하는 곳으로 달린다는 일 따위를 가르친다. 이같은 성질을 갖춘 말이 왕의 승마가 된다. 발타리여, 제자도 십법(十法)을 갖추면 세간의 공양을 받으며 더할데 없는 복전(福田)이 될 수가 있다.

십법은 성자의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혜(正慧), 정해탈(正解脫)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