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념상(思,念,想)

각관(覺觀)

근와(槿瓦) 2017. 5. 1. 02:37

각관(覺觀)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총체적으로 思考하는 麁思를 覺이라 하고, 분석적으로 상세히 관찰하는 細思를 觀이라 한다. 覺은 사물을 추리하는 마음의 조잡한 작용이고, 觀은 미세한 작용이란 뜻이다. 이 두 가지가 다 禪定에 방해가 된다.


참고

각(覺) : 범어 buddha의 번역으로 佛陀라 음역.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이제까지 알지 못하던 일을 훤히 알게 됐다는 의미로부터 涅槃을 깨달음의 뜻으로 사용하며, 菩提(涅槃을 깨달은 지혜), 혹은 佛(覺者, 깨달은 이)의 譯語다. 단, 舊譯에서는 菩提를 道, 佛을 覺이라고 하고, 新譯에서는 菩提를 覺, 佛을 覺者라고 하여 法과 人을 구별한다. 또 일체의 사물을 感知한다는 뜻으로부터 널리 대강 관찰하고 추측하는(推度) 정신작용을 舊譯에서는 覺이라 하며, 新譯에서는 尋(범어 vitarka)이라고 한다.

① 起信論에서는, 萬有의 本體인 阿賴耶識에 覺과 不覺의 두 뜻이 있으며, 覺에는 本覺과 始覺의 二覺이, 不覺에는 根本不覺과 枝末不覺이 있다고 한다. 곧, 만유의 本體는 원래가 淸淨한 覺體(本覺)지만, 그러나, 無始이래로 無明 · 妄念에 의해 덮여서 가리워져 있는 것(不覺)이 현실이다. 그러나, 수행을 하여 觀智를 얻으면 이 不覺으로부터 깨어나 心源을 사무쳐 깨닫게 되는데, 이것을 始覺이라고 한다. 始覺은 覺의 정도에 따라서 다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究竟覺. 이것 이상은 더없는 覺知란 뜻으로 第十地菩薩의 覺知를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佛의 覺知를 究竟覺 · 無上覺 · 正覺 · 大覺이라고 한다.

(2) 第九地까지의 地上菩薩의 覺知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므로 隨分覺이라고도 한다.

(3) 十住 · 十行 · 十廻向(三賢)菩薩과 二乘의 覺知는 비슷한 覺知이긴 하지만 완전한 眞覺이 아니므로 相似覺이라 한다.

(4) 十信까지의 凡夫位로의 惡業은 苦果를 부른다는 業果의 道理를 覺知하고 있으므로 惡業을 짓지는 않지만, 아직도 번뇌를 끊는 智를 일으키지는 못하는 覺知이므로 不覺이라고 한다.

② 佛을 覺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았을 뿐 아니라(自覺)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覺他), 깨달음의 작용이 충만하고 있기 때문이다(覺行窮滿). 따라서 自覺은 凡夫에 대하여, 覺他는 二乘에 대하여, 覺行窮滿은 菩薩에 대하여, 이들과 다름을 나타낸 것으로 이것을 三覺이라고 한다.

③ 獨覺(緣覺)과 大覺(佛)을 二覺 또는 二覺者라고 부른다. 또 보살의 品階 五十二位중 第五十一位의 等覺과 第五十二位의 妙覺(佛果)의 두 가지, 혹은 佛의 智德과 斷德을 二覺이라고 한다.

④ 尋求推度하는 정신작용(心所)으로서의 覺(尋)은 欲界와 初禪에만 있는데, 여기에 그 性이 善인 善覺과 그 性이 惡인 不善覺(惡覺)이 있다. 欲覺(貪覺) · 瞋覺(恚覺) · 害覺(惱覺)을 三惡覺 또는 三不善覺이라고 한다. 또 여기에 親里覺 · 國土覺 · 不死覺 · 族姓覺(利他覺) · 輕他覺(輕侮覺)을 합하여 八覺이라고 하며, 離欲覺(遠離覺 · 出離覺 · 出覺) · 無瞋覺(無恚覺) · 無害覺(無惱覺)을 三善覺이라 하는데, 이는 三惡覺에 대한 對語이다. 無瞋 · 無害의 二覺을 安穩覺이라고도 하고, 또 菩薩 · 緣覺 · 聲聞 같은 大力量이 있는 이가 覺知하고 思念하는 八種의 覺, 곧, 少欲覺 · 知足覺 · 遠離覺 · 精進覺 · 正念覺 · 正定覺 · 正慧覺 · 不戱論覺을 八大人覺(大人八念)이라고 한다. 이것도 善覺이다.


관(觀) : 범어 vipasyana의 번역. 毘鉢舍那, 毘婆舍那, 毘波奢那로 음역하며, 觀察이라고도 한다. 또, 智慧로 객관의 對境을 照見한다는 뜻인데, 觀念과 同義로 쓰일 때도 있다.

① 九想觀이나 日想觀처럼 종종의 想을 마음에 떠올려서 觀하는 初步的인 觀을 觀想이라 한다. 天台宗에서 말하는 觀은 一念三千 一心三觀처럼 자기의 心의 本性을 觀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觀心이라고 한다. 觀은 悟境에 통하는 道이므로 法相宗 · 華嚴宗에서는 이것을 觀道라고 한다. 觀의 對境을 觀境, 觀하는 智慧를 觀智, 觀하는 방법을 觀門 · 觀法이라 한다. 또 觀은 止(범어 samatha. 奢摩他 心을 하나의 對境에 집중시켜 생각을 쉬게 하는 것)에 상대되는 말이다. 그러나 中道觀 등의 觀은 止와 觀이 잘 조화된 상태(止觀均行)를 나타내는 捨(범어 upeksa)의 의미와 附合한다. 또 觀에는 禪定(범어 dhyana)의 의미도 있으므로 禪定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出觀 · 出定이라고 한다.

② 觀의 내용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諸法을 分析하여 空한 것으로 觀하는 小乘 및 成實宗의 觀法을 析空觀(析色入空觀 · 生滅觀)이라 하며, 이에 대해 大乘의 觀法은 因緣을 따라 일어난 諸法의 當體에 卽一해서 現象界 그대로 空한 것으로 體達하는 觀이므로 이것을 體空觀(體色入空觀)이라고 한다. 요컨대 觀은 心을 하나로 專心하여 智慧로써 佛과 法의 일정한 대상을 觀察하고 念思하여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다. 眞言宗에서는 悉曇五十字母의 첫째 字인 阿자에는 本初의 뜻과 不生의 뜻이 있다고 하며, 이 阿字 위에 우주 · 인생을 該攝總括시켜 그 本不生의 理를 觀하는 것을 阿字觀이라고 했다. 往生要集에는 佛의 相好光明을 총괄적으로 觀하는 것을 總相觀이라 하고 華座를 비롯해서 白毫 등 佛身의 하나하나의 相好를 별개적으로 觀하는 것을 別相觀이라 했다. 三論宗에서는 八不中道의 觀은 空에도 有에도 집착하지 않는 無所得中道의 正觀이란 뜻으로 無得正觀이라 한다. 眞如의 理를 觀함에 있어 名字의 相, 心念의 相, 곧 名相을 여의어 眞如의 경계에 冥合하는 觀法을 理觀 또는 無相離念이라 하며, 이와 반대로 佛이나 淨土를 觀함에 있어 差別的이고 具體的인 相을 세워서 여기에 마음을 두고 觀想하는 것을 事觀 · 立相住心이라 한다. 占察經에서는 唯識觀과 實相觀을 二종의 觀法으로 든다. 十二因緣의 理를 觀하는데 淺深의 구별이 있으니, 聲聞의 觀은 가장 低劣한 觀이므로 下智觀, 緣覺의 그것은 中智觀, 菩薩의 그것은 上智觀, 佛의 觀은 가장 殊勝하므로 上上智觀이라 일컬었으며 이것을 四乘의 觀智라고 했다. 懺悔滅罪의 방법으로서 (1) 生死(迷惑의 世界)에 流轉하는 것은 자신의 罪障의 因緣 때문이라고 觀하고 (2) 그 인연에 따라서 生死에 流轉하는 자신의 不淨한 果報를 觀하며, (3) 佛性을 開顯해야 할 자신임을 觀하며, (4) 如來의 몸에 具足하고 있는 利他哀愍의 德을 觀하는 것을 四種觀行이라고 한다. (觀佛, → 止觀, → 五停心觀, → 四尋思觀(四如實智觀), → 五重唯識, → 四法界, → 三聖圓融觀, → 三觀, → 析空觀(體空觀), → 眞心觀(妄心觀), → 阿字觀, → 五相成身觀, → 五字嚴身觀, → 字輪觀, → 種三尊觀, → 十六觀)


심(尋) : 범어 vitarka의 번역. 覺이라고도 번역한다. 心所(마음의 작용. 心과 相應하여 心과 동시에 존재하고 心에 종속하는 가지가지의 정신작용을 말함)의 이름. 사물(특히 말의 의미 등)을 찾아 헤아리는(尋求推度) 것. 伺에 흡사하나 伺와 같이 細密하지 않은 것. 또 伺와 더불어 말을 하기 시작하는 작용이 있다 한다. 俱舍宗에서는 不定地法(心所 6품의 하나. 여기에 46心所를 세운다)의 하나라 하며, 唯識宗에서는 四不定[悔(惡作)·睡眠·尋·伺]의 하나라고 한다.


사(伺) : 범어 vicara의 번역. 觀이라고도 번역한다. 心所(마음의 작용)의 이름. 俱舍宗에서는 不定地法(心所 6품의 하나. 여기에 46心所를 세운다)의 하나. 唯識宗에서는 4不定[悔(惡作) · 睡眠 · 尋 · 伺]의 하나. 사물을 細密하게 伺察하고 思惟하는 정신작용. 麤雜(거칠고 잡됨)하게 尋求推度하는 心所의 尋과 상대어.


선정(禪定) : 禪은 범어 禪那의 약칭으로, 思惟修라 번역하며, 新譯은 靜慮라 한다. 思惟修는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자세히 思惟하는 수행이란 뜻이다. 靜慮는 고요히 생각하는 것으로, 心體가 적정하여 능히 審慮한다는 뜻이다. 定은 범어 三昧의 번역으로, 마음이 한 경계에 定止하여 흐트러짐을 여읜다는 뜻이다. 곧 한 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것을 禪이라 하고, 一境이 靜念한 것을 定이라 한다. 그러므로 定의 이름은 寬이며 일체의 息慮凝心으로 이름한 것이며, 禪의 이름은 狹이니 定의 一分이다. 왜냐하면 禪那의 思惟와 審慮는 스스로 定止 · 寂靜의 뜻이 있으므로 定이란 이름을 얻었고, 삼매는 思惟와 審慮의 뜻이 없으므로 禪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러한 두 가지 뜻을 總別合稱하여 禪定이라 한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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