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삼혹(一心三惑)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同體三惑이라고도 한다. 三惑은 三障이라고도 한다. 천태종에선 번뇌를 見思 · 塵沙 · 無明의 세가지로 나누는데 이 세가지는 그 本體가 각각 틀린 것이 아니고 一惑의 작용이 세밀하고 거칠은 정도에 불과하므로 모든 法性은 다른 것이 아니고 서로 融合하여 一心속에 넣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3惑은 一心으로 三觀을 觀함으로 인하여 끊을 수 있다.
見思의 惑이란 3世의 道理에 迷惑되어 있는 見惑과 현재의 事象에 迷惑되어 있는 思惑이다. 이 두 가지는 三界의 生死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界內의 惑이라 한다. 聲聞 · 緣覺 · 菩薩의 三者가 다 끊을 수 있는 惑이므로 通惑이라 한다. 이 惑은 空觀에 의해 끊을 수 있다. 塵沙의 惑은 塵沙와 같이 무수히 많은 無知를 말한다. 보살은 十界 중생의 無量의 惑, 그것을 對治하는 無量의 敎法을 알지 않으면 안되지만 空觀에 의해 見思의 惑을 깨뜨리는 것은 空理에 집착되어, 더 나아가 이들 無邊의 差別相을 알고자 하지 않으므로 이 塵沙의 惑을 또 著空의 惑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의 障이 되며 특히 보살만이 끊을 수 있으므로 이것을 別惑이라고도 한다. 이 惑은 界內界外에 공통하며 假觀으로 끊을 수 있다. 無明의 惑은 모든 것이 一法界가 되는 것을 모르는 미세한 번뇌이므로 界外의 惑이라 하고 보살만이 끊을 수 있으므로 別惑이라 한다. 이것들은 中觀에 의해 끊는다.
이상과 같이 三惑을 三觀에 의해서 차례로 따로따로 끊는 것은 別敎의 주장으로 천태종 곧 圓敎에선 三惑은 同體의 것이므로 一心의 3觀으로 하나를 끊을 때 다른 것도 동시에 끊을 수 있다 한다.
참고
혹(惑) : 깨달음을 장애하는 迷妄의 마음. 證悟와 반대되는 것. 곧 번뇌를 말한다. 번뇌는 우리의 마음을 의혹하는 것이므로, 惑이라 한다. 仁王經合疏 中에「惑이라 하는 것은 미망의 마음이다」하였음.
견사(見思) : 또는 見愛 · 四住 · 染汚無知 · 枝末無明 · 通惑 · 界內惑 · 見修. 우주의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迷惑인 見惑과 낱낱의 사물에 대한 진상이 판명되지 않은 미혹인 思惑을 가리킴.
견혹(見惑) : 惑은 마음의 迷惑, 곧 번뇌의 별명이며, 또한 見惑이란 것은 見道에 의해 消滅되는 惑이란 뜻이고, 修惑(思惑이라고도 한다)은 修道에 의해 消滅해 없어지는 惑이다. 俱舍宗에서는 四諦의 진리(즉, 佛敎의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 眞理를 모르는 惑을 見惑, 現象的인 사물에 집착하고 迷한 迷事의 惑을 修惑이라 했으며, 唯識宗에서는 邪道의 이단자가 邪敎 등의 誘導에 의해, 또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분별함을 따라 일으키는 후천적인 번뇌(分別起)를 見惑, 태어남과 동시에 저절로 생기는 선천적인 번뇌(俱生起)를 修惑이라 한다고 했다. 또한 天台宗에서는 見 · 思의 二惑은 空觀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이므로 塵沙惑 · 無明惑과 구별했으며 합해서 三惑이라 했다. 그 가운데 見 · 思의 惑은 모두 三界안의 사물에 의해 상대적으로 일어나고, 三界의 生死(즉, 迷的 生存)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界內의 惑이라 했고, 三乘이 공통으로 끊지 않으면 안되는 惑이므로 通惑이라 한다.
사혹(思惑) : 修惑이라고도 하며, 事物의 차별적인 眞相을 알지 못하므로 일어나는 번뇌.
성문(聲聞) : 소리를 듣는 사람이란 뜻으로 제자라고도 번역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가리킨다. 원래는 佛在世時의 제자를 말하지만 緣覺 · 菩薩에 대해 二乘 · 三乘의 하나로 열거할 때는 부처님의 敎說에 따라 수행을 하지만 자기 혼자만 해탈하는 것을 목적하는 出家의 聖者를 뜻한다. 佛敎徒 가운데 성질 ·능력이 얕은 下根機 또 四諦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쌓아 四妙門果를 깨닫고 마침내는 心身을 다 滅盡하여 灰身滅智의 無餘涅槃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하는 사람들의 뜻이다. 성문을 위한 敎를 聲聞乘, 그 교를 설한 經典을 聲聞藏이라 한다. 聲聞乘은 緣覺乘과 같이 소승에 속한다. 법화경 卷二에는 성문이 마음을 바꾸어서 대승으로 轉向하는 경우, 이를 聲聞이라 칭하는 것은「다른 사람을 제도하고자 가르침을 다른 사람에게 설하여 들려주는 사람이란 뜻이다」라고 하며 이것을 大乘聲聞(佛道聲聞)이라 부른다.
연각(緣覺) : 범어 pratyeka-buddha(各自가 깨닫다는 뜻)의 번역. 獨覺이라고도 번역하고, 또 辟支佛로 音譯. 불타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道를 깨달은 이로, 寂靜한 고독을 좋아할 뿐 說法敎化하지 않는다고 하는 일종의 聖者. 聲聞과 같이 二乘의 하나. 또 聲聞 · 보살과 같이 三乘의 하나.
보살(菩薩) : 菩提薩埵 · 菩提索多 · 冒地薩怛縛 · 扶薩이라고도 하며, 道衆生, 覺有情, 道心衆生 등이라고 번역한다. 또한 無上菩提를 구하여, 衆生을 이익케 하고, 모든 波羅蜜의 行을 닦아서 미래에 불타의 깨달음을 열려고 하는 사람. 三乘의 하나. 十界의 하나. 보살에게는,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는 有情(心識을 가진 자. 衆生)이라고 하는 뜻이나, 혹은 菩提(구하는 목적인 깨달음)와 薩埵(敎化의 대상으로서의 중생)를 대상으로 하여 자기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 것, 菩提를 얻을려고 하는 용맹한 큰 마음 등의 뜻이 있어, 聲聞이나 緣覺도 각기 菩提(覺智)를 구하는 점에서는 보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므로, 특히 無上菩提를 구하는 大乘의 수행자를 摩訶薩埵(摩訶는 크다는 뜻) · 摩訶薩 또는 菩薩摩訶薩 · 菩提薩埵摩訶薩埵 · 摩訶菩提質帝薩埵 등이라고 하여, 二乘으로부터 구별하여 이것을 보살이라고 한다.
통혹(通惑) : 천태종에서 말하는 5惑 중 見思惑을 通惑이라 일컫는다. 또 塵沙와 無明을 別惑이라고 한다. 見思는 3乘을 통하여 끊을 수 있다. 四敎儀에는 集諦는 곧 見思惑이며, 혹은 通惑이라고 했다.
공관(空觀) : 모든 존재는 그 자체의 본성이 없고 고정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진리를 觀想하는 수행법. 모든 존재를 空(실체가 없음)으로 觀하는 입장. 모든 사물은 다 空하다고 하는 도리를 깨닫기 위하여 수행하는 觀法. 모든 사물은 因緣所生(원인과 조건에 의해 生起함)이기 때문에 그 실체는 있을 수 없고, 空寂無相이라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무지(無知) :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을 染汚無知와 不汚無知의 두 無知로 나눈다. 染汚無知는 染無知라고도 하며, 그 성질이 染汚(不善과 有覆無記)된 無知라는 뜻이니 곧 진리를 덮어 지혜를 방해하는 번뇌로서의 無知를 말하고 無明을 體로 한다. 不染汚無知는 不染無知 · 不染愚라 하며, 번뇌로 더럽힌 것이 없어진 無知를 말함. 대상에 대하여 집착하지는 않지만 杌(나무를 베고난 그루터)을 보고 사람이라 생각하듯 여러 가지 사물을 확실히 알 수 없는 劣慧이며 有漏이긴 하지만 善 또는 無覆無記어서 無明과 꼭 같지는 않다. 이것은 또 所知障에 해당하는데, 대승에서는 無明을 體로 한다고 설한다. 有部에선「성문의 아라한이나 연각은 染汚無知를 다 단절해 버리지만 不染汚無知는 끊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現行하는 것)」고 하며, 佛陀만이 두 無知를 완전히 단절하여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한다.」고 한다.
가관(假觀) : 三觀의 하나. 만유의 모든 법은 공한 것이어서 하나도 실재한 것이 없으나, 그 차별한 모양이 분명한 것은 대개 假의 존재라고 觀한다.
중관(中觀) : 三觀의 하나. 中諦의 진리를 觀하는 것. 諸宗이 한결같이 이 中觀으로써 觀道의 極致를 삼는다. 法相宗에서는 遍計所集은 有에 있지 않고 依他圓成은 空에 있지 않다고 觀하는 것을 中觀이라고 하며, 三論宗은 諸法이 不生不滅하고 내지 不來不去라고 觀하는 것을 中觀이라고 하며, 천태종에서는 三千의 諸法이 낱낱이 절대하다고 觀하는 것을 中觀이라 하고 여기에 別敎의 所說을 隔歷의 中이라 하고 圓敎의 所說을 圓融이라 하여 前者를 但中, 後者를 不但中이라 했으니 곧 不但中을 究竟의 中觀으로 한 것이다.
진사(塵沙) : ①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먼지와 모래에 비유한 것. ② 塵沙惑. 천태종에서 見思 · 無明과 한가지로 三惑의 하나로 치며, 三界의 내외에 걸쳐 있는 惑으로 假觀에 의해서 破할 수 있는 惑이라고 한다. 지혜가 열등하여 더욱 나아가 온갖 차별상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보살이 자유자재로 중생을 교화하는데 장애가 되므로 化道障의 惑이라 한다. .....삼혹→3障이라고도 한다. (1) 見思惑. 見道와 修道에서 끊는 見惑과 修惑을 말함. 見惑은 세상의 진리를 알지 못하여 일어나는 煩惱이고, 修惑은 모든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여 얼어나는 煩惱이다. (2) 塵沙惑. 塵沙란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할 때에 마음이 어두워 한없이 많은 법문을 알아 자재로이 구제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3) 無明惑. 障中道惑이라고도 한다. 迷의 根本을 이루어 밝은 지혜가 없는 번뇌이다. 이 3惑 가운데 見思惑은 聲聞 · 緣覺 · 보살이 함께 끊을 수 있는 것이므로 通惑이라 부르고, 塵沙惑과 無明惑은 보살만이 끊는 것이므로 別惑이라 한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迷)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의 第一支가 無明支이다. 또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癡라 한다. ① 十二緣起의 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와 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를 三世兩重의 因果로 說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의 位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의 因果로 해석하고 無明과 行과 識 등의 五果의 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癡로서 善惡의 業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법성(法性) : 법의 體性이란 뜻. 우주의 모든 현상이 지니고 있는 진실 불변한 본성. 眞如法性 · 眞法性 · 眞性이라고도 하고 眞如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한다. 智度論卷三十二에는 諸法에 대한 각각 相(현상의 차별적인 相)과 實相이 있다. 예컨대 相은, 모두 초를 불에 닿게 하면 녹아버려 이전의 相을 잃어 버리듯이 고정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분별하여 찾아보려고 하면 끝내 찾아낼 수 없다(不可得). 찾아낼 수 없으므로 空이며, 곧 그 空인 것이 諸法의 眞相이라고 설명한다. 空인 것이 모든 差別相에 대해 전부 동일하므로 그런 의미에서 如라 하고, 모든 相이 똑같이 空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空을 法性이라고 하며, 또한 예컨대 黃石 속에 金의 성질이 있듯이 일체 世間法 속에 모두 열반의 법성이 있어서 이 諸法 본연의 實性을 法性이라 설명한다. 일반적으로는 법성을 如來藏과 구별하여 광범위하게 일체법의 實性이란 뜻으로 사용하지만, 여래장과 같은 뜻이라고 하는 說도 있다.
일심(一心) : 우주의 근본원리로서 萬有의 實體인 절대 無二의 心性. 眞如, 如來藏心을 말한다. 舊譯의 화엄경 卷二十五의 十地品에「三界는 허망하여 다만 이 한 마음의 所作이다」라고 說한 것은 이런 뜻에 근거한 것이다. 또 宗密의 화엄경 行願品鈔 卷二에는, 華嚴宗의 五敎에 一心의 說을 배속하고, 小乘에서는 마음 밖에 外境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이름은 있어도 實다움이 없고(假說의 一心), 大乘權敎에서는 異熟阿賴耶識(事의 一心), 大乘實敎에서는 如來藏藏識(理事無礙의 一心), 大乘頓敎에서는 染淨을 함께 뛰어넘은 절대적인 一心 別敎一乘에서는 萬有를 다 거두어 들인 萬有總該의 一心을 말한다고 하고, 別敎의 一心은 一眞法界, 一心法界라 함과 같이 우주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곧 事事物物이 그대로 서로 장애하지 않고 절대적인 존재, 萬有를 만드는 眞如心에 거두어 一心으로 한다
별교(別敎) : 天台宗에서 말하는 化法 4敎의 하나. 근기가 둔한 중생들의 所見으로 보는 萬有는 事方面에서는 차별이 있지만, 理 방면으로 보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므로 이 迷見을 벗어나서 평등한 이치를 깨달으라고 가르치신 敎法.
원교(圓敎) : 원만하고 완전한 敎의 뜻. 舊譯 華嚴經卷五十五에는 善伏童子에게 圓滿因緣修多羅를 說했다고 했다. 중국에서 모든 경전의 내용을 體系化해서 비판분류하는데(敎相判釋), 究極的인 敎를 가끔 圓敎라고 부른다.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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