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업과 마음의 업 71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께서는 그로부터 왕사성을 떠나 나란타로 가서 파워리카의 몽수림(檬樹林)에 들어가셨다. 그때 니건타(尼乾陀)의 야제자(若提子)도 많은 제자들을 이끌고 이곳에 머물렀는데, 그 제자인 장고행(長苦行)은 읍에서 탁발한 뒤, 몽수림으로 세존을 찾아와 자리를 같이 하였다. 세존은 말씀하시기를, “장고행이여, 그대의 스승은 악업에 대하여 어느 정도 업을 수립하고 있는가?” “교답마여, 저의 스승은 업이라고 하지 않고 신벌(身罰), 어벌(語罰), 의벌(意罰)이라는 식의 벌로써 나타내고 있습니다.” “장고행이여, 이 세 가지 벌 중에 어느 것을 중하다고 하는가?” “신벌을 가장 중한 것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존자 교답마시여, 당신은 어떻게 벌의 구별을 세우고 계십니까?” “장고행이여, 나는 벌이라고는 하지 않고 업이라고 한다.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의 구별을 세우고 의업을 가장 중한 것으로 하고 있다.” 장고행은 이 문답을 마치고 세존과 헤어져 자기 스승의 곁으로 가서 이야기를 하였다. 야제자는, “참으로 잘했다. 너는 옳게 교답마에게 설명했다. 힘이 약한 의(意)의 벌이 힘이 강한 몸의 벌에 비하여 뛰어날 리는 없다. 몸의 벌이 중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고 칭찬하였다. 그러자 그 자리를 함께 하던 재가자의 우바리(優波離)는 “나도 한번 교답마의 처소에 가 보겠다. 만약 그가 이론으로 도전해 오면, 힘센 사내가 길다란 양의 털을 쥐고 휘두르고 또 휘두르며 양을 내팽개치듯이 던져 버리겠다.” 하고 용기 백배하였다. “교답마는 괴상한 술수를 알고 있어서 남의 제자를 꾀어내는 일에 능하므로 그만 두는 게 좋겠다.” 라고 간했지만, 듣지 않고 떠나 세존께 논쟁을 시도하였다.
세존은 말씀하시기를, ‘우바리여, 만약 그대가 도리에 입각하여 감정으로 달리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논의를 해도 좋다. 가령 여기에 한 니건타가 병에 걸려 있다고 하자. 그는 병 때문에 냉수를 원하면서도 가르침에 따라 냉수를 사용하지 못하고 금지된 채 더운 물을 받아 마시고 끝내 냉수를 얻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면 그는 어느 곳에 태어날 것 같은가?“ ‘그것은 의착천(意着天)이라는 곳에 태어납니다. 냉수를 마음에 두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바리여, 잘 생각하여 대답해야 한다. 전후 모순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 한 가지, 가령 여기에 한 니건타가 있어서 네 가지의 금계를 지키고 밤낮으로 스스로 억제하고 모든 악을 여의려고 하되, 그 오가는 길에서 작은 벌레를 수없이 죽였다고 한다면 야제자는 어떠한 응보가 있다고 말하겠는가?” “마음이 있어서 저지른 일이 아니면 대단한 죄는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이 있어서 저지른 일이라면 무거운 죄가 됩니다.” “우바리여, 잘 생각하여 대답해야 한다. 전후 모순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 한 가지, 이 나란타는 참으로 번영하여 인구도 많으나 여기 어떤 사람이 검을 빼들고 순식간에 이 나란타의 인구를 몰살시켜 버리겠다‘고 말했다고 하자, 그것은 될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것은 물론 될 수 없습니다. 10명, 20명, 50명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도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신통력을 갖추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출가자가 이 나란타를 진에(瞋恚)로써 재(灰)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은 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할 수 있습니다. 10, 20, 50명 정도면 나란타를 마음대로 재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바리여, 잘 생각하여 대답해야 한다. 전후 모순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는 일찍이 선인(仙人)이 한 번 노여움에 의하여 여러 국토를 넓은 벌판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들은 일이 있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그것을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최초의 비유로써 저는 이미 명확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만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삼보(三寶)에 귀의하겠습니다. 부디 오늘부터 저를 세존의 신자(信者)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것은 그대가 숙고한 끝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대와 같이 이름 있는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마음 먹은 일을 해야 한다.”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기필코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 다른 교인들은 저와 같은 자를 제자로 삼으면 그것을 온 나란타에 떠들어댈 것이지만, 세존께서는 다만 잘 생각해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기필코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 “우바리여, 그대의 집에서는 지금까지 니건타 사람들에게 공양하고 있었던 것이므로, 다음에 그들이 올 때도 여전히 공양함이 좋다.” “세존이시여, 그 말씀을 듣고서 저는 더욱더 귀의할 생각이 더해 가옵니다. 저는 전에, 세존은 자기와 그 제자들에게 공양하라, 다른 교인들에게는 공양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존께서 니건타 사람들에게도 전과 다름없이 공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자옵고 삼보에 귀의할 마음은 더해 가옵니다.” 우바리는 세존의 가르침을 받고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이치를 깨달아 기쁨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문지기에게 앞으로 니건타 사람들이 오거든 ‘우바리는 교답마의 신자가 되었으므로 이 문은 니건타 사람들에게는 닫혀지고, 교답마의 제자들에게 열려 있다고 말하라’고 명령하였다.
세존은 길을 동쪽으로 취하여 앙가국을 유행하여 앙가 하류의 참파(膽波)에 이르러 가가라 호반에 숙소를 정하셨다. 그곳에는 소나단타라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빈바사라왕으로 책봉되어 부유했으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소나단타가 누각에 올라 낮잠을 자고 있으려는데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가가라 호반 쪽으로 걸어간다. 그 소음에 눈을 뜨고 무슨 일인가 하고 이상하게 여기다가, 세존이 방문한 것임을 알고 자기도 만나 봐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많은 바라문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간하기를, “그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이쪽에서 찾아 가신다면 당신의 이름이 훼손되고 교답마의 평판만 높아질 뿐입니다. 당신은 7대를 청정한 바라문의 가문에서 태어난 청정한 분입니다. 게다가 삼베다(三吠陀)에 정통한 도덕과 높은 학자로서 3백 명이나 되는 제자에게 성전을 가르치는 바라문 중의 기숙(耆宿)인 마갈타의 왕 빈바사라나 비가라사제 바라문(沸伽羅娑提婆羅門)등의 존경을 받고 왕으로부터 이 땅에 봉해진 신분이므로 교답마의 편에서 찾아오는 것이 지당합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다. 나의 편에서 찾아가는 것이 지당하다. 교답마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 가문과 재보를 버리고 출가하였고, 그 용모는 미려하고 위엄이 있으며 계로써 몸을 지키고 업을 믿으며 뛰어난 상(相)을 갖추고 득도하여, 세간의 도사가 되어 중생에게 상냥하다. 따라서 그가 머무는 곳에서는 싸움이 없고 출가, 재가의 제자들을 이끌어 훌륭한 가르침을 베푸는 자로, 빈바사라왕이나 비가라사제 바라문 그 어느 쪽이나 그의 일가가 통틀어 귀의하여 존경하고 있다. 지금 그 교답마가 우리들 참파의 가가라 호반에 머물고 계시니 우리들의 빈객인 것이다. 빈객은 공경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내 편에서 찾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게다가 나는 교답마의 덕을 이 정도 밖에 가르칠 수 없으나 그의 덕은 결코 이것 뿐이 아니다. 신(信)이 있는 자는 등에 양식을 짊어지고서라도 멀다 하지 않고 찾아뵈어야 한다.” 소나단타의 이 말에 많은 바라문들은 수긍하고 같이 가가라 호반으로 향해 떠났다. 그 도중 숲속을 지날 때 소나단타는 생각하기를 ‘만약 내가 교답마에게 질문하는데, 바라문이여, 그 물음은 그렇게 물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묻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기 시작하고 그 때문에 내 이름이 훼손되어 수입에도 지장을 끼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또 교답마의 편에서 질문하여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렇게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도 결과는 똑같게 된다. 그렇다고 또 이렇게 떠나와서 만나지 않고 돌아간다면 더욱 나를 겁쟁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어 나의 이름이 훼손될 것이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어떻게든지 나의 자랑으로 삼는 삼베다의 학문으로 문답하여 그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마음 먹고 세존에게로 나아갔다.
인사를 마치고 각각 자리를 잡자, 안절부절하고 있는 소나단타의 거동을 본 세존은 그 심중을 살피시고,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어떠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만 참다운 바라문이라 말하는가?” 이 물음은 크게 소나단타를 기쁘게 하였고 또 마음을 놓게 했다. ‘참으로 적절하게 교답마는 나에게 이런 물음을 해주셨다. 이거라면 나의 대답은 그의 가납하는 바가 될 것이다’라고 몸을 쭉 펴고 침착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대중들을 돌아보며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다섯 가지 자격이 있으면 참된 바라문이라고 불립니다. 첫째로 7세대 동안 그의 가문은 부모계 모두 혈통이 깨끗할 것. 둘째는 성교(聖敎)를 읽고 삼베다(三吠陀)의 학문에 정통하고 순세파(順世派)의 학문에도 밝으며 대인의 상을 분간하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할 것. 셋째로는 용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며 게다가 위엄이 있을 것. 넷째는 계행(戒行)이 바를 것. 다섯째는 지자(智者)로서 공희(供犧)의 국자(杓)를 받드는 제 1인자 또는 제 2인자가 될 것. 이 다섯 가지 자격이 있으면 참다운 바라문이라고 부릅니다.” ‘바라문이여, 그대가 든 다섯 가지 자격 중에서 한 가지가 빠지더라도 바라문이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가합니다. 세 번째의 용모의 아름다움이 빠지더라도 바라문이라고 부릅니다.” “나머지 네 가지에서 또 한 가지가 빠지더라도 바라문이라고 부르는가?” “그러하옵니다. 두 번째를 뺍니다.” "남은 세 가지 중에서 또 한 가지를 뺄 수가 있겠는가?“ “가합니다. 첫째 번을 뺍니다.” 그때 다른 바라문들은 이 묻답을 들으면서 안절부절하여 소나단타에게 속삭이듯이, "존자여,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오. 교답마의 말을 너무 좇으면 안 됩니다.“ 세존이 말씀하시기를, "여러 바라문들이여, 너희들이 만약 소나단타가 학문이 얕아 말이 졸렬하여, 나와 논의하는데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희들이 스스로 나서서 말하는 것이 좋다. 또 만약 소나단타가 박학(博學)하여 틀림없이 나와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희들은 물러가 있음이 좋다.“ 소나단타는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상관하지 마시옵소서. 제가 직접 이 사람들에게 말하겠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용모를 경시하고 주문(呪文)을 경시하며, 문벌을 더럽힌다고 생각하는듯 한데, 나는 그러한 것을 경시하고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조카인 이 앙가카를 보시오. 용모도 아름답고 교답마를 빼고는 비길 사람이 없습니다. 또 주문을 배우고 삼베다에 정통한데 내가 손을 잡고 가르친 것입니다. 또 문벌도 7대에 걸쳐 아버지 쪽이나 어머니 쪽이나 한결같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 앙가카가 산 목숨을 죽이고 물건을 훔치며 다른 사람의 처를 범하고 거짓말을 내뱉으며 술을 마신다면, 용모도 학문도 문벌도 필경은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나는 계행이 청정하고 지혜가 있으며, 공희(供犧)의 음기(飮器)를 바치는 제일인 또는 제이인이 되는 자격이 있으므로 참된 바라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그 최후의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뺄 수가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될 수 없습니다. 지혜는 계행으로써 청정해지고 계행은 지혜로써 청정해지니, 계행이 있는 곳에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는 곳에 계행이 있으며, 계행을 갖춘 사람은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계행을 지니며, 계행과 지혜와는 이 세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일컫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람이 손으로써 손을 씻고 발로써 발을 씻는 것과 같이, 계행과 지혜는 서로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참으로 그대로이다. 계행과 지혜는 서로가 서로를 청정하게 하며 이 세간에서 가장 절실한 것이라고 일컫는다. 그렇다면 계행과 지혜는 대체 무엇인가?‘ “오오, 세존이시여. 저는 이것만을 알고 있습니다. 모쪼록 그 이상을 말씀해 주십시오.”
“바라문이여, 부처가 이 세상에 나와서 법을 설하고, 재가자가 이것을 듣고 믿음을 일으켜 출가하며, 계율을 지켜 바른 행을 낙으로 삼고 작은 죄도 두려워하며, 생활을 바르게 하고 오관(五官)의 문호를 지키면서 살생을 안하며, 인(仁)이 넘쳐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마음을 곧고 청정하게 하고 음행을 금하고 망어를 버리고 남을 이간시키는 말을 하지 않으며, 난폭한 말을 삼가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며, 적당한 때에 바르게 말하는, 이것이 계인 것이다. 또 번뇌를 여의고 모든 선정에 들어 조용히 온화하고 단단한 마음으로 모든 법의 무상 무아임을 알며 자타의 숙명을 알고 사람들의 생사를 알고 번뇌의 멸을 안다면 이것이 지혜인 것이다.” 소나단타는 이것을 듣고 삼보에 귀의해 신자가 될 것을 서약하고 이튿날 식사를 초대하겠다는 말씀을 올렸다. 이튿날, 초대 식사가 끝났을 때 소나단타는 낮은 걸상을 가지고 와서 앉아 세존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제가 저의 동료들 틈에 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절을 하면 동료들은 저를 경멸하여 그 때문에 불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합장하는 손을 뻗으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으로 생각해 주셔야겠습니다. 또 제가 머리의 모자를 벗거든 절하는 것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또 제가 수레를 달리고 있다가 세존을 뵐 때 채찍을 아래로 내리고 손을 머리에 올리거든 수레를 내려서 절한 것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존은 이에 응하고 설법을 마친 뒤, 가가라 호반으로 돌아가셨다.
다음에 세존은 앙가국을 차례로 유행하며 아사보라(阿沙補羅)의 마을에 머무시면서,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다음의 가르침을 남기셨다. “제자들이여, 너희들은 출가자로 알려져 있다. 또 사람들이 물으면 나는 출가자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다음과 같이 익혀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출가자로서 해야 할 법을 지켜 가자. 그래야만 출가자가 된 진실함이 있다. 나에게 의복과 음식과 주거와 약을 주는 사람들에게 큰 복을 얻게 하고 나의 출가 생활에 유익하고 보람이 있도록 하자’고.
제자들이여, 출가자가 해야 할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참(慚)과 괴(愧)를 갖추는 일이다. 그러나 참괴를 갖추어 이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몸과 말과 마음 위에서 행과 생활을 청정하게 하고 숨김없이 하되, 그렇다고 자기의 행을 뽐내어 자찬하고 남을 헐뜯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이여, 더구나 이것만으로 충분히 출가자의 목적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관의 문호를 지키고 외경(外境)을 보며 그것에 집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음식에는 양을 알며 먹는 것을 낙으로 삼지 말 것이며, 이 법의 그릇인 몸을 지탱하여 기르고 청정한 행을 이루는 도움으로 하며, 바른 반성으로써 식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언제나 이 같은 내용을 깨닫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낮에는 정좌한다든지 경행(經行)한다든지 하며 금하는 법을 행하지 않으며, 밤에나 초저녁에도 정좌하고 경행하며 밤중에는 우협(右脇)으로 누워 발과 발을 포개고, 정심 정념으로 일어나야 할 때를 마음에 떠올리고 사자(獅子)와 같이 자며,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정좌하고 경행하며, 금지된 법에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평소 가는 일에나 오는 일에나, 가까운 데를 바라보는 일에나 멀리 보는 일에나, 옷을 입는 일에나 바리때를 들 때나 식사할 때나, 물을 마실 때나 행주좌와(行住坐臥)를 언제나 바른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항상 조용한 거처를 찾아 수풀 속 나무 밑이나 산중의 동굴 속이나 무덤가나 거적에 자리를 정하고, 몸과 마음을 똑바로 하고 탐욕, 진에, 나태와 수면, 도거(掉擧), 뉘우침과 의심을 여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병의 고통을 감내할 수 없는 자가 병이 낫게 되고 몸을 회복하여 기뻐하듯이, 노예에게 자유가 주어져 자기가 생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을 기뻐하듯이, 또 많은 재보를 등에 지고 황야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집에 돌아와 기뻐하듯이, 이 다섯 가지 마음의 부개(覆蓋)를 여의고 마음이 환희에 차서 몸이 느긋하여 정신 통일을 얻어 모든 선정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자들이여, 그 위에 다시 이 선정으로 단련시켜 언제라도 일할 수 있는 마음으로서 자타의 숙명을 알고 중생들의 생사를 알며 번뇌의 멸각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자들이여, 이리하여 비로소 출가자, 바라문, 지혜 있는 사람, 평온한 사람, 성자라고 일컫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출가자, 바라문 또는 성자란 악불선(惡不善), 더러움의 법, 고통의 열매를 낳고, 다음 세상에 태어날 근본이 되는 바를 진압한 사람이다.
제자들이여, 출가하여 만약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진에를 여의지 못하며 분노와 원한을 숨기는 일이나 자존과 질투, 사기와 아첨, 악욕과 사견을 멀리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쌍날칼을 옷 속에 감추고 있는 것과 같다. 나는 옷을 입고 있으므로 출가자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나체로 있다 해서 출가자라고는 안 한다. 도회자(盜灰者)는 그저 이마에 회를 발랐을 뿐, 수욕자(水浴者)는 그저 하루에 세 번씩 목욕을 할 뿐, 어느 것도 출가자는 아니다. 나무 밑에 머무는 사람, 황야에 머무는 사람, 입행(立行)하는 사람, 단식하는 사람, 송경하는 사람들도 그저 그것에 한한 사람일 따름이며 출가자는 아니다.
제자들이여, 옷을 입는 것만으로 탐욕, 진에 그 밖의 번뇌를 여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나체로 있다든가, 이마에 회를 바른다든가, 하루 세 번씩 목욕한다든가, 나무 밑에나 황야에 머문다든가, 송경하든가 하는 것은 그저 외형뿐으로 출가한 자의 본래의 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출가한 자의 본래의 도는 무엇인가? 탐욕과 진에와 분노와 원한에 덮힌 자 등은 자존과 질투, 속임수와 아첨, 악욕과 사견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악에서 떠났을 때에 떠났다는 것을 알고 기쁨을 낳으며 몸이 느긋해져서 마음이 능히 정복된다. 그래서 일체의 세계를 커다란 인자한 마음과 슬픔의 마음, 기쁨의 마음을 가지고 증오함이 없고 원한이 없이 채워지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비유컨대, 강변의 깨끗한 백사(白沙)를 깔고 맑은 찬물이 가득한 연못이 있다고 하자. 여행자들이 사방에서 더위에 지친 발을 이끌고 연못가에 왔을 때, 이 물로 해서 갈증을 풀고 더운 열기의 고통을 풀 것이다. 마치 그와 같이 찰제리종(刹帝利種), 바라문종, 비사종(毘舍種)의 사람들이 부처가 설하는 법에 의해서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아 번뇌라는 염열(炎熱)의 괴로움을 멸하고 마음의 청량함을 얻는다면, 나는 이 사람을 출가의 도에 들어선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렇게하여 번뇌를 적멸(寂滅)시키고서야 참다운 출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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