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전기-12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2. 공주, 노승의 계시를 받다
여늬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공주는 화원에 물주기를 마치고 한숨 돌리고져 만발한 백가지 아름다운 꽃들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결에 뒤쪽에 인기척을 느껴 돌아보니 웬 노승이 한분 서 있었다. 하얀 승의를 걸친 노승은 특히 긴 눈썹이 시선을 끄는데 소쇄(瀟灑)한 인상에 안광(眼光)이 빛나고 하얀 수염이 가슴밑까지 드리워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노승은 꼼짝을 않고 계속하여 공주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주위에 위엄과 덕화가 가득 넘쳐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공주가
“스님! 어쩌려고 가벼이 이곳에 들어오셨나이까? 이곳은 왕가의 정원이옵니다. 함부로 침입한 사실을 알게되면 중벌을 받게 되옵니다.”
그제야 노승은 엷은 미소를 띄우며
“허허…, 이것 참, 무례를 용서하오. 우승(愚僧)도 그만 아리따운 꽃에 이끌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발길이 이곳을 향한 모양이라. 허나 이렇게 낭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도 인연인 모양이오, 허허…….”
노승의 말은 부드러우면서 너그러워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존경의 생각을 갖게 됐다.
“스님, 저는 국왕마마의 삼녀 묘선이라 하옵니다마는…….”
공주는 예의를 갖추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조용히 노승을 우르러 보았다. 노승은 의아스러운 표정이 되더니
“왕녀의 신분인데 어떤 연유로 누추한 옷을 입고 이곳 화원에서 노역을 하는지?”
공주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 즉 자신의 신상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이 노괴승과 화원 한가운데에서 대화중임이 딴사람 눈에 띄어서는 곤란하다고 여겼다. 이 화원은 호위군사들이 항상 엄중히 경계하고 있어서 아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노승은 어떻게 들어왔단 말인가? 어찌하면 좋을까? 공주는 마음속으로 당황하면서 보모를 부를까 말까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노승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필시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우승은 결코 해를 끼치는 자가 아니요. 이롭게 돕고자 하니 마음을 놓으시고 얘기를 해보시오.”
공주는 이 한마디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문이 열려 얼굴을 들고
“정녕 그러하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래전부터 저는 불도에 귀의해 수행정진하기를 원했사오나 부왕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사옵니다. 끝내는 혼인을 하라는 부왕의 명을 거스려 노하심을 받아 이곳으로 내치게 된 것입니다.”
공주는 스스럼없이 자신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했다.
노승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그럼 어찌 부왕을 거스리면서까지 수행을 하려 하시는고?” 라고 질문을 했다.
“네, 세상의 일시의 영화보다도 구원의 열반을 구하고저 하는 일념에서입니다.” 공주는 간단히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대는 왕녀의 신분에다 여자가 아닌가? 용이하게 열반의 도를 얻을 수 없으니 궁중에 돌아가 영화의 생활을 누림만 같지 못하리라.”
갑자기 노승의 어투가 바뀌며 공주에게 궁으로 되돌아 갈 것을 권했다.
한순간 공주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스님께 의외의 말씀을 듣게 되오이다. 미타, 불타의 도를 숭봉함에 빈부귀천의 차가 없을 것이오. 누구나 일념으로 발원하여 악업을 끊고 수행정진하면 남녀 불문하고 무상정등각을 얻을 것이며 열반(涅槃)에 들 수 있다고 믿사옵니다.”
노승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 실은 이 우승도 원래 조그마한 나라의 귀족의 신분이었으나 권에 의해 불타에 귀의하여 미타의 도를 닦았지만 청정안락은 고사하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수행연속일 뿐 일거에 득도할 수가 없었오. 수행함에 불골(佛骨)이 아니면 도저히 득도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소. 이 우승의 말을 진실이라 믿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궁으로 되돌아 감이 좋을 것이오. 인생이 몇 번이나 있는 것은 아니며, 출가금계는 괴로운 것, 재식정진에 무슨 취의(趣意)가 있겠는가. 괴로운 수행보다도 즐거운 세상풍정을 즐김이 좋으리라. 또한 한세상 이 몸은 참으로 다시 받기 어려우며 칠보를 가지고도 젊은 나이는 살 수가 없으니…….”
공주는 노승의 얘기를 듣다가 즉시 의연하게 그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스님! 제가 스님을 잘못 본 것 같사옵니다. 오랫동안 고된 수행으로 그만 타락하신 때문인 듯하군요. 예부터 성도하신 불타나 신선이나 성인들이 다 범인으로부터 성취하시게 된 것이옵니다. 모든 경전에 있듯이 주색재기는 사람을 미(迷)하게 하고 범진고해(凡塵苦海)는 사람을 해하는 함정이라고 설해 있습니다.”
노승은 모르겠다는 듯 공주의 말을 덤덤하게 듣고 있었다. 공주는 이어서
“장로고덕에 감히 외람된 말씀을 드려 죄송천만이오나 불타 역시 원래는 왕자로서 수행을 성취하여 성불한 것으로 압니다. 무릇 공덕을 쌓아 착한 일을 키우면 영혼은 삼계를 초월하여 장육금신(丈六金身 : 佛陀)을 성취하게 되옵니다. 백세광음은 불빛과 같고 부귀공명은 뜬구름과 같은데 어찌 그에 연연할 필요가 있으리까? 이 몸이 구제받기 어려웁기에 이제 이 몸이 있을 적에 법을 닦지 못한다면 어느 날에 이 몸이 구제받으리까?”
공주는 차차 얼굴이 붉게 상기되면서 일념으로 자신이 깨친 바를 설(說)해 나갔다.
“청컨대 고덕노승이여! 부디 마음을 정하시와 삼심양의(三心兩意)를 떨치고 일심으로 정도를 수행하시옵소서. 그리하면 자연 성불할 것이옵니다. 눈앞에 당장은 고난이 있을지라도 공덕이 성취되는 새벽녘에는 만고의 대광명이 그 여명을 비칠 것이옵니다. 천, 지, 인 삼재(三才)는 사람이 장악하고 있는 것, 고락도 그 근원은 한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늦거나 이르거나 선악에는 결국 반드시 응보가 있을 것이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계속되자 노승이 돌연 소리를 내어 크게 웃으면서
“들어보니 공주는 정말 불연(佛緣)이 깊은 사람으로 심성이 뛰어나 탄복 아니할 수 없도다. 정녕히 묻노니, 공주여! 그대는 진실로 성심성의 생사를 양단하고 수도할 결심을 가지고 있는가?”
“이미 깊이 마음먹고 조석으로 정근하고 있사옵니다.”
공주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다시 한번 노승을 쳐다보며 성실하게 대답했다.
노승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묻는다.
“그래, 수행하면 성도를 이룰 수 있다 하나 어느 정도의 공덕을 닦아야 하는가? 고해를 해탈하고 삼계를 초월하여 서천성불(西天成佛)이 된다 하나 무슨 근거가 있어 그런 말을 하는가?”
이 질문은 묘선공주를 몹시 당황케 하는 것으로 즉시 답변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용히 노승의 모습을 응시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삼심양의(三心兩意)를 일심에 거두고져 하나 그 일심은 어디에 있으며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 영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부모의 청탁(淸濁)을 어찌하여 나누는가? 번뇌 잡념으로 전도된 심원의마(心猿意馬)를 어디에 붙들어 매어야 하는가? 이를 알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사생육도(四生六道)의 윤회를 해탈할 수 없다 하거늘 공주의 느낌은 어떠하뇨?”
공주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생각해 보았으나 즉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웬고하니 노승의 질문은 공주가 지금껏 의문을 가지고 생각해 온 것으로 마음속 깊이 남아있던 문제들이었는데 노승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그 점을 물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주는 이 노승이 자신의 마음의 모든 경지를 환히 알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자 이 노승은 필시 내력이 있는 도승임에 틀림없으며 자신을 제도하기 위해 오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급히 두근거리며 귀뿌리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좀전의 질문은 나의 신심과 경지를 시험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내가 너무 당돌한 말을 한 것이 아닐까? 청하여 가르침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황급히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를 갖추고
“스님! 소녀는 이제 겨우 수행의 문턱에 있을 뿐 아무 것도 모르옵니다. 좀전의 당돌함을 용서하시고 부디 가르침을 내려 주소서.”
노승은 비로소 크게 웃으며
“그대의 일심은 수승하도다. 어서 그만 일어나도록 하라.”
노승이 일어나기를 권했으나 공주는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감격한 공주가 뜻밖의 불연(佛緣)에 겸허히 얼굴을 들고 노승을 쳐다보니 지금까지의 노승 모습이 일변하여 장엄한 보상(寶相)으로 보이며 전신에서는 호광(毫光)이 찬연히 빛나고 얼굴은 자애로 가득차 있었다.
공주는 외경(畏敬)의 생각과 함께
“스님! 부디 자비를 베풀어 도를 얻도록 일러주옵소서.”
노승은 위엄을 갖추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겁(塵劫=오랫동안 윤회해온 세상의 업보)이 아직 다하지 않고 고난을 아직 다 받지 않고서 어찌 득도가 되겠는가?”
노승 잠시 말을 끊고 묵상에 잠기는 듯 하더니
“단지 그대가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굳은 결심으로 수행코저 한다면 득도는 어렵지 않다. 정법을 얻으면 마음은 밝은 거울처럼 청정무구해지리라. 그리하면 고통도 없이 자연히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상시에 무아경지에 이르게 되리니, 잠시 괴로운 수행과정을 겪지 않으면 안되나 잘 참고 견디어야 한다.”
공주는 노승의 자애에 가득찬 유시(諭示)를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기 위하여 귀를 기울였다. 마치 고기가 물을 얻은 듯 공주는 전신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솟아 올랐다.
“스님! 소저의 수행은 언제나 끝나오리까?”
공주는 애원과 같은 필지소원(必至訴願)의 념(念)을 품고 노승을 우러러 보았다.
“앞으로 멀지않은 날 그대는 수미산으로 백련을 캐러 갈 일이 있으리라. 그곳에서 명사(明師)로부터 백옥정병(白玉淨甁)을 받게 될 것인즉 그날이 그대의 득도일이 되리라.”
이렇게 말하고 난 노승이 갑자기 존엄한 안색을 갖추어 엄숙한 묵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나 그 사이 가지가지 두려운 마장과 박해를 면할 도리가 없으리라. 지옥의 처참함도 보게 되리니, 그럴 때마다 뜻을 다시 굳게 지니고 계속 정진할지니라. 어떠한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인내로 극복하도록 하라. 오로지 일념으로 정진하기만을 바라노라.”
공주는 더할 수 없는 감격에 말을 잊은 채 그저 그침없는 눈물이 얼굴을 적실 뿐이었다.
“장래 마난(魔難)을 이겨내고 득도를 하게 되면 남해보타산(南海普陀山)의 백련대(白蓮臺)에 진좌(鎭座)케 되리라. 내 말을 명심하여 부디 수행에 힘쓸 일이로다.”
공주의 두 눈은 온통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다시금 이마를 땅에 대고 고은(高恩)을 사례한 뒤 얼굴을 들어보니 어느 사이에 노승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공주는 즉시 고개를 돌려 사방을 휘둘러보았으나 노승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더 이상 노승을 대할 수 없음을 깨달은 공주는 일순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으나 그 노승으로부터 득도에 대한 암시를 받은 일을 생각해내자 다시금 원기가 샘물처럼 솟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은 노승에게 그의 내력을 물어보지 못한 것이었으나 아무튼 기이한 행적으로 보아 신불(神佛)의 화신(化身)이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공주는 노승이 사라진 쪽을 향하여 지극정성으로 합장하고 배례했다.
출전 : 大聖 관세음보살일대기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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