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망경(梵網經)

범망경-15-3

근와(槿瓦) 2016. 7. 17. 06:23

범망경-15-3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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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증득하여 마음 마음마다 고요히 반연하며, 나의 것이라는 법[我所法]의 식계(識界)와 색계(色界) 중에서 흔들리지 않으니, 거스르고 따르며 나오고 가라앉기 때문이니라. 항상 백 가지 삼매(三昧)와 열 가지 선지(禪支)에 들어 일념(一念)의 지혜로써 이 소견을 지으니, 일체의 나와 남과 안과 밖에 머무는 여러 종자는 모두가 합하거나 흩어짐이 없어서, 모이고 이루어지고 일으키고 짓는 것을 얻을 수 없느니라.


불자야, 혜심(慧心)이란, 지혜로운 소견의 마음을 짓는 것이니라. 모든 삿된 소견과 번뇌의 환난 등의 묶임에 결정된 체성이 없음을 관하니, 순인(順忍)하여 공과 같기 때문에 음(陰)이 아니며, 계(界)가 아니며, 입(入)이 아니며 중생이 아니며, 일아(一我)가 아니며, 인과가 아니며, 삼세법(三世法)이 아니니라. 지혜의 성품이 밝은 광명을 일으키고 하나의 불꽃이 밝고 밝아서 허(虛)를 보아 받음이 없으니, 그 지혜의 방편은 장양심(長養心)을 낳고, 이 마음이 공을 일으키는 공의 길에 들어가 무생심(無生心)을 일으키느니라. 위의 천해명왕품(千海明王品)에서 이미 심백법명문(心百法明門)을 설하였느니라.”


노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1천의 부처여, 그대는 앞에서 금강의 종자에 십심(十心)이 있다고 말하였느니라.


불자야, 신심(信心)이란, 일체의 행은 믿음으로써 으뜸을 삼으니, 이는 온갖 덕의 근본이며, 외도의 삿된 소견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모든 소견을 집착이라고 이름하니, 번뇌[結]가 있어 짓는 업은 반드시 받지 않으며, 공한 무위(無爲)의 법 가운데 들어가 삼상[三相 : 유위법(有爲法)의 세 가지 특성, 즉 생(生)∙주(住)∙멸(滅)의 세 가지 유위상(有爲相)을 말한다.] 을 없애서 무생(無生)도 없고 생도 없고 머물음도 없으며, 멸함이 없음에 머물음도 멸하여 없느니라. 일체의 법은 공한 존재이며, 세속의 진리와 제일의제(第一義諦)의 지혜는 남김없이 없어져도 공과 다르며, 색공(色空)은 세심(細心)한 심공(心空)이니, 세심한 마음은 마음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믿음과 믿음이 적멸하여 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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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화합함이 없고 또 의지함도 없으나, 주인이란 나와 남이라는 이름의 쓰임이니, 삼계가 가아(假我)인 아(我)이어서 모으는 상(集相)을 얻을 수 없으므로 상이 없는 믿음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불자야, 염심(念心)이란, 생각을 지음이니, 여섯 가지 생각[六念 : 염불(念佛)∙염법(念法)∙염승(念僧)∙염계(念戒)∙염시(念施)∙염천(念天)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을 항상 깨달아서 마침내 항상 베푸는 제일의제에 이르느니라. 공하여 집착함이 없고 풀어놓음도 없으며, 생(生)과 주(住)와 멸(滅)의 상은 움직이지 않아서 거래(去來)에 이르지 않으며, 여러 업을 받는 자에 대하여 하나의 합해진 상으로 회향하여 법계의 지혜에 드느니라. 지혜와 지혜가 서로 타고 올라가, 타고 오르고 타고 올라서 적멸하며, 불꽃처럼 타올라  무상하며, 밝은 빛은 생겨남이 없으니, 생겨남이 없어서 일어나지 않느니라. 공한 도로 바꾸어서 앞뒤로 변전(變轉)하니, 변하고 변하여 전화(轉化)하고, 변화하고 전전(轉轉)해서, 동시에 변화하여 함께 머물러 불꽃처럼 타오르던 하나의 상(相)이 일시에 생멸하느니라. 이미 변하였거나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 변하고 변화하니, 또한 하나의 느낌[受]을 얻음도 이와 같으니라.


불자야, 회향심(廻向心)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 : 18공(空)의 하나로, 제일의제에서 보았을 때 공한 성품, 가장 뛰어난 진실의 공인 열반공(涅槃空)을 말한다.] 은 실다운 법의 공한 지혜에 대해 실다운 진리(實諦)가 있음을 비추는 것이니라. 업의 도가 상속하는 인연의 중도를 이름하여 실다운 진리(實諦)라 하며, 가명(假名)인 여러 법과 나와 남의 주인을 이름하여 세속의 진리라고 하니, 이 두 가지 유제(有諦:假諦)에 대해서 깊이깊이 공에 들어가 오고감이 없느니라. 환화(幻化)로 과를 받는 것이어서 받음이 없기 때문에 깊이깊이 마음이 해탈하느니라.


불자야, 달조심[達照心 : 진실한 상에 통달하여 비추는 마음.] 이란, 일체의 실성(實性)을 참고 따르는 것으로 성품과 성품의 묶임이 없고 풀음[解]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법에 통달하고 뜻에 통달하고 말[辭]에 통달하고 교화에 통달하느니라. 3세 인과에서 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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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근본 행은 여여(如如)하여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실용(實用)이 없고 용(用)도 없고 명용(名用)도 없으며, 용용(用用)의 일체가 공하고 텅 비어 공하여 공을 비추어 통달하니, 이를 이름하여 일체법공(一切法空)에 통달한다고 하느니라. 공공[空空 : 일체제법의 공도 또한 공한 것으로, 18공(空) 중에 하나이다. 또는 내신(內身)과 외경(外境)이 함께 공하며, 그 공함도 또한 공하다.] 은 여여(如如)하여 상(相)을 얻을 수가 없느니라.


불자야, 직심(直心)이란, 곧게 비추어서 신아(神我)를 반연함을 취하여 무생으로 들어가는 지혜이다. 무명의 신아(神我)는 공공(空空) 가운데 공(空)이니, 공공(空空)의 이심(理心)은 유(有)에 있고 무(無)에 있어서 도의 종자를 무너뜨리지 않으며, 무루(無漏)의 중도를 한 번 관(觀)하여 일체 시방의 중생을 교화하며, 일체의 중생들을 변하게 하여 모두가 살바야공[薩婆若空 : 일체지(一切智), 즉 불지(佛智)의 공견(空見).] 의 진성(眞性)의 진성에 들게 하며, 참으로  공을 행하면 삼계의 주인은 결박을 받지 않느니라.


불자야, 물러서지 않는 마음(不退心)이란, 일체 범부의 땅에 들어가지 않아서 잡된 장양(長養)의 여러 가지 소견을 일으키지 않으며, 또 서로 비슷한 나와 남을 인습(因習)하여 일으키지 않으며, 삼계의 업에 들어가 역시 공을 행하되 머물러 물러서지 않으며, 해탈은 제1의 중도에 있어서 하나로 합하는 행이기 때문에 행이 물러나지 않으며, 본제[本際 : 진리의 근거, 만물의 근거.] 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이 물러나지 않으니, 공은 관지(觀智)를 낳고  여여하게 상속하여 타고 오르는 마음은 불이(不二)에 들어가느니라. 항상 공을 내는 마음[空生心]은 하나의 길이며 하나의 청정함이며, 물러서지 않는 하나의 길이며 하나의 비춤이 되느니라.


불자야, 독대승심(獨大乘心)이란, 모든 사물이 하나의 공임을 알기 때문에 일체의 행과 마음을 일승(一乘)이라고 이름하느니라. 하나의 공한 지혜에 오르는 것이 지승(智乘)이고 행승(行乘)이며, 지혜에 올라서 마음 마음마다 마음대로 움직이고 사용하고 실어서 일체중생을 맡아 삼계의 강물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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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강물 생사의 강물을 건네주니, 행하는 자가 수레에 앉아 쓸 것을 맡아 싣고서 지혜로운 마음으로 불법의 바다로 나아가 들어가기 때문이니라. 일체 중생은 아직 공한 지혜(空智)를 마음대로 쓸 수 없으므로 대승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며, 다만 수레에 올라타 고해(苦海)를 건널 수 있다고 이름하느니라.


불자야, 무상심(無相心)이란, 망녕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반야바라밀이 둘이 아니며 일체의 묶인 업과 3세의 법이 여여하게 하나의 진리임을 비추어 무생(無生)의 공을 행하느니라. 스스로 성불(成佛)하여 일체의 부처가 모두 우리의 스승이며, 일체의 현성(賢聖)이 모두 나의 동학(同學)임을 아니, 모두가 무생의 공과 같기 때문에 무상심(無相心)이라 이름하느니라.


불자야, 여여혜심(如如慧心)이란, 무량한 법계는 모임(集)이 없고 생(生)을 받음도 없으니, 태어나 번뇌를 일으키되 번뇌에 얽매이지 않으며, 일체의 법문과 일체의 현성(賢聖)이 행하는 도와 일체의 현성이 관찰하는 법과 소유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일체의 부처님이 교화하시는 방편의 법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모여 있으니, 외도의 일체의 주장[論]과 삿된 정(定)의 공용(功用)과 환화(幻化)와 마구니의 말과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분별하여 진제(眞 諦)와 속제(俗諦)에 들어가느니라.


하나가 아니며 둘이 아니며, 음(陰) ∙ 계(界) ∙ 입(入)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은 바로 지혜의 광명이니, 광명으로 성품을 비추어 일체의 법에 드느니라.


불자야, 불괴심(不壞心)이란, 성지(聖地)의 지혜에 들어가 해탈의 자리에 가까이 가는 것이니, 도를 얻는 바른 문은 밝은 보리심이니라. 번뇌를 조복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공(空)에 순응하여 여덟 가지 마장(馬場)이 무너뜨리지 못하며, 뭇 현성이 이마를 만져 주고 모든 부처님이 관찰하시고 촉발시켜 마정삼매(摩頂三昧)에 들며, 신광(身光)의 빛을 놓아 시방의 불국토를 비추어 부처의 위신(威神)에 드느니라. 나오고 들어감이 자재하여 대천세계를 움직이며, 평등지(平等地)의 마음과 둘이 아니고 다름이 없지만 마음으로 관하여 도를 아는 것이 아니니 삼매의 힘으로써 하기 때문이니라. 빛 가운데 부처님의 무량한 국토를 나타내어 당장에 그를 위해 법을 설하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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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곧 정삼매(頂三昧)를 얻고 허공과 같은 평등지에 올라 총지(總持)의 법문과 거룩한 행을 만족시키느니라. 마음과 마음[心心 : 신심(信心)이 계속 이어지는 것] 의 행은 공하니, 공공(空空)의 지혜 가운데 도를 무상(無相)하게 비추기 때문이니라. 일체의 상이 멸하여 금강삼매문(金剛三昧門)을 얻고 일체 행의 문에 들어가 허공과 같은 평등지에 드니, 부처님께서 화엄경에서 널리 설하신 것과 같으니라.”


노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1천의 부처여, 그대가 먼저 물은 10지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가.


불자야, 보리살타는 평등한 지혜의 체성지(體性地)에 들어가는 진실한 법으로 일체의 행을 변화시켜 화광(華光)으로 가득 차느니라. 사천(四天)의 과(果)와 승(乘)과 용(用)을 뜻대로 변화하여 방위에 걸림이 없이 이치로 교화하고 신통의 10력(力)과 10호(號)와 18불공법(不共法)으로 부처님의 정토에 머무느니라. 무량한 대원(大願)과 말솜씨로 두려움이 없어 일체의 주장[論]과 일체의 행에 내가 모두 들어감을 얻고, 불가(佛家)에 출생하며, 부처의 성품 자리[佛性地]에 앉아 일체의 장애와 범부의 인과는 끝내 받지 않으므로 크게 즐거워하고 환희하느니라. 한 불국토로부터 무량한 불국토에 들어가고, 1겁으로부터 무량한 겁에 들어가며, 설할 수 없는 법이 설할 수 있는 법이 되어, 일체의 법을 비추어 보는 데 미쳐서는 역순(逆順)으로 일체의 법을 보며, 항상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에 들어가 제1의(第一義) 가운데 있느니라. 하나의 지혜로서 10지(地)의 차례를 알고, 하나하나의 일을 중생에게 보여 항상 마음 마음마다 도에 맞아 하나의 지혜로 모든 불국토의 다른 품(品)과 부처님이 말한 법을 알아서 몸과 마음이 변하지 않느니라. 하나의 지혜로 12인연과 열 가지 악의 종성(種性)을 알아 항상 선도(善道)에 머무르며, 하나의 지혜로 유(有)와 무(無)의 두 가지 상을 보고, 하나의 지혜로 10선지(禪支)에 들어 37도(道)를 행하는 것을 알아 일체 색신(色身)의 6도(道)를 나타내느니라. 하나의 지혜로 시방의 모든 현상[色色]이  어지럽게 일어나는 것을 알아서 색보[色報 : 색법(色法)이라고도 하며, 물질적인 모든 것도 과보라는 뜻으로 쓰인다] 에 들어가되 마음과 마음은 번뇌[縳]가 없으며 밝은 빛은 일체를 비추니, 그러므로 무생(無生)을 굳게 믿는...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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