增一아함경, 雜아함경

잡아함경-185-37

근와(槿瓦) 2016. 6. 28. 00:16

잡아함경-185-37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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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없애버리고 그 근본을 끊으면 마치 다라 나무를 자른 것과 같아 미래에 다시는 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비구들이여, 이른바 '진리를 본 거룩한 제자들은 위의 여러 가지 사특한 소견을 끊어 미래에 영원히 다시 나지 않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색은 나다. 나와 다르다. 나는 색 안에 있다. 색은 나 안에 있다'고 보며, '수 · 상 · 행도 마찬가지이며, 식은 나다. 나와 다르다. 나는 식 안에 있다. 식은 나 안에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색(色)은 곧 나[我]다'라고 보는가? 일체는 땅이라고 관찰하는 삼매[地一切入處正受 : 열 가지 일체처정(一切處定)의 하나이다. 일체처정은 변처정(遍處定)이라고도 하는데, 일체 만유를 하나의 대상으로 총합하여 관찰하는 방법이다. 그 대상이 되는 것에 열 가지가 있으니, 곧 지(地)·수(水)·화(火)·풍(風)·청(靑)·황(黃)·적(赤)·백(白)·공(空)·식(識)이다.] 를 얻어 관찰한 뒤에는 '땅은 곧 나요, 나는 곧 땅이다. 나와 땅은 오직 하나요, 둘이 없으며, 다르지도 않고, 나눌 수도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일체는 물 · 불 · 바람 · 파랑 · 노랑 · 빨강 · 하양이라고 관찰하는 삼매를 얻어 관찰한 뒤에는 '행(行)은 곧 나요, 나는 곧 행이다. 그것들은 오직 하나요 둘이 없으며, 다르지도  않고, 나눌 수도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입처(入處)에 대해서 낱낱이 나라고 헤아리나니, 이것이 '색은 곧 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색(色)은 나[我]와 다르다'고 보는가? 만일 그가 수(受)를 곧 나[我]라고 본다면, 그는 수를 곧 나라고 본 뒤에는 색(色)을 곧 내 것[我所]이라고 보며, 혹은 상 · 행 · 식을 곧 나라고 보고 색(色)을 곧 내 것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나 안에 색이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수(受)를 곧 나라고 보고는 색(色)은 나 안에 있다고 보며, 혹은 상 · 행 · 식을 곧 나라고 보고는 색은 나 안에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색 안에 나가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수(受)가 곧 나로서 색 안에 머무르고, 색에 들어가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며, 상 · 행 · 식이 곧 나로서 색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색 안에 나가 있다'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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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어떻게 '수(受)는 곧 나[我]다'라고 보는가? 이른바 6수신(受身)이니, 눈으로 부딪쳐 생기는 수와 귀 · 코 · 혀 · 몸 · 뜻으로 부딪쳐 생기는 수입니다. 이 6수신에 그 하나 하나가 곧 나요, 나는 곧 수라고 보나니, 이것이 '수는 곧 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수는 나와 다르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수를 내 것이라고 보며, 상 · 행 · 식을 곧 나라고 보고는 수를 내 것이라고 보나니, 이것이 '수는 나와 다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안에 수가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수는 그 안에 있다고 보며, 상 · 행 · 식을 곧 나라고 보고는 수는 그 안에 있다고 보나니, 이것이 '나 안에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수 안에 나가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이 곧 나로서 수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며, 상 · 행 · 식이 곧 나로서 수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나니, 이것이 '수 안에 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상(想)은 곧 나[我]다'라고 보는가? 이른바 6상신(想身)이니, 눈으로 부딪쳐 생기는 상과 귀 · 코 · 혀 · 몸 · 뜻으로 부딪쳐 생기는 상입니다. 이 6상신 하나하나를 곧 나라고 보나니 이것이 '상은 곧 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상은 나와 다르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상은 곧 내 것이라 보며, 식[識 : 송·원·명 3본에는 '식(識)'자 앞에 '수행(受行)'이 있다.] 을 곧 나라고 보고는 상을 곧 내 것이라고 보나니, 이것이 '상은 나와 다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안에 상이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은 곧 나로서 상은 그 안에 머무른다고 보며, 수 · 행 · 식이 곧 나로서 상은 그 안에 머무른다고 봅니다. 어떻게 '상 안에 나가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이 곧 나로서 상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나니[송·원·명 3본에는 '受行識是我於想中住周遍其四體' 14자가 들어가 있다. 이것을 보입하여 번역하면 '……두루한다고 보며, 수·행·식이 곧 나로서 상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나니, 이것이……'가 된다.], 이것이 '상 안에 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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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어떻게 '행(行)은 곧 나[我]다'라고 보는가? 이른바 6사신(思身)이니, 눈으로 부딪쳐 생기는 의도[思]와 귀 · 코 · 혀 · 몸 · 뜻으로 부딪쳐 생기는 의도입니다. 이 6사신 하나하나를 곧 나라고 보나니 이것이 '행은 곧 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행은 곧 나와 다르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을 곧 나라고 보고는 행은 곧 내 것이라고 보며, 수 · 상 · 식을 곧 나라고 보고는 행은 곧 내 것이라고 보나니, 이것이 '행은 곧 나와 다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안에 행이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은 곧 나로서 행이 그 안에 머무른다고 보며, 수 · 상 · 행(송·원·명 3본에는 '행(行)'자가 없다. 문맥으로 보아도 없어야 마땅하다.) · 식이 곧 나로서 행은 그 안에 머무른다고 보나니, 이것이 '나 안에 행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행 안에 나가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이 곧 나로서 행 안에 머물러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며, 이른바 수 · 상 · 식이 곧 나로서 행 안에 머물러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나니 이것이 '행 안에 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식(識)은 곧 나[我]다'고 보는가? 이른바 6식신(識身)이니, 안식과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입니다. 이 6식신 하나하나를 곧 나라고 보나니 이것이 '식은 곧 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식은 나와 다르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식은 곧 내 것이라고 보며, 수 · 상 · 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식은 곧 내 것이라고 보나니, 이것이 '식은 곧 나와 다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안에 식이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식은 그 안에 머무른다고 보며, 수 · 상 · 행을 곧 나라고 보고는 식은 그 안에 머무른다고 보나니, 이것이 '나 안에 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식 안에 나가 있다'고 보는가? 이른바 색이 곧 나로서 식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며, 수 · 상 · 행이 곧 나로서 식 안에 머무르고 온몸에 두루한다고 보나니, 이것이 '식 안에 나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거룩한 제자들은 네 가지 진리를 보아 빈틈없는 한결같음[無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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等]을 얻고, 모든 삿된 소견을 끊어 미래에도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색은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는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그것은 한결같이 쌓이고 모인 것이니 다음과 같이 관찰합니다.

 

즉 '일체는 무상하다. 일체는 괴롭다. 일체는 공이다. 일체는 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거두어 받아들이거나, 보호하며 지키지 말아야 한다. 수 · 상 · 행 · 식에 있어서도 또한 그것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거두어 받아들이거나, 보호하며 지키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관찰합니다.

 

이렇게 관찰한 뒤에는 마음을 잘 잡아매고 법에 어리석지 않으며 다시 관찰하고 정진하여 모든 게으른 마음을 떠나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어, 몸과 마음이 고요히 쉬고 고요함과 평정에 머무릅니다. 그래서 모든 도품(道品)을 갖추고 수행이 만족하여 길이 모든 악을 여읩니다. 태우지 않은 것이 없고 소멸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소멸해 일어나지 않고, 감해서 더하지 않으며, 끊어서 나지 않고, 나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열반을 깨달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압니다." 사리불이 이 법을 설명했을 때, 60명의 비구들은 모든 번뇌를 받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였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110. 살차경(薩遮經)[『증일아함경』 제30권 10번째 소경을 참조.]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비사리(毘舍離)의 미후지(獼猴池) 곁에 계셨다. 그 때 비사리국에는 총명하고 지혜로워 모든 이론을 잘 이해하고,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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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총명함을 자부하는 교만스러운 니건자(尼揵子)가 있었다. 그는 널리 모든 이론을 섭렵하였고, 묘한 지혜는 빈틈이 없었으며, 대중을 위해 설법하면 모든 논사들을 뛰어넘었다. 그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나를 당적할 어떤 사문 바라문도 없다. 나아가 여래와도 능히 함께 논의할 수 있다. 모든 논사들은 내 이름만 들어도 이마에 진땀이 흐르고, 겨드랑에서 땀이 나며, 털구멍에서는 물이 흐를 것이다. 내 이론의 바람은 능히 풀을 쓰러뜨리고 나무를 꺾으며, 쇠나 돌을 부수고 모든 용이나 코끼리까지도 항복받거늘 하물며 인간인 논사들이 어찌 나를 당할 수 있겠는가.'이 때 아습파서(阿濕波誓)라는 비구가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위엄스런 태도로 조용하고 상냥하며 단정한 눈길과 편안한 걸음으로 성으로 들어가 걸식하였다. 이때 살차니건자(薩遮尼揵子)는 작은 볼 일이 있어 여러 마을을 둘러 성문을 나오다가 멀리서 아습파서 비구를 보고는 곧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사문 구담은 제자들을 위해 어떻게 설법하며 어떤 법으로 제자들을 가르쳐 닦고 익히게 합니까?"아습파서는 말하였다. "화종[火種 : 팔리어로는 Aggivessana이고 불을 숭배하는 바라문을 일컫던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살차니건자를 화종 거사라고 불렀다.]거사여,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법하시어 모든 제자들을 가르쳐 공부하게 하십니다. 즉 '모든 비구들아, 색에는 나가 없다고 관찰하고, 수 · 상 · 행 · 식에도 나는 없다고 관찰하라. 그래서 부지런히 방편을 써서 이 5수음은 병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가시와 같고, 살기와 같으며, 무상하고, 괴로우며, 공이요, 나가 아니라고 관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차니건자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불쾌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아습파서여, 분명 당신이 잘못 들은 것입니다. 사문 구담은 끝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사문 구담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삿된 소견입니다. 내가 이제 그를 찾아가 힐난하여 그 소견을 그만두게 하리다."그 때 살차니건자는 마을의 여러 리차[離車 : 팔리어로는 Licchavi이고 리차(利車)·율차(律車)·리차비(梨車毘) 등으로 음역한기도 한다. 비사리성에 살던 찰리 종족의 이름이다.] 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서 여...

 

 

-나무 관 세 음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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