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불교(高麗佛敎)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太祖 이래 불교를 국교로 숭상함으로써 정치 · 사회의 지도이념이 되었으며, 수도 개성을 위시하여 전국에 많은 사찰이 있었다. 신하들뿐 아니라 王家에서도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일이 허다하였으니 출가한 왕자를 小君이라 하였다. 또한 사원에는 사찰답 외에 왕실 귀족들의 희사로 토지와 노비가 증가되었다. 宗派로는 五敎의 敎宗과 九山의 禪宗이 아울러 발전하였다. 교종의 五敎는 華嚴 · 法相 · 法性 · 열반 · 戒律의 다섯 宗이다. 광종 때에는 승과제도(敎宗試와 禪宗試)를 마련하여 승려들의 등용문을 마련하였는데, 교종의 과거인 敎宗選은 교종의 총본산 三輪寺(개성 소재), 선종의 과거인 禪宗選은 그 총본산 廣明寺(개성 소재)에서 실시하였다. 승과에 합격하면 교 · 선종을 막론하고 大選이란 첫 단계의 法階를 주었다. 이로부터 大德(주지의 자격이 있음), 大師, 重大師, 三重大師에 차례로 승진하게 되고, 이 이상은 敎 · 禪宗이 각각 달라서 교종은 首座 ·僧統, 禪宗은 禪師 · 大禪師로 각각 승진하였다. 특히 법력이 높은 승려에게는 왕사 · 국사 제도까지 마련, 승려들을 우대하였다. 일국의 사표인 국사는 임금 한 사람의 스승인 왕사보다 높았다.
이에 따라 위대한 승려들이 많이 나타났으니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대각국사 義天과 보조국사 知訥이다. 義天은 문종의 아들로, 출가하여 송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돌아와 불경을 간행하고 禪 · 敎가 다 각기 한쪽에 치우치는 폐단을 막고 敎禪兼修를 내세우고 天台宗을 일으켰다. 知訥은 九山의 禪門을 통합하여 조계종을 창립하고 頓悟漸修 · 定慧雙修를 제창하여 禪門에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문종 때는 승려 개인에게도 別賜田을 지급하였으며, 사원에는 면세 · 면역의 특전까지 부여하는 등 보호책이 강구되었기 때문에 普愚 · 慧勤 · 無學 등과 같은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불교의 성격은 護國的 · 現世求福的 · 귀족적 불교로 보호육성되었으며, 역대 군왕들은 국가의 대업이나 安泰를 위하여 대사찰을 건립, 연등회 행사, 대장경 조판 등 국가적 불교사업을 추진하였다.
현종 · 문종 때에 마련했던 藏經板은 대구의 符仁寺에 두었던 바 몽고군의 침입으로 타 버리자, 고종은 약 16년의 오랜 시일과 물자를 투입하여 1251년(고종 28) 대장경판을 완성하니 이것이 지금 해인사에 남아 있는 고려 대장경판이다. 한편 불교는 민간 신앙과도 결합하여 승려들은 巫卜 · 풍수 · 圖讖에 통해서 불교와 아울러 이것으로 민심을 좌우하였다. 그들은 교화사업과 구호사업에도 나서서 병자에게 약을 주고 치료하였을 뿐 아니라 곤경에 있는 자들을 많이 구호하였다. 승려들은 건축 · 조각 · 단청 · 기와를 만들고, 고려자기를 만드는데도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불경을 간행함으로써 刻字로 인쇄문화에 공헌하였고, 삼국시대에 이어 僧兵의 활약도 컸다.
이같은 좋은 면이 있는 반면에 좋지 못한 일면도 있었으니, 많은 토지와 노비들을 거느리고 大地主의 행세를 하였고, 땅에서 나는 소득 외에 술 · 축산 · 고리대금으로 축재하는 경향도 있었다. 또 많은 돈을 들여 절을 짓는데 물의가 따르기도 하여 성리학자들에 의해 배척을 받게 되었다.
鄭道傳은 그의 저서 <佛氏雜辨>에서 불교를 滅倫害國의 道라고 공박하였다. 후기의 고승으로 普愚는 임제종을 전래하여 조선 선종의 주류가 되었고, 慧勤은 인도의 指空에게 求法하여 조계종을 발전시켰으며, 自超는 조선 태조의 왕사로 활약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변화는 원효의 사상적 기반이 있었으므로 義天이 천태종을 개창할 수 있었고, 知訥도 義天의 사상적 통일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계종의 사상체계가 수립된 것이다.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한국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교양종(五敎兩宗) (0) | 2016.06.10 |
---|---|
도승(度僧) (0) | 2016.06.03 |
한국에의 불교 전래 (0) | 2016.04.22 |
이조불교(李朝佛敎) (0) | 2016.04.13 |
불교미술(佛敎美術) (0) | 2016.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