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경(159)-1455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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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어진 이여, 만약 중생에게 끊임없이 보시를 부지런히 하고, 또 끊임없이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를 닦는다면, 여러 어진 이여, 이것을 이름하여 세간에서 정진하는 지혜 그릇의 평등이라 하느니라.
여러 어진 이여, 저 세간에서 선정에 드는 지혜 그릇의 평등이란 무엇인가? 여러 어진 이여, 만약 세간의 초선과 나아가 제4선까지 들어가고, 또 가이없는 허공처(虛空處)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 들어간다면, 여러 어진 이여, 이것을 이름하여 세간에서 선정에 드는 지혜 그릇의 평등이라 하느니라.
여러 어진 이여, 저 세간에서 문혜(聞慧)하는 지혜 그릇의 평등이란 무엇인가? 여러 어진 이여, 만약 이와 같이 공한 법이 상응하고, 대승의 언교(言敎)를 감당할 수 있고, 읽어 외우고 받아 지니는 언사(言辭)가 청정하고, 남을 위해 연설하되 아첨하거나 헛되지 않고, 모든 번뇌와 나쁜 업장이 다하고, 법을 알고 이치[義]를 안다면, 이 사람은 저 대승의 언교에서 법을 알고 이치를 알아서 밤낮으로 정진하여 위없는 지혜를 부지런히 구하니, 여러 어진 이여, 이것을 이름하여 세간에서 문혜(聞慧)하는 지혜 그릇의 평등이라 하느니라.
여러 어진 이여, 저 출세간의 지혜 그릇의 평등이란 무엇인가? 여러 어진 이여, 어떤 선남자가 색(色) · 수 · (受) · 상(想) · 행(行) · 식(識)을 취하지 않고, 눈의 색을 취하지 않고 눈의 식별[眼識]을 취하지 않고 눈의 닿임[眼觸]을 취하지 않고, 눈 닿임의 인연으로 생기는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도 취하지 않으며, 이와 같이 나아가서 뜻과 법[意法]과 뜻의 식별[意識]과 뜻의 닿임[意觸]을 취하지 않고, 뜻의 닿임의 인연으로 생기는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도 취하지 않으며, 이와 같이 땅의 경계와 물 · 불 · 바람의 경계도 취하지 않고, 허공의 경계도 취하지 않고, 나아가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의 경계도 취하지 않으며, 또 현재세와 미래세도 취하지 않고, 착하거나 착하지 않음도 취하지 않고,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도 취하지 않으며, 성문승(聲聞乘)도 취하지 않고, 연각승(緣覺乘)도 취하지 않고, 위없는 대승(大乘)도 취하지 않고, 삼계도 취하지 않고, 3승(乘)도 취하지 않으며, 있음[有]도 취하지 않고 없음[無]도 취하지 않으며, 무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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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언설(言說) 없음도 취하지 않아서 반연 없는 자비의 삼매를 얻는다면, 이는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가 아니니라. 이 사람은 이 삼매 때문에 능히 수릉엄(首楞嚴)삼매에 들어가는 문을 볼 수 있어서 단계적으로 반드시 수릉엄삼매를 얻으리니, 여러 어진 이여, 이것을 이름하여 출세간의 지혜 그릇의 청정평등이라 하는데, 결정된 청정 평등이 아니라 방편의 힘으로 지혜의 평등을 구한 것이니라.
여러 어진 이여, 저 출세간의 모든 법기(法器)인 반야(般若)에 편히 머무는 모든 법계의 청정 평등이란 무엇인가? 여러 어진 이여, 일체의 법계는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천안(天眼)으로 보는 것도 아니니, 이는 거룩한 법과 슬기의 눈이 상응하는 것이니라. 거룩한 슬기의 눈으로 모든 법계의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음을 관찰하고, 모든 법의 융성과 쇠퇴가 있음을 보지 않고,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보지 않아서 이르는 바가 없고, 생겨남이 있고 멸함이 있음을 보지 아니하니,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청정 평등을 볼 때는 다시 중생을 실답게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느니라. 만약에 중생을 얻을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간다면, 이 사람은 모든 법도 얻을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중생을 여의고서 모든 법이 있지 않고 모든 법을 여의고서 중생이 있지 않아서 중생의 체성(軆性)이 바로 모든 법의 체성이고 그 모든 법의 체성이 바로 중생의 체성이며, 그 모든 법의 체성이 바로 나의 체성이고 그 나의 체성이 바로 모든 법의 체성이며, 그 모든 법의 체성이 바로 불법의 체성이고 그 불법의 체성이 바로 나 없음[無我] 경계의 체성이며, 그 나 없음 경계의 체성이 바로 실제(實際)의 체성이고, 그 실제의 체성이 바로 여여(如如)의 체성이니,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알기 때문이니라, 여러 어진 이여, 이것을 이름하여 출세간의 모든 법기인 반야에 편히 머무는 모든 법계의 청정 평등이라 하느니라.
여러 어진 이여, 저 출세간의 모든 법기의 청정 평등이란 무엇인가?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반야에 편히 머물러서 선정에 들어갈 때라면 법을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으며, 또 선정에 머물면서도 모든 법의 경계를 버리지 않느니라. 머무름도 없고 멸함도 없고 깨달아 아는 것도 없이 선정에 머무르면, 이 사람은 몸의 선(禪)으로 선정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의 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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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선정에 머무는 것도 아니니라. 이 사람이 이와 같이 선에 머무를 때엔 여여(如如)한 실제의 법계에 들어가서 능히 온갖 법을 취하거나 집착함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 일체의 성문과 벽지불 위로 뛰어남이니, 이 사람이 이러한 선으로 선정에 머무는 것이 바로 결정하지 않는 보살로서 능히 온갖 번뇌의 소견과 번뇌의 얽매임을 끊는 것이니라.
만약에 보살이 능히 이러한 선정에 머물 수 있는 자라면 능히 모든 법에 들어갈 것이고, 이 법에 들어갈 때엔 능히 중생들의 착하고 나쁜 모든 욕심을 알아서 성숙시킬 것이니라. 이 사람이 중생을 보지 않으니, 나[我]와 남[人]과 수명(壽命)과 온갖 수효의 중생을 보지 않는 자는 조작하는 이와 조작하게 하는 이, 일어나는 이와 일어나게 하는 이, 받는 이와 받게 하는 이를 양육하며, 이 사람이 다시 여여(如如)한 법계에 들어갈 때엔 온갖 중생의 뒤바뀐 번뇌와 뒤바뀌기 때문에 갖가지 괴로움을 받는 걸 보느니라.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미세하고 여여한 실제의 법계에 들어가니, 이것이 보살이 중생을 중생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성숙시키는 것이니라.
중생은 실답지 않기 때문에, 중생은 중생이 없기 때문에, 중생은 나가 없기 때문에, 중생은 여의기 때문에, 중생은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중생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중생은 공하기 때문에, 중생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중생은 소원이 없기 때문에, 중생은 작용이 없기 때문에, 중생은 여여한 성품이기 때문에, 중생은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중생은 멸함이 없기 때문에, 중생은 청정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중생을 성숙시키면서도 나를 보지 않고, 나아가 받는 이도 보지 않으며, 또 일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니라. 이 모든 법의 자체의 성품과 모습은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 법계이므로 모든 언어와 문자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나타내 보일 수도 없어서 있는[有] 바가 없느니라. 이 보살은 큰 슬픔[大悲]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불가설법으로서 온갖 법을 설하나니, 말하자면 이것은 누(漏)가 있고 이것은 누(漏)가 없으며, 이것은 세간이고 이것은 출세간이고, 이것은 죄가 있고 이것은 죄가 없으며, 이것은 유위이고 이것은 무위이며, 이것은 번뇌가 있고 이것은 번뇌가 없으며, 이것은 응당 수행해야 하고 이것은 응당 버려야 하며, 이것은 범부의 법이고 이것은 배움의 법이고 이것은 배울 것이 없는 법이며, 이것은 연각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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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것은 보살법이고 이것은 부처님 법이니라.
여러 어진 이여, 아직 결정하지 않은 보살이 이와 같이 출세간의 모든 법기인 반야에 편히 머물러 모든 법계의 청정 평등에 들어가서 분별하여 설법한다면, 이 보살이 설한 바의 법은 그 모습을 보지 않느니라.
여러 어진 이여, 비유컨대, 어떤 요술쟁이가 허공계에 가득하도록 갖가지 색과 갖가지 꽃을 화작(化作)하여 전에 없는 일을 능히 나타내고서, 부처님이 출세하지 않더라도 그 꽃 속에서 능히 이같이 미묘한 이치를 지닌 글귀의 맛을 낸다거나, 법문에 들어가서 법의 음성을 연설할 수 있다고 하면, 이러한 일을 하는 건 어려울까 어렵지 않을까?”
그때에 모든 하늘 · 사람 · 귀신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대덕 바가바시여, 이 일은 어렵겠습니다, 대덕 수가타(修伽陀)시여,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렵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진 이들이여, 이것은 더욱 어렵고, 가장 어려우니라. 저 결정하지 않는 보살은 속한 바의 법이 없는 이러한 법을 색이 없어 볼 수가 없고, 문자도 아니고 언설이 아니라서 스스로 알지 못하고, 증득하지 못하고, 잘 수행하지 못하고, 자재롭지 못하고, 저 언덕에 이르지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능히 다른 중생의 온갖 번뇌를 없애서 성숙시켜주니, 이것이야말로 더 어려운 것이니라. 저 모든 중생이 이러한 매우 깊고 언설 없는 법을 아직 증명하지 못했으면서도 들은 뒤에는 비방하지 않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더 어려운 것이니라. 또 저 모든 중생이 능히 온갖 번뇌의 나무를 부수어 부드러운 마음과 업을 짓는 마음에 머물면서 모든 중생에게 자애로운 마음 · 가엾어 하는 마음 · 해치지 않는 마음 · 슬픈 마음 · 함께하는 마음 · 같은 마음을 가지니, 저 온갖 중생들이 부드러운 마음을 지니기 때문에 생사의 바다를 마르게 하고 번뇌의 바다를 건너서 속히 무외(無畏)의 성(城)에 들어가느니라. 이처럼 언설이 없음을 증명하지 못하는 걸 들은 뒤에 비방하지 않는 이것이야말로 더욱 어렵고 가장 으뜸으로 어려운 것이니, 왜냐하면 너희들 나쁜 마음의 귀신은 스스로가 마음을 자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모든 중생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짓지 않고 후세의 두려움도 살피지 않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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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어진 이여, 만약에 출세간의 모든 법기의 청정 평등삼매에 머무는 보살마하살이 있다면, 이 보살은 능히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6근(根)을 수호하여 각각 자기 경계에 머무르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너희들 나쁜 마음의 귀신을 막아내지 못하겠느냐.
이 훌륭한 장부는 다 이 법을 얻어서 대자대비한 마음에 머물러 다른 이를 괴롭히지 않나니, 그 이유는 대자대비의 방편력을 닦기 때문에 다른 이를 괴롭히지 않느니라.
이 보살들이 이러한 매우 깊은 법에 들어가고 나면 중생을 허공계 속에다 던져두고 수억 나유타 겁 동안 각각 서로 보지 못하게 할 수 있거늘, 어찌 너희들의 온갖 나쁜 귀신을 다스리지 못하겠느냐? 또 모든 중생을 세계 중간의 아주 어두운 곳[大黑闇處]에 던져두고, 나아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다만 바람을 먹고 물을 먹고 흙을 먹고 돌을 먹게 하고, 이 보살들이 이러한 매우 깊은 출세간의 법기의 청정 평등삼매에 머물기 때문에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수억 겁 동안 먹지 않게 할 수 있거늘, 어찌 너희들이 다른 중생의 정기와 피 · 살, 그리고 온갖 나쁜 귀신을 먹는 걸 다스리지 못하겠는가? 무엇 때문에 너희들을 내버려두는가? 이 보살들은 대자대비의 방편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너희들을 내버려두는 것이니라. 이 사천하에 있는 보살마하살들은 이처럼 매우 깊은 출세간의 법기의 청정 평등삼매에 편히 머무는데, 그 이름을 말하자면 중자재(衆自在)보살, 자자재(慈自在)보살, 문수음(文殊音)보살, 전자재(電自在)보살, 일자재(日自在)보살, 월자재(月自在)보살, 지자재(地自在)보살, 상자재(想自在)보살, 관세자재(觀世自在)보살, 수자재(水自在)보살들이니, 이와 같은 1만 8천 보살마하살이 이 사천하에 거처하느니라.
저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 열 가지 가장 깊고 깊은 출세간의 모든 법기의 청정 평등에 머무니, 그 열 가지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의 평등과 법의 평등과 청정의 평등과 보시의 평등과 계율의 평등과 인욕의 평등과 정진의 평등과 선정의 평등과 반야의 평등과 모든 법의 청정 평등이 그것이니라. 이 열 가지의 가장 깊고 깊은 출세간의 모든 법기의 청정 평등삼매에 머무는 보살마하살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너희들의 나쁜 귀신들을 능히 다스릴 수 있느니라. 그렇다면 왜 너희들을 내버려두는가? 이 보.....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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