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경(156)-144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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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를 갖추어서 용모가 단정해 뭇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일에 장애가 없고 모든 감관에 결함이 없으리라.
또 저 보시의 청정 평등을 행할 때에 계로서 삿된 소견을 없애고 평등한 행을 닦는다면, 큰 청정 평등의 과보를 갖추어서 바른 소견의 국토에서 바른 소견의 집안에 태어나 항상 여러 부처님과 보살 · 성문을 만나고, 부처님을 뵙고는 법을 듣고 뭇 스님을 공양하는 한편 보리의 행을 닦아 언제나 청정 평등을 여의지 않으리라.
여러 어진 이여, 이것이 바로 계의 청정 평등이니라. 이 계의 청정 평등으로 스스로를 장엄한다면, 이 사람은 오래지 않아서 부처님 공덕을 성취하리라. 즉 상호(相好)를 원만히 갖추고 음성이 청정하고 모든 악마와 원수를 항복 받아서 청정 평등을 얻을 것이며, 또 이 사람은 오래지 않아서 모든 부처님의 법과 선정의 염(念)과 지혜의 행과 청정한 큰 지혜와 대자대비를 얻고 나아가 일체 부처님 법의 청정 평등을 원만히 갖추리니, 이것을 이름하여 세간의 계행(戒行)이 청정 평등한 곳이라 하느니라.
어진 이들이여, 무엇이 출세간의 계행 청정이 평등한 곳인가? 만약 계의 삼마발제(三摩跋提)로서 믿고 이해하고 행하는 자는 색음(色陰)에 의지하지 않고서 계를 지니며, 수음(受陰), 상음(想陰), 행음(行陰), 식음(識陰)에 의지하지 않고서 계를 지니며, 눈에 의지하지도 않고, 색에 의지하지도 않고, 눈의 식별[眼識]에 의지하지도 않고, 눈의 닿임[眼觸]에 의지하지도 않고, 눈의 닿임의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受] · 애욕[愛] · 취함[取] · 존재[有] · 남[生]에 의지하지 않고서 계를 지니며, 나아가 뜻에 의지하지도 않고, 법에 의지하지도 않고, 뜻의 식별[意識]에 의지하지도 않고, 뜻의 닿임[意觸]에 의지하지도 않고, 뜻의 닿임의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 · 애욕 · 취함 · 존재 · 남에 의지하지도 않고서 계를 지니며, 지계(地界)에 의지하지 않고서 계를 지니며, 수계(火界), 화계(火界) · 풍계(風界)에 의지하지 않고서 계를 지니며, 가이없는 허공에 들어감[入]을 의지하지 않고서 계를 지니며, 나아가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에 들어감을 의지하지 않고서 계를 지니며, 욕계와 색계에 의지하지 않고서 계를 지니며, 현재세나 미래세에 의지하지 않고서 계를 지니며, 성문승과 벽지불승의 일체종지(一切種智)에 의지하지 않고서 계를 지니며, 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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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의지하지 않고, 선정에도 의지하지 않고, 지혜에도 의지하지 않고서 계를 지니며, 청취의 힘에도 의지하지 않고, 삼매의 힘에도 의지하지 않고, 다라니의 힘에도 의지하지 않고, 참음의 힘에도 의지하지 않고, 누(漏)가 있는 힘에도 의지하지 않고, 누(漏)가 없는 힘에도 의지하지 않고, 유위(有爲)경계의 힘에도 의지하지 않고, 무위(無爲) 경계의 힘에도 의지하지 않고, 착하고 착하지 않은 힘에도 의지하지 않고, 밝음과 어둠의 힘에도 의지하지 않고서 계를 지니나니, 여러 어진 이여, 이것을 이름하여 출세간의 계행이 청정 평등한 곳이라 하느니라. 또 이름하여 계를 닦는 범로(梵路)의 성도(聖道)로서 능히 위없는 무외(無畏)의 큰 성(城)에 들어가서 뭇 성인이 의지하는 바가 계행의 청정 평등이니, 제일의제인 청정 계율을 수호하기 때문에 능히 청정한 지혜에 들어가느니라.
계란 무슨 뜻일까? 비유하자면 큰 철위금강산(鐵圍金剛山) 사이의 뜨거운 바람을 산이 가로막기 때문에 사천하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성인이 청정 평등의 계를 배울 때는 애착의 뜨거운 바람을 사념처(思念處)를 닦기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게 하나니, 이런 이치로 인해 이름하여 계라 하느니라. 비유하자면 큰 철위산 사이의 냄새나는 더러운 바람을 산이 가로막기 때문에 사천하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성인이 청정 평등의 계를 수호할 때는 4무외(無畏)로 하기 때문에 애착과 집착의 더러움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나니, 이런 이치로 인해 이름하여 계라 하느니라. 비유하자면 큰 철위산 사이의 어둠을 산이 가로막기 때문에 사천하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성인이 청정 평등의 계를 수호할 때 무명(無明)과 유위(有爲)와 유루(有漏)의 모습을 7각분(覺分)을 닦기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게 하나니, 이런 이치로 인해 이름하여 계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욕심을 여의는 이치가 바로 계의 이치이고, 해탈하는 이치가 계의 이치이고, 쉬게 하는 이치가 계의 이치이고, 다함없는 이치가 계의 이치이고, 멸진(滅盡)의 이치가 계의 이치이니, 이 모든 구절의 이치를 이름하여 계의 이치라 하느니라.
여러 어진 이여, 이것을 유위이고 무위인 계의 청정 평등함이라 하나니, 만약에 어떤 세간의 사문과 바라문이 이 유위이고 무위인 청정 평등의 계에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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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다면, 그 사람은 이름하여 세간의 복밭[福]이라 할 것이니라. 만약 저 청정한 계에 머무는 사람을 공경하고 믿고 존중하여 옹호하고 양육하되 의복 · 상욕(床褥) · 침구 · 음식 · 탕약 등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 보시한다면, 이 사람도 이 선근으로 인해 생사 유전할 때에라도 항상 훌륭한 과보를 받아서 무외의 큰 성(城)에 빨리 들어가게 되리라.
여러 어진 이여, 저 참음의 청정 평등이란 어떤 것인가? 참음에 두 가지가 있으니, 버림[捨]의 참음과 성내지 않는 참음이 그것이니라. 어진 이여, 버림의 참음이란 어떤 중생이 일체의 즐거움을 구하고 일체의 괴로움을 쉬게 하는 것을 이름하여 버린 참음의 청정 평등이라 하느니라. 만약 다시 즐거움을 구하고 괴로움을 여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인을 제외하고는 삼계의 일체가 독열(毒熱)과 번뇌인 괴로움의 길이라고 관찰하느니라. 이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하기 때문에 커다란 두려움을 낳으며, 이러한 두려움으로 삼계의 일체가 치열하게 온갖 번뇌의 크나큰 불로 태워지고, 낱낱의 중생은 고통과 상해 때문에 생사유전에 휩쓸리면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느니라. 저들이 괴로움의 핍박으로 해탈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이런 괴로움의 핍박을 어떤 방편을 써야 스스로 벗어날까 하다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다른 일을 제치고 다만 버림의 참음으로써만 온갖 괴로움에서 해탈하여 모든 즐거움을 갖추게 하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곧 발심하여 참음으로 만족할 줄 알기 때문에 갖가지 몸을 자량(資糧)하는 도구를 능히 버리고서 이른바 음식 · 의복 · 침구 · 가옥과 코끼리 · 수레 · 말 따위를 그 필요한 바에 따라 모두 다 공급하였다. 이 사람이 또 참음의 보시로써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자 자주자주 참음으로 만족할 줄 앎을 닦고, 머물 때에도 능히 버림의 보시를 행하되 바른 길과 바른 사람이 머무는 곳에 나아가 친근히 공양하고 그의 가르침에 수순하니, 공양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하게 갖가지 생사의 허물과 열반의 이익을 들으며, 이 사람이 성문의 승(乘)에 발심하기도 하고, 연각의 승에 발심하기도 하고, 대승에 발심하기도 해서 자기의 안락을 위하기 때문에 다시 참음으로 만족할 줄 앎을 늘여서 중생을 수호하고 기른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버리는 참음의 청정 평등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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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아가서는 외부의 재물과 자기의 즐거움까지 버리고, 모든 괴로움을 참아 견디면서 다른 이로 하여금 안락을 얻게 하니, 이것을 버리는 참음의 청정 평등이라 하느니라. 만약에 어떤 거지[乞人]가 갖가지 형색과 모양, 갖가지 행동거지, 갖가지 음성, 갖가지 성냄, 갖가지 욕설, 갖가지 속임수, 갖가지 거칠고 불순한 말로 와서 요구하는 것을 본다면, 이 사람은 이러이러하게 마음이 부드럽지 못하고 성냄과 미워함이 가셔지지 않아서 청정한 참음에 머물지 못하리니, 그때 이 사람은 생각한다.
‘누가 나를 이길 것인가? 왜냐하면 저 피와 살을 먹는 야차 · 나찰 · 구반다 · 비사차 · 부단나 · 가타부단나들은 아직 생사의 고뇌와 열반의 공덕을 듣지 못하고 뒷세상의 두려움을 관찰하지 못하므로 뭇 고통에 시달리느라고 일체의 고통에서 해탈하지 못하나니, 그 까닭은 저들이 선지식을 여의고 바른 법을 듣지 못한 탓에 태어나고 죽으면서 괴로움에 빠지기 때문이니라. 나는 이미 생사의 고뇌와 열반의 공덕을 자주 듣고 후세의 두려움을 관찰하여 부지런히 뭇 괴로움을 없애고 선지식을 친근하여 바른 법을 들었으므로 내가 이제 생사에 빠지는 걸 제도하고자 하는데 무엇 때문에 성을 내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응당 이렇게 사유한다.
‘모욕하는 음성과 모든 어긋난 일은 다 바람과 같으므로 내 마땅히 버리고 성내지 않을 것이니, 이와 같이 모든 중생에 대해 갖가지 생각을 버리고자 한다. 모든 문자와 언어의 분별이 다 바람 같으므로 모든 중생에 대해 갖가지 생각을 버리고는 참음의 청정 평등을 닦으리라.’
이 사람은 자주자주 모든 중생에 대해 갖가지 생각과 모든 문자의 분별하는 생각을 버리고 참음의 청정 평등을 닦음이 이러하고 이러하느니라. 이 사람의 마음은 곧 참음의 청정 평등에 머물면서 기쁨을 얻고 청정을 얻음이 이러하고 이러하느니라. 이 사람은 법에 걸림 없음[法無礙], 이치에 걸림 없음[義無礙], 말에 걸림 없음[辭無礙], 즐겁게 말함에 걸림 없음[樂說無礙]의 4무애(無礙)를 닦으며, 이 사람은 자주자주 법에 걸림 없음과 나아가 즐겁게 말함에 걸림 없음을 닦으므로 곧 능히 몸의 껍질 · 살 · 힘줄 · 뼈 · 눈 · 귀 · 코 · 혀 · 손 · 발 · 머리 따위의 애착하는 목숨도 버릴 수 있으리니,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분별하면서 분별없는 참음의 청정 평등을 닦는 것이니, 이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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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하여 보살의 버리는 참음의 청정 평등이라 하느니라.
여러 어진 이여, 저 성내지 않는 참음의 청정 평등이란 어떤 것인가?
어진 이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모든 언어 음성 · 문자에 대해 분별하는 생각을 버릴 수 있고, 또 색신(色身)의 모양과 거동과 위의와 오고 가는 일과 뜻의 업[意業]과 희소(戱笑)에 대해 분별의 생각을 버리고, 모든 애착과 집착에 포섭됨을 버리고, 과보를 구하지 않고 괴로움과 즐거움도 여의어서 분별의 생각이 없으며, 나아가 자기 몸과 목숨에 대한 분별에서도 분별하는 생각이 없다면, 제일의제인 참음의 청정 평등에 머물리라. 이는 마치 허공이 밝든 어둡든 성내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는 것과 같나니, 이처럼 보살마하살도 제일의제인 참음의 청정 평등에 머물러서 모든 유위행의 희소(戱笑)와 언어 · 문자․형색(形色)과 괴로움의 느낌과 즐거움의 느낌에 대해 분별을 여의고 분별해도 성내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느니라. 보살이 저 중생에 대해 분별의 생각을 여의고서 제일의제인 참음의 청정 평등에 머물게 되는데, 비유하자면 허공이 움직이지 않음이 올바로 두루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진동하지 않음이 올바로 두루 진동하는 것이 아니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이 모든 업의 유위행에 대해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음이 올바로 두루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진동하지 않음이 올바로 두루 진동하지 않는 것이니라. 비유하자면 허공이 청정하여 더러움 없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이 제일의제인 참음의 청정 평등에 머물러서 저 모든 유위의 몸과 마음이 잘 청정해지며, 비유하자면 허공이 모든 중생을 길이 양육하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이 제일의제인 참음의 청정 평등에 머물러서 모든 중생을 양육하며, 비유하자면 허공이 겁화(劫灰)에 타버리지 않고 겁수(劫水)나 겁풍(劫風)에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이 제일의제인 참음의 청정 평등에 머물고 나아가 위없는 보리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 따위에 그 마음이 무너지지 않으며, 비유하자면 청정한 허공의 보름날 밤에는 지극히 원만한 달이 서늘한 광명을 두루 놓아서 뜨거운 번뇌의 중생으로 하여금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이 제일의제인 참음의 청정 평등에 머물러서 몸과 입의 위의(威儀)로써 중생들의 모든 번뇌의 뜨거움을 쉬게 하며, 비유하자면 청정.....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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