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대강좌(51)-견성해도 대승행 닦아야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그래서 반야경(般若經)의 실상반야(實相般若), 곧 아공(我空)ㆍ법공(法空)ㆍ구공(俱空)을 깨달았으면 그런 다음에는 보시(布施)를 하라, 그리고 六바라밀을 다 행하라, 하는 것은 실상반야만 지키고 있으면 그것은 소승(小乘)의 나한(羅漢)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처음부터 제대로 배운 사람은 초견성(初見性)을 해서 반야가 열렸다 해도 이런 잘못은 없습니다.
요새 참선(參禪)하는 수좌(首座)들이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은 하지 않고 참선 하나만 제일이라고 해서 복을 짓지 않고 중생제도(衆生濟度)할 줄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경지(境地)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 된 것인 줄로 알고 공(空)에 떨어질 것을 염려(念慮)하여 六祖대사께서도 나무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아공(我空)ㆍ법공(法空)ㆍ구공(俱空)의 경지를 체득(體得)했으면 그때부터는 오로지 중생의 제도를 위해 전념(專念)하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일체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도하라. 제도를 하되 실상반야(實相般若)가 천당(天堂)사람도 되고 태생(胎生)ㆍ난생(卵生)도 되고 지옥(地獄)도 되고 한 것이니, 그 사람을 근본적(根本的)으로 내가 고쳤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르쳐 지도(指導)했다는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수자상(壽者相) 그런 것 느끼지 말고 저건 내가 제도한 중생이거니 저건 내 신도(信徒)거니 내 제자(弟子)거니 그런 생각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문(法門)을 듣고 배우는 중생들에게도 듣고 배운 건 다 알고 나면 잊어버리고 들을 줄 아는 그것도 깨우치도록 해서 지도를 받았다거니 배웠다거니 하는 아상ㆍ인상이 없어지도록 지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시(布施)하고 계행(戒行)도 잘 지키고 인욕(忍辱)도 하여 남이 뭐라고 욕(辱)을 보이더라도 다 참아서 참았다는 생각까지 없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남이 욕한다고 야단 치고 보복(報復)하고 칭찬해 준다고 좋아하고 이러다 보면 번뇌(煩惱)의 생사심(生死心)만 늘지 언제 보리(菩提)를 성취(成就)합니까. 그래서 육바라밀(六波羅密) 가운데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 근본이지만 반야를 깨친 다음에는 그래서 나의 업보(業報)ㆍ망상(妄想)을 쉬고 녹이는 데는 인욕(忍辱)이 중심이 됩니다. 남이 칭찬을 해도 들은 체 만 체할 것도 없고 남이 욕을 하고 때려서 반죽음이 되었어도 「왜 그러느냐」고 한마디 따질 것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이 마음자리는 어제도 이 모양이고 오늘도 이 모양이고 내일도 이 모양이고 여러 천만년 전에도 지옥에 갔을 때나, 천당에 갔을 때나, 성불(成佛)한 뒤나 똑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다른 건 모두 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생겨나고 하는 갈팡질팡하는 허망무상(虛妄無常)한 존재이지만 이 마음자리는 중생이나 부처나 다 같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자리이기 때문에 온 중생이 두루 다 평등한 것이므로 내가 깨우쳐 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부터 부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정말 따르는 사람이라면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내가 부처되는 방법이고 번뇌를 해탈하는 방법인 줄 알아야 하고 당장 천하태평객(天下泰平客)이 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실패를 했다 성공을 했다.」그런 것이 없는 생활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현실(現實)은 마음에서 생긴 꿈이니 이런 식으로 알고 내일부터라도 흉내 내어 살아 봅시다. 오늘 저녁부터라도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면 잠을 못자고 밥을 못 먹어도 능률이 더 나고 근심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어집니다. 이제는 죽고 살고 흥망성쇠(興亡盛衰)ㆍ시간세계(時間世界)를 다 초월(超越)해서 망각(忘却)했기 때문입니다. 공포증(恐怖症)이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있고 욕심이 앞서 있으면 자기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정구장(庭球場) 앞을 지나치던 정구선수가 친구의 권유(勸誘)로 아무 부담 없이 잠깐 쳐 보려는 생각으로 몇 번 친 것이 선수 생활 십년 동안에 한 번도 쳐 본 일이 없는 아주 훌륭한 볼을 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꼭 이기겠다는 욕심이나 지면 큰 일이라는 공포심이 없이 아무 생각없는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부처가 정구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무심(無心)한 근본 자성자리에 합하기만 하면 이런 묘한 기술(技術)이 나옵니다. 권투나 축구나 검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을 연습한다는 것도 알고 보면 본래 만능(萬能)하던 마음자리가 안심(安心)이 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심만 되면 세계 최고의 기술이 나옵니다. 글씨를 쓰는 것도 잘 써야 되겠다는 공포증(恐怖症) 때문에 잘 안 써 집니다. 왕희지(王羲之)같은 이도 어느 날 친구의 연회(宴會)에 초대(招待)되어 만취(滿醉)하여 돌아와서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한 줄 썼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 보니 자기로서는 십년 백년이 걸려도 쓸 수 없는 명필(名筆)이 있어서「어느 신선(神仙)이 와서 나를 깨우쳐 주려고 써 놓은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며칠 뒤에야 자기가 취중(醉中)에 썼다는 것이 기억(記憶)이 됬는데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글씨의 십분의 일도 따라 갈 수가 없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글씨도 무심하면 자연히 명필이 되고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 조건 없이, 어디에고 이끌림 없이, 남을 위한다는 생각 없이(應無所住) 남을 도와주고 보시를 행한다면(行於布施) 큰 보람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능력을 내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에 머무름 없이 부주상으로 보시(布施)하면 그 복덕이 한량없이 많아서 생각으로는 헤아려 볼 수 없는 무한대한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출전 : 금강경대강좌(청담큰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금강경(金剛般若波羅蜜經)'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대강좌(53)-如理實見分 第五 (0) | 2016.02.16 |
---|---|
금강경대강좌(52)-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자리 (0) | 2016.02.15 |
금강경대강좌(50)-처음부터 끝까지 여시의 숙제 (0) | 2016.02.13 |
금강경대강좌(49)-수보리 보살~ (0) | 2016.02.12 |
금강경대강좌(48)-수보리 어의운하~ (0) | 2016.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