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해제

근와(槿瓦) 2016. 2. 2. 01:32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해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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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립과 한역(漢譯)

 

열반경은 부처님이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娑羅雙樹)에서 열반에 들기 직전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설하신 최후의 설법이라고 한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열반경에는 북본(北本)과 남본(南本)의 두 가지 외에도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이 있다.

 

이 『대반니원경』은 동진(東晉)의 법현(法顯)이 418년에 남본과 북본 열반경의 앞 9권에 해당하는 부분을 6권 18품(品)으로 나누어 한역한 것이다.

 

북본 열반경은 421년 북량(北涼)의 담무참(曇無讖)이 한역한 것으로서 40권 13품으로 되어 있다. 이 북본 열반경이 번역된 지 오래지 않아 북량(北涼)이 망하자 열반경의 학자들은 강남으로 옮겼고, 이들을 중심으로 열반경 연구가 성행하면서 북본의 번역에 대한 결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동안사(東安寺)의 혜엄(慧嚴)과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은 사영운(謝靈運) 등과 함께 북본을 바탕으로 하고 법현(法顯)이 한역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과 대교(對校)하여 36권 25품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남쪽에서 이루어졌다 해서 남본이라고 불리며, 후세의 열반경 연구는 대개가 이 남본을 기초로 하고 있고 여기 번역한 열반경도 이 남본을 옮긴 것이다.

 

법현의 『대반니원경』을 비롯하여 북본과 남본의 열반경을 대승열반경(大乘涅槃經)이라고 부르며, 소승열반경(小乘涅槃經)으로부터 발달한 이 경은 또 여러 가지 대승경전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그 예로 열반경이 인용하고 있는 초기 대승경전을 들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수릉엄경(首楞嚴經)』·『반야경(般若經)』·『법화경(法華經)』·『화엄경(華嚴經)』 등은 열반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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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경들이다.

 

대승열반경의 성립은 용수(龍樹 150∼250년 경) 이후라고 보지만 경의 태동(胎動)은 소승열반경에 속하는 경들이 성립된 시기로 거슬로 올라간다. 이 시기는 또 보살 집단에 의한 대승운동(大乘運動)의 초기를 지난 기원전후라고 보아지며, 이후 4세기 중반 경까지 내려가면서 몇 차례의 증보(增補) 과정을 거쳐 오늘의 열반경이 완성되었으리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2. 줄거리와 의도(意圖)

 

열반(涅槃)이란 범어 nirva의 음사(音寫)로서 반열반(般涅槃)parin-iva라고도 하며 멸도(滅度)라고 한역한다. 그러므로 열반에 든다고 하는 것을 멸도(滅度)에 든다고 하며, 줄여서 입멸(入滅)이라고도 한다.

 

열반경은 구시나성(拘尸那城, ku inagara) 가까이를 흐르는 아리라발제하(阿利羅跋提河 Ajitavat)의 강가에 서 있는 사라쌍수 사이에서 2월 15일, 입멸에 드시기 직전 석존(釋尊)께서 설하신 법이다.

 

그러므로 열반경은 부처님의 최후의 유교(遺敎)라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경은 부처님 입멸시의 슬픈 정경이 장엄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석가 부처님 입멸의 예고를 받고 슬퍼하는 대중이 모여들고, 사라수(娑羅樹)의 숲은 색이 변하여 백학(白鶴)과 같이 희어졌으며, 사방의 부처님 나라에서는 무변신(無邊身) 보살이 향반(香飯)을 가져와 공양하고자 모여들고, 그밖에도 독사나 악업(惡業)을 지은 자까지 모여 슬퍼한다.

 

그럼에도 마하가섭(摩訶迦葉)과 아난(阿難)과 아사세왕(阿闍世王)과 일천제(一闡提)의 무리들은 오지 않고 있었다.

 

그 때 석가 세존은 재가신도(在家信徒)인 순타(純陀)가 바치는 공양을 최후의 공양으로 받으셨으며, 순타 이외의 대중이 바치는 공양은 화현(化現)한 부처와 비구들이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문수(文殊)보살에게 법을 부촉(付囑)하고 중생을 조복(調伏)하기 위하여 몸에 병을 나타내 보였다.

 

이어 경의 끝에 이르러서는 열의 외도(外道)를 꺾어 귀의하게 하고 악마의 무리에게 시달리고 있는 아난을 구출하신 다음 최후의 제자가 된 범지(梵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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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발타(須跋陀)를 도(道)에 들게 한 것으로 대단원을 맺고 있다.

 

이와 같이 열반경의 줄거리는 그 소재를 아함(阿含)중의 「유교경(遺敎經)」 등에 전하는 석존의 입멸 당시의 광경에서 빌려왔으나 석존의 입멸 당시 광경을 역사적으로 바르게 기술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대승적인 수식이 현저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경이 부처님의 입열반(入涅槃)의 장면을 서술하지 않고 부처의 본질을 이루는 대열반을 보편화하여 불멸(不滅)함을 밝히고 있는 점은 곧 이 경의 뜻이다.

 

또한 부처의 불멸성과 함께 특히 이 경이 밝히고자 한 것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설한 점이다. 그러한 것은 다음에 말하는 열반경의 사상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3. 열반경의 사상

 

(1) 상주(常住)하는 불신(佛身)부처의 불멸성(不滅性)을 불신상주(佛身常住)라고 한다. 소승불교의 일반적인 이해에 따르면 신체의 유무(有無)를 따져 열반을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의 둘로 나누었다.

 

괴로움의 원인[苦因]인 정신상의 번뇌가 없어졌어도 괴로움의 결과[苦果]인 육체가 남아 있는 동안은 유여열반이며 육체까지 없어져 심신(心身)이 함께 공무(空無)로 돌아간 것을 무여열반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승에 의하면 신체, 즉 물체와 마음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다. 부처가 무여열반에 드는 것이 마치 장작이 다 타서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처를 신체적으로만 파악하는 것이다. 부처를 업(業)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신체적 존재라고 보는 자에게 부처의 죽음은 무상(無常)하고 괴로운 것이며, 무아(無我)며 부정(不淨)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처는 육신(肉身)이 아니며 업에 속박되는 무명(無明)의 존재가 아니다.

 

부처로 하여금 부처이게 하는 것은 진실로 깨달음인 것이다. 열반경은 그 깨달음을 대열반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처의 본질인 그 깨달음을 근본적으로 추구하고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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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경에 따르면 대열반이란 법신(法身)과 반야(般若)와 해탈(解脫)의 3법(法)으로써 이루어지며 이 셋을 열반의 3덕(德)이라고 한다.

 

법신이란 때와 장소라고 하는 제약을 넘어 보편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우주의 진실한 이법(理法)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지혜가 반야며 그것을 깨달았을 때 얻는 자유의 경지가 해탈이다. 이 3자는 상호 의지하여 존립함으로써 비로소 각각의 의의를 완성할 수 있으며 각각 떨어져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부처의 본질인 대열반이 이와 같은 법신과 반야와 해탈의 셋을 내용으로 한다고 하면 부처는 법신이므로 무상(無常)한 육신이 아닌 상주(常住)며 해탈이므로 고(苦)가 아니라 낙(樂)이며 반야이므로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에 속박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대아(大我)다. 결국 그것은 청정하며 번뇌가 없는 존재이다.

 

석가모니불의 무상을 나타낸 입멸을 계기로 열반경은 이 대아를 밝히며 진실한 부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인 삼덕(三德)을 갖춘 열반으로서 본질을 삼기 때문에 불신(佛身)은 상주(常住)인 것이다.

 

그러나 석존이 80세에 입멸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대승의 입장에서 보면 80세에 입멸한 부처는 진실한 부처가 아니며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진실한 부처가 응현(應現)한 부처며, 그 응현의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과 한가지로 입멸을 보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석존의 성도(成道)와 마찬가지로 진실한 부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진실한 부처에게는 성도라든가 병에 걸린다고 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성도와 병과 입멸의 그 모두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열반경은 「장수품(長壽品)」에서 입멸이 그러한 시현(示現)임을 설하고 「현병품(現病品)」에서 병 또한 시현임을 설하고 있다.

 

그래서 열반경은 "선남자야,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의 몸은 곧 금강신(金剛身)이다. 그대는 오늘부터 항상 전심으로 이 뜻을 마땅히 사유해야 한다. 식신(食身)을 염하지 말라. 또한 사람을 위하여 여래의 몸은 곧 법신이라고 설하느니라" 한다.

 

열반경의 이와 같은 불신관(佛身觀)은 『반야경』이나 『유마경』에서 부처는 법신(法身)으로서 생신(生身)이 아니라고 하는 사상을 계승한 것이며, 『법화경』 「수량품(壽量品)」에서 설하고 있는 부처의 수명은 구원(久遠)하며 본지불(本地佛)은 구원의 옛날에 성불(成佛)하였다고 하는 『법화경(法華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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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설과도 서로 통한다. 열반경은 또 부처의 수명에 대해서 처음에는 장수(長壽)라고 설하고, 이어 장수란 진실 상주(常住)라고 하는 초시간적(超時間的)인 의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열반경은 불신(佛身)에 대해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이원적(二元的) 실재론(實在論)을 결정적으로 불식시켰다.

 

(2)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

 

불성(佛性)은 부처의 성품이란 뜻으로서 부처의 본질을 말한다. 불성이란 3덕(德)을 내용으로 하며, 그 3덕은 보편(普遍)하며 상주(常住)하는 것이므로 모든 중생은 이 불성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로 하여금 부처이게 하는 본질은 성불할 때 처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며, 입멸과 함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처가 되는 것은 중생이 불성 안에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이며,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불성을 현현(顯現)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범부(凡夫)는 불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범부에게 있어서 불성은 번뇌에 덮여 있어 아직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번뇌에 덮이고 가리워진 상태에 있는 불성·여래성(如來性)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불성·여래성이 그를 덮고 있는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 즉 자각한 불성을 법신(法身)이라고 한다.

 

범부가 자각한 불성을 법신이라고 함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사람이 특별히 정해졌거나 제한되지 않음을 뜻한다. 소승에 따르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자는 보살이라고 하는 특정한 사람에 한정되어 있고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3승(乘)의 차별론(差別論)이 있다.

 

그러나 대승에 따르면 부처님은 모든 중생을 자기와 같은 부처가 되게 하고자 법을 설하고 있으므로 부처가 되는 것은 선천적으로 제한된 소질이나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추구될 수 있는 이상인 것이다.

 

때문에 열반경은 이것을 '일체의 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강하게 주장한다.

 

열반경의 불성론(佛性論)은 처음부터 일정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품(品)을 거듭하면서 그 심도(深度)를 더하고 있다. 즉 처음에는 불성을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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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히 법성(法性)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사자후보살품(獅子吼菩薩品)」에 이르면 불성이란 공(空)과 불공(不空)을 보는 제일의공(第一義空)이므로 중도(中道)라고 설하며, 또 12인연을 관조하는 지혜를 불성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는 12인연 그 자체를 불성이라고 하기에 이르며, 12인연을 바탕으로 한 열반경의 불성사상(佛性思想)의 전개는 불성의 인(因)은 12인연이며 그 인(因)의 인은 지혜며, 불성의 과(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며 그 과의 과는 무상(無上)의 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 설한다.

 

이것은 석존이 12인연을 관하여 성도(成道)한 사실(史實)에 유래하는 것으로서 12인연을 보는 것은 법을 보는 것이며, 법을 보는 것은 부처를 보는 것이라는 논리다.

 

열반경은 또 불성(佛性)의 현현을 위해서는 지계(持戒)에 의지해야 하고 공(空)을 닦음으로써 불성을 본다고 설하면서 6바라밀(婆羅蜜)과 8정도(正道)에 의한 발심수행(發心修行)을 엄격하게 요구한다.

 

따라서 「가섭보살품(迦葉菩薩品)」에 이르면 발심과 수행으로 불성을 덮고 있는 무명과 번뇌를 걷고 불성을 현현해야 하므로 무명(無明)과 번뇌야말로 불성이라고 하기에까지 이른다.

 

그것은 무명과 번뇌에 의하여 선(善)의 5음(陰), 즉 심신(心身)이 생기고 그 선의 5음에 의하여 성도에 이르므로 결국 불성과 법성이라고 하여도 현실의 무명과 번뇌를 벗어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 것이다.

 

(3) 일천제(一闡提)의 성불(成佛)

 

일천제(一闡提)는 범어 icchantica의 음사로서 천제(闡提)라고도 하며, 단선근(斷善根), 신불구족(信不具足)이라고 한역한다. 열반경에서는 시종 이 일천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가 문제되어 있고 그가 불성이 있다면 성불(成佛)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열반경에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설한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방일하지 않고 꾸준히 불성을 개발하는 노력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석존의 입멸 때 스승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비구들이 있었다.

 

열반경으로서는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한 것에 근거하여 만인(萬人)의 평등과 성불을 주장하였으나 현실적으로는 이 불성론을 믿지 않는 그러한 비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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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한 부류의 성불에 관한 문제는 매우 심각하였을 것이다.

 

열반경은 여래성품(如來性品)에서 일천제에게 불성이 있음을 인정하였으나 그 성불에 대해서는, 일천제는 불성은 있으나 무량한 죄업(罪業)에 얽매여 있으므로 보리(菩提)의 인(因)을 낳을 수 없어 생사의 유전이 끊어지지 않고, 비록 4중죄(重罪)와 5역죄(逆罪)를 범한 자까지도 보리심(菩提心)을 내게 할 수는 있어도 생맹(生盲)과 같은 일천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에 이르면 일천제의 성불을 인정하게 된다. 그것은 일체 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열반경으로서는 비록 일천제라 하더라도 불성(佛性) 밖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천제가 만약 불성을 믿는다면 그 믿음에 의해서 성불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믿음이 없는 상태로는 성불할 수 없다는 원칙을 그대로 두고, 실제로는 일천제의 성불을 주장하여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 설과의 논리적 통합을 이룬다.

 

이러한 열반경의 주장은 실로 불교의 종교적 의의를 현실적인 것으로 정착시키는 기초가 되었으나 상당한 파란과 오랜 고심(苦心)끝에 얻어진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든, 아무리 극악한 죄를 지은 사람일지라도 믿음을 갖고 뉘우칠 때, 그의 갱생을 돕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열반경은 정법(正法)의 호지(護持)와 정법이 멸한 뒤에 일어날 여러 가지 악한 일과 상황에 대해서 설하고 올바른 계율관(戒律觀)을 설하고 있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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