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공(空)과 마음

근와(槿瓦) 2016. 1. 14. 01:28

공(空)과 마음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은 대승불교에 오게 되면 공(空)으로 개념이 확대된다. 공이란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비유하면 허공과 같다. 허공은 줄거나 늘지 않으며 생기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텅빈 공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모든 것이 창조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허공과 같은 마음이 바로 공이다.

 

우리가 법회 때 암송하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공의 의미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근본불교시대를 지나 부파불교시대에는 ‘나’는 무아로서 공하지만, 그 나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법’은 실체로서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접어들어 불교도들은 반야(般若)의 초월적 지혜를 높이 내걸고 법도 역시 공하다고 천명한다.

 

이와 관련하여 역시 <반야심경>을 보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는 구절이 있다. 나를 구성하는 법으로서의 다섯 가지 요소를 지혜의 눈으로 비추어 보니 모두 공이라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모든 것이 공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가? 어떤 요소이든지, 그것이 아무리 단단한 다이아몬드일지라도, 언젠가는 소멸하고 만다. 모든 물체들은 쪼개고 쪼개 보면 분자나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자 자체도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으며 뭐라고 규정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대승의 공은 이러한 사물의 모습을 물리적으로 쪼개어 공이라고 판단하기 보다는 사물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그 모습이 비어 있음을 투시하는 길을 제시한다. 어떤 사건이나 물건, 어떤 사람의 모습을 보더라도 바로 그 본래 모습이 공함을 그 자리에서 보는 것이다.

 

또 하나 대승불교의 공은 모든 지적인 분별을 타파하는데 그 주안점이 있다. 모든 분별작용으로 인한 견해와 판단은 사물이나 사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므로, 그러한 이성적인 생각 ∙ 판단 ∙ 입장 ∙ 주장 등을 철저히 부수어 버린다. 

 

공의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사람의 편견이거나 앎의 조그마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마치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인 양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대립하고 편을 가르며 싸운다. 공은 그러한 억측과 편견을 철저히 부수어 버린다. 어느 입장에 서서 집착하는 그 마음을 모조리 타파해 버린다. 그래서 색, 즉 물질이란 것도 실체가 없으니 공이라 부정하고, 모든 판단과 분별작용도 공이라고 부정한다. 나아가 공마저도 부정하여 그 공에 집착하는 것도 철저히 부정한다. 공에 집착하거나 머무는 것을 허무주의적 견해(見解)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 것도 긍정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공마저 공으로 비워 다시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견해를 베어버리는 절대 부정을 거쳐 절대 긍정에 도달한다. 이렇게 해서 다시 색은 공으로 살아난다. 그것은 공으로서의 부정을 통해서 살아난 묘유(妙有)로서의 색이다. 이러한 묘유로서의 색은 도처에 있다. 머무는 곳마다 진리가 살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색은 공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쓸모가 없는 무가 아니라, 형태를 갖춘 색으로 존재한다. 공은 색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밥 먹고 세수하고 일하는 그 색의 움직임 속에 공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묘유의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이슬이나 물거품처럼 금방 사라지고 마는 색에 집착해서는 안되며, 모든 것이 사라진 허무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즉 색과 공, 둘 다에 집착하지 않는 걸림 없는 자세로서, 묘유의 움직임을 보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색에서 공을 보고, 공에서 색을 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중심 수행으로 내거는 선(看話禪)은 이 묘유의 움직임을 바로 이 자리에서 보게 하는 수행법이다. 진공묘유로서의 나를 바로 이 자리에서 찾는 것이 선(禪)이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고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고 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한다. 그 마음이 바로 공의 마음이다. 그 공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창조된다. 유일신이 창조주가 아니라, 마음이 창조주요 주인공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서 그리면 그리는 대로 보이고,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간절히 노력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닫혀있으면 어떤 사물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마음이 감응하고 느낄 때 주변의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인다. 더욱이 그 마음이 깨어 있을 때 제대로 보이며 널리 이루어진다. 그래서 공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공으로 자기를 비우고 하심하면서 자기를 허공처럼 열어 보라. 그렇게 자기를 비우면 그 빈 마음에 모든 것이 들어온다. 자기를 비우고 자비와 사랑, 나눔과 베품을 실천하면 실천하는 만큼 나는 넓어지고 전 우주와 하나가 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육바라밀의 실천은 이러한 마음을 바탕에 두고 나를 한없이 열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이요, 보살의 마음이며, 진정한 불자의 마음이다.

 

 

출전 : 불교입문(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