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근와(槿瓦) 2016. 1. 12. 00:40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1)

聖師(원효대사)의 春秋가 삼십여세 되던 때이다.

그 때에 玄奬法師가 西域 · 天竺 여러 나라의 旅行과 遊學을 마치고 돌아와 皇帝의 外護下에 譯經事業과 또는 근간의 學僧들을 모아 唯識 · 法相學을 講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聖師는 道友 義湘과 약속하고 唐에 遊學하기를 꾀하고 入唐의 길에 올랐다.

 

本國 唐州界(지금의 水原 南陽海岸)에 이르자 날이 저물고 폭우가 계속되었다. 비를 피하여 어떤 움집에 들어 자다가 목이 매우 말라 주위를 더듬다가 사발 같은데 고인 물을 마시고 解渴하여 편히 쉬었다.

 

그 밤이 밝자 다시 살펴보니 그 움집은 古塚의  龕室이요 마시던 물 그릇은 해골박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聖師는 돌연히 구역질이 울컥 났다. 마악 구역질을 하다가 문득 한 생각이 번개처럼 번쩍이는 찰라에 확 깨달음을 얻었다. 聖師는 마치 악몽에서 깨어난 듯 이렇게 感嘆하였다.

 

「한 생각 일어나면 갖가지 法이 일어나고 한 생각 사라지면 갖가지 法이 사라진다.(心生則 種種法生, 心滅則 種種法滅)」

 

如來께서 「三界는 虛僞인 것이니 오직 한 마음의 造作이라」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이르심이다. 이 때에 聖師는 一心의 本源 · 萬法의 實相을 사무처 깨달았다. 이때까지 무엇인가 알듯 말듯 뚜렷이 드러나지 않던 「眞如」의 참모습이 확실히 나타나니 法에 대한 의심이 끊어져 버렸던 것이다.

 

[備考]

聖師는 이 때에 萬法의 實相, 곧「一眞如」의 본바탕을 如實히 본 것이다. 그 原理는 起信論에「一心眞如」란 것은 곧 一法界 大總相法門體니 이른바 心性은 不生 · 不滅이다. 一切法은 오직 妄念에 의하여 차별이 있나니, 만일 妄念을 여의면 곧 一切 境界의 모습이 없도다」라고.

 

心性의 본바탕은 본래로 一如平等하여 아무런 차별이 없는데 오직 妄念에 의하여 一切境界의 차별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어서,

 

「一切法은 본래부터 言說相을 여의고 마음의 반연相을 여의어서 끝내 平等하여 變異함이 없으며 破壞할 수 없어 오직 一心일 뿐이다. 그러므로「眞如」라고 한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本然의 實相인데 범부는 妄念으로 一切 境界의 差別相을 일으키어 取 · 捨  · 愛 · 憎의 妄業을 지으므로 眞如의 實相을 스스로 가리울 뿐이다.

 

또 論에 이르기를, 「一切法은 다 마음으로부터 좇아 일어났으며 妄念에서 생긴 것이다. 온갖 분별은 곧 自心을 분별함이다. 世間의 온갖 境界는 다 중생의 無明 妄心에 의하여 住持되나니, 마치 거울 속 影像은 바탕이 없는 것과 같다. 다만 妄心으로 있다고 분별할 뿐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法이 사라지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三界가 虛僞하여 오직 마음의 所作이다. 마음을 여의면 곧 六塵境界가 없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金剛三昧經 如來藏品」에「法從分別生 還從分別滅 滅諸分別法 是法非生滅」이라 한 것도 그것이다.

聖師는 이 때에 이러한 眞理를 사무쳐 깨달은 것이다. 마음에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眞如의 모습, 그것이 곧 諸法의 實相이다. 간 밤에 아무 분별 없이 물을 마실 적엔 그 물이 달고 목마름을 풀고 편히 잤는데 왜, 그 마신 물이 이미 다 分泌된 오늘 아침에 와서 구역이 나는가? 이것은 오직 한 생각 분별에서 오는 妄業임을 활짝 깨닫자, 마음의 본래 모습과 萬法의 본래 平等一如한 實相임을 사무쳐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實相의 原理를 특히 起信論에서 가장 요령 있게 提示하였던 것이므로 다음에 聖師의 敎理體系는 起信論을 기초로 하여 전개시킨 것이다. [출처 : 聖典(대한불교원효종)]

 

 

(2)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이 말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슬프고 짜증나는 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편안해지는 법이다. 유식(唯識)에서는 일수사견이라는 비유를 든다.

 

같은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데에도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은 물을 보면, 누구나 마신다든지, 발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지옥의 중생들은 물을 피고름으로 본단다. 물고기는 그냥 사는 집일 따름이다. 즉 물이라는 객관적 형태를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천차만별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낙엽 지는 호숫가에서 첫사랑을 속삭였던 이는 물만 보면 다정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솟구친다. 즉 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교과서적인 해석은 존재할 수 없다. 물은 결국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지금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미움에 시달리는 이가 있다면, 옛 기억을 떠올려 보자. 죽을 것만 같았던 그 고통의 시간들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두 부질없는 번뇌망상이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지금의 현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따름이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 하는 상념의 차이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마찬가지이다. 신문 사회면으로만 본다면 이 세상은 저주와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면으로 보면, 여전히 세상은 따스하다. 문제는 어느 쪽에 액센트를 두는가 하는 점이다. 시끄럽고 말 많은 세상을 보면서, 그래도 살만하다고 느끼게 하려면 불교가 바로 서야 한다. 그래서 세상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선 삶은 자신의 해석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모든 사실은 그 해석에 따라서 개인의 진실이 된다. 그 다음은 창조에 대한 의미이다. 개인의 자신이 마음, 믿음에 따라 외부 세계는 형성된다.  [출처 : 위키 백과(불교)]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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