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에 정착하시어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해인사 백련암은 380년 전 소암 스님이 창건하신 이후 환적, 활해 스님들께서 주석하신 성지이다.
가야산에서 가장 높은 암자이기도 한 백련암은 당시 건물이 퇴락하여 중수하지 않으면 거처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욱이 스님께서 소장하고 계시는 경전을 보관할 곳이 없어서 새로이 조그마한 장경각을 지었으니, 화재를 염려하여 시멘트로 짓는 배려를 보이셨다.
정화 후 초대 해인사 주지로 추대되었을 때도 사양하고 오지 않던 출가지 가야산에 다시 오신 것은 수십년 만의 환향이며 큰 뜻을 가진 일이었다.
대리 주지로 부임하여 이후 해인사 주지를 역임하시고 해인사 부흥에 노고가 많으신 ㅈ스님의 권유와 배려에서 해인사 시기가 시작되었다.
백련암에 오셔서도 신도들의 참배 오는 날을 팔공산 때처럼 한정시키고 오는 신도마다 삼천배 절을 시켰으며 지금도 그 가르침은 이어지고 있다.
출세간의 자세를 고고히 지키면서도 누구보다도 세간의 불법을 염려하여 오신 스님은 평소 지론인 한국 불교의 실질 정화운동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종단운영의 지도자들이 찾아올 때마다 한국 불교도 중국선종의 전통을 이어 총림을 설립하여 청규 실천의 수행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여, 드디어 67년 임시총회에서 총림설치법이 통과되고 초대방장으로 추대되었다.
총림이란 선종이 중국 천하에 선의 기치를 날릴 때 큰 사찰에서 이루어졌던 종합 수도원이며, 선원·강원· 율원 등 근기에 맞는 수행을 지도하던 교육기관의 역할도 하였다.
그리고 방장이란 직제도 수도원을 관장하던 최고의 직제이며, 총림 통솔의 최고 권위를 부여하여, 현 사찰의 주지직을 임면 내지는 겸임할 수 있도록 그 권한을 규정하였다.
이리하여 평소의 바램이셨던, 가야산 해인총림이 설립되어 교화의 장이 시작되었다.
방장에 부임하시어 처음으로 구상하신 일이 사찰이 관광지에서 수도장으로 정착되어야 한다고 하시고, 스님들의 거처까지 드나드는 관광객들의 출입을 제한하기로 하시고 관광할 수 있는 구역을 설정하시었다.
구역 설정에서 줄어지는 수입의 결손으로 사찰운영에 지장이 있다 하시어 신도 후원회를 조직하여 기금을 마련하도록 하셨으니 곧 영산회의 발족이었다.
아직도 그 기금이 살아 있어 그때 스님의 탁견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사찰 운영 담당 부서의 직제도 중국 총림의 직제를 본따서 육직으로 바꾸었으니 운영에서부터 새 출발을 하였다.
또 하나 크게 계획하였던 것은 승가대학 설립의 구상이었다.
다가오는 경쟁사회에 강원 졸업승의 사회적 지위가 초라하다는 것을 예견하시고 강원을 국가가 인정하는 대학 과정으로 승격시키려는 구상이야말로 그 당시 획기적인 것이었다. 연전 미국에서 돌아가신 ㄷ거사가 스님의 고귀하신 뜻을 이해하고 자기의 사재를 출자하고 해인사의 건물을 임대사용 형식으로 서류를 갖추어 승가대학 설립추진을 하였으니 스님의 선견지명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사학문제가 사회의 물의를 빚어 허가가 중지되었으므로 학교 설립의 꿈은 좌초하고 말았지만 그 이념은 오늘에도 이어져 중앙 승가대학 설립에 밑거름이 되었다.
스님께서는 총림의 생명은 선원에 있다 하여 선원 운영에 지나치리만큼 편애를 하셨다.
소임을 맡은 젊은이들이 선원 일변도의 총림 운영에 불평을 할 때엔 스님께서는 선이야말로 불교의 근간이므로 방에서 변을 보더라도 수좌는 잘 보살피라고 하시고, 선 수행자에게는 각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으며 선원 대중에게는 항시 문을 열어 놓으시고 만나보시고 직접 지도하시었다.
선객들의 불만이 불씨가 되어 큰 소란이 있은 일도 있었지만 스님께서는 항시 선원을 우위에 두고 총림 운영의 방침을 세우셨으므로, 지금도 해인 총림 대중이 어느 사찰 대중보다 숫적으로나 질적으로 훌륭한 전통을 갖게 되었고 출신 스님들이 종단의 동량이 되었다.
70년대로 접어들어 나라 경제가 나아지면서 관광객의 숫자도 늘어나 반대로 수도장에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이 되었고, 관광지 개발이란 이름으로 자연을 훼손하는 졸속한 행정이 시도되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해인사가 관광지가 될 수 없고, 가야산이 국립공원이 될 수 없다 하시고 친히 해인성지란 휘호를 써서 돌에 새겨 세우게 하시고 성지로서 사수할 것을 지시하시었다.
행정 당국이 일방적으로 공원 지정은 하였지만, 가야산은 지금도 불교 성지로 지켜지고 있으며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는 지역으로 알려진 것도 스님의 탁월한 소신에서 비롯되었다.
주민들의 거처인 신부락을 확장하여 가야산 입구 낙화담 주변을 훼손하려 할 때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 계획을 백지화시키고 기존 부락이 있던 위쪽 산속으로 옮겨 이주케 한 일은 가야산 절경을 보존한 위업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초등학교 뒤쪽에 문교부 지정 수련장 건립 계획도 동의한 주지를 문책하면서까지 정지 작업이 완료되었음에도 끝내 그 계획을 철회시킨 집념은 가야산을 아끼고 사랑하신 스님의 한 모습이었다. <천제스님>
출전 : 큰빛 큰지혜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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