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큰스님 말씀

봉암사 탈출(시봉이야기)

근와(槿瓦) 2016. 1. 10. 01:16

봉암사 탈출(시봉이야기)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한국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봉암사 결사는 6 ·25를 앞둔 불안한 상황에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발발 직전 빨치산들은 백두대간을 타고 남북을 오가며 게릴라전을 벌였는데, 경북 문경 봉암사는 빨치산들이 오가는 깊은 산중 길목에 있었던 것이다. 봉암사 결사에 동참했던 도우스님은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어느 날 빨치산들이 봉암사에 들이닥쳐 깎아 놓은 곳감을 몽땅 가젼간 적이 있었죠. 그런데 무슨 일인지 원주를 맡고 있던 보경스님을 인민재판에 부쳐 처형해야 한다며 잡아가려고 했어요. 그때 경험도 많고, 나이도 있었던 청담스님이 나서 간신히 빨치산을 설득해 겨우 총살을 면할 수 있었지요.”

 

식량도 식량이지만 인명이 해를 입을 위기에 직면하면서 수행 분위기가 급속도로 흐트러졌다.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성철스님은 안전한 경남 월내의 묘관음사로 옮겼다. 다시 경남 고성의 문수암으로 옮겨 수행하던 중 전쟁이 터졌으며, 성철스님은 다음 해 경남 통영 안정사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함께 수행했던 원로회의 의장 법전스님은 말했다.

 

“성철스님이 안정사 토굴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가 도우스님하고 둘이서 모셨습니다. 당시 성철스님은 안정사 주지에게 양해를 얻어 별도로 토굴에 초가를 이은 세 칸짜리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천제굴(闡提窟)이라고 붙였죠.”

 

천제굴이란 ‘부처가 될 수 없는 집’이란 뜻이다. 득도해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을 하는 스님으로서는 매우 역설적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몇 사람이 모여 살다가 하나 둘 떠나고 남은 사람은 성철스님과 법전스님 두 사람이었다.

 

“성철스님은 비록 봉암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 결사의 정신만은 한 치의 빈틈없이 간직하고 계셨지요. 봉암사에서 결의한 그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법웅스님, 곧 도우스님도 있다가 가버리고 결국 나 혼자 남아 모시게 되었지요. 나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 모시고, 공양해 올리고, 약 달여 드리고, 과일즙 내 드리고, 산에 가 나무하고, 밭 매고, 어디 심부름 갔다 오고, 노장님 빨래도 해드리는 등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했지요. 요새 젊은 스님 다섯이 해도 나 하나 역할 못할 거예요. 천제굴 시절에도 청담스님이 가끔 오시고 자운스님도 오셨습니다. 운허스님은 청담스님하고 같이 오셨는데 아마도 운허스님은 천제굴에서 처음 성철스님을 뵈었을 겁니다. 그리고 서옹스님, 향곡스님 등이 다녀가셨습니다. 서옹스님은 그때 남해 망월암이라는 토굴에서 정진하시면서 더러 다녀가셨지요. 그리고 어느 땐가 혜암스님도 와서 함께 성철스님을 모신 기억이 납니다.”

 

천제굴 시절 얘기를 하자면 반드시 언급해야 할 스님이 한 사람 있다. 바로 현재 부산 해월정사에 머물고 있는 천제스님이다. 성철스님의 첫 번째 상좌, 곧 성철스님 제자중 가장 맏상좌인 분이다. 천제스님이 처음 토굴을 찾아간 것은 6 ·25전란 중 병을 얻어 숨진 아버지의 천도재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성철스님은 당시 악신(惡神)도 천도시킨다는 도인(道人)으로 알려져 있었다. 천제스님은 이렇게 기억했다.

 

“천도재를 마친 후 성철스님이 들려준 자상한 위로의 말씀은 저의 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부친을 떠나 보내고 마음의 부친을 만나는 순간이었지요. 인생의 무상함과 불교에서 보는 죽음의 의미를 쉬운 말로 설명해 주셨는데, 그 순간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성철스님은 재(齋)를 지낼 때도 붕암사 결사의 정신, 곧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신도들 스스로가 불공을 올리게 했다. 잘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사람이나 차별 없이, 찾아오는 신도들은 모두 부엌에서 직접 밥을 지어 불전에 공양을 올려야 했다.

 

또 불공은 자신이 직접 해야지 스님들께 부탁해서는 공덕이 되지 않는다며 삼천 배를 하게 했다. 그런 성철스님의 모습과 가르침은 아직도 천제스님의 머릿속에 생생하다고 한다.

 

“성철스님은 봉암사 결사가 6·25전란으로 중도에 그친 일을 못내 아쉬어하셨습니다. 늘 봉암사의 정신을 강조했지요. 비록 몇 사람 안되는 스님들이 같이 사는 천제굴이었지만 공주규약을 꼭 지켰습니다. 스님은 범어를 손수 우리말로 음역하고 불교의 예식을 정비해 갔습니다. 봉암사에서 하시던 대로 총림의 원칙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한다며 능엄주와 예불대참회문도 빼놓지 않고 하셨습니다.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집념은 전란 중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천제굴에서 인연을 가진 스님으로는 청담, 향곡, 서옹, 우봉, 운허, 경환, 혜암, 도우, 법전스님이 있었다. 그 밖에도 스님의 건강을 걱정해 주며 정진하던 인홍, 혜춘, 장일, 원묵, 묘전스님 등의 비구니 스님들이 있다.

 

 

출전 :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