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등대집경

대집경(73)-730

근와(槿瓦) 2015. 12. 26. 01:11

대집경(73)-73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721 / 1773] 쪽

에 비구가 이 다섯 가지 가래를 갖춘다면 법행이라 할 것이며, 다섯 가지 일을 멀리 여의고도 다섯 가지 일을 성취하고 범행(梵行)을 닦아서 큰 공덕을 이룩하게 되리라.

 

교진여야, 만약 비구가 2선(禪)을 얻는다면 법행이라 할 것이며, 숨의 드나듦을 관하고 마음을 한곳에 두어 기쁨과 즐거움을 멀리 여읜다면 3선을 얻어 기뻐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리니, 왜냐하면 전일한 마음으로 숨의 드나듦을 염하고는, 멀리 기쁨과 즐거움을 여의어 제4선을 얻기 때문이니라.

 

만약에 비구가 숨의 드나듦을 관한다면 5음(陰)을 관함이요, 5음을 관한다면 이는 법행이라 할 것이며, 모든 법행의 생멸을 보고 내지 온갖 번뇌의 생멸까지 본다면 이는 법인(法認)이라 할 것이며, 눈[眼]의 공함을 보고 내지 뜻의 식별[意識]의 공함을 안다면 이는 공인(空忍)이라 할 것이며, 눈의 모양 없음[無相]을 보고 내지 뜻의 식별의 모양 없음을 안다면 이는 무상인(無相忍)이라 할 것이며, 눈 내지 뜻의 식별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는 무원인(無願忍)이라 할 것이며 괴로움의 다름과 즐거움의 다름에 있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의 다름을 관한다면 이는 중제인(中諦忍)이라 할 것이며, 중생을 위하여 생사를 행한다면 이는 수상제인(隨上諦忍)이라 할 것이니라.

 

어떤 것을 인(忍)에 따르고 근(根)에 따르고 힘에 따르고 각과 관에 따르고 내지 열반에 따른다 하느냐 하면, 이러한 법에 마음으로 탐착하지 않는 것을 믿음의 인[信認]이라 하고 이를 믿음이라고는 하되 믿음의 근[信根]이라고는 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거둬서 나쁜 일을 조작하지 않게 한다면 이를 정진이라 하고 정진의 근이라고는 하지 않으며, 이러한 법에 전일하게 염하는 것을 염한다 하고 염하는 근이라고는 하지 않으며, 심수(心數)의 법을 능히 한 연(緣)에 둔다면 이를 정(定)이라 하고 정의 근이라고는 하지 않으며, 이러한 모양[相]을 관하지 않는다면 이를 지혜라 하고 지혜의 근이라고는 하지 않나니, 이러한 근 없음을 관하는 것을 법행이라 하느니라.

 

교진여야, 만약에 비구로서 정법(頂法)과 세간의 제일 법[世第一法]을 관하고 3해탈의 공과 무상과 무원과 덧없고 괴롭고 공함을 관한다면 이를 법행이라 하고 이를 공삼매(空三昧)라 하느니라.

 

                                                                                [722 / 1773] 쪽

이러한 삼매는 수명(壽命)이 없음을 인연하고 자재로움이 없음을 인연하느니라. 무상(無相)삼매는 다함[盡]을 인연하고 파괴함을 인연하고 멸함을 인연하고 싫어함을 인연하며, 무원(無願)삼매는 단 이슬을 인연하여도 단 이슬의 행은 아니고, 단 이슬의 행이면서 단 이슬을 인연하지 않음이 있으며, 공(空)삼매도 단 이슬을 인연하되 단 이슬의 행은 아니고 단 이슬의 행이면서 단 이슬의 인연하지 않음이 있으며, 무상삼매도 단 이슬을 인연하되 단 이슬의 행은 아니고 단 이슬의 행이면서 단 이슬을 인연하지 않음이 있느니라.

 

교진여야, 만약에 비구가 지혜의 멸함을 인연하여 장엄하게 무원삼매에 든다면 이는 단 이슬을 인연하되 단 이슬의 행은 아니라 하며, 비구가 지혜의 멸함을 인연하여 해탈하게 된다면 이는 단 이슬의 행이라 하고 단 이슬을 인연함은 아니니, 공삼매와 무상삼매 또한 그러하느니라.

 

교진여야, 만약에 비구로서 이와 같이 관한다면 이를 법행이라 하며, 비구로서 느낌[受]을 관하고 마음을 관한다면 이를 법행이라 하리니, 왜냐하면 능히 스무 가지의 아견(我見)을 파괴하기 때문이니라.

 

교진여야, 단견(斷見)과 아견(我見)이 각각 다섯 가지가 있으니, 색의 끊음[色斷] 내지 식의 끊음[識斷]을 다섯 가지 단견이라 하고 색의 나[色我] 내지 식의 나[識我]를 다섯 가지 아견이라 하느니라.

 

교진여야, 다섯 가지 단견을 분별하면 마흔네 가지가 있으니, 열여섯 가지 상을 설한 것[說想]과 여덟 가지 상이 없음을 설한 것[說無想]과 여덟 가지 비상비비상을 설한 것[說非想非非想]과 여섯 가지 갖가지 상을 설한 것[說種種想]과 여섯 가지 끊음을 설한 것[說斷]을 마흔네 가지라 하며, 아견을 분별하면 열여덟 가지가 있으니, 네 가지 결정코 나를 설한 것[定說我]과 네 가지 설변(說邊)을 설한 것과 네 가지 이상한 일[異事]을 설한 것과 여섯 가지 무구(無求)삼매를 설한 것이니, 이것을 합하여 62견(見)이라 하느니라.

 

스무 가지 아견의 인연이 404가지의 번뇌를 낳으므로 이러한 번뇌를 여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관하는 것을 범행이라 하나니, 이러한 비구는 능히 몸과 마음을 관하느니라.

 

교진여야, 어떤 것을 8인(人)이라 하고 어떤 것을 결정(決定)이라 하느냐

 

                                                                                [723 / 1773] 쪽

하면, 교진여야, 단견(斷見)의 사람은 일념(一念)을 단이라 하고 상견(常見)의 사람은 8인(忍)을 단이라 하나니, 이 두 사람은 다 결정을 얻은 뒤에 번뇌를 여의어도 무방(無妨)하느니라. 교진여야, 이 8인(忍) 얻는 것을 8인(人)이라 하고 16심(心) 얻는 것을 결정이라 하고 이것을 참된 법[如法]이라 하느니라.

 

교진여야, 만약에 비구로서 내쉬고 들이 쉬는 숨[出入息]을 성취한다면, 곧 8인(人)이란 이름을 얻고 또 결정이라 하며, 비구로서 숨 헤아림[數息]을 성취한다면 곧 믿음의 근기와 지혜의 근기를 얻고, 만약에 다섯 가지 근기까지 얻는다면 곧 세간의 으뜸가는 법을 얻으리니, 이러한 비구는 능히 온갖 의심에 걸린 마음을 깨뜨릴 것이므로 이는 진실로 성행(聖行)을 닦는다 하리라.

 

만약에 비구로서 괴로움의 지혜[苦智]를 성취한다면 열 가지 번뇌를 끊으므로, 이것을 처음 번뇌 없는 마음[初無心]의 관을 닦는다 하나니, 그때 차례로 무원삼매를 관하며, 무원삼매를 관할 적에 37조도법 닦는 것을 번뇌 없는 정의 지혜[無漏定智]라 하여 괴로움[苦]이라는 법의 인(忍)․괴로움이라는 법의 지혜[智], 원인[集]이라는 법의 인․원인이라는 법의 지혜를 얻느니라.

 

그때 색계(色界)의 5음(陰)과 무색계(無色界)의 4음(陰)은 욕계(欲界)의 괴로움과 같고, 색계와 무색계 또한 그러하느니라. 이와 같이 관하고 나서 모양과 무형의 열여덟 가지 번뇌를 끊고는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모든 괴로움은 어떤 업(業)을 따라 오며 누가 조작한 것인가?’ 하느니라.

 

이렇게 관찰하면 이 괴로움은 애욕의 인연에 따르므로 내가 만약 이러한 애욕의 뿌리를 빼지 않으면 반드시 괴로움을 낳게 됨을 분명히 알 것이니, 그러므로 원인[集]을 관하고는 일곱 가지 번뇌를 끊으며, 욕계의 원인을 관함과 같이 색계와 무색계 또한 그러하므로, 이렇게 관하고 나서는 비인[比忍 : 유지인(類智忍)의 구역(舊譯)이다.]과 비지[比智 : 유지(類智)의 구역이다. 상계(上界)의 번뇌에 대하여 작용하는 지(智)이다.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행의 4제(諦)를 관찰하고, 번뇌를 끊는 무루지(無漏智)를 말한다.]를 얻나니, 이 관을 일으킬 때에 열두 가지 번뇌를 끊느니라.

 

교진여야, 8인(忍)을 갖춘 자는 법을 보았다 하고 삼계(三界)의 원인을 끊

 

                                                                               [724 / 1773] 쪽

고 나서는 다시 이러한 관을 일으키나니, 말하자면 ‘무슨 인연으로 괴로움과 원인을 끊는가, 안락하기 위한 때문이다. 대저 안락이란 것은 곧 멸함의 이치[滅諦]로다’라고.

 

그때 처음 욕계의 멸하는 이치를 관하여 멸하는 법의 인(忍)을 얻고 일곱 가지 번뇌를 끊는지라, 색계와 무색계도 그러하므로, 이 관을 일으키고는 멸하는 비인(比忍)을 얻고, 열두 가지 번뇌를 없애고 다시 이러한 관을 일으키나니,‘무슨 인연으로 이 비인(比忍)을 얻는가, 여덟 가지 도를 닦음으로 인해 여덟 가지 바른 도의 힘을 지니므로 욕계의 괴로움과 원인과 멸하는 이치를 안다’라고.

 

그때 차례로 길[道]에 이르는 법의 인(忍)을 얻고는 능히 여덟 가지 번뇌를 끊으며, 다시 색계와 무색계를 관하여 도의 비인(比忍)을 얻고 열네 가지 번뇌를 끊으며, 원인[集]을 닦음으로써 여든여덟 가지 번뇌를 멀리 여의므로 이것을 일러 ‘결정코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음’이라 하고, ‘열여섯 가지 마음’이라 하고, ‘반드시 보리심을 얻음’이라 하고, ‘일곱 번 왕래(往來)하여 온갖 괴로움을 끊음’이라 하느니라.

 

교진여야, 어떤 사람은 마음에 따라 결정하고, 어떤 사람은 법에 따라 결정하고, 어떤 사람은 일생에 수다원과로부터 내지 아라한(阿羅漢)을 얻고, 어떤 사람은 믿음의 근[信根] 내지 지혜의 근[慧根]에 들고, 어떤 사람은 선정을 닦고 어떤 사람은 지혜를 닦고 어떤 사람은 초선(初禪) 내지 4선(禪)을 얻어 결정의 관에 들고 온갖 행이 덧없어서 차례로 나고 멸함을 관하여서 온갖 범부의 법을 멀리 여의고, 어떤 사람은 온갖 행의 덧없고 괴롭고 공하고 깨끗하지도 않고 자재롭지도 않고 고요함도 없이 인연에 따라 나고 인연에 따라 멸함을 관하며, 그리고는 고요한 멸함의 지혜를 얻나니, 이것을 일러 비구가 법과 같이 행한다 하느니라.

 

교진여야, 여래는 온갖 중생들 근기의 영리하고 둔함을 분명히 알고 또 온갖 중생의 심성과 모든 번뇌의 성품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중생의 정도에 따라 설법하고 또 모든 번뇌에 따라 대치법(對治法)을 연설하시나니, 그러기에 살바야지(薩婆若智)라는 이름을 얻느니라.

 

교진여야, 내가 열반한 뒤에 여러 제자들이 여래의 12부경을 받아 지니고

 

                                                                              [725 / 1773] 쪽

베껴 쓰고 읽어 외움에 있어 뒤바뀌게 이치를 설명하고 뒤바뀌게 연설한다면, 뒤바뀌게 해설함으로써 법장(法藏)을 덮어 숨기게 되고, 법을 덮음으로써 담마국다[曇摩掬多 : 담무덕부(曇無德部)의 시조다. 담무덕부에서 전하는 율은 4분율이다.]라고 이르리라.

 

교진여야, 내가 열반한 뒤에 나의 여러 제자는 여래의 12부경을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우고 베껴 쓰면서도 다시 외전(外典)을 읽어 외우고 써서 말하며, 3세와 안팎을 받아 지니어 외도(外道)를 파괴하고 이치를 잘 논란하며, 온갖 성(姓)을 말하여 다 계(戒)를 받게 하고 무릇 질문이 있음에는 다 능히 대답하리니, 그러므로 살바제바[薩婆帝婆 : 살바다부(薩婆多部)를 말한다. 살바다부에서 전하는 율은 10송률이다.]라고 이르리라.

 

교진여야, 내가 열반한 뒤에 나의 여러 제자는 여래의 12부경을 받아 지니어 베껴 쓰고 읽어 외우되 나와 느낌[受]이 없다고 말하며, 모든 번뇌를 버리기를 마치 죽은 시체와 같이 하리니, 그러므로 가섭비부[迦葉毘部 : 음광부(飮光部)라고도 한다. 설일체유부에서 갈라져 나왔다.]라고 이르리라.

 

교진여야, 내가 열반한 뒤에 나의 여러 제자는 여래의 12부경을 받아 지니어 읽어 외우고 베껴 쓰되 땅 ·물·불·바람 따위의 모양[相]과 허공과 식별의 모양을 조작하지 않으리니, 그러므로 미사색부[彌沙塞部 : 미사색부에서 전하는 율은 5분율이다.]라고 이르리라.

 

교진여야, 내가 열반한 뒤에 나의 여러 제자는 여래의 12부경을 받아 지니어 읽어 외우고 베껴 쓰되 다 유아(有我)를 말하고 공상(空相)을 말하지 않기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하리니, 그러므로 바차부라[婆蹉富羅 : 바차부라(婆蹉富羅)는 바차부다라(婆蹉富多羅)로서 독자부(犢子部)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이르리라.

 

교진여야, 내가 열반한 뒤에 나의 여러 제자는 여래의 12부경을 받아 지니어 읽어 외우고 베껴 쓰며, 5부(部) 경서를 널리 두루 통달하리니, 이러므로 마하승기[摩訶僧祗 : 마하승기에서 전하는 율은 마하승기율(摩訶僧祗律]이다.

 

                                                                               [726 / 1773] 쪽

교진여야, 이러한 5부는 비록 제가기 다르다 할지라도 부처님의 법계와 큰 열반에는 방해되지 않느니라.

 

어떤 것을 신행(信行)에 따른다고 하는가. 삼보를 믿어 믿음의 뿌리를 갖추면 믿음 뿌리의 인연에 따라 수다원과(須陀洹果)·사다함과(斯陀含果)·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고 색계와 무색계를 벗어나 아라한과를 얻을 것이며, 믿음에 따라 해탈하게 됨을 믿음의 해탈이라 하고 1분(分)이라고도 하고 신증(身證)이라고도 하고 지혜의 해탈이라고도 하나니, 이를 신행(信行)에 따름이라고 이르느니라.

 

교진여야, 어떤 것을 법행(法行)에 따른다고 하는가. 법에 따라 결정에 듣고 지혜의 뿌리를 갖추어 수다원과·사다함과·아나함과를 얻으며, 색계와 무색계를 벗어나 아라한과를 얻게 되면 이것을 일러 2분(分)을 견도(見到)한 해탈이라 하고 신증의 지혜로써 해탈함이라 하고 마음의 해탈로써 멸진정(滅盡定)을 얻었다 하나니, 그러므로 이분의 해탈이라 하고 무학(無學)의 해탈이라 하고 법행이라 하며, 몸의 관 내지 법과 법의 관을 성취함이라 하고 비바사나(毘婆舍那)와 사마타(奢摩他)를 성취함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사마타라 하느냐 하면, 멸함[滅]을 이름이니, 능히 탐내는 마음·성내는 마음·어리석은 마음을 멸함으로써 사마타라 이르며, 어떤 것을 사마타의 모양[相]이라 하느냐 하면, 능히 탐내는 모양과 성내고 어리석은 모양을 멸함으로써 사마타의 모양이라 이르며, 어떤 것을 사마타에 따라 결정에 든다 하느냐 하면, 사마타의 행을 닦음에 따라 존중 찬탄하고 사마타의 방편을 향하여 장엄함으로써 이를 사마타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만약에 어떤 비구가 깊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의 탐내는 마음은 깨끗하지 못한 것만을 관하므로 이를 없애야 하고, 성내는 마음은 사랑으로 없애야 하고 12인연은 어리석음을 없애야 한다’고 한다면, 이를 사마타의 모양이라고 이르리라.

 

어떤 것을 비바사나(毘婆舍那)라 하느냐 하면, 성인의 지혜를 닦아서 능히 5음(陰)의 차례로 생멸함을 관하므로 이를 비바사나라 하며, 만약에 모든 법은 다 참다운 법성이라고 관하여 실성(實性)과 참 모양[實相]을 분명히 안다면, 이 또한 비바사나라고 이르리라.

 

                                                                               [727 / 1773] 쪽

어떤 것을 비바사나의 모양[相]이라 하느냐 하면, 염하는 마음을 원만히 갖추어서 온갖 지어감은 인연을 따라 나고 인연을 따라 멸함과 온갖 지어감은 자재(自在)함이 없어 조작도 느낌도 없음을 관한다면 이를 비바사나의 모양이라 하며, 비바사나에 따라 결정에 드는 것이란 지심으로 비바사나를 염하고 공경 존중하여서 장엄한 도에 나아감이니, 이것을 비바사나에 따라 결정에 든다고 이르느니라.

 

어떤 것을 내는 법으로 마음을 거두고[出法攝心] 멸하는 법으로 마음을 거둠이 아니라 하는가. 만약 비구로서 능히 마음의 나는 인연 내지 온갖 지어감의 나는 인연을 관한다면 이를 내는 법으로 마음을 거두고 멸하는 법으로 마음을 거둠이 아니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멸하는 법으로 마음을 거두고 내는 법으로 마음을 거둠이 아니라 하는가. 만약 비구로서 깊이 멸하는 마음의 인연 내지 온갖 지어감의 멸하는 인연을 관찰한다면 이를 멸하는 법으로 마음을 거두고 내는 법으로 마음을 거둠이 아니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내는 법으로 마음의 거둠이 아니고 멸하는 법으로 마음의 거둠도 아니라 하는가. 만약 비구로서 능히 마음의 성품·눈의 성품에서 식별의 성품까지를 관찰한다면 이를 내는 법으로 마음의 거둠도 아니고 멸하는 법으로 마음의 거둠도 아니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인연으로 마음을 거두고 사유(思惟)로 마음의 거둠이 아니라 하는가. 만약 비구로서 내쉬는 숨을 관하고 들이쉬는 숨[入息]을 관하지 않는다면, 이를 인연으로 마음을 거두고 생각으로 마음의 거둠이 아니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생각으로 마음을 거두고 인연으로 마음을 거둠이 아니라 하는가. 만약 비구로서 들이쉬는 숨을 관한다면, 이를 생각으로 마음을 거두고 인연으로 마음을 거둠이 아니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인연으로 마음을 거둠도 아니고 생각으로 마음을 거둠도 아니라 하는가. 만약 비구로서 마음의 성품·눈의 성품을 비롯하여 뜻을 성품까지를 관한다면, 이를 인연으로 거둠도 아니고 생각으로 거둠도 아니라 하느니라.

 

                                                                                [728 / 1773] 쪽

교진여야, 만약 비구로서 능히 마음을 거두는 이라면 80가지 삼매문을 얻고 또 3해탈문을 닦을 것이며, 만약 비구로서 과거의 몸을 관하여 장엄을 닦고 몸 밖의 몸[身見身]을 관한다면, 이는 무원(無願)삼매문을 닦음이라 하며, 만약 비구로서 과거의 몸을 관하고 나서 마음만을 보고 몸을 보지 않거나 또 장엄을 닦고서 몸 밖의 몸을 관한다면 이는 무상(無相)삼매문을 닦음이라 하며, 만약 비구로서 과거의 몸을 관하고는 조작과 조작하는 것을 보지 않고 조작하는 것은 몸이 없고 몸은 조작하는 것이 없으며, 장엄을 닦아서 몸 밖의 몸을 관한다면, 이는 공삼매문을 닦음이라 하나니, 느낌[受]과 마음[心]과 법(法)을 관하는 것도 그러하느니라.

 

다시 교진여야, 3해탈문으로서 장엄한 관을 닦나니, 온갖 지어감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서 나고 나서는 멸하고 멸해서는 이르는 곳이 없으므로, 이르거나 가거나 오지 않나니, 이것을 원 없는 해탈문을 장엄한다 하느니라.

 

다시 미래세상을 관함에는 모든 지어감이 아직 나지 않았다면, 곧 멸함이 없으므로 이를 원 없는 해탈문을 장엄한다 하느니라. 필경 다하지도 않고 필경 다하는 것이라면, 생멸(生滅)이 없음이며, 만약 생멸이 없으면, 필경 다하는 것이요 필경 다하는 것이라면, 곧 공의 인연이니, 만약 이와 같이 필경 다함을 관한다면, 이는 공 해탈문을 장엄한다 하느니라.

 

만약에 모든 지어감은 필경 다함이라고 관한다면, 곧 나고 멸함이 없다면 곧 공함도 없음이니, 왜냐하면 앞에 서 있고 뒤에 없음을 공이라 함이요, 만약 본래 없는 것이라면, 뒤에 없다는 것도 없음이니 어찌 공이라고 이르겠느냐.

 

만약에 지어감이 없다면, 이는 곧 함이 없음[無爲]이다. 필경 다함이란 이 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함이 없는 것도 아님이니, 공은 지어감도 아니고 지어감 없는 것도 아니니라. 그러므로 필경 다함이란, 함이 있는 것의 거둠[攝]도 아니고 함이 없는 것의 거둠도 아니니, 이를 무상(無相) 해탈문을 장엄함이라 하느니라.

 

만약에 온갖 지어감이 필경 다한다면, 이는 곧 열반이므로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니, 그러기에 과거 지어감의 사라지지 않음을 열반이라 하고 미

 

                                                                                [729 / 1773] 쪽

래와 현재 지어감의 사라지지 않음을 열반이라 하느니라. 수다원인 사람이 이 열반을 보고 내지 아라한인 사람도 이 열반을 보느니라.

 

어떤 것을 괴로움의 진리[諦]라고 하는가. 온갖 지어감을 관하여 으뜸가는 진리를 보지 않고 온갖 인(因)을 관하여 제2의 진리를 보지 않고 온갖 행을 관하여 제 3의 진리를 보지 않고 온갖 도(道)를 관하여 제 4의 진리를 보지 않느니라.

 

무엇이 나는[生] 것인가 하면, 본래 없던 것이 뒤에 있어지는 이것을 남이라 하며, 무엇이 멸하는 것인가 하면, 있던 것이 도로 없어지는 이것을 멸함이라 하며 나거나 멸함이 없는 이것을 다함이라 하느니라.

 

왜냐하면 나고 멸함이 없는 것을 도라 하여, 이 도는 여섯 가지의 지어감이 있으니 닦음과 닦지 않는 것, 지어감과 지어감 아닌 것, 알음[知]과 알음 아닌 것이니라. 만약 비구로서 능히 이러한 나고 멸하는 법을 본다면, 이 사람은 온갖 지어감을 싫어하여 온갖 지어감의 덧없는 상[無常相]을 보리라.

 

어떤 것이 덧없는 모양이고 덧없는 법은 아니라 하느냐 하면, 만약 어떤 모양에 처음 번뇌 없는 근[初無漏根]의 행을 섞거나 어떤 원 없는 해탈문의 행을 섞거나 공한 모양․괴로움의 모양·깨끗하지 못한 모양·나 없음[無我]의 모양이 있다면, 이는 덧없는 모양이고, 덧없는 법은 아니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덧없는 법이고, 덧없는 모양은 아니라 하느냐 하면, 이른바 삼계(三界)의 색 모양[色相]과 내지 법의 모양[法相]은 이를 뒤바뀜의 모양이라 하고 버림의 모양[捨相], 덧없는 모양 아니라 하나니, 이를 덧없는 법이고, 덧없는 모양은 아니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덧없는 모양이면서 또 덧없는 법인가 하면, 이른바 온갖 중생은 아직 결정은 얻지 못하고 세속의 도로서 모든 삼매에 들며 법모양의 지혜[忍]에 따르나니, 이를 덧없는 모양이면서 또 덧없는 법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덧없는 모양도 아니고 덧없는 법도 아니라 하는가 하면, 이른 바 적정(寂靜)의 떳떳한 모양과 해탈의 깨끗한 모양이니, 이것을 덧없는 모양도 아니고 덧없는 법도 아니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으뜸가는 진리를 얻음이라 하느냐 하면, 이른바 6근(根)과 5음(陰)을 관하되, 마치 거울의 형상처럼 하는 것을 으뜸가는 진리를 얻음이라

 

                                                                               [730 / 1773] 쪽

하느니라.

 

어떤 것을 한마음으로 네 진리를 관하는가 하면, 모든 것은 다 이 괴로움의 인(因)이니라. 괴로움의 인이기 때문에 볼 수 있고 멸할 수 있고 멀리 여읠 수 있다고 관한다면, 이것을 일러, 마음이 번뇌 없음에 반연함이라 하며, 그럼으로써 한마음으로 네 진리 얻는 것을 일러, 번뇌를 여의고서 마음에 해탈을 얻음이라 하나니, 만약 비구로서 마음의 본체와 마음의 대상을 관한다면, 이는 무원(無願) 해탈문이라 하느니라.

 

마음의 본체와 마음의 대상을 관하고 나서는 열두 가지 일을 관하나니, 첫째는 업이요, 둘째는 지어감이요, 셋째는 괴로움이요, 넷째는 공이요, 다섯째는 괴(壞)요, 여섯째는 자재롭지 않음이요, 일곱째는 과거요, 여덟째는 현재요, 아홉째는 미래요, 열째는 인연이요, 열한째는 조작이 없음이요, 열두째는 느낌이 없음이니라. 이를 마음의 본체와 마음의 대상이라 하고 무원(無願) 해탈문이라 하느니라.

 

만약에 비구로서 이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의 나는 것이 없고 드나듦도 없어서 능히 멀리 여읠 수 없고 멀리 여읠 것도 없으면 이는 마음의 본체와 마음의 대상을 보아서 공한 해탈문을 얻었다 하며, 만약 선정에 드는 마음 없음을 관하여 온갖 번뇌를 멀리 여의게 되고 인연이 없기 때문에 번뇌가 나지도 않는다면, 이는 마음의 본체와 마음의 대상 보는 것을 멀리 여의고서 모양 없는 해탈문을 얻었다 하며, 만약 이와 같이 관한다면, 곧 번뇌 있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서 번뇌 없는 해탈을 얻으리라.

 

교진여야, 온갖 함이 있는[有爲] 지어감은 결정이 없음이니, 만약 결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정취(定聚)에 들겠으며, 만약 3세를 관찰하여 이미 정취에 들었다고 한다면, 이 이치는 그렇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다 되었고 미래는 아직 나지 않았고 현재는 덧없으므로 3세의 관찰이 다르나니, 어떻게 바른 정취에 들어갈 수 있으랴. 그러므로 온갖 다른 관찰은 그 성품이 결정되지 않느니라.

 

교진여야, 마치 전당(殿堂)에 네 단계의 사다리가 있는데, 맨 처음 첫째 단계를 경유하지 않고서 넷째 단계에 오른다는 것은 그럴 이치가 없고, 첫째 단계에 오를 때 넷째 단계에 올랐다고 설할 수 없으며, 넷째 단계를 첫째 단.......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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