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

정법념처경(86)-860

근와(槿瓦) 2015. 12. 15. 00:27

정법념처경(86)-860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851 / 1802]

쾌락을 싫어하여 떠나는 마음을 내었다.

 

그 때에 제석천은 다시 방편으로 그 천자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묘한 법을 널리 설한다.
천자들이여, 다시 이른바 아첨이란 마음이 정직하지 않고 생사에 굳게 집착하는 것이요, 질투란 남에게 대해 몹시 고뇌하는 것이며, 인색함이란 자기 물건이 다할까 두려워하여 탐하고 아끼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이것이 이른바 삼계의 더러운 땅의 법이다.

 

다시 분별하면 삼계에 속하는 것으로 분노·원한·인색함·허깨비 등은 욕심 세계에 매인 것이요, 아첨의 한 법은 욕심 세계와 범천에 두루 있는 것이며 교만과 큰 교만은 삼계에 두루 있는 것이다. 천자들이여, 이것이 이른바 열 가지 좋지 못한 대지의 법이다.

 

또 열 가지 좋은 대지의 법이 있다. 그 열 가지란 이른바 탐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으며 제부끄러움[]이 있고 남부끄러움[]이 있으며 믿음이 있고 제어함이 있으며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며 버림이 있고 침노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열 가지 좋은 대지의 법이다.

 

이런 열 가지 법은 각기 그 성질을 달리한다. 이른바 탐하지 않음이란 일체 선법의 근본으로써 마치 들보와 기둥과 같은 것이다. 어리석지 않은 선근도 그와 같다. 제부끄러움이란 스스로 정직을 지키는 것이요, 남부끄러움이란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모든 법에 대해 그 마음이 청정한 것이요, 제어함이란 몸과 마음이 잘 다루어져 악법을 떠나고 청량한 법을 의지하는 것이다. 방일하지 않음이란 선법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요, 버림이란 유위(有爲)나 무위(無爲)의 인연 가운데서 그 마음을 버리는 것이며, 침노하지 않음이란 중생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열 가지 선법의 대지이다.

 

만일 누구나 이런 법을 생각하면 그는 목숨을 마칠 때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염라 사자의 결박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선법의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바 마음·마음 수의 법·좋은 대지법·더러운 대지법의 자기 모양을 모두 설명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열 가지 법이다.

 

또 천자들이여, 이른바 어떤 것이 열한 가지 법을 닦는 것인가? 만일 어떤

 

                                                                                [852 / 1802]

비구가 자기 몸을 관찰하고 스스로 그 몸을 보아 사랑하지도 않고 헷갈리지도 않아 굳이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을 첫째의 수행이라 한다.

 

또 천자들이여, 만일 어떤 비구가 먼저 어떤 쾌락을 누리고는 그것을 비방하여 맛붙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생각하지도 않아 그것을 싫어해 떠날 생각을 내면 이것이 이른바 둘째의 수행이다.

 

또 천자들이여, 만일 어떤 비구가 항상 방일하지 않아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번뇌를 없애면 이것이 이른바 방일하지 않는 행을 닦는 것으로서, 이것을 셋째의 수행이라 한다.

 

또 천자들이여, 만일 어떤 비구가 선법을 생각하여 선법을 수행하면 그 선법은 능히 즐거운 과보를 낸다. 그리하여 (즐거운 인연으로 나는 이런 즐거운 과보를 받으리라) 하여 좋지 않은 법을 끊으면 이것이 이른바 넷째의 수행이다.

 

또 천자들이여, 수행하고 즐겨 생()을 받는데 그 존재를 받는 것은 어떤 힘인가? 어떻게 낳는가? 그것은 어떤 인이며 어떤 연이며, 어떤 인연인가? 어떻게 나게 되어 이런 생을 받되 장애가 없었는가? 이렇게 그 생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그것이 견고하지도 않고 진실하지 않으며 공으로서 아무것도 없으면 이것이 이른바 다섯째의 수행이다.

 

또 천자들이여, 만일 어떤 비구가 수행하되 (모든 행은 무상하여 괴롭고 공이며 내가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서 서로의 인연으로 생이 있고, 하나의 힘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이렇게 수행하고 이렇게 수행한 뒤에는 마음이 그것을 사랑하거나 즐기지 않으면, 이것이 이른바 여섯째의 수행이다.

 

또 천자들이여, 만일 어떤 비구가 생각하되 나는 좋은 생각을 내어 좋은 인연이 생겼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 좋은 생각은 다른 생각에 부서진다. (내가 지금 반연하는 것은 생멸하는 좋지 못한 생각으로서 내 좋은 생각을 부수고 내 선법을 방해한다)고 이렇게 반연 되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이른바 일곱째의 수행이다.

 

또 천자들이여, 혹 어떤 비구는 여덟째 행법(行法)의 모양과 평등한 모양을 닦아 자기 모양의 법에 머물러 뒤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법의 성품에는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비구는 다시, 나는 이미 세상에 태

 

                                                                                [853 / 1802]

어나 반드시 죽을 것이다. 유위의 법은 세 가지 모양이 아닌 것이 없다고 관찰한다이렇게 모든 법은 다 무상이라고 수행하면, 이것이 이른바 여덟째의 수행이다.

 

또 천자들이여, 아홉째의 수행이란 어떤 것인가? 세 가지 번뇌의 뿌리를 세 가지로 다스리는 것이다. 번뇌란 이른바 탐욕·분노·우치이다. 탐욕하는 사람에게는 부정관을 가르치고 분노하는 사람에게는 자심관을 가르치며 우치한 사람에게는 인연관을 가르친다. 이것이 이른바 다스리는 것으로서 이렇게 관을 닦아 마음으로 항상 생각하면, 이것이 이른바 아홉째의 수행이다.

 

또 천자들이여, 열째의 수행이란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고 세상을 안락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여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면 이것이 이른바 열째의 수행이다.

 

또 천자들이여, 이른바 열한째의 수행이란 어떤 것인가? 타인으로부터 차례로 무상의 법은 한 찰나도 머무르지 않되, 태에 있을 때부터 생멸하여 머무르지 않고 처음에 태에 있을 때부터 어린애·소년, 그리고 늙을 때까지 무상하다는 법을 듣는다. 그리하여 그 비구와 다른 사람은 그것을 닦아 익힌다. 닦아 익힌 뒤에는 목숨을 마칠 때에 다달아도 염라왕의 사자가 마음대로 끌고 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무서운 추악한 꼴도 보지 않으면 그것이 이른바 열한 째의 수행이다.

 

또 천자들이여, 어떤 것이 생각을 매는 열세 가지 법으로서 그것을 잘 닦아 이롭고 안락하며 열반에까지 이르는가? 그 열세 가지란 무엇인가?

 

방일하지 않기를 생각하고 나고 머무르며 멸하는 것을 생각하며 산란하지 않음을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좋은 빛깔이나 나쁜 빛깔을 보고 혹은 여자를 보더라도, 그 몸 안의 피고름 따위의 더러운 것들이 있는 곳과 대·소변의 더러운 것을 관찰한다. 이렇게 생각을 매어 산란하지 않게 한다. 그리하여 도시나 촌으로 가서 구걸하거나 가지 않아야 할 색()의 경계에 가서 그 생각을 매어 두지 않으면 곧 색욕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생각을 매어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첫째다.

 

                                                                                [854 / 1802]

또 둘째의 생각을 매어 둠이란 바깥 경계를 생각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즉 사랑할 만한 동산숲이나 연꽃 못이나 또 사랑할 만한 강물·샘 등의 유희하는 곳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한다이런 사랑할 만한 유희하는 곳에 대해 어리석은 마음은 탐착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쇠하고 무너질 것이다. 나뭇잎은 누렇게 시들어 본래의 모습을 잃고 말라 떨어지면 그 모양은 마치 말라 죽은 것 같고 그늘은 듬성듬성할 것이다. 이런 유위의 법은 모두가 무상하여 공하고 아무것도 없거늘 하물며 사랑하는 법이 있겠는가이렇게 마음을 먹고 생각을 맨다. 이렇게 생각한 뒤에 마음이 안팎의 경계에 탐착하지 않으면 악마도 그를 어지럽히지 못한다.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둘째다.

 

또 셋째의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둠이란 유익하고 안락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법을 반연하는 생각을 매어 두는가? 음식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일찍이 미색(美色)을 보았어도 그것을 생각하여 분별하지도 않고 마음에 생각을 매어 두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여 우치한 범부가 모든 감관으로 탐착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그런 생각을 매어 두면 그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셋째다.

 

또 넷째의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둠이란, 어떤 곳으로 가서 의복·평상·침구·약품 등 공양의 이익을 얻어도 기뻐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왜냐 하면 공양의 이익이란 종기를 기르는 것으로서 가죽을 깊이 베고 살을 헤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살을 헤치고는 힘줄을 끊고 힘줄을 끊고는 뼈를 부수고 뼈를 부수고는 골수를 다치는 것처럼, 이양(利養)의 인연이 선법을 부수는 것도 그와 같다.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넷째다.

 

또 다섯째의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둠이란, 혹 도시나 촌이나 영문(營門)에서 놀 때에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또 사람이 찾아 오더라도 그들과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많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만일 누구나 도시나 촌락에서 놀면 마음이 산란하여 이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다섯째다.

 

                                                                                 [855 / 1802]

또 여섯째의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둠이란, 이런 허물을 보았기 때문에 무덤 사이나 나무 밑·풀무더기의 곁·산골의 물가나 혹은 빈 집에 머무르면서 아무 애착이 없고 또 사랑하는 이도 없으며 남을 가까이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선법이 늘어나 스스로의 이익을 얻고 사람들을 멀리 피한다.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여섯째다.

 

또 일곱째의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둠이란, 천상의 과보의 말을 듣고도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싫어하고, 지옥의 괴로운 과보를 듣되 싫어하지 않고 이렇게 생각한다.(하늘에서 타락하여 죽으면 염라 사자에게 끌려 갈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이제부터 다시는 지옥의 업을 짓지 않고 그것을 좋아하지도 않으며 짓는 이를 보면 그것을 버리게 하리라.) 이렇게 그 비구는 천상의 즐거움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고 지옥의 괴로움을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근심을 떠나고 기쁨을 떠나 항상 선법을 생각한다.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일곱째다.

 

또 여덟째의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둠이란, (나는 좋은 생각을 일으키고 좋지 않은 생각을 버려 모두 부서지게 하고, 그 남은 기운에서까지 떠나 다른 선법을 내어 선법에 생각을 매어 두리라. 만일 불선을 생각하면 좋은 생각을 방해할 것이다. 나는 이미 좋지 않은 생각을 끊었다)고 한다. 그렇게 반연하는 생각의 수를 차례로 일심으로 생각에 매어 두고 그 마음을 항복 받는다. 그리하여 그는 소용돌이 치면서 일어나는 원수의 마음을 그 경계에 머무르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여덟째다.

 

또 아홉째의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둠이란,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고 법을 존경하기를 생각하며 스승을 공경하고 믿기를 생각하고 좋은 스승의 행을 따라 바른 뜻으로 수행하되, 여덟 자[一尋] 앞을 바로 보고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며 마음으로 해탈을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을 매어 두면 얻는 결과가 헛되지 않아 열반까지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아홉째다.

 

또 열째의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둠이란, 바른 행을 잘 닦는 것이다. 즉 쇠약·늙음··죽음 등 이런 네 가지의 큰 두려움이 닥치면 그 죽음의 원수

 

                                                                                [856 / 1802]

를 두려워하여 생각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그 네 가지 법은 유동하여 무상한 것임을 본다. 수명·안온·젊음·풍족 등 이 네 가지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거기는 항상 두려움이 있다. 이렇게 무상하다는 생각을 닦아 다섯 가지 쾌락을 즐기지 않으므로 애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항상 바른 생각을 수행하면 번뇌의 큰 산을 부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열째다.

 

또 열한째의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둠이란, (이것은 정진이요, 이것은 게으름이다) 하여 이런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만일 이런 생각을 내면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다. 남을 괴롭히지 않으면 그 마음이 청정해진다. 생각을 매어 항복 받아 중생들을 괴롭히지 않으면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열한째다.

 

또 열두째의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둠이란, 항상 바른 법을 듣고 듣고는 받들어 가지며 받들어 가지고는 굳게 가져 잊어 버리지 않는다. 그는 좋은 법과 좋지 않은 법을 안다. 그런 사람은 큰 어둠 속의 큰 등불과 같다. 불법 안에서 좋고 좋지 않은 법을 환히 아는 것은 등불과 같다.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것으로서 이렇게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면 사랑하거나 성내지 않아 악마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열두째다.

 

또 열셋째의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둠이란, 몸으로 마음의 법을 받기를 생각하고 그런 곳을 생각하며 자기 모양을 알아 마음을 바르게 생각을 잡아 매어 방일한 행을 떠난다. 방일하지 않기 때문에 염라 사자의 마음대로 끌려 가지 않는다. 때가 아닌 행이 없고 안 갈 곳에 가지 않으며 나쁜 경계에 다니지 않고 그 생각을 완전히 매어 둔다. 이것이 이른바 일심으로 생각을 매어 두는 열셋째다.

 

또 천자들이여, 열네 가지 법이 있다. 그것으로 그 마음을 잘 닦고 마음을 잘 항복 받으며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방일을 떠난다.

 

열네 가지란 첫째는 만족할 줄 아는 것이요, 둘째는 정진이며, 셋째는 고요함이요, 넷째는 좋은 스승을 친근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나쁜 벗을 떠나는 것이요, 여섯째는 불법을 수습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잘 관찰하여 수습하는

 

                                                                                [857 / 1802]

것이요, 여덟째는 교만을 버리는 것이며, 아홉째는 인과의 법과 비법을 믿는 것이요, 열째는 좋은 욕심을 생각하는 것이며, 열한째는 여색을 보지 않는 것이요, 열두째는 친척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며, 열셋째는 일체 경계에 바로 머무르는 것이요, 열넷째는 생사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열네 가지 법으로서 그 마음을 잘 닦는다는 것이다.

 

이 인연으로써 그 마음을 제어하면 목숨을 마칠 때에 다달아도 나쁜 길의 염라의 옥졸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쁜 길의 문을 열지 않으며 바른 법을 끊지 않아 염라 사자에게 결박되어 그 마음대로 끌려 가지 않는다.

 

악업을 짓지 않고 능히 모든 선법을 얻은 이는 이른바 그 마음을 잘 제어하여 선업을 닦기를 생각하고 능히 중생들을 데리고 인간이나 천상에 가서 열반의 문을 연 뒤에 열반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천자들이여, 너희들은 부디 그 마음을 잘 제어하라. 마음을 제어하면 염라의 사자를 보지도 않겠거늘 하물며 그에게 끌려 가겠는가?'

 

그 때에 제석천은 그 하늘 무리들을 위해 나쁜 길의 두려움과 염라왕의 사자를 만나는 두려움을 말하였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나는 이미 이와 같이 낱낱이 차례로 너희들을 위하여 열네 가지 법을 설명하였다. 이제는 너희들을 위해 열다섯 가지 법을 설명하리라. 내가 옛날 부처님께 들은 그대로를 지금 너희들에게 설명하리라.

 

열다섯 가지란 어떤 것인가? 혹 출가한 어떤 사문은 법식을 깨뜨리고 또 남도 깨뜨리게 한다. 즉 법복인 가사를 입되 그 입은 가사로 남의 애욕이 생기게 하였으면, 그는 즐겨 가사를 입고 스스로 장엄했더라도 그 음성은 추악하여 마치 나귀 소리 같고, 또 조용한 걸음으로 천천히 걸으면서 위의가 단엄하더라도 애욕을 위해 그 몸을 장엄한 것이다. 그런 사문은 부지런히 정진하지 않고 여자 보기를 좋아하며 교만하여 뽐내고 그 마음은 경솔하고 조급하며 마음으로 방일을 좋아한다그러므로 입는 옷은 추위와 더위를 막기 위해 겨우 몸을 덮을 뿐인 것으로 알아, 그것에 탐착하거나 애착하지 않고 방일한 마음에 홀리지 않으면 목숨을 마칠 때에 다달아도 뉘우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첫째 법이다.

 

                                                                                [858 / 1802]

또 천자들이여, 사문은 어떤 둘째 법을 아는가? 만족할 줄을 알려면 어떤 계율을 지니는가? 집을 나와 수행하고 혹은 지혜를 닦아 그것을 이미 안 뒤에는 시주들이 침구나 약품을 주어도 만족할 줄을 알아, 그것을 받을 때는 알맞게 받고 법대로 받는다. 이렇게 보시를 받는 것은 집을 나온 사문의 법에 방해되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둘째의 법을 안다는 것이다.

 

또 천자들이여, 사문은 어떤 셋째 법을 아는가? 탐하는 마음으로 침구를 생각하지 않는다. 촌락이나 도시 등 공덕이 아닌 곳에서 음식이나 의복을 위해 아란야를 버리고 촌락이나 도시로 들어가면 선법을 닦는 데에 방해되고 만족할 줄 아는 법을 잃어버린다. 사문의 법 가운데서 제일 훌륭한 것은 만족할 줄 아는 것과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누구나 탐하기를 즐기고 만족할 줄 알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탐욕에 미혹되어 선법을 해칠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마치 어리석은 개가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이른바 사문의 셋째 법이다.

 

또 천자들이여, 사문은 어떤 넷째 법을 아는가? 읽은 바 경전을 많이 읽었다고 말하지 않고, 시주가 음식·의복·침구·약품 등 많은 공양을 보시할까 두려워하며, 그것을 소화시키기 어려워 집을 나온 법을 방해하여 자기에게 알맞지 않을 것을 걱정하면서 스스로 만족할 줄을 알면 이것이 이른바 사문이 넷째 법을 안다는 것이다.

 

또 넷째의 욕심이 적은 법이 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을 알면 어떤 법에서 방일한 행을 행하지 않는가? 그 사문이 스님네의 심부름이나 혹은 병자를 위해 시주의 집에 가서 재물을 구걸할 때 그 집에서 한 모금의 물을 마시더라도 그것은 선법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한갖 심부름 한 헛수고 뿐으로서 아무 복덕이 없다. 왜냐 하면 맛을 탐하기 때문에 시주의 집에 가서 시주들로 하여금 깔보고 천히 여기는 마음을 내게 하였기 때문이다그런 비구는 스스로도 이롭지 않고 병자에게도 이롭지 않으며 스님네에게도 이롭지 않아 그것은 가장 가볍게 보고 업신여기는 인연이다. 이른바 시주의 집에 가서 음식을 탐하고 경솔하고 조급하여 바른 말을 타지 않는다. 이 세 가지 법은 세상 사람에게나 세상을 벗어난 사람들에게 가벼이 여김과 천

 

                                                                                 [859 / 1802]

대를 받는다. 그러므로 만족할 줄을 알고 방일하지 않은 행은 그런 법을 버린다. 이것이 이른바 사문의 넷째 법이다.

 

또 천자들이여, 어떤 다섯째 법을 아는가?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을 알아 걸식에 의지하되, 집을 나온 법을 받들어 오직 한 끼만 먹고, 자고 먹기를 완전히 하지 않는다. 만일 자고 먹기를 완전히 하면 마음이 거기에 탐착하여 좌선과 경전 읽기를 좋아하지 않고 음식 맛에 탐착하여 뒤에 다시 얻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이런 조그만 탐욕도 사문의 법을 방해하거늘 하물며 비구로서 많은 공양을 탐함이 있겠는가? 만일 그런 법을 기르면 애욕의 그물에 튼튼히 결박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문의 다섯째 법이다.

 

또 천자들이여, 사문은 어떤 여섯째 법을 아는가? 혹 어떤 사문은 큰 성바지로서 출가하였더라도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을 알아, 자기가 이미 집을 나온 뒤에는 (나는 아무개 큰 성바지로 집을 나왔다)고 스스로도 말하지 않고 또 제자들을 시켜서도 선전하지 않는다. 법을 받은 제자거나 집을 나온 제자들을 시켜서 말하게 하지 않는다또 시주들이 침구·의복·음식·약품 등 많은 공양을 베풀까 두려워한다. 내가 그것을 받으면 선법에 방해 될 것이요 그것을 받지 않으면 제자들에게 실망을 주어, 그들이 성을 내면 그 선법에 방해 되어 미래 세상에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그런 사람은 만족할 줄을 알고 보시를 받되 욕심으로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바른 법 안에서 바른 생각을 내어 숲 속을 즐긴다. 그리하여 거기서 선관(禪觀)을 공부하되 순신관(循身觀)으로써 몸을 관찰하고 순심관(循心觀)으로써 마음을 관찰하며 순수관(循受觀)으로써 감정을 관찰하고 순법관(循法觀)으로써 법을 관찰한다. 그런 비구는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아는 행을 행함으로써 유위(有爲)의 감옥을 능히 뛰어 넘는다. 이것이 이른바 사문의 여섯째 법이다.

 

또 천자들이여, 사문은 어떤 일곱째 법을 아는가?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알므로 큰 이양(利養)을 두려워한다. 이양을 버린 뒤에는 어떤 법을 아는가? 혹 어떤 비구는 지식이 많아 많은 사무를 좋아하고 많은 제자를 좋아하며 많은 공양의 이익을 탐하고 즐겨 음식을 청하면서 자주 친구를 만난다.

 

                                                                                [860 / 1802]

그런 비구나 수행하는 사람과는 짝이 되어 촌락으로 가지 않아야 한다. 왜 서로 따라 다니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방일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그런 비구의 이양을 즐기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다 알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곳으로 함께 가면 사람들은 (이 사람도 탐욕이 많아 만족할 줄 모른다) 하고 공양으로써 그 사람을 공경하고 존중하면 둘이 다 방해되는 것이다일이 많은 비구는 남의 공양을 받는데 이 수행하는 사람이 그 물건을 받지 않으면 그 일이 많은 비구로 하여금 분노하게 하여 (이 비구는 거짓이요 진실이 아니다. 그리하여 촌락의 많은 식구들을 속인다)고 말하게 하고 또 (이 비구의 속마음은 탐욕으로 흐려 있다)고 말하게 한다. 이 때문에 이들을 보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속으로 비방하게 한다. 그러므로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아는 비구는 저 일이 많은 비구와 함께 쉬거나 머무르거나 가고 오거나 드나들지 않아야 하나니, 그것은 허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문의 일곱째 법이다.

 

또 천자들이여, 사문은 어떻게 여덟째 법을 아는가? 욕심이 적은 비구는 생사를 두려워하여 이양을 멀리 떠나고 항상 일심(一心)을 생각한다. 또 어떤 법을 아는가? 집에 있을 때에 갖가지 기술을 배웠지마는 집을 나온 뒤에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른바 의술·장인 및 음악·칼이나 창 쓰기 등 이런 갖가지 기술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시주들이 그 기술을 알고 많은 공양을 베풀어 사문의 법에 방해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혹은 그런 세속의 기술을 즐겨 익히고 행하면 선법을 파괴하여 일심을 얻지 못하고 선정을 얻지 못하며 마음이 청정하지 않고 사문의 법을 방해하여 자기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모두 손상시켜, 제자들을 제어하여 이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기술을 버리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문의 여덟째 법이다.

 

또 천자들이여, 사문은 어떤 아홉째 법을 아는가? 욕심이 적은 비구로서 지혜로운 사람은 공양을 멀리 떠난다. 그런데 절이나 도시·촌락이나 혹은 가까운 촌락이나 울타리 친 고을이나 혹은 울타리 친 가까운 고을 안에 절이 있고, 거기 계율을 깨뜨린 많은 비구들은 욕심이 많아 만족할 줄 모르므로 많은 음식을 쌓아 두고 부정한 음식을 먹으며 술을 마시고 방일하며 살림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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