參禪警語

참선경어(11~20)

근와(槿瓦) 2013. 10. 24. 00:01

참선경어(11~20)

 

 

11. 옛사람의 공안을 천착하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옛스님들의 공안(公案)을 알음알이로 헤아려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비록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의 뜻을 깨닫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공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런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즉 옛스님들의 말씀은 마치 큰 불덩어리 같아서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그 가운데 어떻게 앉아보고 누워볼 수 있겠는가. 그러한 말씀에다 다시 이러니저러니 분별을 일으켜 자기 신명(身命)을 망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12. 선에서의 바른 믿음.

  이 공부(禪)는 교학(敎學)과는 다르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대승(大乘)을 공부해 온 사람도 선(禪)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하물며 성문(聲聞) · 연각(緣覺)을 공부하는 소승(小乘)에 있어서랴!

3현 10성(三賢十聖 : 10住 · 10行 · 10廻向의 3賢과 10地位 聖人)이 어찌 교(敎)에 통달하지 못했을까마는 오직 참선하는 일에 대해 설법할 때만은 그렇지 않아서 3현(三乘)보살은 간담이 떨리고 10지(十地)보살도 혼이 빠진다고 하였다. 또한 등각(等覺)보살도 마찬가지이다. 등각보살은 비오듯 자재한 설법으로 무량한 중생을 구제하시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으신 분이다. 그런데도 아직은 소지장(所知障)에 막혀 도와는 완전히 어긋난 사람이라고 하셨으니,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선종(禪宗)에서는 범부(凡夫)에서부터 완전히 부처와 똑같다고 한다. 이 말은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데가 있겠으나, 믿는 사람은 선(禪)을 할 수 있는 그릇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이 근기가 아니다. 모든 수행자가 이 방법을 택하려 한다면 반드시 믿음(信)으로부터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믿음'이란 말에도 그 뜻이 얕고 깊은 차이와 바르고 삿된 구별이 있으므로 가려내지 않으면 안된다.

 

믿음이 얕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불교에 입문한 이라면 뉘라서 신도가 아니라고 자처할까마는 그런 사람은 단지 불교만을 믿을 뿐 자기 마음을 믿지 않으니 이것을 말한다. 

 

믿음이 깊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대승보살도 아직 믿음을 갖추었다 할 수 없으니, 「화엄경소(華嚴經疏)」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설법을 하고 대중들은 그 법문을 듣고 있구나.' 이렇게 의식하면 그 보살은 아직 믿음의 문턱에도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가령 「화엄경」에 나오는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卽心卽佛)"라고 한 말씀은 누구나가 다 믿노라고 한다. 그런데 "네가 부처냐?"라고 묻게 되면 영 어긋나버려서 알아듣지를 못한다.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을 다해서 아무리 재어보아도 부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생각을 다해 재보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이는 벌써 믿음을 갖추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르다 삿되다 한 것은 무슨 차이인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믿는 것을 '바른 믿음'이라 하고, 마음 밖에서 법(法)을 얻으려는 것을 '삿된 믿음'이라 한다. 그대로가 부처임을 철저히 밝혀 자기 마음으로 직접 맛보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바른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얼굴만 번듯하고 속은 어리석은 노름꾼 같은 이는 단지 말로만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고 떠들 뿐이지 사실은 자기 마음도 모르고 있다. 이런 것을 바로 '삿된 믿음'이라고 한다.

 

13. 본체를 보아야 선정에 든다.

  옛 선사는 복숭아를 따다가도 문득 정(定)에 들고, 호미로 밭을 매다가도 문득 정에 들었으며, 절의 자잘한 일을 하면서도 선정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한 곳에 오래 눌러앉아 외연(外緣)을 끊고 마음을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에야 정(定)에 들었다고 하겠는가. 이를 곧 '삿된 선정(邪定)'이라고 하니, 이는 납자가 가져야 할 바른 마음이 아니다.

6조 혜능(慧能 : 638~713)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처님은 항상 선정 속에 계셨으며, 선정에 들지 않으실 때가 없었다."

모름지기 본체(本體)를 확실하게 보아야 비로소 이러한 선정과 하나가 된다. 석가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내려와 왕궁에 태어나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 샛별을 보고 허깨비 같은 중생을 깨우쳐주신 일들이 모두 이 선정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들뜬 경계에 빠져 죽었을 것이니, 그래서야 어찌 정(定)이라 할 수 있겠는가. 들뜬 경계(境界)에 대해서 마음을 일으킬래야 일으킬 수 없고, 고요한 경계에 있어서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서 고요하든 들뜨든간에 전혀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여기서 무엇을 가지고 경계를 삼겠는가? 이 뜻을 깨달을 수 있다면 세상이 온통 정(定)이라는 하나의 몸(體)으로 꽉 차서 다른 것은 없을 것이다.

 

14. 세간법에서 자유로와야 한다.

  참선하는 납자는 세간법(世間法)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불법(佛法)에도 오히려 집착해서는 안되거늘 하물며 세간에 매달려서야 되겠는가. 만약 화두공부가 제대로 되면 얼음을 뒤집어써도 차가운 줄을 모르며, 불을 밟고 가도 뜨거운 줄을 모르며, 가시덤불을 지나가도 걸리거나 막히는 일이 없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세간법에도 자유로와진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바깥 경계에 끄달린다. 여기에서는 조그만큼의 공부를 이루려 해도 당나귀해(노年 : 12간지에 없는 해로, 실현될 가능성이 없음을 비유함)가 되도록 끝없이 기다려 보았자 꿈속에서도 공부의 진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15. 언어 문구를 배우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문구(文句)를 따져 연구하거나 옛사람의 말씀(言語)이나 외우고 다녀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은 무익할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알음알이로 전락해 버린다. 이러고서는 '마음의 움직임이 완전히 끊긴 자리(心行處絶)'에 이르려 한들 되겠는가.

 

16.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참선할 때에는 알음알이를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마음을 여러 갈래로 치닫게 되면 도(道)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니, 그런 식으로는 미륵이 하생할 때까지 해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만일 의정(疑情)이 문득 일어난 납자라면 허공 속에 갇혀 있어도 그것이 허공인 줄 모르고 또한 은산철벽(銀山鐵壁 : 깨뜨리기 어려운 장애를 비유함) 속에 앉아 있듯 하여 오직 살아나갈 길만을 모색해야 하니, "살길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편안하게 은산철벽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해야 한다. 단지 이렇게 공부해 나가다 보면 때가 올 것이니,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자연히 들어갈(入道) 곳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17. 공부로는 도를 깨칠 수 없다는 사견을 조심하라.

  요즘 삿된 선사(禪師)가 납자들을 잘못 가르치는 일이 있다.

그들은 "깨치는 길은 공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옛사람들은 한번도 공부해서 도를 깨친 일은 없다"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말은 가장 해로와서 후학을 미혹케 하여 쏜살같이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대의(大義)선사의 「좌선명(坐禪銘)」에는 이런 글이 있다.

 

참구할 필요없다 절대로 큰소리 말지니

옛분이 애써서 모범이 되어주지 않았던가

지금은 낡은 누각 버려진 땅이라 해서

한번에 영영 황폐시켜서야 되겠는가

 

 

 

만약에 참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문득 "나는 도를 깨쳤노라"고 한다면 이는 하늘에서 떨어진 미륵, 땅에서 솟은 석가일 것이다. 이런 무리들을 이름하여 불쌍한 존재라고 한다.

자기 스스로 참구하지는 않고 옛스님들이 도를 묻고 대답한 것을 보고는 문득 자기가 깨달았다고 착각한다. 드디어 알음알이를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으로 사람들을 함부로 속인다. 그러다가 호된 열병에라도 한 번 걸리면 아프다고 하늘에 닿도록 소리치니 평생동안 깨달은 바가 하나도 쓸모없게 된다. 이윽고 죽는 마당에 이르면 마치 끓는 남비 속에 들어간 방게처럼 손을 바삐 움직이고 발버둥을 치게 되니 그제서야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황벽(황벽 : ?~850)스님은 이런 노래를 지으셨다.

 

티끌 세상을 벗어남은 보통 일이 아니니

고삐끝을 꼭 잡고 한바탕 일을 치루라

매서운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떻게 매화향기 코를 찌르랴

 

이것은 가장 간절한 말씀이니, 이것으로써 때때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면 공부는 자연히 날로 향상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백리길을 가는데 한 발자국을 걸어가면 한 발자국만큼 길이 줄어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한 발자국도 걸어가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게 되면, 비록 자기 고향일은 훤히 설명할 수가 있지만 진정한 고향인 깨달음에는 끝내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 어느 쪽 일을 택해야 마땅하겠는가?

 

18. 간절하게 참구하라.

  참선하는 데 있어서는 '간절함'이라는 한마디가 가장 요긴하다. 간절함은 무엇보다도 힘이 되는 말이니 간절하지 않으면 게으름이 생기고, 게으름이 생기게 되면 편한 곳으로 내쳐 마음대로 놀게 되며 못할 짓이 없게 된다. 만일 공부에 마음이 간절하면 방일할 겨를이 있겠는가. 간절하다는 이 한마디만 알면 옛스님들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근심할 필요도 없고,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이 간절하다는 말을 버리고 따로 불법을 구한다면 모두 어리석고 미친 사람들로서 형편없이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엉터리와 참선하는 사람을 어떻게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간절하다는 이 한마디가 어찌 허물만 멀리 할 뿐이겠는가?

당장 선(善)과 악(惡)과 무기(無記)의 3성(三性)을 뛰어넘을 수 있다.

무슨 뜻인가?

화두(話頭) 하나에 온통 간절하게 마음을 쏟으면 선(善)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악(惡)도 생각하지 앟게 되며, 또한 간절한 마음 때문에 무기(無記)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화두를 간절히 참구하면 마음이 들뜨는 상태(掉擧)와 어둡게 가라앉는 상태(昏沈)가 없어지고, 화두가 눈앞에 나타나면 무기(無記 : 감각이 없는 상태)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간절하다는 이 한마디가 가장 친절한 말이다. 마음씀이 매우 간절하면 마(魔)가 들어올 틈이 없다. 또한 있다(有) 없다(無)를 놓고 분별심을 내지 않아서 외도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19. 참선중에는 앉아 있음도 잊어라.

  참선하는 중에는 걸어가도 걷는 줄을 모르고 앉아 있어도 앉은 줄을 모르니, 이것을 "화두가 현전(現前)한다"고 말한다. 의정(疑情)이 깨어지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있는 줄도 모르는데 하물며 걷고 앉는 일을 의식하겠는가.

 

20. 주변사에 마음을 쓰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시(詩) 짓고 노래 부르며 글 쓰기를 생각하는 일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시나 노래로 대가가 되면 '승려시인 아무개'라 불리우고, 문장력이 뛰어나면 '글 잘하는 아무개 스님'이라 불리게 되나 참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다. 

마음에 맞거나 거슬리는 바깥 경계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그자리에서 알아차려 깨뜨려야 한다. 그리고는 화두를 들고서 바깥 경계를 따라 굴러가지 말아야 비로소 제대로 되었다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바짝 조여댈 것 없다(不打緊)"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태도가 가장 사람을 그르치게 하는 공부이니, 납자라면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출전 : 參禪警語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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