參禪警語

참선경어(1~10)

근와(槿瓦) 2013. 10. 23. 01:47

 

참선경어(參禪警語)  서(序)

 

경()자는 깨어난다는 뜻이다. 또 어떤 사람은 놀래킨다는(驚) 뜻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기도 한다.

"도둑이 큰 집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자. 이때 주인이 등불을 밝혀놓고 대청마루에 앉아서 기침소리를 내면 도둑은 겁이 나서 마음을 놓지 못한다. 그러다가 조금 후에 깊은 잠에 빠지고 나면 그 틈을 타서 집안에 들어와 보따리를 다 기울여 털고 달아난다. 그러므로 경계가 엄한 성에서는 밤에 딱다기를 치면서 야경을 돌고, 군대의 진중(陳中)에서는 조두(斗 : 밥그릇 모양의 징)를 치면서 밤경비를 한다. 그러므로 갑자기 사고가 생긴다해도 아무 근심이 없게 되니, 이는 미리부터 경비를 철저히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생사(生死)라는 큰 근심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한없는 세월이 지나도록 깨지 못할 꿈이다. 더구나 6근(六根)이 도둑 같은 그 생사를 도와 나날이 가보(家寶)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잘 깨달으신 선지식께서 경책해 주시는 뼈아픈 말씀이 없다면 종신토록 꿈에 취해서 끝내 깨어날 날이 없을 것이다. 이는 비단 잠들었을 때 주인노릇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낮에 눈을 뜨고도 계속 잠꼬대를 하는 격이다.

 

그러므로 박산 대의(博山大艤 : 1574~1630) 스님께서는 자비로운 원력으로 멋들어진 노래를 지으셨는데, 그것을 가지고서 식견이 좁고 아집이 센 중생들의 업병(業病)을 두루 치료하는 훌륭한 의사가 되고자 함이었다. 이런 취지에서 「선병경어(禪病警語)」5장(章)을 발표하셨다. 이 책은 간결한 문체로 요점만을 타당하게 서술함으로써 참선하는 데서 생길 수 있는 고질적인 병통을 다 끄집어내어 철저하게 규명한 글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공부방법으로 제시하는 내용은 가장 요긴한 것으로서, 참선하는 납자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한 권의 참신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제한다는 면에서도 아홉 번을 구워 만들었다는 신약(神藥)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에 대하여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선(禪)이란 가명(假名)일 뿐 실체(實體)가 없는데 무슨 병통이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설명하고자 한다. 참선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 생각을 고집하여 잘못된 이해로 마음(心意識)이 들떠, 깨달음을 진실된 경계에서 찾지 않고 알음알이 속에서 구하려 한다. 그리하여 옛사람이 하신 말씀에 꼭 막히기도 하고, 더럽고 썩은 물속에 가라앉아 죽게 되기도 하며, 혹은 아무 일 없이 멍청한 상태로 앉아 있기도 한다. 이렇게 해가지고는 영악하게 이익을 챙기는 마음이나 어리석게 집착하는 마음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미세한 번뇌(命根)를 끊기 어렵고 생멸이 분명하게 마음속에 장애로 남게 되니, 이 모두가 다 내가 만든 병이지 선(禪)에 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심한 사람은 미치거나 마귀가 붙어서 부처님도 구제할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을 업병(業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선병(禪病)이 아니다.

 

그러면 선병(禪病)이란 무엇인가?

가령 죽을 힘을 들여서 여러가지 경계를 맛본다 치자.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법신(法身)의 이치에 상응하는 참된 공부를 하려 하지 않아서 진정한 깨달음으로 향하는 문턱을 직접 밟아보지 못하고 밥통 속에 앉아서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輕安)에 빠져 노닌다면, 바로 이런 편안함이 선병(禪病)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스님이 덕망 높은 선사(禪師)에게 물었다.

"무엇이 청정법신(淸淨法身)입니까?"

큰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수없이 많은 큰 병의 근원이 청정법신이니라."

 

이는 마치 밤송이 같아서 삼키기도 토하기도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다. 훌륭하신 옛스님들께서는 진정하게 참구하여 실답게 깨닫는 과정 속에서 한바탕 병들을 치르고 오셨다. 그러므로 빈둥거리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어지럽게 쇠침을 놓아주지 않고, 오직 숨을 죽여 가며 아픔과 가려움을 알려고 하는 납자에게만 비로소 진찰해 주기를 승락하셨다. 이 때문에 병을 알면 곧 그 병을 없앨 수가 있고, 자기를 치료하고 난 다음에야 다른 사람을 고쳐줄 수가 있으니, "세 번 남의 팔꿈치를 부러뜨린 다음에야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라 하겠다.

 

박산(博山)스님은 오래전부터 이 도(道)를 참구(參究)하시어 지극하게 깨달으셨다. 그리하여 사리에 딱 맞는 요점만을 말씀하셨을 뿐, 억지로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지는 않으셨다. 그것은 스님께서 평소에 몸소 깨닫고 실제로 터득한 경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법(法)을 알아내고 설명하며 일상에 적용함에 있어서, 그 이치가 뚜렷하고 말솜씨에도 막힘이 없으셨다. 이것이 선병(禪病)을 명쾌하게 고칠 수 있는 원인이었으니, 마치 진시황이 궁중에서 옥경(玉鏡)을 잡고 앉아서 뭇 관료들의 마음속을 비추어보아 터럭만큼도 숨길 수 없게 한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법상(法床)에 걸터앉아 선지식이라 일컬어지며 설법하던 선사들 중에서도 박산스님만큼 뚜렷하게 설파한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선병(禪病)이란 가장 설명하기 어렵고, 또 설명한다고 해도 다 남김없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그 병이 곧 법신(法身)의 병이기 때문이다. 법신에는 무수한 병이 생기는 것이니,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이 법신의 병을 잘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병 자체를 묘약으로 삼고, 또한 밥 먹고 차 마시는 집안일 쯤으로 여기며, 몸에 걸치는 땀내나는 저고리 정도로 생각하여 이것을 남이 모르게 잘 감추어두고 있을 따름이다. 

 

옛사람이 "병 치료하는 여가에 놀이삼아 불사(佛事)를 한다." 하심이 바로 이 뜻이다. 다시 말해 법신에 주체가 없음을 확실히 안다면 병은 저절로 씻은 듯이 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산(洞山 : 807~869)스님께서도 "내가 볼 때는 병이 있는 것 같지 않더라"라고 하셨다. 오직 망상(妄想)과 집착(執着) 때문에 선병이 앞을 다투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도「능엄경(楞嚴經)」에서 5온(五蘊)의 마장(魔障)과 그 밖에 외도(外道)의 모든 사견에 대해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지금 사람들의 선병에 해당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고집스럽게 집착하면 마장이 되고, 알음알이로 헤아리면 외도라 하니, 집착과 헤아림이 없어야만 역시 병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터득한 경계에 대해 좋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참경계(善境界)라 할 수 있으며, 만일 '나는 깨달았노라' 하는 생각을 내면 삿된 마군의 침입을 받는다"라고 하는 이유이다.

 「법화경(法華經)」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막히고 험난한 길 사정을 잘 아는 길잡이 하나만 있으면, 그 덕분에 여러 사람을 인도하여 보물 있는 곳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산스님의 이 책이야말로 말세에 있어서 배를 매어두는 말뚝이며, 초심자에게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오늘날의 선문(禪門)에만 유익할 뿐이겠는가. 뒷날의 선문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반드시 참선을 해서 공부를 완성하고 크게 깨닫는 방편을 찾고자 하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자세히 이 책을 읽어 보라. 그러면 어떤 방법이 생길 것이다. 그리하여 의정(疑情)을 일으키지 못하던 곳에서 의정을 일으킬 수 있고, 병의 뿌리를 뽑아낼 수 없던 곳에서 뽑아낼 수가 있게 된다. 이것은 마치 모래를 헤치고 보배구슬을 찾아내는 일과 같으니, 중요한 것은 스스로 보배구슬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안개 걷힌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이 남을 미혹시키지 않고, 꽉 막힌 길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새 길이 되며, 의미없는 죽은 말(死句)속에 활구(活句)가 있어 마치 둥근 구슬이 쟁반 위에 굴러다니듯 어느 한마디에도 막히지 않게 된다.

 

그 묘한 작용이 이와 같으니 사람마다 이렇게 마음을 운용할 수 있다면 앉아 졸면서도 도를 볼 수 있고, 도를 묻느라 부지런히 돌아다니지 않아도 크게 안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게 되어 불조(佛祖)들과 똑같은 경지가 된다.

 

이것으로 자신을 잘 경책할 수 있는 사람은 대중을 깨우쳐줄 수 있고, 다시 이것으로 스스로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병도 고쳐줄 수 있으니, 바로 이런 사람을 살아 있는 의왕(醫王)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조사의 가르침이 퍼져 흐르게 하고 나라의 운명과 부처님의 혜명(慧命)이 아울러 굳건해져서, 스님께서 보여주신 방편과 원력의 참뜻을 저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이것으로 서(序)를 삼는다.

 

                                                                                                   유숭경(劉崇慶)

 

제 1장

처음 발심한 납자가 알아야 할 공부

 

1. 생사심을 해결할 발심을 하라.

  참선할 때는 가장 먼저 생사심(生死心)을 해결하겠다는 굳은 마음을 내야 한다. 그리고는 바깥 세계와 나의 심신이 모두 인연으로 이룩된 거짓 존재일 뿐 그것을 주재(主宰)하는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아야 한다. 만약 누구에게나 본래 갖추어져 있는 큰 이치를 깨치지 못하면 생사에 집착하는 마음을 깨뜨릴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재촉하는 귀신이 순간순간 멈추지 않고 따라다니게 되니, 문득 이것을 어떻게 쫓아버릴 수 있겠는가?

 

오직 이 한 생각만을 가지고 수단 방편으로 삼아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아날 길을 찾듯 해야 한다. 비틀거리며 걸어나가려 해도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고, 가만히 있자니 그럴 수도 없으며,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한 생각도 일으킬 수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으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해야겠는가. 모름지기 타오르는 불도 돌아보지 말고 목숨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남이 도와주기를 바라거나 다른 생각을 하지도 말고 잠시 머물러 있을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는 곧장 앞으로 달아나 우선 불길 밖으로 뛰어나오는 길만이 묘수이다.

 

2. 의정을 일으켜라.

  참선하는 데에는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일이 중요하다. 무엇을 의정이라 하는가?

예컨대 우리가 어디로부터 태어나는지 모르니 그 온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생사문제라는 관문을 뚫지 못했을 때 문득 의정이 생기게 된다. 그것이 맺혀서 눈꺼풀 위에 머물고 있어, 내치려 해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두고 달아나려 해도 갈 수가 없다. 그러다가 홀연히 하루아침에 의정의 뭉치를 때려 깨고 나면,

"이 '생사'라는 두 글자가 어느 집 구석에 한가하게 놓인 가구란 말이냐!"라고 외치게 된다.

아! 옛날 어느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하지 않으면 아예 깨닫지 못한다."

 

3. 일념으로 정진하라.

  참선할 때 '죽음'이라는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늘 염두에 두면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죽은 상태와 똑같이 하는 방법이 있다. 그렇게 되면 오직 이 문제를 밝혀야겠다는 그 한 생각만이 눈앞에 남아있게 된다. 이 때의 한 생각이란 하늘을 찌를 정도의 긴 칼과 같아서 무엇이든 갖다대는 족족 베어지므로,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막힌 것을 걸러내고 둔한 것을 갈다보면 칼은 사라진 지 오랜 뒤가 될 것이다.

 

4. 고요한 경계를 조심하라.

  참선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은 고요한 경계에 빠져들어 사람을 말라죽은 듯한 적막 속에 갇히게 하는 태도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은 번거로운 곳을 싫어하고 고요한 곳에서는 대부분 염증을 느끼지 않는다. 도를 닦는 수행인의 경우도 그러하다. 시끄러운 바닥에서만 내내 살던 이가 일단 조용한 경계를 맛보고 나면 그것이 꿀이나 되는 양 달갑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사람은 권태가 오래되면 잠자기를 좋아할 것이니, 자기가 이런 병통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어떤 외도(外道)는 자기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없애어 딱딱한 돌(石)처럼 되게 하였다 하니 이것도 고요한 경계를 통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마를대로 마르고 적막할대로 적막해져서 아예 인식작용이 없는 상태(無知)까지 가버렸으니 목석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들이 혹 고요한 경계에 처할 때는 오직 법복(法服) 속에서 벌어지는 한 가지 큰일, 즉 육신의 생사를 깨치는 데 힘써야 한다. 자기가 고요한 곳에 있는 줄을 몰라야만 비로소 옳다 하겠다. 생사대사에서 고요한 모습을 구하려 해도 정말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면 이야말로 된 것이다.

 

5. 자기 공부에만 매진하라.

  참선할 때에는 마음을 똑바르고 곧게 하여 남의 사정을 봐주지 말아야 한다. 남의 인정 사정 다 봐주다가는 자기 공부가 향상되지 못한다. 공부가 향상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세월이 오래 가면 반드시 속세에 물들어 스승에게 아부까지 하게 될 것이다.

 

 

6. 의단을 깨라.

  참선하는 납자는 고개를 쳐들어도 하늘을 못 보고 고개를 숙여도 땅을 보지 못하며, 산을 보아도 산으로 보이지 않고 물을 보아도 물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 또한 길을 걸어가도 걷는 줄을 의식하지 못하며, 앉아 있어도 앉아 있는 줄을 몰라야 한다. 많은 인파 속에서도 한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이 온통 의심 덩어리 하나뿐이니 세계를 하나로 뒤섞어놓았다 할 만하다. 이 의심 덩어리를 깨뜨리지 않고는 맹세코 마음 놓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공부에 있어서 긴요한 것이다.

 

세계를 하나로 뒤섞는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헤아릴 수 없는 오랜 겁 전부터 본래 갖추어져 있는 큰 이치는 소리도 없이 고요(寂寂)하여 한 번도 움직인 일이 없다.

요는 참선하는 자가 알음알이를 다 떨어버렸을 때, 천지가 뒤바뀌면서 자연히 거꾸로 용솟음쳐오는 한 줄기 파도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몸으로 받은 듯한 상태를 말한다.

 

7. 의정과 하나가 되라.

  참선하는 납자는 죽어서 살아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살아만 있고 죽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는 결단코 의정(疑情)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들떠 움직이는 경계를 굳이 떨어버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지고, 허망한 마음도 억지로 맑히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맑아진다. 그리하여 6근(六根)이 자연히 텅 비어 자유로와진다. 이런 경지에서는 움찔했다 하면 벌써 마음먹은 곳에 가 있고 입만 벙긋했다 하면 벌써 반응이 있게 되니, 살아나지 못할까 근심할 일이 있겠는가?

 

8. 세 가지 폐단을 조심하라.

  공부가 향상되기를 바란다면, 천근되는 짐을 어깨에 걸머진듯하여 팽개치려 해도 내려놓지 못하는 형편이 되어야 한다. 또한 잃어버린 중요한 물건을 찾듯하여 확실하게 찾아내지 못하면 맹세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아집(我執)과 집착(執着) 알음알이(計較)가 생기는 일이다.

아집은 병(病)이 되고 집착은 마(魔)가 되며 알음알이는 외도(外道)로 빠지게 된다. 결단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열심히 공부하면 앞서 말한 세 가지 폐단이 얼음 녹듯 말짱해 질 것이다. 이른바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들뜨게 하면 그 자리에서 법체와 어긋난다(生心動念 卽乖法體)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9. 또렷하게 깨어 있는 채로 참구하라.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납자는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처럼 분명하고 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옛사람도 "적군의 목을 베지 않고는 맹세코 쉬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망상의 도깨비굴 속에 들어앉게 되어 어둡고 깜깜한 채로 일생을 다 보내고 말 것이니 참선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두 눈을 반짝 뜨고 목표물을 노려보며 네 다리에는 힘을 주고 곧추서서 오는 쥐를 잡아 입에 물어야만 비로소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비록 닭이나 개가 옆에 있다 하더라도 돌아볼 정신이 없다. 참선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오직 열심히 이 도리를 밝히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렇게 되면 8경(八境 : 마음을 흔들어 놓는 利 ·  · 毁 · 譽 · 稱 · 譏 · 苦 · 樂의 경계)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해도 신경 쓸 틈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해도 쥐는커녕 고양이마저도 달아나고 마는 것이다.

 

10. 하루에 공부를 다 마치듯 하라.

  참선할 때는 날마다 하루 할 공부를 다 마쳐야 한다. 미루고 질질 끌면 백겁천생(百劫千生)토록 끝내 공부를 다 마칠 날이 없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향 한 개비를 꽂아놓고 그것이 다 타는 것을 보고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부가 늘 그저그러하여 나아진 것도 퇴보한 것도 없다. 이런 식으로 가면 하루에 몇 개비의 향이 타겠으며 1년이면 얼마만큼의 향이 타겠는가?"

그러고는 생각해 보았다.

"시간은 눈깜짝할 새 지나가 버리고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생사문제를 아직 밝히지 못했으니 어느 날에나 공부를 마치고 깨닫게 될 것인가?"

이런 생각으로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출전 ; 참선경어(저 : 박산무이선사)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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