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信心銘)

참선은 마음을 깨치는 지름길

근와(槿瓦) 2015. 11. 30. 18:56

참선은 마음을 깨치는 지름길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내가 「마음」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내가 말하는 이 마음은 심성·불성(心性·佛性)이란 뜻으로 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자리는 억만겁 이전부터 있었고 억만겁 뒤에 가서도 옛 것은 아닙니다. 어제도 이렇고 오늘과 내일도 이렇고 항상 이러한 것이 마음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말합니다. 「억만겁을 지나왔지만 오랜 것이 아니고 언제까지 뻗어가도 노상 지금이다.(歷千劫而不古하고 亘萬古而長今」라고.

 

가령 갓난 아이가 엄마 젖을 먹다가 배가 부르면 그만 먹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젖꼭지를 더 빨지 않는 그 마음이나, 노망이 들어 똥을 엿인줄 알고 찍어 먹는 그 때나 그 마음자리는 하나도 변함없이 늙지 않습니다. 마음은 어린애도 아니고 늙은이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낼 줄 아는 마음자리는 백년 전 이 세상에 태어났던 첫날이나 백년 뒤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그날까지 백년 동안 늘고 주는 일이 없이 항상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줄을 알고 보면 마음자리는 아득한 옛날 그 어느 시간에 비로소 생겨나온 것도 아니고, 자동차나 기계처럼 사용하면 할수록 낡아서 못쓰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도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선」이란 바로 이런 「마음」을 찾는 공부입니다. 이리 저리 헤매지 않고 이 「마음」을 직접 찾는 지름길이 바로 「참선」공부입니다. 그래서 옛날 조사님들께서 선(禪)을 【사람의 「마음」을 곧 바로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성불하게 한다.】하셨던 것입니다. 이 「마음」은 서론에서 말한 생명이고 「참 나」고 절대자 입니다. 생명이 있는 중생이면 누구나 다 갖추어 있는 것이므로, 본래부터 성불입니다. 없는 마음을 따로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마음자리는 우주의 주재자이면서 우주의 핵심입니다. 옛날 사람들 말로 하자면 신(神)이다, 조물주다, 신령님이다 하고 말하지만,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보고 듣는 인연을 여의지 않은채 부처의 경지에 오른다(不難見聞緣 超然登佛地)」는 법문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참선을 하는데, 도시는 분주하니까 새 소리 쥐 소리도 안들리는 저 산중 바위 틈에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한다 흔히 이렇게 알고 있는데, 이 생각이 대승불교로나 선종으로 나오면 그렇지 않습니다. 석가여래가 깨쳐서 가섭에게 전해 가지고 선종으로 전해 내려온 참 법의 진리는 아까 말한 것처럼 우리 자성자리인 이 마음이 본래 법신·보신·화신과 여섯 가지 신통을 다 갖추어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발견만하면 네 가지 보리지혜(菩提智慧)가 성취되고 부처님과 똑같이 된다는 정신입니다.

 

그러면 이 법에 따라서 어떻게 수행을 할것이냐? 바람소리도 물 소리도 없는 바위 틈에 앉아서 조용하게 닦으면 되느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불난견문연하고 초연등불지(不難見聞緣하고 超然登佛地)」란 말은, 눈으로 온갖 것을 다 보고 귀로 온갖 소리를 다 들으며, 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도 그 마음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약한 욕을 다 들어가면서 남과 싸움도 하고 선악의 경계를 다 보면서 부처님 경지에 올라선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참선하는 법이 모든 것을 다 떠나가지고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하는 그 가운데서 깨달아야 한다 그 말입니다. 선종(禪宗)은 이것이 특수한 점입니다. 또 선종에서 의리선(義理禪)으로 따질 때 아무 생각 없는 무아지경(無我境)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데, 이 무아지경에 바로 들어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무아의 경계

모든 망상이 딱 끊어지고 일체 잡념이 없는 지경에 들어가 보면, 「아! 이렇구나」하는 생각이 납니다. 「아! 정말 적연(寂然)한 지경이다」, 「열반이라고 하더니 이게 열반이고 보리이고 이게 반야구나」하고 단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아는 주관과, 아무 것도 없는 객관하고 상대가 성립되니까 하나의 인식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이다」하는 아상(我相)이 있고, 능소(能所=주관· 객관)가 붙어 있는 한 주관 객관을 초월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참선을 처음 하는 사람들이 번뇌 망상 가운데서 비빔밥이 되어 곤란을 당하다가 모처럼 마음을 내어 화두(話頭)공부를 좀 해보려고 하면 화두가 잘 안됩니다. 염불을 하려 해도 염불도 되지 않고 자꾸 망상에 매여서 풀려나지 못합니다. 애가 타서 얼굴이 새까맣게 타가지고 신경질이 날 지경입니다. 정진하는 사람에게 가장 고민되는 것은 망상에 얽히어 정진이 잘 되지 않는 그것처럼 괴로운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 수도 없고 바짝바짝 사람이 마릅니다.

 

이렇게 고생을 하다가 번뇌 망상이 뚝 끊어질 때면 「참 이렇구나」하는 생각을 안 낼 수가 있습니까? 깊은 산골짜기에만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우연히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앞이 툭 트인 무변대해를 바라다 볼 때 「앗!」소리를 안 지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넓은 창해를 볼 때 기쁜 마음이 일어나듯이, 번뇌 망상이 뚝 끊어진 경지에 들어가면 「이만하면 됐다」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까 말한 것처럼 아직 능·소의 때(垢)가 붙어 있습니다. 주관·객관이 남아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어진 조용한 경계 그것이 객관 세계고, 이렇구나 하는 인식 그것은 나의 주관이 되는 때문입니다. 이걸 말로만 들어서는 알기가 어려운데, 불교의 선심리학(禪心理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도리를 잘 모르고 공부를 하다 보면, 「이렇구나」하는 경계에서, 또는 「이렇구나 하는 인식도 다 없어졌구나」하는 경계에서 그만 다 된 줄 알고, 「석가여래가 이걸 얻었구나」, 「달마대사가 이걸 전했구나」하고 고함을 지르고 선지식을 만나면, 「네가 뭐냐, 한마디 대답하라」하고 날뛰게 됩니다. 선지식은 벌써 대답을 다 해 놓은 것도 모르고 마구 달겨들어서 선지식을 하루 종일 때립니다. 그래서 일본에 가보면, 선지식들이 두 자 정도 되는 구리쇠 몽둥이를 들고 앉아서 수자들이 제가 뭘 깨달았다 싶은 태도를 하면 이 구리쇠 몽둥이로 마구 때려 줍니다. 수자들 기풍이란 이런 겁니다. 몸뚱이란 아무 것도 아니고 거품이고 도깨비고 헛 것이니까, 죽어 보라는 것입니다. 어딜 감히 선지식을 시험하려고 꾀를 내느냐? 그 가운데 정신 차리라는 겝니다.

 

법만(法慢)

번뇌 망상에 짓밟혀 가지고 맥을 못 쓰다가 큰 우주를 발견하고 보면 온 우주가 내 기운이 됩니다. 그래서 참선한 사람이 뭐 조금만 소견이 생겨서 경계가 달라지면 그 기운을 막을 수가 없게 됩니다. 몇 달씩 먹지도 않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설치지만, 살이 빠지지도 않고 기운이 줄지도 않습니다. 잠을 안자도 그만입니다. 이와 같이 공부하는 수자가 어떤 경계에서 미치광이처럼 설치는 것은 평소에 아상(我相)이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잠재해 있던 강한 아상이 아만(我慢)으로 되어 법만(法慢)으로 튀어 나온 것입니다.

 

법을 좀 깨쳤다는 아만을 가지고는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로구나」이런 생각을 냅니다. 일체 중생을 보고는「이거 아무 것도 아닌 놈들이구나」이렇게 생각하고 개똥만치도 안 여깁니다. 이 육체를 내(我)라고 집착하여 아상· 아만이 강하다 보니까 그것이 좀 깨친 경지에 들어가서 법만이 되어 가지고 미친지경에까지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선도 악도 초월했고, 있고 없는 것도 초월했으며, 초월한 그것까지 초월한 절대 초월의 경지를 얻은 사람이라면 그런 미치광이 생각이 나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게송이 튀어 나오고, 이 태백이도 당할 수 없는 글을 자꾸 지어 내고 자꾸 떠들고 설치는 것은 우주 신비에 어느 정도는 통해져 있어서 그런 것이지만, 이것은 확실히 미치광이 짓이며 부처님의 정법(正法)은 못 됩니다. 무아지경에 들어가서 아무 생각도 없는 데에 들어가면 우주 심령계에 말하자면 영혼의 세계에 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세계도 통하고 잡신의 세계도 통하고 온갖 영혼의 세계에도 통하는 것입니다.

 

불자득승(佛子得勝)

그런데 영혼의 세계도 한정 없는 세계가 있고, 한정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공자를 중심으로 한 세계도 있고, 노자를 중심으로한 그러한 세계도 있고 예수를 중심한 그러한 세계도 있고 부처님을 중심으로 한 그러한 세계도 있습니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한 세계를 불보살의 세계라 하고 정법의 세계라 합니다. 온갖 신들이 모두 부처님을 대하면, 완력으로나 신통으로나 당할 수가 없습니다. 아는 것으로도 당할 수가 없고 무엇으로도 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불자일체처득승(佛子一切處得勝)」이라 하셨습니다. 내 제자·부처님의 아들 딸들은 어느 곳을 가나 승리를 거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불교 이름만 들은 정도라도 불교의 진리를 짐작하고 보면, 현대의 철학자들이 최고 철학이라고 떠드는 실존철학의 원리 같은 것은 다 유치원 아이들의 소리처럼 쉽게 판단이 갑니다. 무식한 수자라도 부처님의 법을 조금만 배우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공부 가운데는 마음 깨치는 공부가 최고의 공부이고 마지막 공부입니다.

 

거기서 마음을 깨치면 일체가 다 갖추어 있어서, 지식으로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능력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마음이 본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선종에서 전하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인데,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무(無)

조주스님의 무(無)자 공부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조주스님이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가?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一切有情 悉有佛成)」고 하셨는데 조주스님은 왜 무라고 했는가? 생각이나 이론을 가지고는 이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무」를 의심하면 일생 일대의 큰일을 다 마칩니다. 생사를 초월하게 된다는 겁니다.

 

교종(敎宗)에서는 흔히 경만 보고 철학적으로 이론만 따지는데, 이런 방법으로는 마음을 깨쳐서 생사를 해탈할 수가 없습니다. 번뇌 망상을 끊지 않고는 깊고 묘한 마음의 자성자리를 발견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의 뜻도 바로 따지고 깊은 이론을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은 우리의 마음자리에 이런 것이 있겠구나 하고 이론적으로 생각해서 알 수는 있습니다.

 

내가 마음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내가 말하는 이 마음은 심성·불성(心性·佛性)이란 뜻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자리는 억만겁 이전부터 억만겁 다음까지 항상 여여(如如)합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나 나중에 석사나 박사가 된 때에도 그 마음은 항상 똑같습니다. 「금강경」은 오히려 의리선(義理禪)입니다.

 

망상을 자꾸 떼고 떼고 하는 것이 「금강경」의 내용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심명」하고는 좀 다른 데가 있습니다. 경의 내용으로 봐서는 「금강경」하고 「신심명」하고 똑같은데, 설명하는 방법이 「금강경」은 한 개의 논리이고, 「신심명」은 논리를 초월한 글입니다.

 

「신심명」을 공부하다 보면 아! 여기가 그 자리였구나! 이렇게 깨칠 수 있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심명은 격외선 도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나」다 지금 이 「나」가 내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나냐? 따져 물으면 이 몸뚱이를 가지고 나라고 할 수도 없고, 나라는 생각 이것이 나이고, 나라는 집념 이것이 나라는 결론으로 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나라는 집념 이것이 정말 나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생각 그것도 한개의 생각인 이상 어디까지나 생각에 그칠 뿐 어떻게 나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낸 것이 「나」지, 「나」라는 생각 그것은 나일 수가 없다.

 

그러면 나라는 생각을 낸 주체는 무엇인가? 싯달태자가 六년간 고행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나」라는 생각을 내게 한 것이 무엇이냐? 여기 꽉 막혀서 육년동안 고행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따지고 생각해서 알 수 없는 꽉 막히는 경계에서 한 가지 의심을 골똘하고 일여(一如)하게 생명을 걸고 의심해 나가는 수행이 참선법입니다.

 

신심명은 우리들을 이 경지에 바짝 이끌어다 주는 법문입니다. 말하자면 밥을 먹여 주기까지 하는 법문입니다.

 

 

출전 : 신심명(청담스님 설법)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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