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큰스님 말씀

대지도론(大智度論) (百日法門 上)

근와(槿瓦) 2015. 11. 11. 01:35

대지도론(大智度論)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용수논사는 대품반야경을 주석한「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제법 실상인 중도는 바로 두 견해를 멀리 떠나는 것임을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가 남김없이 멸한 제법실상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며, 항상 머물러 무너지지 않으며 번뇌를 청정하게 한다. 부처님과 존중하신 법에 머리 숙여 예배하나이다.

 

이 세상에 무엇인가 불변하는 존재가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의 양변을 여읜 제법실상(諸法實相)은 상주불괴(常住不壞)이며 상주불멸(常住不滅)이며 상주법계(常住法界)입니다. 이것은 모든 중생의 번뇌와 업식을 청정하게 정화합니다. 부처님을 존중히 하고 법을 존중히 한다는 뜻은, 일체중생이 유무의 양변에 얽매여서 중도 정견(正見)을 갖추지 못하는데 대하여 부처님은 양변을 배제하고 오직 제법실상인 중도를 실제로 잘 설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머리 조아려 부처님과 법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대지도론」에서 중점적으로 중도와 관련하여 논의되는 것으로 반야바라밀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대지도론」에서 인용하는 구절은 반야경에서 역설하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한 것으로 여러 가지로 해설하고 있으나, 결국에는 반야바라밀이 중도임을 부연하고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이란 일체 제법이 실로 깨뜨릴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어서 부처가 있거나 없거나 항상 머물러 있는 모든 법의 모습(法相)이며 법의 자리(法位)이다. 부처나 벽지불 · 보살 · 성문 · 인천이 만든 것이 아니거니와 하물며 그 밖의 미약한 중생이리오. 또 항상함도 한 변이요 단멸함도 한 변이니, 이 양변을 여의고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반야바라밀이란 일체만법을 통합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깨뜨릴 수도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으며 부처가 있거나 없거나간에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모습(法相)이며 법의 자리(法位)요, 일체제법의 실상으로서 진여법계라는 것입니다.

 

연기경(緣起經)에서 부처님이 진여법계를 말씀하실 때, 부처님이 출현하거나 출현하시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상주하여 변동시킬 수 없고, 만들 수 없고, 부술 수 없다고 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여기에서는 반야바라밀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그 내용은 중도연기를 근본으로 삼는 진여법계며 상주법계인 것입니다.

 

단견과 상견의 변견(邊見)을 떠나서 중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설명해 왔지만 일체 모든 견해가 항상한다거나 단멸한다는 단상(斷常)의 두 견해에 포함된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과 대논사와 대보살들이 늘상 말해 오는 것입니다. 있다는 생각이 상견이며 없다는 생각이 단견으로 유와 무, 단과 상의 견해만 완전히 여의면 중도 정견(正見)으로 안 들어갈래야 안 들어갈 수 없고 이것이 곧 불법입니다. 만약 유견과 무견, 상견과 단견의 변견에 집착하게 되면 이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이란 정법(正法)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반드시 단견과 상견의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일체만법을 총괄하여 우선 근본골자를 드러내 말했고, 이 다음에는 이를 세부적으로 설하였습니다.

 

또 다시 상 · 무상, 고 · 락, 공 · 실, 아 · 무아 등도 이와 같다. 색법(色法)이 한 변이며 무색법(無色法)이 한 변이다. 가견법 · 불가견법, 유대 · 무대, 유위 · 무위, 유루 · 무루, 세간 · 출세간 등의 모든 두 법도 이와 같느니라.

 

상(常)과 무상(無常) 내지 세간과 출세간 등의 모든 상대적인 두 법은 다 변견이며, 이 양 변견을 여읜 중도가 반야바라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양변을 말씀하실 때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을 거론하셨는데, 그때 고와 낙을 여읜 것이 중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학자들 가운데는 이 때에 “고와 낙을 말하고, 중도를 말한 것은 평범한 이야기이지 저 심오한 뜻을 가진 것이 아니다. 보통 일상생활에서 행동을 잘 하라는 말이지 그렇게 고와 낙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불교는 본래 대승불교나 일승교(一乘敎)에서 말하는 저 심오한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보통 고락이라 하든지 선악이라 하든지 이런 행동적인 면에서 말하는 것이지 심오한 철학적 의의를 가진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고와 낙을 실제로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누구든지 고락의 문제를 끝까지 추구하면 참으로 진여를 깨치기 전에는 그리고 유무의 양변을 완전히 여의기 전까지는, 고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설사 어느 정도의 법을 깨달아 삼계(三界)의 분단생사(分段生死)를 완전히 해탈하여 자재한 몸을 얻었다 해도 실제로 대열반을 증득한 부처님의 경지에서 볼 때는 변역생사(變易生死)를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분단생사에서 볼 때는 그것이 즐거움(樂)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열반에서 볼 때는 변역생사라는 이것도 실제로는 괴로움(苦)입니다. 즉 아뢰야고(阿賴耶苦)라는 것은 보통 중생이 볼 때는 무심(無心)의 경계가 되어서 자재한 것 같지만 부처님의 대열반, 대자재에서 볼 때는 참으로 큰 고(苦)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이 고락이라는 것을 끝까지 밀고 밀어 추구해 나가 보면 결국 대열반 진여열반을 증득하기 전에는 고락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피상적으로 ‘고락을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 뜻이 깊은 것이 아니다’라고 평범하게 해석하려는 사람은 실지 고락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유(有)니 무(無)니 하는 이런 것도 어느 정도 심오한 철학적인 색채를 띤 말이지만, 이것은 부처님이 초전법륜 때 말씀한 것과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실제로 고와 낙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유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또한 유위법(有爲法)을 버리고 무위법(無爲法)을 성취하는 것이 근본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위(有爲)가 병이라면 무위(無爲)에 국집하는 것도 병입니다. 그러므로 생사를 여의어서 해탈하고 그 해탈에 집착한다면 그것도 똑같이 병이라는 뜻입니다. 집착하면 무엇이나 다 병입니다. 그래서 유위와 무위, 유루와 무루, 세간법과 출세간법, 불법과 비법을 다 잊어버린 데서 참다운 반야바라밀을 알 수 있고 중도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반야바라밀이란 이름도 원래 설 수 없지만 무어라 표현할 수 없어서 부득이 이름 붙이기를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무명(無明)이 한 변이요, 무명이 다하는 것이 한 변이며, 내지 노 · 사가 한 변이요 늙고 죽음이 다하는 것이 한 변이며, 모든 법이 있음이 한 변이요 모든 법이 없음이 한 변이니, 이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보살이 한 변이요 육바라밀이 한 변이며, 부처가 한 변이요 보리가 한 변이니, 이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무엇이든간에 한쪽으로 집착하면 설사 열반을 증득하였다고 하여도 열반에 집착하면 병이므로 그것은 중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무명과 내지 노사가 한 변이고, 이들이 다함도 한 변이며, 제법이 있음도 한 변이고, 없음도 한 변입니다. 보살도 한 변이고 육바라밀도 한 변이며, 부처와 보리도 각각 한 변이니 이것들에 집착하면 마침내는 모두 변견이 되고 맙니다. 무엇이고 간에 집착하면 병이 되므로 부처고 마구니고 할 것 없이 똑같이 버리는데서 실제의 불법을 알 수 있는 것이지, 마구니를 버리고 부처를 집착하면 그 병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것까지도 완전히 이탈하여 집착하지 않으며, 참으로 양변을 여의고 양변을 완전히 융화하는 쌍차쌍조한 중도를 행하는 것이 실지의 반야바라밀이고 불교의 정법인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건대 안의 육정(六情)이 한 변이요 밖의 육진(六塵)이 한 변이니, 이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이다. 이 반야바라밀이 한 변이며 반야바라밀 아닌 것이 한 변이니, 이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행함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육정(六情)이란 눈 · 귀 · 코 · 혀 · 몸 · 뜻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6근(六根)을 말합니다. 육진(六塵)은 이 육정에 상대하는 물질 · 소리 · 향기 · 맛 · 감촉 · 법의 여섯 가지 대상입니다. 이것들은 전부 다 상대가 있는 것으로 모두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무엇이든지간에 집착하는 마음은 변견으로서 똑같이 병입니다. 무엇이든간에 완전히 변견을 버려야만 참으로 원융무애한 중도 정견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부문을 널리 설하면 무량한 반야마라밀이니라.

 

이와 같은 두 부문(二門)의 차별 상대법을 널리 설할 것 같으면 무량무변해서 그런 반야바라밀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무량무변한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무량무변한 반야바라밀이 되고, 무량무변한 양변을 집착하면 무량무변한 변견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유(有)를 떠나고 무(無)를 떠나며 유가 아님을 떠나고 무가 아님을 떠나서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고 능히 바른 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유(有)나 무(無), 비유(非有)나 비무(非無)에 집착하면 이는 우치한 사람으로서 이 변견을 떠나면 우치를 면하게 되고, 능히 바른 도(善道)를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른 도는 착한 행동을 잘한다는 말이 아니고 양변의 변견을 완전히 버린다는 것으로 이것이 반야바라밀이고 중도입니다. 결국 참으로 반야바라밀을 성취하려면 이 반야바라밀에 대한 집착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중도란 것도 병이 아니냐’고 논박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직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늘 말씀하시기를 양변에 머물면 중도에 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중도도 병이 아니냐 하면, 이는 중도에 집착하여 양변을 완전히 여의지 못하고 중도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중도란, 양변을 떠나서 그 한가운데 말뚝이 또 하나 서 있는 것 같이 알면 이것은 외도란 말입니다.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이것이 곧 중도인데, 이 중도도 설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이름하여 중도라 하는 것이지 무슨 중도가 한가운데 말뚝 서듯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즉 집착이 없다는 것에 대한 집착도 떠난 것이 중도이고 반야바라밀이며, 반야의 실상이고 일승(一乘)이며, 원교(圓敎)이고 불법(佛法)입니다.

 

또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은 부처님이 정등각(正等覺)하신 후 설법한 내용의 핵심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대지도론」에서도 이 십이연기(十二緣起) 또는 십이인연(十二因緣)에 대하여 논하면서 그 근본적 의미가 중도와 연관됨을 설합니다. 말하자면 원시경전에서 설해진 부처님의 법문인 십이연기는 단 · 상(斷常)의 양변을 떠난 중도에 그 실질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사람이 다만 필경공(畢竟空)만을 관하면 많이 단멸의 변에 떨어지고, 만약 유(有)를 관하면 많이 상변에 떨어지니 이 양변을 떠나는 까닭에 십이인연공(十二因緣空)을 설하느니라.

 

필경공(畢竟空)을 관하면 많은 사람들이 단멸의 변에 떨어진다 함은 일체법은 끝내 공(空)하다고 관하면 곧 공에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체법은 항상 존재한다고 유(有)를 관하면 상변에 빠집니다. 그래서 이 단변과 상변의 양변을 떠나는 까닭에 십이인연공(十二因緣空)을 설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이인연공이란 연기(緣起)가 공(空)이고 공이 곧 연기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부처님이 중도를 설하실 때는 언제든지 십이인연으로서 설하셨으며, 그 십이인연은 중도 입장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용수보살도 이와 마찬가지로 중도연기(中道緣起)란 단과 상의 양변을 여읜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법이 인연 화합에서 생겨난다면 이 법은 고정적인 성품이 없으며, 만약 법이 고정적인 성품이 없다면 곧 필경공이며 적멸상이니, 이 양변을 떠나므로 거짓으로 중도라 하느니라.

 

만약 일체법이 인연의 화합에서 생겨난다면 이 법에는 고정된 성품이 없으며, 만약 법에 고정적인 성품이 있다면 화합에 의한 변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법에 고정성이 없다면 필경공인 적멸상이 되는데, 이것도 일종의 공견(空見)입니다. 그래서 상(常)이든지 멸(滅)이든지 이 양변을 완전히 떠나는 까닭에 중도라 합니다. 이것도 거짓으로 중도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중도라고 정의(定義)한다는 말입니다.

 

용수보살이「대지도론」에서 아주 도도무애한 대변설로서 일체불법을 요리하여 일대 체계를 이루어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 근본이 어느 곳에 서 있느냐 하면 반야바라밀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 내용은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근본적으로 양변을 여읜 중도이니 이것은 용수보살이 독창한 새로운 사상이 아니고 부처님이 초전법륜 때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게 선언하신 것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하신 것이 다 중도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소승불교 시대에 와서 그것을 망각하고 오해하여 유견(有見)이나 무견(無見)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용수보살이 부처님의 근본입장처인 양변을 여읜 중도에 서서 실제의 불교로 회복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부처님이 설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절대로 성립하지 못합니다. 대승불교운동은 근본불교의 복구운동이란 말을 내가 자주 하는 것은 아직도 대승불교를 비불설(非佛說)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출전 : 百日法門 上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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