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경(楞伽經)

130-4-입능가경-13

근와(槿瓦) 2015. 11. 1. 17:31

130-4-입능가경-13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21 / 415] 쪽

모든 선(禪)과 사무량(四無量)이며,

무색(無色)의 삼마제(三摩提)요,

소상(少相)인 적멸정(寂滅定)은

모두 마음속엔 없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 무루(無漏) 닦는 이,

또한 한번 가고 오는 이와

오지 않는 이와 아라한은

모두 마음이 미혹했다네.

능소(能所)의 소유로 사유함이란

진제(眞諦) 보는 것을 멀리 떠난 것이며,

오직 이 허망한 마음이니,

그것을 능히 알면 해탈을 얻으리라.

 

대혜여, 두 가지 지혜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관찰하는 지혜요, 둘째는 허망한 분별로 상을 취하여 머무르는 지혜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관찰하는 지혜인가? 어떠한 지혜로서 일체 모든 법의 체상(體相)은 네 가지 법을 떠나서 법을 가히 얻을 수 없다고 관찰함이니, 이를 관찰하는 지혜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네 가지 법인가? 같음과 다름, 갖춤[俱]과 갖추지 못함[不俱]이니, 이를 네 가지 법이라 한다.

 

대혜여, 네 가지 법을 만약 떠난다면 일체법은 가히 얻을 수 없으니, 대혜여, 만약 일체법을 관찰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네 가지 법에 의하여 모든 법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대혜여, 망상 분별로서 상을 취하여 머무르는 지혜란 이른바 굳음[堅]과 뜨거움[熱]과 젖음[濕]과 움직임[動]에 집착하여 허망하게 사대(四大)의 상(相)을 분별하므로 인(因)과 비유를 내세우는 것에도 집착하고, 진실 아닌 법을 내세우고서 진실로 여김이니, 대혜여, 이를 허망한 분별과 집착으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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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취하여 '머무르는 지혜'라고 이름한다.

 

대혜여, 이를 두 가지 지혜의 모양이라 한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필경에 이 두 가지 모양을 알고는, 법무아(法無我)에 나아가서 진실한 지혜의 지위와 행상(行相)을 잘 알 것이며, 알고는 곧 초지(初地)에 올라가서 백 가지 삼매를 얻고, 삼매의 힘에 의하여 백의 부처님과 백의 보살을 볼 것이며, 과거와 미래의 각각 백겁의 일을 능히 알고, 백 가지 부처님의 세계를 비출 것이다. 백 가지 부처님의 세계를 비추고는 모든 지위에 올라가는 지혜 모양을 잘 알 것이다.

 

그 본원력(本願力)으로 날세고 신속하게 여러 가지 신통을 보이고 나타낼 것이며, 법운지(法雲地)에서는 법우(法雨)에 의하여 지위를 받고, 여래의 안으로 얻는 구경 법신의 지혜자리를 증득할 것이요, 십무량(十無量)인 선근(善根)과 원(願)에 의하여 이리저리 중생을 교화하여 여러 가지로 응화(應化)하며 자신이 여러 가지 광명을 보이고 나타낼 것이니, 자신이 증득하는 지혜와 삼매락(三昧樂)을 수행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사대(四大)와 사진(四塵)의 모양을 잘 알아야 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보살의 사대와 사진의 모양을 잘 아는 것인가?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수행할 것이니, 이른바 진실이란 말하자면 사대가 없는 곳이니, 사대를 본래 생하지 않은 것으로 관찰함이다. 이와 같이 관찰하고서는 또 생각하기를, '관찰한 것은 오직 자심의 견(見)과 허망한 각지(覺知)며, 그로써 외진(外塵)을 본 것이요, 실물이 있는 것은 아니니, 그것은 명자(名字) 뿐이며, 분별심으로 본 것이라 이른바 삼계(三界)로 사대와 사진의 상을 떠난 것이다'라고 하여 이와 같이 보고서, 네 가지 견(見)을 떠나 청정 법을 보며, 나와 내 것이라 함을 떠나고, 자기 모양인 여실법(如實法)에 머무른다.

 

대혜여, 자기 모양[自相]인 여실법 가운데 머무름이란, 건립한 모든 법이 생(生)함이 없는 자기 모양의 법에 머무름이다.

 

대혜여, 사대(四大) 가운데 어찌하여 사진(四塵)이 있는가? 대혜여, 망상(妄想)으로 부드럽고 연하며, 습윤(濕潤)함을 분별하므로 안팎의 수대(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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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를 낸 것이다.

 

대혜여, 망상으로 '있는 바 굳은 모양'을 분별하므로 안팎의 지대(地大)를 낸 것이다.

 

대혜여, 망상으로 안팎과 또한 허공을 분별하므로 안팎의 생각이 생겼으며, 허망한 안팎의 사견(邪見)에 집착하므로 5음(陰)의 취락(聚落 : 집단)과 사대와 사진이 생긴 것이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식(識)이 능히 여러 가지 경계에 집착하고, 다른 도[異道]를 구하기 좋아하여 저 경계를 취한 것이다.

 

대혜여, 사대(四大)가 넷이 있으니, 색(色) · 향 (香) · 미(味) · 촉(觸)이다.

 

대혜여, 사대는 원인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땅의 자체와 형상과 장단(長短)이 사대의 상을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혜여, 형상 · 대소(大小) · 상하(上下) 용모에 의하여 모든 법을 낸 것이니, 형상과 대소와 장단을 떠나서 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외도가 허망하게 사대와 사진을 분별하는 것은 나의 법에서 이와 같이 분별함이 아니다.

 

대혜여, 내 그대를 위하여 5음(陰)의 체상(體相)을 말하겠다.

 

대혜여, 어떤 것이 5음의 모양인가? 이는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이다.

 

대혜여, 4음(陰)은 색(色)이 없는 것이니, 이는 수 · 상 · 행 · 식이다.

 

대혜여, 색은 사대(四大)에 의하여 생긴 것이니, 사대는 피차(彼此)가 같지 아니한 모양이다.

 

대혜여, 색상이 없는 법은 허공과 같으니, 어찌 네 가지의 수상(數相)을 이루겠는가.

 

대혜여, 비유컨대, 허공은 수상을 떠났는데, 허망하게 분별하여 이는 허공이라고 함과 같다.

 

대혜여, 음(陰)의 수상(數相)은 모든 상을 떠났으며, 유무상(有無相)을 떠나고, 네 가지 상을 떠났지만, 어리석은 범부는 모든 수상을 말하니,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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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내가 말한 '모든 상이 환(幻)과 같아서 여러 가지 형상이 하나와 둘의 모양을 떠났다'라고 함은 가명(假名)에 의하여 말한 것이니, 꿈과 거울의 물상[鏡像]과 같아서 소의(所依)를 떠난 것이 아니다.

 

대혜여, 만약 성인의 지혜로 수행하여 분별함에는 5음을 허망함으로 보니, 대혜여, 이를 5음의 5음 체상이 없는 것이라 이름함이다.

 

대혜여, 그대는 지금 마땅히 이와 같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상을 떠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떠나 여러 보살을 위하여 모든 법상(法相)을 떠난 적정(寂靜)의 법을 말해 줄 것이니, 외도의 모든 견(見)의 상을 막기 위함이다.

 

대혜여, 적정법을 말하여 청정한 무아(無我)의 상을 증득하고 원행지(遠行地)에 들어가며, 원행지에 들어가고는 한량없는 삼매와 자재(自在)한 여의생신(如意生身)을 얻으며, 제법의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고, 자재한 신통력(神通力)을 얻어 행하며 일체 중생에 수순하여 자재한 작용이 큰 땅과 같을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큰 땅이 일체 중생에게 뜻을 따라 쓰임과 같으니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중생의 쓰임을 따르는 것이 또한 그와 같다.

 

대혜여, 외도의 말하는 네 가지 열반이 있으니, 무엇이 넷인가? 첫째는 자체상(自體相) 열반이요, 둘째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고 없는 열반이요, 셋째는 자각체(自覺體)가 있고 없는 열반이요, 넷째는 모든 음(陰)의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과 상속체(相續體)를 끊은 열반이니, 대혜여, 이를 외도의 네 가지 열반이라 함이요, 내가 말한 바는 아니다.

 

대혜여, 내가 말한 바는 허망한 경계를 보고 분별하는 식(識)이 없어진 것을 열반이라 이름한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어찌 여덟 가지 식(識)을 말씀하지 아니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여덟 가지 식(識)을 말한다."

 

                                                                                                                          [125 / 415] 쪽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만약 세존께서 여덟 가지 식을 말씀하신다면 무슨 까닭으로 다만 의식(意識)이 전멸(轉滅)한다 말씀하시고, 7식(識)이 전멸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저 념(念)과 관(觀)에 의지하여 있기 때문에, 전식(轉識)이 멸하면 7식이 또한 멸한다."

 

대혜여, 의식은 경계에 집착하고 취하여 생긴 것이니, 생기고는 여러 가지 훈습(熏習)으로 아리야식(阿梨耶識)을 증장(增長)하므로 나와 내 것이라 함을 떠난 모양에서 허망한 공(空)에 집착하여 분별을 낸다.

 

대혜여, 저 두 가지 식(識)은 차별상(差別相)이 없으니, 아리야식에 의하여 자심에서 나타난 경계의 관(觀)함을 따라서 망상에 집착하여 여러 가지 마음이 생(生)하는 것이 묶은 대나무가 번갈아 서로 인(因)이 되는 것과 같으며, 큰 바닷물결과 같으므로 생멸(生滅)이 있다. 그러므로 대혜여, 의식이 전멸하면 일곱 가지 식도 전멸한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열반을 취하지 않으며,

또한 짓는 상[作相]도 버리지 않아

허망한 마음 굴려서 없앴으니,

그러므로 열반을 얻었다 말하리.

저 인(因)과 념(念)에 의하여

의(意)는 모든 경계를 취향하며

식(識)은 심(心)과 더불어 인을 짓고

심은 식의 소의(所依)가 되나니.

물의 흐름이 고갈되면

파랑이 곧 일지 않듯이,

 

                                                                                                                        [126 / 415] 쪽

이러한 의식이 멸하면

여러 가지 식도 나지 않는다.

 

대혜여, 내가 그대를 위하여 허망하게 분별하는 법체(法體)의 차별상을 말했으니, 그대와 보살마하살은 잘 분별하여 허망한 법체인 차별의 모양을 알 것이며, 허망한 법체인 차별의 모양을 알고는 분별과 분별할 바의 법을 떠나고, 자신이 안으로 수행하는 법을 잘 알고 외도의 능취(能取)와 가취(可取)의 경계를 멀리 떠나며, 여러 가지 허망하게 분별하는 인연법의 체상(體相)을 멀리 떠나서 다시 허망한 상을 분별하지 말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법체인 차별의 모양인가? 대혜여 허망한 분별의 자체인 차별상이 열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열두 가지인가? 첫째는 언어(言語)의 분별이요, 둘째는 가지(可知)의 분별이요, 셋째는 상(相)의 분별이요, 넷째는 재물의 분별이요, 다섯째는 실체(實體)의 분별이요, 여섯째는 인(因)의 분별이요, 일곱째는 견해의 분별이요, 여덟째는 건립(建立)의 분별이요, 아홉째는 생(生)의 분별이요, 열째는 불생(不生)의 분별이요, 열한째는 화합(和合)의 분별이요, 열두째는 박(縛)과 불박(不縛)의 분별이니, 대혜여 이를 분별의 자체상인 차별상이라 한다.

 

대혜여, 언어의 분별이란, 여러 가지 언어는 아름답고 묘한 음성을 좋아하여 집착함이니, 대혜여, 이를 언어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가지(可知)의 분별이란 생각하기를, '마땅히 현전(現前)의 법과 사실인 일의 모양이 있어서, 성인의 수행함도 저 법에 의지하여 언어가 생긴 것임을 안 것이다'라고 하여 이와 같이 분별함이니, 대혜여, 이를 가지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상(相)의 분별이란, 곧 저 가지(可知)의 경계 가운데 열(熱)과 습(濕)과 움직임[動]과 견고함[堅]의 여러 가지 모양을 고집하여 사실인척 하는 것이 새, 짐승들이 허공에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음이니, 대혜여, 이를 상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재물의 분별이란, 금(金) · 은(銀) 등의 여러 가지 보배인 경계를

 

                                                                                                                           [127 / 415] 쪽

좋아함이니, 대혜여, 이를 재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실체(實體 : 自體)의 분별이란 법이 있는 자체의 형상을 전념(專念)하기를, '이 법은 이와 같고 이와 같아서 다르지 않고, 정견(正見)의 견(見)이 아니다'라고 분별함이니, 대혜여, 이를 자체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인(因)의 분별이란, 어떠한 인(因)과 어떠한 연(緣)에서, 유(有)와 무(無)를 요별(了別)하여 인상(因相)으로 요별하는 상을 내는 것이니, 대혜여, 이를 인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견해의 분별이란, 유와 무,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못함의 사견(邪見)을 외도가 집착하여 분별함이니, 대혜여, 이를 견해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건립(建立)의 분별이란, 나와 내 것이라고 하는 상을 취하여 허망한 법을 말한 것이니, 대혜여, 이를 건립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생(生)의 분별이란, 뭇 인연에 의지하여 유무법에서 집착심(執着心)을 낸 것이니, 대혜여, 이를 생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불생(不生)의 분별이란, 일체법이 본래 생함이 아니니, 본래 없기 때문이며, 인연에 의하여 있고 인과가 없다는 것이니, 대혜여, 이를 불생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화합(和合)의 분별이란, 어떠한 법들이 화합하는 것은 금(金 : 바늘)과 누(縷 : 실)가 어울림과 같다 함이니, 대혜여, 이를 화합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박(縛)과 불박(不縛)의 분별이란, 묶이는 인(因)에 집착함이란 박(縛)과 같다는 것이니, 대혜여, 사람이 방편으로 줄을 맺어서 매듭을 만들어 맺었다가 도로 푸는 것과 같은 것이니, 대혜여, 이를 박과 불박의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이를 허망하게 분별하는 법체의 차별상이라 이름한다. 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법체의 차별상에서 모든 범부들이 유와 무에 집착하고, 법상의 여러 가지 인연에 집착한 것이니, 그러므로 대혜여, 법체의 차별상을 분별하여 여러 가지 법을 보고 집착하여 사실로 여기는 것이 환상에 의하여 여러 가지 일을 보는 것과 같지만, 범부는 분별하기를 환상과 다른 이러한 법이

 

                                                                                                                          [128 / 415] 쪽

있는 것으로 안다.

 

대혜여, 나는 여러 가지 법에서 환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또한 다르지 아니함도 아니라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환상이 여러 가지 법과 다르다면, 마땅히 환상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법이 나지 않을 것이며, 만약 환상이 곧 여러 가지 법이라면, 마땅히 달리 보이지 않겠지만, 이는 환상이며, 이는 여러 가지 법이라 하여 차별됨을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다르지 않으며 다르지 아니함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그대와 여러 보살마하살은 환상의 실(實)이 있거나 없다고 분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은 경계에 의해 속박되며

지각도 경계를 따라 생하니,

고요하고 수승한 곳에서만

평등한 지혜가 생한다.

망상(妄想)은 분별로서는 있지만

연기법(緣起法)에는 없거늘

허망을 취해 미란(迷亂)했기에

다른 힘으로 생김을 알지 못하네.

여러 가지 인연으로 생긴 법이란

바로 환(幻)이며 진실이 아니니,

저 여러 가지 생각으로

허망하게 분별하면 될 수 없으리.

저 생각이란 바로 허물이며

모두 마음의 속박으로부터 생한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가 없어

인연법을 분별한다네.

 

                                                                                                                           [129 / 415] 쪽

이 모든 망상의 자체는

곧 이 연기법으로,

망상이 여러 가지 있으므로

뭇 인연 가운데 분별함이네.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와

세 번째 인(因) 없이 나는 것이며

망상으로 세제를 말하니

이를 끊으면 성인의 경계라네.

비유컨대 수행하는 이가

하나의 일에서 여러 가지를 나타냄 같으나

저 법은 여러 가지가 없으니

분별상도 이와 같다.

눈의 여러 가지 눈병처럼

망상으로 온갖 색상을 보지만

눈병은 색(色)과 비색(非色)도 없듯이

지혜 없이 법을 취함도 그러하다네.

진금(眞金)이 때(垢)를 떠난 것 같으며

물이 탁한 진흙 떠남과 같고

허공이 구름을 떠났듯이

진법(眞法)의 깨끗함 또한 그렇다네.

망상법은 있지 않으며

인연법도 또한 없는데,

유(有)를 취하고 무(無)를 비방함이여

이는 분별로 보는 이의 견해이다.

 

                                                                                                                          [130 / 415] 쪽

망상이 만약 진실이 아니고

인연법이 만약 진실이라면,

인을 떠나 마땅히 법이 생기며

실법(實法)은 실법을 생하리.

허망으로 인해 법이라 한 것이며

모든 인연이 생함을 본 것이니,

망상과 이름이 서로 떠나지 아니하여

이와 같이 허망이 생긴 것이라네.

허망은 본래 진실함 없으니.....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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