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칠보산의 감천(甘泉)과 코끼리의 비유(166)

근와(槿瓦) 2015. 10. 27. 00:55

칠보산의 감천(甘泉)과 코끼리의 비유(166)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그때 세존은 대중에게 고하시기를,

“너희들에게 만약 의문이 있으면 마음에 있는 대로 물어도 좋다. 나는 능히 그 의문을 풀어 주리라.”

 

회중에 사자후(獅子吼)라는 한 보살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세존을 예배하고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불성에 관해서 조금만 더 설해 주시옵소서.”

 

세존 : “사자후여, 모든 중생은 말세에 바로 비길 수 없는 각을 얻게 되리라. 사자후여, 비유컨대 집에 유락(乳酪)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연유(煉乳)냐고 묻는다면 유락은 연유는 아니지만 그 속에서 연유를 얻을 수가 있기는 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아서 모두가 불성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모름지기 마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비길 수 없는 각을 성취할 수가 있다. 때문에 나는 모든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항상 말하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중생들이 얻은 바의 일승(一乘)으로 모든 부처의 어머니인 것이다.

 

비유컨대 신월(新月)은 볼 수 없지만,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비유컨대 설산에 인욕(忍辱)이라는 풀이 있는데 소가 이것을 먹으면 제호(醍醐)를 만들어 내지만 다른 풀을 먹으면 제호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때 설령 제호가 없다고 해서 설산에 인욕의 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지금까지의 가르침에 없었다고 해서 불성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비유컨대 무쇠도 불에 넣으면 빨갛게 달구어 지지만 꺼내면 식어서 다시 검게 되는 것과 같이 모든 중생은 번뇌의 불이 꺼지면 곧 불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자후여, 열반이라 함은 곧 번뇌의 불이 꺼진 것을 말한다. 또 열반은 방이므로 능히 번뇌의 풍우를 막을 수는 있다. 열반은 귀처(歸處)이며 능히 일체 포외(怖畏)의 의지처가 된다. 또 모래톱(洲渚)이라 이름한다. 욕, 유(有), 견(見) 및 무명의 폭류도 이를 띄울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필경(畢竟)의 의(依)라고 이름한다. 마침내 능히 일체의 즐거움을 얻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자후여, 모든 것을 지혜의 눈으로써 보면 밝지 못하다. 부처의 눈으로써 봐야 밝다. 그리고 본다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안견(眼見)과 문견(聞見)이다. 모든 부처가 눈으로써 불성을 보는 것은 손바닥의 암마라(菴摩羅) 열매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중생들은 문견을 하는 것뿐이므로 밝지는 못하다. 만약 마음 속에 신심을 일으켰다면 이제는 단순한 문견은 아니다. 그 신심에는 두 가지의 인이 있다. 문법(聞法)과 사유(思惟)이다. 신심은 문법에 의해, 문법은 신심에 인한다.

 

사자후여, 일체의 법은 인연에 의해 나오고, 인연에 의해 멸한다. 그렇지만 중생들의 불성은 파괴되지 않고 계박되지도 않고 마치 허공과 같다. 모든 중생에게는 모두 이 허공이 있다. 그렇지만 이미 허공과 같은 것이므로 범부에게는 안 보인다. 다만 보살이 조금이나마 이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사자후여, 이것은 여러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므로 중생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므로, 번뇌에 계박되어 생사의 세계에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만약 불성을 보면 생사를 뛰어넘어서 열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자후 : “세존이시여, 만약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면 어째서 마음의 퇴전이 있사옵니까?”

세존 : “사자후여, 참(實)에는 마음의 퇴전이란 없다. 만약 마음이 물러서는 일이 있다면 끝내 도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늦게 얻기 때문에 이것을 물러선다고 말할 뿐이다. 그것은 모든 인연이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바른 인(因)과 연(緣)의 인, 이 두 가지 인을 설한다. 바른 인은 불성이며 연의 인이란 보리심을 말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에 의해 마치 돌에서 금을 뽑아내듯이 비길 수 없는 각을 얻는 것이다.

 

사자후여, 마음의 퇴전이 있다고 해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비유컨대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어느 곳에 칠보의 산이 있는데 산에 우물이 있어 그 물은 맑고 그 맛이 달았다. 능히 이곳에만 간다면 가난도 없어지고 그 우물물만 먹으면 수명도 연장된다. 다만 길이 멀고 험하므로 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가자고 하여 한 사람은 여장을 갖추고 한 사람은 아무 것도 갖지 않고 함께 나섰던 바 길에서 많은 보물을 가진 사람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그 사람에게 물었다. ‘이 사람아, 저곳에 참된 칠보산이 있는가’하고. 그 사람이 말했다. ‘나는 이미 그 보물을 취하였고 또 샘물도 마시고 오는 길이다. 그러나 길은 험하고 도둑이 많아 가는 자가 천만 명이 될지라도 이르는 자는 참으로 적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한 사람은 후회하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을까? 나에게는 재산도 조금은 있다. 만약 도중에 죽임을 당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이미 다녀온 사람이 있을진대 나 역시 가지 못할 것은 없다. 만약 갈 수 있다면 소원대로 재물과 샘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갈 수 없다면 다만 죽는 길뿐이다. 나아가 그곳에 이르러 그 소원을 이루고 돌아오면 부모를 섬길 수도 있고 종친들도 돌볼 수 있다’고 말하며 여정을 계속했다고 한다.

 

사자후여, 칠보의 산이란 대열반을 말하는 것이다. 감천(甘泉)이란 불성을 말하는 것이다. 곧장 가는 자는 물러서지 않는 보살, 돌아가는 자는 물러간 보살이다.

 

사자후여, 중생들의 불성은 그 길과 같이 상주하며 변하지 않는다. 뉘우치고 돌아온 자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상주가 아니라고 하지 못한다.

 

사자후여, 보리의 도에는 결코 물러서는 자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중생은 반드시 도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중생에게는 설사 다섯 가지의 역죄를 짓는다든가 네 가지의 무거운 금계를 범한다든가 하는 선근을 끊은 중생들일지라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사자후여, 비유컨대 등불이 켜지면 어둠이 없어지고 등불이 꺼지면 어둠이 생기듯이, 또 납(蠟)의 도장을 진흙탕에 찍으면 인(印)은 없어지고 그 흔적으로 무늬만을 남기듯이 중생들의 업의 과(果)도 그와 같은 것이다. 이 마음과 몸이 없어지고 다른 몸과 마음이 이어서 이루어진다고는 하지만 모든 중생은 마찬가지로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비유컨대 독을 젖 속에 넣으면 젖이 제호(醍醐)가 되더라도 모두 독이 된다. 그리고 젖을 낙(酪)이라고도 하지 않고, 낙 또한 젖이라고도 하지 않으며, 제호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름은 각각 바꿔지지만 독성은 없어지지 않은 채 모두 오미(五味)속에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실은 독을 제호 속에 넣은 것은 아니지만 만약 이 제호를 마신다면 그 사람은 죽고 말 것이다. 불성도 그와 같아서 다섯 가지 도에 주하면서 다른 몸을 받고 있지만 불성은 항상 하나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사자후여, 열반에는 상(相)이 없다. 상이라는 것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의 상, 생멸의 상, 남녀의 상을 말한다. 열반에는 이러한 상이 없는 것이다.

 

사자후여, 그러니 상에 집착하는 자는 우치를 낳고 우치가 있으면 갈애가 생기며, 갈애가 생기면 계박이 되고, 계박이 되면 생을 받고 생을 받으므로 죽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제자들의 선정과 지혜와 사심(捨心)을 닦는다면 능히 이의 상을 끊을 것이다. 나무를 뽑는데는 먼저 흔들어서 뽑으면 쉽게 뽑히듯이, 또 옷을 빠는데도 먼저 잿물로 씻고 뒤에 청수로 헹구면 깨끗해지듯이, 또 장수는 먼저 갑옷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그 후에 능히 적을 쳐부수듯이 보살은 먼저 이 세 가지를 닦아야 한다.

 

사자후여, 혹은 즐거움을 받는 일로, 혹은 법을 설한 일로, 혹은 보시를 받는 일로 교만이 일어났을 때에는 마땅히 선정을 닦는 것이 좋다. 지혜를 닦아서는 안 된다. 온갖 노력을 다해도 각을 얻을 수 없다고 뉘우치고 기력이 둔하여 자신을 마음대로 조복할 수가 없다든가, 번뇌가 성하기 때문에 스스로 계를 훼손한다고 하는 걱정이 따를 때에는 마땅히 지혜를 닦는 것이 좋다. 만약 선정과 지혜를 닦아도 번뇌를 일으킨다면 이 때에는 사심을 닦아서는 안 된다. 마땅히 경을 읽고 또 부처를 염하는 것이 좋다.

 

사자후여, 부처의 법신에는 주처가 없다. 불성도 또 모름지기 주처가 없다. 모든 중생은 이에 대하여 퇴타(退墮)하는 일이 없이 반드시 얻어지고, 또 반드시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모든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어떤 왕이 한 대신에게 한 마리의 코끼리를 몰게 하여 맹인에게 보였던 바, 어려 맹인들은 각자 손으로 이것을 만져 보았다. 왕은 그들을 불러서 물어 보았다. ‘너희들은 코끼리가 무엇을 닮았다고 생각하는가’고 했다. 그러자 어금니를 만진 자는 코끼리는 무뿌리와 같다고 했고, 귀에 손을 댄 자는 키(箕)와 같다고 했고, 얼굴을 만진 자는 돌과 같다고 했고, 코를 만진 자는 절구공이와 같다고 했고, 다리를 만진 자는 절구통과 같다고 했고, 등을 만진 자는 침상과 같다고 했으며, 배를 만진 자는 항아리와 같다, 꼬리를 만진 자는 새끼줄과 같다고 답했다.

 

사자후여, 저 여러 맹인의 코끼리에 대한 설명은 완전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전혀 틀리게 풀이한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이 중생들은 혹은 몸과 마음을 불성이라고 말하고 혹은 몸과 마음이 떨어져 있는「아」를 불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불성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사자후여, 부처는 상주해 있다. 그 법신은 가이없고 장애가 없고 생하지도 않으며 멸하지도 않는다. 이것을「아」라고 하는 것이다. 중생에게는 참으로 이와 같은 아는 없다. 그러나 반드시 이것은 얻어질 것임이 틀림없으므로 불성이 있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사자후여, 대자 대비를 이름하여 불성이라 한다. 그것은 대자 대비는 항상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은 것으로 모든 중생은 반드시 이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자 대비는 불성인 것이며 불성은 곧 부처인 것이다. 또 대희 대사(大喜大捨)를 이름하여 불성이라 한다. 그것은 보살이 모든 미지의 세계를 버리지 않는다면 한없는 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은 반드시 이것을 얻을 것이 틀림없으므로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희 대사는 불성이다. 불성은 곧 부처인 것이다. 또 불성을 대신심(大信心)이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심에 의하여 능히 보살도를 다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얻을 것임이 틀림없으므로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대신심은 불성인 것이다. 불성은 곧 부처인 것이다. 또 불성을 일자지(一子地)라고 이름한다. 그것은 일자지에 의하여 보살은 일체의 중생에게 대해, 그리고 모든 중생은 반드시 이것을 얻을 것이 틀림없으므로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일자지는 불성이다. 불성은 곧 부처인 것이다.

 

사자후여, 이 가르침은 바다와 같은 것이며 그 밑바닥을 궁구하려고 해도 궁구하지 못한다. 게다가 일미(一味)로써 변함이 없다. 일체 중생은 마찬가지로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해탈로 향하는 교법도 모두 동일한 것이며, 그 해탈도 동일한 것이며 인(因)도 하나 과(果)도 하나, 그 경계의 공덕도 역시 동일한 것이다. 모든 것은 반드시 상주, 묘악(妙樂), 자재(自在), 청정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 가르침을 지니는 자는 조수(潮水)가 차더라도 일정한 한도에 넘치지 않도록, 설령 몸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금계를 범하지 않는다. 또 이곳에는 무량한 보물이 있고 무량한 불덕도 있으므로 역악(逆惡)의 사시(死屍)도 이곳에는 깃들지 못한다. 일체 중생은 평등한 것이며 동일한 법성으로 이 경(經)에는 항상 느는 일도 주는 일도 없는 것이다.”

 

이때 우바마나라는 제자가 있었다. 일찍이 아난이 세존의 시자가 아닐 때에 항상 옆에서 모시고 일을 돌봐드리고 있었는데, 세존께서 병으로 누워 계시다는 말을 듣고 깊이 근심하여 세존께 가까이 가서 그 앞에 섰다.

 

그러자 세존이 우바마나에게,

“너는 지금 내 앞에 서서는 안 된다.”

고 말씀하시므로 그는 옆으로 물러났다.

 

아난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랫동안 부처님의 좌우에서 섬기고 있사옵니다만 지금까지 이와 같은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멸도에 들어 가시려고 하시면서 어찌하여 우바마나를 앞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옵니까?”

 

세존 : “아난이여, 나는 그를 기피함이 아니다. 신들이 지금 나를 보려고 다투어 오고 있으나 우바마나가 내 앞에 있으므로 그들은 그 위덕에 막혀서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난 : “세존이시여, 우바마나는 어떠한 인(因)을 닦아서 지금과 같은 위덕을 얻었습니까?”

세존은 이에 대하여 옛날 비바시불(毘婆尸佛)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그는 기쁜 마음으로 손에 풀의 횃불을 들고 부처의 발 밑을 비추어 준 일이 있었는데, 이 인연에 의하여 지금 그 위덕이 신들에게 미쳐 신들의 빛조차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