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환희의 가르침과 니건타(尼乾陀)의 죽음(142)

근와(槿瓦) 2015. 10. 3. 00:46

환희의 가르침과 니건타(尼乾陀)의 죽음(142)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바사닉왕이 그 만년의 어느 날, 세존을 기원 정사로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고 있으려니까 뜻하지 않게도 말리 부인(末利夫人)의 죽음이 전해졌다. 왕은 지나간 날을 생각하고 이 슬픈 이별에 낙담하여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드리우고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세존은 간곡히 슬퍼하는 왕을 위로하셨다.

 

“왕이여, 어떠한 세계에 있어서도 피하기 어려운 일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다하는 것과 멸하는 일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여하히 하더라도 피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왕이여, 지혜가 부족한 범속한 사람은 그 늙어야 할 것이 늙고 병들어야 할 것이 병들고 죽어야 할 것이 죽고 다해야 할 것이 다하고 멸해야 할 것이 멸했을 때, 부질없이 울며 슬퍼하고 미란(迷亂)에 빠지지만, 지혜가 풍부한 불제자는 이 경우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들 늙음이나 병이나 죽음 등은 나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이것에 관해 울며 슬퍼하고 미란에 빠진다면 식욕을 잃어 신체는 쇠약하고 일은 할 수가 없어 원수인 악마는 기뻐하고 내 편은 슬퍼하리라’고. 이렇듯 생각하여 울며 슬퍼하지 않습니다. 범인은 독화살에 맞아 스스로 괴로워하고 불제자는 독화살을 피하여 근심이 없고 스스로 번뇌가 없는 적정의 경에 드는 것입니다.”

 

세존은 그로부터 석가족의 나라에 들어가 에단나의 숲 강당에 체재하셨다. 이때 순타(純陀)는 파바(波婆)에 안거하고 있으면서 니건타(尼乾陀)의 죽음에 의해 그 무리가 양파로 나누어져 서로 싸우는 것을 역력히 보았다. 순타는 안거를 마치고 사마 마을에 체재하는 아난에게 나아가 이 일을 이야기하자, 아난은 즉시 순타를 데리고서 세존의 뒤를 좇아 세존을 뵙고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순타는 이번 안거를 파바에서 보냈습니다만, 이와 같이 말합니다. 니건타가 얼마 전 파바에서 죽었습니다. 그 뒤 니건타의 무리는 두 파로 나누어져 ’너는 가르침도 계도 모른다. 너의 설법은 사견이다. 너는 이미 파계하였다‘고 서로 공격하고 이 때문에 출가한 제자도 재가의 제자도 가르침을 싫어하여 몹시 세력이 쇠퇴해졌다고 합니다.”

 

세존이 분부하시기를,

“순타여, 열반과 적정에 이끌리지 않고 바르게 각을 얻지 못한 자에게 설한 가르침의 최후는 그와 같은 것이다. 순타여, 스승이 바른 각자가 아니고 따라서 그 가르침이 잘못되어 있을 경우, 제자가 그 가르침대로 도를 닦지 않고 가르침을 버리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스승과 법은 비난 받아야만 할 것, 그 제자는 칭찬 받아야 할 것이다. 도리어 그 제자에게 ‘스승의 가르침을 지켜라’고 권하는 사람과 그 권유에 의해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은 부덕(不德)을 낳는 자이다.

 

순타여, 스승이 바른 각자가 아니고 따라서 그 가르침이 잘못되어 있을 경우, 제자가 그 가르침대로 도를 닦고 그 법을 굳게 지니고 지킨다면, 되도록 그 제자로 하여금 가르침을 버리도록 해야 한다. 그 가르침에 머무르는 것을 상찬한다면 상찬하는 사람도 상찬을 받는 사람도 함께 부덕을 낳는 것이다. 순타여, 스승이 바른 각자이고 따라서 그 법이 진실하다고 한다면, 제자는 그 가르침에 머무르고 가르침대로 도를 닦도록 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순타여, 여기에 바로 깨친 스승이 나타나 법을 설한다. 아직껏 제자가 그 법을 깨치지 못하고 널리 인간에게 베풀기 전에 스승이 죽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제자의 슬픔이다. 제자가 그 법을 잘 깨치고 그 법대로 행하고 널리 인간에게 베푼 뒤 스승이 죽는다면, 그것은 제자의 슬픔이 아니다.

 

순타여, 만일 가르침이, 그것을 설하는 스승은 출가하여 오래도록 교계(敎界)의 가르침의 기숙(耆宿)이 되고 그의 제자는 출가자도 재가자도 현명하며 마음을 단련하고 두려움이 없어 안온(安穩)의 경지에 이르러 법을 바르게 설하고 동문(同門)들 사이에 생긴 쟁론도 진정시키는 능력이 있으며 그 가르침이 널리 퍼져 능히 세상에 알려지고 이득도 명예도 그지없는 것에 이르렀다면, 결함이 없고 원만하다고 일컫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중에 하나가 결여되더라도 그 가르침은 원만한 것이 아니다.

 

순타여, 나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세간의 스승으로 나타나, 열반의 적정으로 이끄는 법을 설했다. 나의 제자는 정법(正法)을 잘 이해하고 청정한 행을 원만히 닦고 있다. 나는 또 세상을 버린지 오래 된 교계(敎界)의 장로인 것이다. 나의 제자는 재가자도 출가자도 현명하여 마음을 단련하고 두려움없이 안온한 경지에 이르러 법을 바르게 설하고 동문 사이에 생기는 쟁론도 진정시키는 능력이 있어 나의 가르침은 널리 퍼져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 또 이 세간에 있는 여러 스승 중에서 나만큼, 승가 중에서 나의 제자의 승가만큼 그지없는 공양과 그지없는 명예를 믿고 있는 자는 없다. 누구라도 이지러진 데가 없이 원만한 가르침이 있다고 바르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이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순타여, 나마(羅摩)의 아들 울다가(鬱陀迦)는 능히 보되 보지 않는다는 말을 썼지만, 이것은 날카로운 면도칼의 등을 보고서 날을 보지 않는다는 의미로 쓴 것이다. 하잘 것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말을 바르게 쓰면, 원만한 이지러짐이 없는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좀더 명백히 하자, 좀더 원만히 하리라 생각해 보아도 어디에도 보족할 장소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순타여, 그대들은 나의 설법을 모여서 서로 읽되 다투어서는 안 된다. 세간의 이익과 행복이 되기 위해 영구히 이 법을 전하도록 글과 뜻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순타여, 그대들이 서로 모였을 때 만일 한 사람이 법을 설하는 데 있어, 그대들은 이것을 글도 틀리고 뜻도 사특한 것이라 생각하더라도 곧 이것을 좋다, 나쁘다고 해서는 안 된다. 조용히 그 제자에게 ‘그 뜻에는 이 문구(文句)와 그 문구의 어느 쪽이 적당하겠는가, 이 문구에 관해서는 이 뜻과 그 뜻의 어느 쪽이 적당하겠는가’하고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제자가 이 문구와 이 뜻이 적당하다고 말하더라도 즉시 물리치고 비난하지 않고서 다시 간곡하게 그 글과 뜻에 관해 알려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문구는 바르고 뜻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제자에 대해서도, 뜻은 바르고 문구가 틀렸다는 것을 말하는 제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글도 뜻도 바르게 말하는 제자에게는 선재(善哉)라 하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순타여, 나는 이 현재의 번뇌를 멸하기 위해서만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또 미래의 번뇌를 멸하기 위해서만 법을 설하는 것도 아니다. 미래와 현재의 번뇌를 멸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이다. 순타여, 그러기 때문에 내가 허락한 그대들의 옷은 단지 추위와 더위를 막고 모기나 등에를 막으며 참괴를 위하여 몸을 가리는 것으로서 족한 것이다. 그대들의 식사는 이 법의 그릇을 지탱하고 청정한 행을 닦는 도움이 되는 것만으로서 족한 것이다. 주거도 또한 한서를 막고 모기나 등에를 막으며 기후의 위험을 막고 한거의 즐거움을 이루는 것만으로서 족한 것이다. 약도 또한 병고를 제거하고 건강을 얻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순타여, 이교도들은 석자(釋子)의 무리는 즐거움에 탐닉해 있다고 할른지도 모른다. 이 경우 그대들은 이교도들에게 되묻는 것이 좋겠다. ‘즐거움에 탐닉한다고 함은 어떠한 종류를 가리켜 말하는 것인가? 그것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으므로’라고.

 

순타여, 네 가지 종류의 천한 즐거움에 탐닉하는 일이 있다. 하나는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생물의 생명을 빼앗아 즐거움으로 삼는 일, 둘째는 남의 소유물을 빼앗아 즐거움으로 삼는 일, 셋째는 거짓말을 하고서 즐거움으로 삼는 일, 넷째는 오욕에 탐닉하여 즐거움으로 삼는 일이다. 이 네 가지는 그대들이 피하고 있는 바로서, 만일 이 하나를 갖고서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그것은 신심이 없고 성실이 없는 비난이다.

 

순타여, 이 밖에 또 적정과 열반으로 이끄는 낙이 있다. 그것은 욕을 여의고 악을 여의고 들어가는 선정이다. 이 즐거움에 탐닉하는 자는 성도(聖道)의 깨달음을 얻는 이익이 있는 것이다.

 

순타여, 이교도들은 너희들이 지혜로써 과거를 많이 이야기하고 미래를 말하는 일이 적다고 할지 모른다. 순타여, 부처는 먼 과거에 대해서는 마음에 생각한 만큼 정념에 따르는 지혜를 지니고, 미래에 대해서는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으로서 이 밖에 미혹의 태어남은 없고 보리에서 태어나는 지혜를 가질 뿐이다.

 

순타여, 부처는 일로써 진실하고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좋을 때에 설명할 테지만 거짓된 일은 말하지 않는다. 진실이라고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미래의 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현재에 관해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순타여, 부처란 일체의 일을 깨달은 자를 말하는 것이다. 또 정각의 새벽부터 멸도의 저녁까지 그 말하는 바 모두가 진실한 것이라는 뜻이다. 또 말하는 바와 같이 행하고 행하는 것과 같이 말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일체의 세계에 있어 누구에게도 패하는 일이 없는 승자, 전능자, 통치자라는 뜻이다.

 

순타여, 부처는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단지 이것은 고(苦)이다, 이것은 고의 집(集)이다, 이것은 고의 멸이다, 이것은 고의 멸에 이르는 도이다. 이 네 가지의 것을 설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깨달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순타여, 부처는 세계가 상주라든가 상(常)이 없다든가 세계가 한이 있다든가 한이 없다든가 하는,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닌 일은 설하지 않는다. 과거에 관해, 미래에 관해 여러 가지의 사견을 깨고 단지 몸을 관하고 감각을 관하고 마음을 관하고 모든 법을 관하여 세간의 탐욕과 비애를 이길 수 있는 것을 설하는 것이다.”

 

그때 우바바나(偶波婆那)는 세존의 뒤에 선 채로 세존에게 부채질을 하며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이 가르침은 참으로 기쁜 것이옵니다. 이 가르침을 뭐라고 이름지어야 할까요?”

“우바바나여, 이것을 환희의 가르침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