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념처경(11)-110쪽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01 / 1802] 쪽 정법념처경 제 5 권 원위 바라문 구담 반야류지 한역 김월운 번역
2. 생사품 ③ "또 그 비구는 이렇게 관찰한다. 즉 어찌하여 중생들에게는 갖가지 빛깔과 갖가지 형상이 있으며, 갖가지 도와 갖가지 의지할 곳이 있는가? 그는 또 관찰한다. 즉 갖가지 마음과 갖가지 의지할 곳과 갖가지 신해(信解)가 있고 갖가지 업이 있다. 이런 갖가지 빛깔과 갖가지 형상과 갖가지 도와 갖가지 의지할 곳이 있는 것은, 마치 지혜롭고 교묘한 미술가나 혹은 그 제자가 좋고 편편하며 단단하고 매끄러운 훌륭한 땅을 관찰하여 그 땅을 얻은 뒤에 갖가지 채색을 갖가지로 섞어 좋거나 추하거나 마음먹은 대로 그 형상을 그리는 것처럼, 마음의 업의 미술가나 혹은 그 제자도 그와 같아서 좋고 편편하며 단단하고 매끄러운 업의 과보의 땅과 생사의 땅에 자기가 아는대로 갖가지 형상과 갖가지 도와 갖가지 의지할 곳을 짓는다. 이와 같이 마음의 업의 미술가는 업으로 중생을 만든다. 또 여러 가지 채색이 있어서 흰 물감으로는 하얗게 칠하고, 빨간 물감으로는 빨갛게 칠하며, 노란 물감으로는 노랗게 칠하고, 회색 물감으로는 잿빛나게 칠하며, 검은 물감으로는 검게 칠하는 것처럼, 마음의 업의 미술가도 그와 같아서 흰 것을 반연하면 흰 것을 취하여 천상과 인간에서 흰빛이 된다. 흰빛은 무엇을 뜻하는가? 탐욕 따위의 더러운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기 때문에 흰빛이라 한다. 그와 같이 마음의 업의 미술가는 빨간 채색을 취하며, 천상과 인간에서 빨
[102 / 1802] 쪽 간빛이 된다. 빨간빛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른바 사랑스러운 소리·맛·닿임·냄새·빛깔을 그려 관찰하는 옷이다. 이와 같이 또 마음의 업의 미술가는 노란 채색으로는 축생 세계에서 노란빛이 된다. 노란빛은 무엇을 뜻하는가? 피차 서로 피를 마시고 살을 먹으며, 탐욕·분노·우치로써 서로 해치기 때문에 노란빛이라 한다. 또 마음의 업의 미술가는 비둘기색인 회색을 취하여 반연을 관찰하고 아귀 세계에서 더러운 회색이 된다. 회색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의 몸은 마치 불에 타는 숲처럼 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려 갖가지 고통을 받는데, 마음의 업의 미술가는 질투하는 마음에 사로잡히고 우치의 어두움에 덮이기 때문이다. 또 마음의 업의 미술가는 검은 채색을 취하여 지옥에서 검은빛이 된다. 검은빛은 무엇을 뜻하는가? 검은 업 때문에 지옥에 나서 검은 철벽이 있고 불에 타고 결박을 받아 검은 몸이 되어 갖가지 병을 앓고 굶주림과 목마름은 몸을 괴롭혀 한량없는 고통을 받기 때문이니 이것은 다 자신이 지은 업이요, 남이 지은 것이 아니다. 또 그 비구는 이와 같은 세 세계와 다섯 길의 다섯 가지 채색으로 그려진 생사의 그림옷을 관찰하고 세 세계에 머무르는데, 그 세 세계란 이른바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이다. 마음의 업의 미술가가 음욕을 가까이하면 욕계를 반연하여 갖가지 채색으로 그리고 그 채색에 의해 머무르는데, 거기에는 스무 가지가 있다. 욕계를 떠난 네 가지 선정으로 화필(畵筆)을 삼아 16(地)에 의하는데, 거기에 그려지는 곳은 색계이다. 색계의 반연을 떠난 삼마발제로써 무색계를 반연하는데 이렇게 네 곳을 그린다. 마음의 업의 미술가는 이와 같이 세 세계의 큰 옷을 널리 그린다. 또 그 비구가 관찰할 때에 그 마음의 업의 미술가는 다시 다른 법으로 중생을 그린다. 즉 마음은 미술가와 같고 몸은 채색 그릇과 같으며, 탐욕·분노·우치는 견고한 것과 같고, 반연하는 마음은 사다리와 같으며, 감관은 그림붓과 같고 바깥의 여러 경계, 즉 소리·닿임·맛·빛깔 및 모든 냄새는 갖가지 채색과 같으며, 생사는 땅과 같고 지혜는 광명과 같으며, 부지런한 정진은 손과 같으며, 중생은 그림과 같고 신통은 그 한량없는 형상의 옷과 같
[103 / 1802] 쪽 으며, 한량없는 갖가지 업의 과보가 생기는 것은 완성된 그림과 같다. 또 그 비구가 선정에 의해 관찰할 때에 그 마음의 업의 미술가에게는 다른 종류의 법이 있다. 곧 저 미술가가 권태증을 내지 않고 채색을 잘 다루어 모두 밝고 깨끗하게 하고, 또 훌륭한 그림붓을 알아 훌륭한 빛깔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마음의 업의 미술가도 그와 같아서 권태증을 내지 않고, 혹은 선정을 닦아 선정의 채색을 잘 다루며 밝고 깨끗한 것을 반연하여 채색의 광명과 같이 한다. 도를 닦는 스승은 훌륭한 그림붓과 같고 선정의 상하를 아는 것은 훌륭한 벗과 같으며, 갖고 버리는 것은 권태증을 내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선정으로 마음의 업의 미술가는 그 선정의 땅에 그림을 그려 그처럼 그 빛깔이 좋다.또 저 마음의 업의 미술가가 권태증을 내면 그림이 좋지 않다. 지옥·아귀·축생의 세계와 같은 업의 인연으로 쇠망치를 붓으로 삼고 좋지 않은 채색으로 불법을 받아 가지지 않는 사람을 그린다. 이른바 지옥·아귀·축생으로서 그런 빛깔은 훌륭한 빛깔의 그림이 아니다. 그 내용은 앞에서 자세히 말한 바와 같다. 또 그 비구는 마음의 원숭이를 관찰한다. 저 원숭이를 보면 그 원숭이는 쉬지 않고 분주히 날뛰어 갖가지 나뭇가지와 꽃과 과실나무며 산골짜기와 바윗굴 등의 굽이돈 곳으로 다녀도 장애를 받지 않는 것처럼, 마음의 원숭이도 그와 같아서 다섯 길의 차별은 갖가지 숲과 같고, 지옥·아귀·축생의 여러 길은 저 나무와 같으며, 한량없는 중생은 갖가지 가지와 같고 애욕은 꽃과 잎 같으며, 즐거운 소리와 온갖 냄새·맛 따위를 분별하여 그것으로 갖가지 과실을 삼아 세 세계의 산으로 갈 때 굴 같은 곳으로 가더라도 몸은 장애를 받지 않는다. 이것이 마음의 원숭이로서 이 마음의 원숭이는 항상 지옥·아귀·축생의 생사의 길을 간다. 또 그 비구는 선정에 의해 마음의 광대를 관찰한다. 광대를 보면 그 광대는 갖가지 악기를 가지고 놀이터에서 갖가지로 유희한다. 마음의 광대도 그와 같아서 갖가지 업의 변화로 의복을 삼는다. 놀이터란 다섯 길의 장소를 말한 것이요, 갖가지 장식은 갖가지 인연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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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 1802] 쪽 해탈한다.이 마음이란 한량없는 갖가지의 반연으로 부순 모양과, 자체로써 부순 모양과, 같은 업으로써 부순 모양이다. 마음에 다섯 가지가 있다. 이른바 다섯 길에서 자재로 잡아 번뇌의 마음과 화합하고 상응하여 항상 생사에 있으면서 제일의 의지하는 곳, 즉 허공 등의 세 가지 무위(無爲)의 법을 떠나 다섯 가지 감관으로 부순 모양이다. 그 다섯 가지 마음은 한량없고 끝없는 애욕의 마음으로서 갖가지 부숴진 모양을 의지해 머무른다. 요점을 들어 말하자면 그것은 다 더러운 부분이니, 어떤 방편으로 그 더러운 부분인 세 가지 번뇌의 뿌리를 떠날 수 있을까? 그것을 다스릴 세 가지 방편이 있으니, 이것은 과거·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른 길이다. 즉 탐욕은 더럽다는 생각으로 다스리고 분노는 자비스런 마음으로 다스리며 우치(愚痴)는 인연의 이치로 다스린다. 그는 그 몸에 대해서 이렇게 탐욕을 관찰한다. 즉 그 비구는 몸의 행을 반연하여 낱낱이 몸을 관찰하되, 발톱에 시작해서 머리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관찰한다. 이 추한 몸에서 어떤 것이 나며, 어떤 것이 내 것인가? 이 몸에서 발톱을 떼어 내어 관찰할 때에 발톱도 이 몸이 아니요, 발가락도 이 몸이 아니다. 어는 것이 이 몸이요, 어느 것이 나이며, 어느 것이 내 것인가? 발바닥도 몸이 아니다. 어디서 마음을 일으켜 이것을 내 것이라 하는가? 복사뼈도 내 몸이 아니요, 발꿈치도 내 몸이 아니요, 장딴지도 내 몸이 아니요, 무릎도 내 몸이 아니며, 낯도 내 몸이 아니요, 생식기도 내 몸이 아니며, 해골도 내 몸이 아니요, 항문도 내 몸이 아니며, 이와 같이 등골의 마흔다섯 개의 뼈도 다 내 몸이 아니요, 머리도 내 몸이 아니며, 얼굴의 뼈도 내 몸이 아니요, 머리의 뼈도 내 몸이 아니다. 그 비구가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어느 부분에서도 내 몸을 볼 수 없고, 어느 하나하나의 부분에서도 내 몸을 볼 수 없다. 또 눈·귀·코·혀·몸·뜻의 어디서도 내 몸을 볼 수 없고, 또 내 속에 나가 없음을 관찰할 때 그런 것은
[106 / 1802] 쪽 다 조그만 티끌이다. 이와 같이 부분부분으로 그 몸을 관찰할 때 그것들은 다 겨자씨나 조그만 티끌과 같다. 그는 또 여러 요소[諸大]를 관찰할 때 어느 것이 나이며, 어느 것이 지계(地界)인가? 이와 같이 차례로 어느 것이 나이며, 어느 것이 수계(水界)인가? 어느 것이 나이며, 어느 것이 화계(火界)인가? 어느 것이 나이며, 어느 것이 풍계(風界)인가? 그는 이렇게 관찰할 때에 요소는 나가 아니요, 나는 요소가 아니다. 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요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요소와 나를 떼어 놓고 다시 어떤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다 제1의제(第一義諦)이다. 비유하면 한량없이 많은 나무가 모이면 곧 숲을 볼 수 있지마는, 나무가 바로 숲이 아니요, 숲을 떼어 놓으면 나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제1의제로서 나무를 떠나서 따로 숲이라 이름할 것이 없는 것이다. 또 나무를 관찰할 때에 그 뿌리·줄기·가지·잎 따위를 떠나서 따로 나무가 없다. 제일의제로서는 이런 나무가 없지마는 세제(世諦)에 의하기 때문에 숲도 있고 나무도 있다. 몸도 그와 같아서 발 따위가 모여 다만 이름만 있을 뿐이건마는 세제에 의하기 때문에 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비구는 이와 같이 몸에 대한 법을 알고는 몸에 대한 탐욕을 떠나고, 몸에 대한 탐욕을 떠난 뒤에는 모든 감관·감각·요소에 대한 탐욕을 떠나며, 이미 탐욕을 떠났으므로 그 기쁨과 욕심과 사랑도 그를 얽매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부지런히 관찰하여 욕심을 다스린다. 또 그 비구는 어떻게 부지런히 관찰하여 분노를 다스리는가? 그는 자비스런 마음에 머물러 항상 힘써 관찰한다. 저 악행의 중생들은 이른바 다섯 길의 생사에 떨어져 항상 두려워하니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비구는 그것을 관찰하고는 어머니가 자식을 슬퍼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저 중생들이 저처럼 괴로워하는데 어떻게 성낼 수 있겠는가? 내가 만일 저들을 성낸다면 그것은 부스럼 위에 또 부스럼을 가하는 것이다. 저 중생들은 그 본성이 고뇌이므로 성낼 수 없는 것이다. 분노란 둘째의 가장 큰 번뇌다. 그는 이렇게 부지런히 관찰하여 분노를 다스린다.
[107 / 1802] 쪽 또 그 비구는 어떻게 부지런히 셋째의 가장 큰 번뇌를 관찰하는가? 우치가 중생들을 덮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몸으로 불선을 행하고 입으로도 불선을 행하며 뜻으로도 불선을 행한다. 그리하여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악도에 떨어져 지옥에 태어난다. 저들이 만일 우치를 떠나고 바른 소견을 닦으면, 몸으로 선행을 행하고 입으로도 선행을 행하며 뜻으로도 선행을 행하고, 선법과 불선법을 분명히 알 것이다. 이와 같이 법과 법이 아닌 마음을 분명히 알면 곧 셋째의 가장 큰 번뇌를 멸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부지런히 관찰하여 우치를 다스린다. 그 비구는 이렇게 부지런히 세 가지 번뇌를 관찰하여 그것을 다스린다. 그 세 가지가 없어지면 모든 번뇌가 다 없어질 것이다. 마치 나무 뿌리를 끊으면 껍질·줄기·가지·잎·꽃·열매의 반연들이 다 말라 버리는 것처럼, 그 세 가지 번뇌를 능히 끊으면 모든 번뇌가 다 끊어져 없어질 것이다. 또 수행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바른 법을 따라 법의 행을 관찰한다. 즉 저 비구는 어떻게 제7지에서 제8지를 닦아 얻는가? 그는 보고 들어 알거나 혹은 하늘눈으로 본다. 즉 저 비구는 최초에 이와 같이 여실히 눈을 관찰한다. 즉 어떻게 세상의 우치한 범부들은 눈으로 물질을 보고는 탐하기도 하고 성내기도 하며 혹은 미련한 마음을 내는가? 저 범부들은 친한 벗을 보거나 혹은 여자를 보면 곧 탐하는 마음을 내고, 혹은 견해가 다른 이를 보면 성을 내며, 위의 두 가지를 다 갖춘 이를 보면 탐욕과 분노에 덮여 눈으로 빛깔을 보아도 여실히 보지 못하고 우치는 그 마음을 덮는다. 우치한 범부들은 오직 분별만이 있어서 눈으로 물질을 보면 탐하거나 성내거나 혹은 우치에 덮이는 것이다. 애욕에 미혹한 사람은 제 마음대로 분별하여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하여 거기에 집착한다. 비유하면 살이 없는 짐승의 뼈를 씹는 개가 자기의 침을 뼈에 묻혀 골수를 얻으려는 것과 같다. 그 탐하는 개는 자기의 치아 사이에서 피가 나와 그것을 맛보고는 그것을 골수라 생각하고, 그처럼 맛나는 것이 자기의 피인 줄은 모른다. 맛을 탐하기 때문에 어느새 자기의 혀를 씹어 또 그 맛을 탐하고 탐
[108 / 1802] 쪽 욕에 덮였기 때문에 그것을 골수라 생각한다. 우치한 범부도 그와 같아서 허망한 분별로 눈으로 물질을 보고는 좋아하고 탐착하며 사랑하고 분별하여 물질이라는 그 마른 뼈를 눈과 입 안에 넣을 때, 요소는 치아와 같아서 그것을 씹고, 집착은 침과 같고 애정의 피가 흘러 나오면, 그 피 맛을 탐하고 즐기므로 물질을 아름답다 하여 그 물질에서 맛을 얻는데, 그것은 마치 저 개와 같다. 범부는 우치하여 눈으로 저 뼈와 같은 물질을 보고 허망하게 분별하는 것이 마치 저 개가 뼈를 씹는 것과 같다. 이렇게 관찰하면 눈으로 어떤 물질을 보더라도 그것은 마른 뼈와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치한 범부들은 허망한 분별의 미혹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비구는 이렇게 생각한다. '비구는 어떻게 애욕을 두려워하여 생사를 떠나고 일체의 욕망을 버리는가?' 비유하면 큰 코끼리가 나이 예순이 되었어도 그 힘이 왕성하여 코끼리를 잘 다루는 사람이 가죽 채찍으로 싸워 그것을 잡아 다섯 군데를 묶어 튼튼한 우리 속에 둔다. 그리고 환희단(歡喜團)과 감자(甘蔗 : 사탕수수)와 감자술 등 갖가지 맛난 음식을 주고 또 갖가지 악기와 노래 소리로 즐겁게 하여 근심하지 않게 하면, 그는 숲 속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고 혹은 그 즐거움을 잊고는 보통 코끼리와 같이 살 때, 코끼리를 다루는 사람은 더욱 잘 훈련시켜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준다. 그러나 그 코끼리는 그러한 휴식과 그러한 공양에도 그 마음을 근심과 번민에서 떠나게 하지 못하고, 또 숲 속의 즐거움인 자유로운 노닒을 잊지 못하고, 산골짜기의 수림과 꽃과 열매와 온갖 새의 울음소리와 강가의 즐거움을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생각한 끝에 결박을 끊고 떠난다. 그것은 저 즐거움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다루는 사람에 대해서도 어려워하지 않고 그 튼튼한 우리를 부수고 숲을 향해 갈 때에는 마음에는 조금도 미련이 없다. 그 많은 건다(蹇茶 : 설탕)와 맛난 환희단·감자·감자술·거문고의 음악·노래 소리도 그 마음을 달랠 수 없고 마음을 미혹시킬 수 없다. 숲 속의 즐거움을 잊지 않기 때
[109 / 1802] 쪽 문에 보통 코끼리와 함께 다니고 함께 사는 것을 즐기지 않고 숲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수행하는 비구도 이와 같아서 아득한 과거로부터 세상에 흘러 다니면서 다섯 가지 결박에 묶여 있다. 다섯 가지란, 이른 바 즐거운 소리·닿임·맛·냄새·빛깔이다. 잘 다룸이란, 이른바 눈·귀·코·혀·몸·뜻의 여섯 알음알이이다. 튼튼한 우리란 이른바 즐거운 처자 권속이 사는 곳으로서 하인·재물 그리고 번뇌의 장애에 집착하는 것이다. 많은 환희단과 감자술과 갖가지 맛난 음식이란 무엇인가? 환희단이란 분별하는 마음이요, 음식이란 음욕이며, 음악과 노래 소리란 마음의 애욕의 그물이다. 삿된 소견을 가진 범부는 마치 보통 코끼리와 함께 사는 것과 같다는 것은, 이른바 유신견(有身見)·계취견(戒取見)·의견(疑見)이다. 입에 달다는 것은 이른바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의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준다는 것은, 탐욕·분노·우치에 붙인다는 것이다. 잘 다루어진 코끼리란, 이른바 수행하는 사람이다. 일체의 집착과 우치로 공양하더라도 떠나기를 생각한다는 것은 산 속의 선정을 말하는 것이요, 삼마제(三摩提)를 산굴로 삼아 바른 도의 마음을 낸다는 것은 꽃을 말한 것이며, 과실이란 열반이요, 뭇 새 소리란 법사를 말하는 것이며, 지혜를 강으로 삼고 강을 건너는 어구란 한마음을 말하는 것이요, 이른바 땅이란 사랑[慈]·슬픔[悲]·기쁨[喜]·버림[捨]의 네 가지 범행을 말하는 것이다. 저 수행하는 사람은 마치 억센 코끼리처럼 선정의 즐거움을 그대로 따르고 생각하여 절로 가기 위해 숲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구여, 이와 같이 도를 수행하는 사람은 마치 억센 코끼리와 같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살점이 없는 뼈를 씹는 저 개와 다름이 없느니라. 또 수행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바른 법을 따라 법의 행을 관찰한다. 즉 저 비구는 어떻게 제8지에서 제9지를 닦아 얻는가? 그는 보고 들어 알거나 혹은 하늘눈으로 본다. 즉 세 세계는 모두 덧없고 괴로우며 공이요, 나가 없고 깨끗하지 못한 것들의 그릇으로서 일체의 욕심을 관찰하여도 또한 그와 같다.
[110 / 1802] 쪽 비유하면 숲 속의 아주 큰 벼랑의 험준한 곳에 크고 높은 나무가 있는데 이름을 거수리(佉殊梨)라 한다. 그 나무에는 한량없는 가시가 있기 때문에 그 나무 끝에는 열매가 조금 있지마는 그것을 따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만일 그 열매를 따려면 큰 곤란이 있고, 혹 그 열매가 험한 곳에 떨어져 있더라도 또 목숨을 잃을까 두렵다. 또 그 나무 중간쯤에는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은 썩어서 약하기 때문에 그 나무에 올라가려 하여도 구멍 있는 데가 부러져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까 두렵다. 그 나무는 매우 높아 나무에서 떨어져도 죽겠거늘 하물며 높은 벼랑의 험악한 곳에 떨어짐이겠는가? 우치한 범부는 지혜의 눈이 없어 온갖 맛을 탐하다가 그 과실만 보고 높은 벼랑이나 나무 중간쯤의 썩은 구멍은 보지 못한다. 그는 그 과실 맛을 탐하여 나무에 올라갔으나 과실이 있는 곳까지 미처 가기 전에 그만 떨어져 이내 죽는다. 또 어떤 사람은 방편을 조금 알고 혹 목숨의 업이 있어서 곧 떨어지지는 않지마는 과실 맛을 조금 얻기에 많은 고통을 받는다. 그와 같이 저 수행하는 비구는 다섯 길의 숲을 관찰한다. 그 중간에는 구멍이 있다. 매우 크고 험한 벼랑이란 이른바 모든 병(病)이요, 거수리나무란 이른바 욕심이며, 한량없는 가시란 한량없는 백천의 번뇌요, 그 쓴 열매를 구함이란 이른바 고통이며, 나무 끝의 과실이란 모든 욕심이요, 즐거운 소리·닿임·맛·빛깔·냄새의 얻기 어려움이란 욕심의 과실이니, 이른바 바다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칼을 맞을 두려움이 있으며, 왕을 친하고 도적이 되어 생활하는 것 등이니라. 이런 고통을 겪어야 비로소 욕망하는 바를 얻는 것이니, 저와 같이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많은 곤란이 있음이란 탐욕·분노·우치요, 높은 벼랑에 떨어짐이란 지옥·축생·아귀에 떨어진다는 것이며, 이내 목숨을 마침이란 법의 목숨이 다한다는 것이요, 나무의 썩은 구멍이란 모두가 비어 아무 것도 없고 일체는 견고하지 않다는 것이며, 우치한 사람이 나무에 올라감이란 이른바 어리석고......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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