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큰스님 말씀

십이연기의 재해석

근와(槿瓦) 2015. 9. 27. 00:20

십이연기의 재해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제부터는 십이연기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피력하고자 합니다. 먼저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의 문제인데, 여기에는 시간적 인과(因果)관계로 보는 해석과 존재의 원리로 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종래에는 십이연기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이 서로 비등하게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아무래도 연기의 본래 의미는 존재의 원리로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 십이연기에서 연기를 소승의 유부적(有部的)인 생멸(生滅)의 견해로 볼 것이 아니라 법계(法界)의 연기, 중도(中道)의 연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견해에 의하면, 과거 천태대사나 현수대사 같은 분들이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소승에 소속시켜 생멸의 범주로 구분한 것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원시경전인 아함경은 대승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소지를 적지않게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실례는 가전연경 등에서 일부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십이연기의 본래적 의미는 시간적 관계라기보다 존재의 법칙인 까닭을 말해보겠습니다.

 

그때 존자(尊者) 마하구치라는 존자 사리불에게 이렇게 물었다.

"벗 사리불이여, 노사(老死)는 자기가 지은 것(自作)입니까, 노사는 남이 지은 것(他作)입니까,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또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없이 나는 것입니까?"

 

"벗 구치라여,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습니다."

 

"벗 사리불이여, 생(生)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벗 사리불이여, 식(識)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식은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없이 나는 것입니까?"

 

"벗 구치라여,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명색(名色)에 연(緣)하여 식(識)이 있습니다."

 

"벗 사리불이여, 이 말한 바의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하겠습니까?"

"벗이여, 비유하면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과 같이 명색에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으며, 육처에 연하여 촉(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입니다. 벗이여, 만일 그들의 갈대 묶음 가운데서 하나를 제거해버리면 나머지 하나는 넘어져버리며, 다른 것을 제거해버리면 그 다른 것이 쓰러져버립니다. 벗이여, 그와 같이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식의 멸함이 있으며, 식의 멸함에 의해서 명색의 멸함이 있으며,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육처의 멸함이 있으며, 육처의 멸함에 의해서 촉의 멸함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입니다."

 

사리불은 연기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에 비유하여, 명색(名色)을 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무명이 아버지가 되고 행(行)이 자식이 되어서 무명이 행을 낳는다는 식이 아니라 무명과 행은 서로 의지하는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 갈대 묶음 가운데 하나를 빼버리면 다른 하나는 설 수 없으니, 이것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는 뜻을 비유하여 말한 것입니다. 명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고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남전대장경과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에 다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연기는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해 있는 것과 같아 하나는 주체가 되고 다른 하나는 객체가 된다는 것보다는 평등한 입장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즉, 연기란 인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없던 것이 새로 탄생하여 생겨난다는 생성의 기본원리라기보다는 모든 일에 만물이 존재하는 존재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연기를 만물이 어떻게 생겼나를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적 해석이 됩니다. 연기는 본래 존재의 모습을 말하는 기본원리였었는데, 후대에 오면서 생성의 원리를 말하는 시간적 관계로 보게 된 듯합니다. 그러나 연기란 우선적으로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밝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기의 근본 성품에는 앞의 남전장경에서 본 것처럼 진여(眞如)의 의미도 포함되고 있는데, 진여는 나고 죽고 하는 것이 본래 없으며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서로 의지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연기를 생성에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전변설(轉變說)에 떨어지게 됩니다. 전변설은 오늘날 하나님격인 범(梵)에서 일체만물이 나왔다고 하는 인도 고대종교의 사상이며, 부처님은 애초부터 이것을 부정하였습니다. 후대의 불교에서는 전변설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는데, 유식설(唯識說)은 은연중에 이러한 전변설의 색체가 있다고 해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기란 전변설처럼 무슨 본질이 따로 있고 지말(支末)이 따로 있어서 그 본체에서 지말이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화엄(華嚴)의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에서 성기(性起)라는 말을 하는데 그 일어난다(起)는 말을, 생겨나서 일어난다는 생기(生起)의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불법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연기란 '서로 의지해 있는 것(相依性)'이라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의지하고 나는 너를 의지해 있다고 하셨지 내가 있기 때문에 네가 생겼고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생겼다는 말은 아닙니다. 즉 연기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평등인 형제 사이라는 것이며, 우주가 존재하는 근본원리를 말함이지 성경의 창세기처럼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말하는 그런 이론이 아닙니다.

 

흔히 나에게 묻습니다. "예수교에서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합니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불교에는 연기법이 있다. 이 우주라는 것, 법계(法界) · 진여(眞如)라는 것은 누가 만들 수도 없는 것이고 누가 부술 수도 없는 것이다. 법계 그 자체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不生不滅),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不增不減) 것이다. 거기에서는 서로가 의지하여 원융무애하게 존재할 뿐이다."

 

이 우주를 누가 만들었다고 하면 외도법인 전변설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주의 존재방식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란 평등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융화하여 무애자재함을 말할 뿐이지 서로 앞서고 뒤서고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학자나 스님들은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소승에 소속된 것으로 분류하였는데, 지금까지의 인용 경전과 그 해설에서 그와 같은 취급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점을 다소간 이해하였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그 연기에 생사윤회의 시간적인 해석을 하게 된 까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학문이 발달하기 전에는 불교라고 하면 그냥 불교라는 것뿐이었는데, 학문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도 역사적인 전개에 따라 근본불교(根本佛敎) · 원시불교(原始佛敎) · 부파불교(部派佛敎) · 대승불교(大乘佛敎) 등으로 분류하여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근본불교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직접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원초기의 불교를 말하고, 원시불교란 부처님 제자들 이후부터 부파의 분열 이전까지 백여 년 동안의 불교를 말합니다. 그 뒤로 십수개의 부파가 나뉘어져 서로 이론적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합니다. 흔히 말하는 소승불교는 바로 그 부파불교를 가리킵니다. 부파 성립 이후의 교단은 거의 소승불교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소승불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근본불교 정신으로 되돌아가려고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운동이 처음 일어난 때는 기원전 1세기경이라고 하며, 그것을 가장 잘 체계화시킨 사람이 용수(龍樹)를 중심으로 한 중관파(中觀派)이고, 그보다 다소 후에 무착(無着)과 세친(世親)을 중심한 유식파(唯識派)가 성립됩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인도의 불교사상을 오랜 세월 동안 수용하면서 전적으로 대승적인 교학을 발전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종파가 바로 화엄종(華嚴宗) · 법상종(法相宗) · 천태종(天台宗) · 선종(禪宗) 등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근본이 되는 것인 만큼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 당시의 불교가 중심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시대를 내려오면서 만일 그 근본취지가 변질된 것이 있다면 그 변질된 것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합니다. 이제 문제는 지금까지 내가 설명해 온 바와 같이 근본경전에서 설해진 십이연기의 근본성품은 진여이며 법계이며 중도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그런 십이연기법을 시간적인 생멸법으로 해석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시불교 시대를 지나서 부파불교시대로 오면 각 부파가 서로 자기파의 변견을 고집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부처님의 근본교설을 없다는 견해(無見)에 치우쳐 해석하고, 다른 쪽에서는 있다는 견해(有見)에 치우쳐 해석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있다는 견해에 치우친 세력이 컸는데, 그것이 요즘 말하는 소승불교의 실세가 된 것입니다. 있다는 견해에 치우친 것이란 '일체의 모든 법에는 실체(實體)가 있다(諸法實有)'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체가 있으므로 고정적으로 생사윤회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서로 의지한다는 성격(相依性) 때문에 연기란 것은 무아(無我)가 근본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파불교에서는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즉 양변을 여읜 중도사상을 모르고 변견에 떨어져 '실체는 있다'는 견해를 고집했고, 따라서 십이연기를 그와 같은 실유론적인 성격이 강한 생사윤회하는 법칙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이 최초로 나온 곳이 원시경전에 나오는 가전연존자와는 이름만 같고 실제로는 다른 가전연자(迦延子)가 지은「발지론(發智論)」인데, 거기에서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써 설명한 것입니다.

 

그 뒤 오백명의 존자들이 모여서 가전연자가 지은 발지론에 대한 주석서로서「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100권을 지었는데 거기서도 삼세양중인과설을 채택하여 생멸법으로서의 십이연기연을 채택했습니다. 그래서「구사론(具舍論)」등 유부(有部)의 소승불교 전체가 십이연기의 해석을 근본불교와는 다르게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용수보살이 나타나서 부처님의 근본불교를 생멸적인 견해로 곡해한 유부의 변견을 부수게 됩니다. 그는「중론(中論)」을 지어서 중도를 다시 선양하고「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중도사상을 가지고 근본불교를 회복시키려고 전력을 기울인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바로 이러한 근본불교로의 복구운동이 소위 대승불교운동입니다.

 

간략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 연기설이 어떻게 해서 유부(有部)적인 소승의 생멸적 견해로 해석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과정이 대강 짐작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에는 어느 학자도 십이연기를 반드시 생멸적이며 시간적으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하게 생멸적인 소승유부의 주장을 고집하게 되면, 이 사람들은 시대에 역행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부처님의 근본 뜻을 등지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십이연기와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문제가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십이연기와 사성제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이 사성제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생멸사제(生滅四諦)입니다. 이것은 대개 소승의 유부(有部)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법의 자성을 '있다(有)'라고 보기에 이 '있다'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제법은 생멸한다는 피상적인 관찰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보지 못하고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사제를 순전히 생멸적으로 해석합니다.

 

둘째는 무생사제(無生四諦)입니다. 이것은 '생멸사제'의 반대로서 사제는 생(生)하지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는다는 해석입니다. 대승불교 가운데 반야경(般若經)이나 삼론종(三論宗)의 공사상(空思想)에 근거하여 주장한 해석입니다. 공사상에서 볼 때는 사제란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라 합니다.

 

셋째는 무량사제(無量四諦)입니다. 이것은 보살승(菩薩乘)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보살이란 육도만행(六途萬行)을 근본으로 삼고 행동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견해는 육도만행을 하듯이 모든 것이 다 한이 없고 끝이 없다(無量無邊)는 견지에서 사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문 · 연각은 이 무량사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넷째는 무작사제(無作四諦)입니다. 이것은 주로 법화경을 받드는 일승원교(一乘圓敎)의 해석입니다. 여기서는 사제를 생멸(生滅) · 무생(無生) · 무량(無量)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생멸하는 당체(當體)가 그대로 실상(實相)이라는 것입니다. 곧 생사(生死)가 열반(涅槃)이며 번뇌(煩惱)가 보리(菩提)이므로, 끊어야 할 고(苦)도 집(集)도 없고 닦고 증득해야 할 멸(滅)도 도(道)도 없으므로 어떤 인위적인 지음도 요청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변견이나 사견(邪見)이나 할 것 없이 전체가 다 중도 아닌 것이 없으니 부처와 마구니가 한계선이 없어지고 화합하는 때입니다. 이것이 원융무애한 중도사제(中道四諦)입니다.

 

원래 사제는 자세히 알고 보면 십이연기와 별개의 도리가 아닙니다. 사제 중에서 괴로움을 말하는 고제(苦諦)와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뜻하는 집제(集諦)는 괴로움이 생기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순관(順觀)에 해당합니다. 또 사제에서 괴로움이 멸하는 멸제(滅諦)와 그 멸하는 길을 말하는 도제(道諦)는 괴로움이 소멸하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역관(逆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십이연기와 사제는 서로 대등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가 존재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고 법계 연기이고 보면, 사제 역시 생멸적인 사제만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태대사나 현수대사가 아함경을 소승으로 취급하여 아함의 연기를 생멸연기로 해석하고, 아함의 사제도 생멸사제로 간주한 것은 결단코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선언하였는데, 중도가 즉 연기이며, 연기가 즉 법성이며, 법성이 즉 법계이며, 법계가 즉 사제입니다. 이것은 전체가 다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중도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도 표현하고 저렇게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법실상이라든가 법계연기라든가 그 모두가 법계 · 연기 · 법성 이것을 벗어나서 더 묘한 이론은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명하신 근본불법은 제법실상과 법계연기를 주장하는 천태 · 화엄과 같은 일승원교의 입장이지 절대로 소승의 생멸변견적(生滅邊見的)인 불교는 아닙니다.

일승도(一乘道)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흔히 이것은 대승불교에서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법화경」에서 '시방 국토 가운데 오직 일승법이 있으니 모든 부처님의 방편설은 제외한다'라고 설하시어, 부처님의 근본 뜻은 일승(一乘)에 있음을 천명하셨습니다. 때로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二乘)도 말하고, 때로는 이승에 보살을 더한 삼승(三乘)도 말씀하지만 그것은 방편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에서 삼승을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첫째 성문승(聲聞乘)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항상 생멸(生滅)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성제(四聖諦)를 설할 때도 생멸적인 관점에 서서 해석하며, 열반을 증득해도 유여열반(有餘涅槃)이요 무여열반(無餘涅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둘째는 연각승(緣覺乘)입니다. 스스로 인연을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연을 관해도 생멸적인 변견으로 관하는 것이지 중도 정견(中道正見)으로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역시 무여열반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보살승(菩薩乘)입니다.

 

성문과 연각승은 순전히 자기의 이익(自利)에만 치우쳐 혼자 가만히 앉아서 자기의 해탈만 추구하여 모든 것이 다 소극적입니다. 이에 반(反)하여 보살은 자기의 이익(自利)보다 타인의 이익(利他)이 근본이 되어서 남을 위해서는 나의 해탈은 그만두고 지옥을 하루에 천번 만번 가도 좋다고 하는 대보리심을 내어서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의 육바라밀을 비롯한 수많은 수행(六途萬行)을 닦습니다. 일체중생을 위해서 무량한 아승지겁 동안 육도만행을 닦으며, 한없는 세월 동안 중생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위해서 남을 도우며 살면서 마침내는 무상정각을 이룹니다. 이러한 사람을 보살승이라고 하며, 이승과는 달리 유여열반이 아닌 무여열반을 증득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근본 관점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성문승도 연각승도 보살승도 아닌 오직 일승(一乘)입니다. 보살승은 삼아승지겁의 무한한 세월 동안 남을 위해 노력해서 정등각(正等覺)을 이룸을 말하는데, 일승(一乘), 일불승(一佛乘)이란 진여법계를 지금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곧 중도만 정등각하면 진여법계가 그대로 현전하므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법계를 그대로 바로 보는 이것을 일승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승은 중도를 내용으로 한 진여법계를 깨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불법을 성취함에 있어서는 오직 중도를 바로 깨쳐서 진여법계를 바로 증득하면 화장세계에서 임의자재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니 이것이 바로 곧은 길(直路)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처님 당시에 모든 제자들이 부처님의 법문 끝에 바로 깨쳐서 중도를 증득했지 무슨 다른 길을 빙빙 돌아서 공부를 성취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본래 바른 길, 즉 지름길로 가서 부처님 법문을 깨치고 불법을 성취했지 무슨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한다든지 삼아승지겁 동안을 닦아야 한다든지 하는 얘기는 근본 원시경전에는 없는 말입니다. 진여법계로 바로 들어가는 이것이 일승입니다.

 

그러면 왜 삼승을 설하였는가? 소승불교와 대립적인 입장에 선 대승불교에서 방편으로 한 것입니다. 부파불교인 소승불교에서는 이들은 순전히 자리에만 치중하고 이타는 행하지 않았다고 대승에서 주장합니다. 이타가 없기 때문에 소승의 자리적인 편견을 부수기 위해서 이타의 육도만행을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승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중도일승(中道一乘)에서 볼 때는 일종의 방편이지 실지의 구경법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지 · 관(止觀), 정 · 혜(定慧)를 함께 닦아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로 들어가면 그만이지 거기에서 보면 무슨 이승이니 삼승이니 하는 헛된 길(空路)은 없습니다. 원시경전에 부처님 제자들이 깨친 경로가 삼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하는 등의 수증(修證)의 점차(漸次)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비구 교진여가 부처님의 중도법문을 듣고 바로 깨치고 나서 '집(集)이 곧 멸(滅)'이라고, 즉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하니 부처님께서 인가하셨다는 말은 내가 앞에서도 여러 번 귀따가울 정도로 말했습니다. 말로서만 '생사 즉 열반'이 아니라 확실히 원융무애한 것을 체득한 것입니다. 그 뒤에도 부처님의 제자가 깨친 사실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모두가 바로 깨쳐 들어갔지, '삼아승지겁을 닦아 성불한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둘러가는 공로(空路)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일승 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크게 주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일승이라는 말이 반드시 대승경전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아함경(阿含經)에 일승도(一乘道)라는 형태로 드물기는 하지만 그 용례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一乘道)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여 괴로움과 걱정을 말하며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四念處)니라. 어떤 것을 사념처라 하는가. 몸에서 몸(身)을 관하여 열심히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상념하여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조복하여 머물며, 수(受)에서 수를 관하여 마음(心)에서 마음을 관하여 법(法)에서 법을 관하여 머무느니라.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며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고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니라.

 

여기서 말하는 일승도란 신(身) · 수(受) · 심(心) · 법(法)의 네 가지를 바로 알고 바로 생각(正知正念)한다는 것입니다. 즉 몸은 청정한 것이 아니며, 수는 즐겁지 못한 괴로움이고, 마음은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이며, 법은 자성이 없는 무아(無我)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근본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설한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 사념주(四念住), 또는 사념처를 바로 일승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역(漢譯) 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다소 다르게 말합니다. 그 한역의 내용 일부를 다음에 인증해 보겠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비사리(毘舍離)의 미후연못 곁에 있는 중각 강당에 계시었다. 존자 아난은 이차(離車)에게 말하였다.

"여래응등정각(如來應等正覺)께서 알고 보는 바는, 타오르는 번뇌를 떠나 청정한 곳에 뛰어 나는 도를 세 가지 설하여, 일승도로써 중생을 정화하고 근심과 슬픔을 여의며 괴로움과 번뇌를 넘어 진여의 법을 얻게 한다. 무엇이 셋인가. 이와같이 성스런 제자는 청정한 계율에 머무니...또 이차여, 이와같이 청정한 계율을 구족하면 탐욕 · 악 · 선하지 않은 법을 여의며 내지 제 사선(第四禪)을 구족하여 머무른다. 또 삼매를 바르게 받아 지녀서 이 고성제(苦聖諦)에서 여실히 이를 알고, 고집성제(苦集聖諦), 고멸성제(苦滅聖諦), 고멸도적성제(苦滅道跡聖諦)에서 여실히 알고 구족한다. 이차여, 이것을 여래응등정각께서 알고 보는 바, 세번째로 타오르는 번뇌를 떠나 청정한 곳에 뛰어나는 것을 설하여, 일승도로써 중생을 정화하고 괴로움과 번뇌를 여의며 근심과 슬픔을 멸하여 여실한 법을 얻게 한다고 이름하느니라."

 

이상의 내용은 외도의 제자인 이차(離車)에게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존자가 대답한 것입니다. 즉 청정한 계율을 지키고, 사선 등의 선정을 구족하며 고 · 집 · 멸 · 도의 사제를 숙지하면, 고난과 근심에서 벗어나 청정하게 되고 참다운 법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계율(戒律)과 선정(禪定), 사제(四諦) 등의 세가지는 부처님이 중생들을 위하여 일승도로서 시설한 것이라고 봅니다.

 

한역 잡아함경에는 이 일승도라는 말 외에도 여실한 법을 의미하는 진여라는 말도 나오지만, 이 두 가지가 이에 상응하는 파리(巴利)경전에는 없으므로 이 말들은 다소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승도라는 말은 비단 여기서 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파리어로 씌어진 경전에도 나오므로 결코 후대의 대승불교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일승도라는 의미가 아함경과 대승경에서 똑같이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아함경에서는 일승도가 사념처라고 하는 등 삼승에 대하는 대승불교의 일승과는 거리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뜻이야 어찌되었든 일승이라는 말도, 아뢰야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대승불교가 흥륭하기 이전의 근본불교에서부터 일찍이 시용되었다는 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법성은 항상 머무르니, 여래는 그것을 스스로 알아 바른 깨달음(等正覺)을 이루어서 나타내 연설하고 분별하여 열어보이느니라. 이른바 이 일이 있으므로 저 일이 있고, 이 일이 일어나므로 저 일이 일어나느니라.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생을 연하여 노 · 병 · 사 · 우 · 비 · 뇌 · 고가 있으니 이것이 괴로움의 쌓임(苦陰)의 모임이니라. 무명이 멸한즉 행이 멸하고 내지 생이 멸한즉 노 · 병 · 사 · 우 · 비 · 뇌 · 고가 멸하니 이것이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이니라.

 

이 경전에서는 연기의 성품을 법성(法性)이라고 하였는데, 법성은 만법의 자성(自性)이라는 말입니다. 이 법성은 항상 법계에 존재하므로 연기, 곧 십이연기는 항상 법계에 존재하는 법성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연기법은 세존께서 만든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연기법이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느니라.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연설하고 개발하여 나타내 보이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느니라."

 

이 연기법경(緣起法經)은 앞의 내용과 더불어 연기법의 성품을 뚜렷이 규정짓고 있습니다. 앞의 경전에서는 연기법의 성품은 곧 법성이라고 하였으며, 이 경전에서는 그 연기법은 항상 법계에 머무른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연기법의 법성, 법계로의 해석은, 연기법이 생멸적이고 시간적인 인과관계를 내포하든 아니든 그 근본은 진실한 법성의 연기, 법계의 연기로 보아야 한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며 법을 보는 사람은 연기를 보느니라.

발가리(跋迦梨)여,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며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느니라. 발가리여, 법을 보아서 나를 보며 나를 보아서 법을 보느니라.

 

연기를 바로 보는 것이 법을 바로 보는 것이며, 법을 바로 보는 것이 성불(成佛)이라는 말입니다. 여래는 법계를 정등각하고 연기를 깨치고 중도를 직접 증득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직접 증득하고 바르게 깨친 연기는 곧 법이며 곧 중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이 분명히 교시되어 있습니다.

 

한편 법계라고 하면 화엄종의 법계연기에서만 주장하였지 근본 원시경전에는 그런 이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미 앞의 예문에서 드러나듯이 원시경전에서도 연기법과 관련하여 법계설이 설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서 예문 한 가지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사리불(舍利弗)은 잘 법계에 도달하였느니라.

 

이는 부처님만이 법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인 사리불도 법계에 잘 도달하였다고 부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원시경전을 살펴본 까닭은 천태대사나 현수대사 같은 그런 큰스님들이 아함불교(阿含佛敎)를 소승이라 하여 무시하다시피 했으므로 후대에서도 아함(阿含)이라 하면 으레히 소승불교 계통의 경전으로만 인식하고 대승적인 법계연기 · 진여연기를 원초적으로, 그리고 산발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역의 아함경이나 이에 상당하는 팔리어의 남전대장경에 표현되어 있는 근본불교는 결코 후대에서 잘못 이해한 유부(有部)의 소승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설해 온 가전연경 등 연기설에 관련된 경전들의 사상에 의하면 부처님의 근본법은 중도연기(中道緣起)에 있는데, 이 중도연기란 곧 진여법계를 말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진여법계란 천태종이나 화엄종 등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일승원교(一乘圓敎)이며, 화엄경 · 법화경의 근본 도리입니다. 그리고 이 진여법계를 바로 깨치는 것이 선종(禪宗)입니다. 원시불교 경전에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법계의 사상을 구성하는 중도(中道)나 법계(法界) · 법성(法性), 여여(如如), 진여(眞如) 등의 사항이 연기설을 주축으로 하여 부분적이고 원초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근본불교에 있는 중도사상 · 연기사상 · 진여법계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화엄의 법계연기사상입니다. 흔히 화엄사상을 부처님 뒤에 발전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대로 말한다면 부처님이 근본불교에서 설한 연기설을 정통적으로 계승하여 보다 정치하게 발전시킨 것이 화엄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종(禪宗)도 똑 같습니다.

 

화엄의 법계연기가 부처님의 진여법계연기 이론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라면, 선종은 실천면에서 진여자성을 확실히 깨쳐서 진여법계를 직접 증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를 증득하여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해 내려온 것이 다름아닌 선종입니다.

 

선종도 흔히 뒤에 중국에서 발달되었다고 보는데, 그것은 모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선종이란 부처님의 중도, 즉 법계연기 · 진여법계를 단박에 증득(頓證)한 것이며 몸소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여의 법계를 교리적으로 설명하든지, 혹은 증득하든지간에 이 사상은 후세에 발달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근본불교시대에 미숙한 형태로나마, 적어도 문헌의 기록적인 측면에서, 친히 잘 말씀하시고 친히 증득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후세에 이르러 보다 완벽하게 이론화되고 문자화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연기법을 한 게송을 지어 읊어봅니다.

 

가이없는 풍월은 눈(眼) 속의 눈이요

다함없는 하늘과 땅은 등불 밖의 등불이러라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데 십만의 집에

문을 두드리는 곳곳마다 사람이 답하네.

 

삼천대천세계의 곳곳마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데 여기 불러도 "예"하고 저기 불러도 "예"합니다. 곳곳마다 부처님 없는 곳이 없고 곳곳마다 진여 아닌 곳이 없습니다. 다함이 없고 한이 없는 연기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출전 : 백일법문 上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성철큰스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一切處에 無心  (0) 2015.10.08
불속에 피우는 연꽃  (0) 2015.10.03
법문 한번 해줘  (0) 2015.09.23
부처님께 삼천 배(성철스님 법어)   (0) 2015.09.21
중생불성  (0) 2015.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