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말씀

마음과 부처를 함께 잊으라

근와(槿瓦) 2015. 9. 23. 01:38

마음과 부처를 함께 잊으라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고산 지원법사(孤山 智圓法師)의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서문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심성의 본체는 밝고 고요함이 하나일 뿐이다. 범부도 성인도 없고, 의보(依報 : 세계)도 정보(正報 : 육신)도 없으며, 오래 삶도 단명함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물에 감응하고 인연을 따라 변할 때에는 육범(六凡 :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간 · 천상 등 六道와 같음)도 되고 사성(四聖 : 성문 · 연각 · 보살 · 부처님)도 되며, 의보도 있고 정보도 있다. 의보와 정보가 이미 지어졌으니 몸의 수명에 느림과 빠름이 있고, 국토에 깨끗함과 더러움이 있다.

 

우리 부처님 큰 성인께서는 밝고 고요한 하나를 얻으신 분이니, 자(慈)와 비(悲)의 방편으로 헤매는 중생들을 몰아 그 근본에 돌아가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몸이 없지만 몸을 보이고 국토가 없지만 국토를 나타내어, 그 수명을 늘이고 그 국토를 맑게 하여 그들을 즐겁게 하고, 혹은 수명을 단축하고 국토를 더럽게 하여 그들을 싫어하게 한다. 그들이 기뻐하고 싫어하므로 차츰 달래는 방법이 행해졌다.

보배로 된 누각과 금으로 된 못이 눈을 즐겁게 하고 구경거리이면서도 홀리고 방탕하게 하는 색은 아니므로 마음뿐이고 경계(境界)가 없음을 안다.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즐거움이면서도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므로 삼보를 생각하고 의지할 수 있다.

 

이와 같으므로 밝고 고요한 본체로 다시 돌아가기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다.'

 

나는 이 지원법사가 우리 부처님의 오묘한 방편의 근본과 지말을 잘 아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번거로운 글을 인용하여 오늘날 정토(淨土)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닦아 공부를 그르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부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부처님의 이름을 염(念)하여 왕생하기를 간절히 구하지만, 저 부처님 세계의 장엄한 일들은 오고 감도 없고 오직 마음에 의해 나타나 진여(眞如)를 떠나지 않는 것인줄 안다. 생각마다 혼침과 산란에서 벗어나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하고, 밝고 고요한 성품에 어긋나지 않으면 털끝만한 틈도 없다. 감응하여 서로 통하는 것이, 마치 물이 맑아 달이 나타나고 거울이 맑아 영상이 똑똑히 비추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에서도 이와 같이 말하였다.

'실제에 있어서는 부처님이 오신 것도 아니고 마음이 간 것도 아니지만 서로 응하고 통해서 마음이 저절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읊었다.

 

예배하는 이나 예배받는 이나

그 바탕은 텅 비고 고요하므로

서로 응하고 통함은

헤아리기도 말하기도 어렵네.

 

이런 사람은 마음 밖의 대상에 집착함이 없어, 치우치게 꾀하거나 거꾸로 고집하여 악마들의 일을 불러와 부처님의 뜻을 어기지 않을 것이니, 수행자들은 마음에 깊이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어떤 수행자들은 이름과 모양에 굳게 집착하여 대승(大乘)의 유심법문(唯心法門)을 듣지 못한다. 우리 부처님께서 밝고 맑은 성품 속에 근원적인 원력의 방편으로 육신과 국토를 나타내어 환상적인 장엄으로 중생들을 거두어 인도하신다. 귀와 눈이 즐기는 바로써 마음뿐이고 대상이 없음(唯心無境)을 밝게 알고 근원으로 돌아가게 한 오묘한 방편을 중생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도리어 말하기를, 염불 왕생하면 오온(五蘊)으로 된 이 몸을 가지고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는다고 한다.

 

이 마음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참선하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은 염불 왕생을 구하지 않으니 언제 삼계에서 벗어나겠는가 라고 한다. 경전에서 밝힌 '마음이 청정하므로 불토가 청정하다.'는 뜻을 알지 못하고, 또 '닦을 마음은 텅 비고 밝아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들으면 '몸으로 즐거움을 받을 곳이 없다.'고 하여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공(空)은 본래 공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어서,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밝고 맑은 마음은 허공처럼 법계에 두루하고, 중생의 마음을 모두 포용하여 끊임이 없다. 일체 중생의 무명(無明) 분별심 그 자체가 텅 비고 밝아, 시방세계의 부처님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지혜의 바다요 똑같은 법성(法性)이다. 그런데 중생들이 종일토록 그 안에서 활동하면서도 스스로 그 은덕을 등지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런 뜻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집착하고 탐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경지를 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가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과 같다. 어떤 수행자는 성질이 들뜨고 허황해서, 이 '마음의 법'을 듣고는 믿고 즐거워하며 닦고 익히지만 조금 얻는 것으로 만족하고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 지견(知見)이 원만하지 못하므로 본성만을 믿고 만가지 행(萬行)을 닦지 않으며, 정토를 구하지 않고 왕생만을 원하는 이를 보면 그를 경멸한다.

 

위에 말한 두 종류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에 대해 마음을 잘 쓰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장애가 있다. 슬프고 아픈 일이다. 만약 최하의 근기를 지닌 사람이 지혜의 눈은 없더라도 부처님의 이름을 부를 줄 알기 때문에 희유한 일이라고 찬탄한다면, 어찌 부처님의 뜻을 모르고 수행한다고 해서 허물이 되겠는가.

 

또 어떤 수행자는 받은 기운이 굳세고 정연(情緣)이 아주 깊어, 이 마음의 법을 들으면 마음 둘 곳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백호(白毫) 광명을 관하거나 범자(梵字)를 관하거나 경전을 외우거나 염불을 하는 등 이런 수행에 전념하여 어지럽지 않고 망상을 조절하여 미혹의 장애를 받지 않고 청정한 행을 성취한다. 이런 사람은 처음 수행할 때 감응의 길이 서로 통해 마침내 유심삼매(唯心三昧)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도 또한 부처님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이다.

 

비석화상(飛錫和尙)의 <고성염불삼매 보왕론(高聲念佛三昧寶王論)>에는 이런 말이 있다.

'큰 바다에서 목욕하는 사람은 이미 온갖 시냇물을 사용했고, 부처님의 이름을 염하는 이는 반드시 삼매를 이룬다. 물을 맑히는 구슬(水淸珠)을 흐린 물속에 넣으면 흐린 물이 맑아지지 않을 수 없듯이, 염불을 어지러운 마음에 던지면 어지러운 마음이 부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부합된 마음에는 마음과 부처를 함께 잊어버린다. 함께 잊는 것은 선정이고 모두 비추는 것은 지혜다. 선정과 지혜가 고르게 되면 어느 마음이 부처가 아니며, 어느 부처가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부처가 이미 그렇게 되면 온갖 대상과 인연마다 삼매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누가 다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높은 소리로 부처님을 부를 걱정이 있겠는가.'

 

<문수소설 반야경(文殊所說般若經)>에서 '염불하여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얻는다.'고 밝힌 것도 바로 이 뜻이다. 이런 뜻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도리어 사모하는 생각을 가지고 저 부처님의 모습을 관하고 부처님의 이름을 염하면서 오랜 세월을 지나면, 흔히 악마나 도깨비에 홀려서 미쳐 날뛰게 될 것이니 헛되이 공부를 수고롭게 하여 일생을 망치고 만다. 요즘에 이런 사람들을 자주 보고 듣는데, 그것은 모두 시방세계의 의보(依報) 정보(正報)와 선악 인과는 오직 마음이 지은 것으로 그 본체는 얻을 수 없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출전 : 밖에서 찾지 말라(지은이 : 보조선사, 옮긴이 : 법정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