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말씀

마음이 모든 부처님의 근원

근와(槿瓦) 2015. 9. 29. 01:38

마음이 모든 부처님의 근원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요즘 어떤 친구로부터 <오위수증도(五位修證圖)>를 하나 얻었는데, 그것은 건주(建州) 대중사(大中寺)에서 교학(敎學)을 강의하던 영년(永年)이란 스님이 나누어 배열(排定)하고, 항주(杭州) 상부사(祥符寺)의 화엄교(華嚴敎)를 전한 명의대사(明義大師) 담혜(曇慧)가 거듭 자세히 감수한 것이다.

 

그 서문에 말하였다.

'위 없는 보리(無上菩提)는 삼아승지겁 밖에 있는 것이므로 오위(五位)의 수행과 육도(六度)가 원만해야 비로소 증득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돈(頓) 점(漸) 두 길을 벌여 놓는다. 원돈문(圓頓門)으로 말한다면, 중생계의 선남자들이 부처될 씨앗을 갖춘 이는, 한 생각에 번뇌를 등지고 깨달음에 합하여 아승지겁을 지나지 않고도 바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 그것은 단박에 뛰어 넘어 견성 성불하는 것이고, 삼승(三乘)의 점차를 말한다면 오위의 성현은 삼아승지겁을 지나야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룬다.

이와 같이 분별하여 밝히고 그림으로 돈점(頓漸)의 행상(行相)을 벌여 놓으면서도 서로 뒤섞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생의 근기에는 이승(二乘)의 종성(種性)도 있고 보살의 종성도 있고 부처의 종성도 있어, 그 예리하고 무딤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교(敎) 중에도 부처의 종성을 갖춘 중생들이 생사의 땅에서 부처님의 교법을 단박 깨달아 한꺼번에 증득하고 한꺼번에 닦는 이치가 있는데, 어찌 남종(南宗)에만 돈문(頓門)이 있다고 하겠는가.

 

다만 교를 배우고 선을 배우는 사람들이 오묘한 이치를 만나고서도 그것을 성인의 경지에서나 할 일이라고 미루고 스스로 겁을 내어 주저앉는다. 자신의 마음이 일상에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 바로 견줄 데 없는 큰 해탈임을 깊이 살필 줄 모르기 때문에 온갖 의혹을 내는 것이다.

 

이 다음에 다시 진실한 증거를 대어 단박 뛰어 견성하는 이가 삼승(三乘)의 점차에 따라 수행하는 절차를 밟지 않더라도, 그것은 깨달은 후에 원만히 수행하는 문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깨닫고 닦는 근본과 지말이 원만히 밝게 깨닫는 성질의 성성 적적한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두루 밝혔다. 그래서 마음을 닦는 이들에게 권(權)을 버리고 실(實)로 나아가 그 공부를 그르치지 않도록 우리가 위없는 보리를 속히 증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또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에서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처음 발심해서 부처가 되기까지 오직 고요함뿐이고 아는 것 뿐이라 변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지만 다만 그 지위를 따라 이름이 조금 다르다. 즉 밝게 깨달을 때는 이지(理智)라 하고(理는 고요함이고 智는 앎이다) 발심해서 수행할 때는 지관(止觀)이라 하며(止는 얽힌 인연을 쉬고 고요함에 합하는 것이고, 觀은 성품의 모습(性相)을 관조하여 앎에 합하는 것이다) 제대로 닦아 행을 이룰 때는 정혜(定慧)라 하고(인연을 쉰 공덕으로 마음이 선정에 융합하는데, 선정이란 고요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관조의 공덕으로 혜(慧)가 생기는데, 혜란 분별없는 앎이다). 번뇌가 죄다 사라지고 공을 쌓는 행이 원만하여 성불할 때는 보리와 열반이라 한다.(보리란 범어이며 우리말로는 깨달음인데 곧 앎을 뜻한다. 열반도 범어로서 우리말로는 번뇌의 사라짐인데 곧 고요함(寂)을 뜻한다). 그러므로 처음 발심할 때부터 최후에 이르기까지 고요함 뿐이고 앎 뿐이다.'(여기서 고요함 뿐이고 앎 뿐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성성 적적이다).

 

이 <별행록>의 뜻에 의하면, 지금은 비록 범부일지라도 빛을 돌이켜 그 마음을 비추어 보고, 방편을 잘 알아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을 조절하면 성성하고 적적한 마음이 원인(因)과 결과(果)를 두루 거두어 변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설고 익음과 밝고 어둠이 공부를 따라 다를 뿐이다.

자기 마음의 진실하고 변함 없는 성품의 덕을 비추어보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 걸림이 없어 법계를 증득해 알면, 모든 지위의 공덕과 티끌수 같은 법문과 구세(九世) 십세(十世)〔과거 三世와 현재 三世, 미래 三世가 합해서 九世가 되고 거기에 현존 一念을 더해 十世가 된다〕등이 그 한 생각을 떠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심성이 신령 오묘하고 자재해서 만 가지 법을 포용하고, 만법은 일찌기 자성(自性)을 떠나지 않아 움직이는 것도 같고 움직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성(性)과 상(相), 본체와 작용, 인연을 따름(隨緣)과 변하지 않음(不變)이 때를 같이 해도 걸림이 없다.

 

당초부터 지금과 옛, 범부와 성인, 선과 악,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공을 점점 쌓고 여러 지위를 거쳐 자비와 지혜가 점점 원만해져서 중생을 성취시킨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때도 한 생각도 한 법도 한 행도 변하지 않는다.

 

<화엄론>에 말하였다.

'자기 마음에 있는 근본 무명(無明)의 분별하는 종자로써 부동지불(不動智佛)을 이루고, 법계의 본체와 작용으로써 믿고 나아가고 깨달아 들어가는 문을 삼는다. 십신(十信)에서 더 닦아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십일지(十一地)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동지불을 떠나지 않는다. 어느 한 때도 한 생각도 한 법도 한 행도 떠나지 않으면서도 한량없고 끝없으며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법문이 그 안에 다 들어 있다. 왜냐하면 법계와 본래 움직이지 않는 지혜를 따라 믿고 깨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했다.

'삼승의 권교(權敎)에서 열등한 견해를 가진 중생들을 상대로 세간에 삼세(三世)의 성(性)이 있다 하고, 불과(佛果)는 삼아승지겁 밖에 있다고 말한 것과는 같지 않다.'

이런 말에 따르면 원종(圓宗)을 원만히 믿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 있는 근본무명의 분별의 종자로 곧 부동지불을 이루어 믿음(信)에서 마지막 지위에 이르기까지, 바뀌고 변하고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모양이 없다. 그것은 이른바 심성이 본래 자재해서 인연을 따라 바뀐 듯하면서도 항상 변함이 없음을 말한다.

 

요즘 말만 익히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법계의 걸림없는 연기(緣起)를 널리 말하면서도, 자기 마음 속 덕의 작용을 돌이켜 볼 줄을 모른다. 법계의 성(性)과 상(相)이 바로 자기 마음의 본체와 작용임을 보지 못하는데, 언제 자기 마음의 정진(情塵)을 열어 삼천대천세계만큼의 경전을 내보이겠는가.

 

경에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법이 곧 마음의 자성(自性)인 줄 알면 지혜의 몸을 성취하고, 다른 것에 의해 깨닫는 것이 아니다.'

 

또 말하지 않았던가.

'말로 하는 설법은 작은 지혜의 망령된 분별이다. 그러므로 장애가 생겨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한다.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바른 도를 알겠는가. 그는 뒤바뀐 지혜로 말미암아 온갖 악을 더욱 조장할 뿐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참(眞)을 닦는 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간곡한 말에 의지하여, 먼저 자기 마음이 바로 모든 부처의 근원임을 확신하고, 관조하는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가만히 앉아 어리석음을 안고 분별이 없다는 것만을 본받아 그것을 큰 도라고 착각하지 말라.

 

이른바 얽혀있는 진여(眞如)는 혼침과 산란을 두루 갖추었고, 얽매임에서 벗어난 진여라야만 선정과 지혜가 밝아진다. 그것은 총(總)과 별(別)의 조리가 정연하여 앞뒤가 서로 뒤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지금 더러움을 씻으면 이 다음에 맑아지리라는 생각으로 본래의 오묘함을 보지 않고, 스스로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수고롭게 점차(漸次)의 행을 닦지 말아야 한다.

 

<유심결(唯心訣)>에서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 지위를 사양하여 지극한 성인에게 미루고, 혹은 덕을 쌓아 삼아승지겁이 차기를 바라며, 전체가 앞에 나타난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오묘한 깨달음만을 바라니, 어떻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공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면서 원만하고 항상함에 들어가지 않고 끝내 생사에 유전하는 것은, 다만 성덕(性德)에 어두워 진실한 종지를 분별할 줄 몰라,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를 따르며, 뿌리를 버리고 곁가지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마음 닦는 사람은 스스로 굽히지도 말고 자만하지도 말아야 한다. 자만에 빠지면, 마음이 자신의 바탕에서 이탈하여 범부가 되기도 하고 성인이 되기도 하면서, 순간순간 조작(造作)하여 다시 부침(浮沈)하게 될 것이다. 낮의 세 때와 밤의 세 때에 부지런히 정진하여 성성하되 망령됨이 없고, 적적하게 밝게 알아 수행에 어김이 없어야 한다. 또 스스로 굽히게 되면, 그 마음이 영통하여 사물에 따라 항상 눈앞에서 하루 종일 인연을 따르면서 변하지 않는 덕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음과 애욕을 가지고 해탈의 참 근원을 이루고, 탐욕과 분노를 써서 보리의 큰 작용을 나타낸다. 역경이나 순경에 자유롭고, 묶이고 벗어남에 구애됨이 없어 심성의 문에 따를 것이다. 이 닦음과 심성의 문은 새의 두 날개와 같아 하나만 없어도 이루지 못한다.

 

옛사람은 말하였다.

'넉넉하게 마음을 쓸 때는 넉넉하게 무심(無心)을 쓴다. 굽은 말은 이름(名)과 모양(相)이 번거롭고, 곧은 말은 번거로움과 되풀이가 없다. 무심히 넉넉하게 쓰면 항상 써도 넉넉하여 다함이 없다. 지금 말한 무심도 유심(有心)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뜻을 얻어 닦아 나아간다면 비록 말세의 중생이라 한들 어찌 단(斷)과 상(常)의 구렁에 떨어질 것을 걱정하겠는가. 이제까지 말한 티끌수 같은 법문과 여러 지위의 공덕이 오묘한 마음의 본체에 이미 갖추어져 있음이 여의주(如意珠)와 같다고 함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오묘한 마음(妙心)이란 바로 성성 적적한 마음이다.

 

 

출전 : 밖에서 찾지 말라(지은이 : 普照禪師, 옮긴이 : 법정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