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말씀

잘못된 소견

근와(槿瓦) 2015. 9. 23. 01:31

잘못된 소견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며칠 전 찾아온 나그네들과 점심 공양을 하는 자리에서였다. 그중 한 사람이 케일 쌈을 먹으면서 불쑥 나를 보고 이런 말을 하였다.

“스님은 참으로 행복하겠어요.”

 

어리둥절한 나는 ‘왜요?’라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맛좋은 케일을 먹으면서 살 수 있으니까요.”

 

너무도 싱거운 그의 행복론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밭에서 자란 채소를 뜯어다 먹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가지고 행복 운운하다니 얼마나 싱거운 말인가. 요즘 세상에서는 행복이 이처럼 먹는 일로 빛이 바래졌는가 싶으니, 그렇지 않아도 없는 밥맛이 달아나려고 했다.

 

물론 시장에서 사다 먹지 않고 밭에서 손수 가꾼 채소를 현장에서 뜯어먹으니 신기하고 부럽게 생각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행복까지 들출 거야 없지 않은가.

 

남의 말꼬리를 책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즘의 우리들은 우리가 쓰는 적절한 말의 개념을 모르고 있다. 그 자리에 꼭 들어맞는 말을 가려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빌어다 끼워 맞추는 것 같다. 그만큼 생각의 틀이 엉성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인스턴트식 문명에 찌들어가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한 자연현상에 대해서까지 새삼스레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도록 된 것이다.

 

먹는 것을 가지고 행복을 느껴본 일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세상에 별의별 음식도 많아 그 아주머니의 표현대로라면 행복을 파는 집이 적지 않겠지만,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을 느낄 만큼 나는 미식가가 못된다.

 

맑게 개인 날 아침 큰 마음을 먹고 방청소를 한다. 나는 몹시 게으른 성미라 미적미적 미루다가 큰맘 내어야 청소를 한다. 방석을 밖에 내다 털어 말리고 빗자루를 들고 구석구석 쓸고 말끔히 걸레질을 한다.

 

우물가에 가서 걸레를 빨아 널고 방석을 거두어다 제자리에 놓는다. 말끔히 청소된 빈 방에 앉아, 향로에 향을 사르고 차를 달여 마신다. 이때의 맑은 한가(淸閑)를 나는 즐긴다. 그저 맑고 고요하고 넉넉할 뿐, 이 밖에 다른 바람은 없다.

 

햇살이 포근하게 들어오는 밝은 창 아래 앉아,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옛 성현들의 귀한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할 때에도 나는 그 맑은 고요와 한가를 누린다. 이런 순간에 나는 내 삶의 잔잔한 기쁨과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밥맛은 모르고 지내지만, 산중에 사는 그 맛은 알고 있다.

 

이 맑은 고요와 한가를 위해 나누려는 뜻에서 옛 경전의 길로 산책을 나설까 한다. 복잡한 생각 다 쉬어버리고 빈 마음으로 산책의 길에 들어선다면, 사는 일이 새로워지고 고마워질 것이다.

 

<중아함경(中阿含經)> 제3권에 <도경(度經)>이란 경전이 실려 있다.

 

부처님이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그릇된 소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지혜로운 이는 그것을 밝게 가려내어 거기에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말아야 한다. 그 세 가지 그릇된 소견이란 무엇인가.

 

첫째,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일은 괴롭든 즐겁든 다 전생의 업(宿業)에 의한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어느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 주장에 확신을 갖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의 주장대로라면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음란한 짓 하고 거짓말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생각을 갖는 것도 모두 전생에 지은 숙업 탓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일은 해서는 안된다거나 이 일은 해야겠다는 의지적인 노력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자제력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도 정당화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박했다.”

 

우리들은 무슨 일이 잘 안 풀리면 흔히 사주팔자 탓으로, 혹은 전생에 지은 업으로 돌리는 경향이 많다. 그 운명이나 숙명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현재의 삶은 과거의 찌꺼기일 뿐 전혀 새로운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할 것은 숙명과 인과관계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의 업이라 할지라도 현재의 의지적인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과관계란 과거로만 소급할 것이 아니라, 지금 새로 지어서 지금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난날 과로나 무절제한 생활로 인해 병이 들었을 경우, 그걸 운명이나 숙명으로 돌린 나머지 좌절하고 만다면, 그 병은 나을 가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병의 원인을 자세히 살피어 과로에서 온 피로를 풀고 무절제한 생활을 청산, 절제된 새로운 생활습관을 꾸준히 익힌다면 다시 건강한 삶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우리가 순간순간 사는 일은 자기 생애의 소모인 동시에, 새로운 자신을 형성하고 실현하는 일로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은 좌절하지 않고 노력하고 있는 한 자기 삶을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그런 존재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하고 형성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말씀은 계속된다.

“둘째,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것은 오로지 신의 뜻에 달린 것이다’라고 한다.”

 

경전은 첫째의 형식에서처럼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이 세상의 불의나 재난 혹은 억울한 일도 모두 신의 뜻이겠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인간의 책임회피를 추궁한다.

 

신은 절대적인 세계를 갈구한 나머지 우리 인간이 세워놓은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신은 사람처럼 화를 냈다가 기뻐했다가 하는 변덕쟁이가 되어서는 안되고, 자기를 믿고 찬양하는 사람에게만 복을 내리는 그런 편협한 존재가 되어서도 안되며, 어떤 특정한 종파나 민족만을 선택받은 종교나 백성이라고 편애하는 그런 옹졸한 존재도 아니다. 진실한 종교는 지역적인 한계가 없다. 신은 사랑이고 진리이고 우주질서다.

 

그러기 때문에 마하트마 간디의 표현처럼, 종교는 이것만을 좋아하고 저것은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 속에서 그 신성(神性)을 실현하는 데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신에게 붙잡혀 옴짝 못하는 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우리들 자신이 무한한 인간의 덕성을 발휘하여 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신에게만 그 기능이나 책임을 전가할 때 인간의 설 자리는 어디이겠는가. 불교적인 문법으로는 인간 스스로가 지어서 받는 것이고 자연의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에 의해서 우주적인 현상이 진행되는 것이지 어떤 절대적인 섭리나 뜻이 아니라고 한다.

 

결국, 어떤 신성을 믿고 귀의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하거나 붙잡히지 말라는 것. 모든 것을 한곳에다만 매어두지 말라는 뜻이다. 신은 사랑이고 진리이고 우주적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시 부처님의 말씀.

“셋째, 또 어떤 사람은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떤 자제력도 필요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좋다는 말인가.

 

만약 이들의 주장대로 행동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부정되고 마침내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와 같은 잘못된 소견을 잘 분별하여 거기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얼마 전 대전에서 돈 2천만원을 요구하며 무고한 어린이를 유괴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 은행 카메라에 찍혀 범인들은 붙잡혔지만 그들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했다. 자기네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남의 생명을 수단으로 썼다니 너무도 이기적이다. 나만 살면 되고 남은 슬퍼하건 괴로워하건 상관없단 말인가.

 

우리가 무슨 일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그 결과도 예상해야 한다.

 

그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는 온갖 재난과 끔찍한 범죄가 자행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과관계란 누가 그렇게 주장하기 전에 이 세상의 도리요 질서다. 세상에는 거저 되는 일도 공것도 없다. 눈앞의 이해관계만 가지고 따져서는 안된다. 한 단면만이 아니라 전과정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내 전생 일은 지금 내가 받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고, 이 다음 세상 일은 지금 짓는 것으로써 짐작할 수 있다.”

 

잘못된 소견에 얽매이게 되면 자기 자신의 눈을 잃게 된다. 눈을 떠야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된다.

 

 

출전 : 텅빈충만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