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131)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그로부터 세존은 다시 사위성으로 들어가 기원 정사에 머무르셨지만, 정사에서 어느 날 사리불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벗이여, 그대들은 헐뜯고 비웃는 사람이 있을 때, 이와 같이 생각하라. ‘내가 지금 비방을 듣고 괴롭게 느끼는 것은 귀의 감촉에 의한 것이다. 청각에 상(常)이 없다면 거기서 일어나는 괴로움, 즐거움의 감정도 상이 없다. 상념(想念)도 상이 없다면 의념(意念)도 상이 없는 것이다. 이 마음과 몸을 만든 것은 모두 상이 없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가라앉고 부드러워져 견고해진다.
또 그대들을 학대하여 주먹으로 치고 흙덩이를 던지고 몽둥이나 검으로 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게 좋다. 이 신체는 그와 같이 상이 없는 것이다. 세존은 톱의 비유로 설하여 ‘비록 도둑이 쌍날톱으로 그대의 몸을 끊더라도 어둔 마음이 된 자는 내 가르침을 지키지 않는 자이다’고 가르치셨다. 나는 흔들리지 않고 노력하여 정념을 깨지 않고 신체는 느긋하니 마음을 한곳에 모으고 있다. 이 신체를 주먹으로 난타하든 몽둥이나 검으로 난타하든 마음내키는대로 하려면 해봐라. 이 부처의 거룩한 가르침을 충만시키기 위해서이니 만큼 만일의 경우 부처와 법과 승가를 억념(憶念)하더라도 평등한 마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시아버지를 보고 신부의 마음이 어지럽혀지듯이 그 마음이 어지럽혀지리라. 만일 부처와 법과 승가를 억념하여 평등한 마음이 나타난다면, 그는 이것에 의해 기뻐하고 얻는 바가 많으리라.
벗이여, 재목과 덩굴풀과 흙으로 둘러싼 것을 집이라고 부르듯이 뼈와 심줄과 살과 가죽으로 둘러싼 것을 몸뚱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이 신체에 근(根=五官)과 경(境)과 식(識)의 세 가지를 화합하여 비로소 보고 듣는 것과 같은 활동이 생기는 것이다. 벗이여, 세존은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말씀하셨다. 이 몸과 마음은 실로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일으키는 욕망 욕구는 괴로움의 인이다. 이 욕망과 욕구를 제어하여 멸하는 것이 고의 멸이다. 벗이여, 이 정도 깨달을 수 있는 자는 많은 것을 이룩한 자이다.”
또 어느 날 사리불이 세존을 모시고서 가르침을 듣고, 기뻐하며 돌아가는 도중 보루저가(補縷低迦)라는 이교의 유행자를 만났다. 보루저가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부터 오셨습니까?”
“지금,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돌아가는 길이오.”
“당신은 아직도 젖을 먹고 있는가, 나는 벌써 오래 전에 스승을 떠나 혼자서 도를 닦고 있는데, 당신은 아직도 스승의 가르침을 듣는가?”
“나는 아직 젖이 떨어지지 않은 채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서 기뻐하고 있다. 생각컨대 당신의 스승은 참된 각자가 아니고 그 가르침은 참된 법이 아니므로, 마치 어미소의 젖이 나쁘거나 적거나 하여 송아지가 일찌감치 젖을 떼듯이 스승을 떠났으리라. 나의 스승은 참된 각자이고 그 가르침은 참된 가르침이기 때문에 마치 어미소의 젖이 좋고 풍부하여 송아지를 언제까지라도 젖을 떼지 않듯이 젖을 떼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사리불은 보루저가에게 말했다.
세존은 계속해서 사위성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제자들이여, 나는 아직 깨달음을 얻기 전, 보살로 있을 때 나의 사유를 둘로 나누어 보자고 생각하고 탐욕과 진에와 해치려는 생각을 한편으로, 욕심을 여의는 생각과 성내지 않는 생각과 해치지 않는 생각을 한편으로 이렇게 나누어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나에게 만일 탐하는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즉시 이와 같이 생각했다. ‘나에게 탐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이것은 스스로를 해치고 남을 해치고 자타를 함께 해치는 것이다. 또 지혜를 멸하고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생각하자 탐하는 생각이 사라졌다. 노여운 생각, 해치는 생각이 일어날 경우도 이와 같이 했다. 나는 이리하여 이 세 가지의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파쇄(破碎)하여 버렸던 것이다.
제자들이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자주 생각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법이다. 탐을 생각하면 탐이 더욱더 성하고 노여움을 생각하면 노여움이 더욱더 심하고 해치려는 생각을 일으키면 마음은 해치는 쪽으로 더욱더 기울어지는 법이다. 우기가 끝나고 추수할 무렵이 되면 소몰이가 소를 몰아 외양간에 가둔다. 그것은 소가 묶이든가 죽임을 당하든가 하는 것은 곡식을 해치는데서 오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나도 그와 같이 좋지 않은 화를 보고서 마음을 다스려 나쁜 생각을 파쇄하여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난 뒤 이런 나는 욕심을 여의는 생각, 화내지 않는 생각, 해치지 않는 생각이 일어났다. 나는 그때 ‘이 생각은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고 자타를 함께 해치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 이 생각을 조정해 보고, 이 생각을 아무리 빈번히 거듭해 보아도 거기에 가공할 까닭을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지 너무 오래 같은 생각을 계속하고 있으면 몸이 피로하고 마음에 병이 나고 따라서 마음으로 전주(專注)함을 잃게 되리라 생각하여, 마음을 안으로 진정시키고 한곳에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이여, 마음은 자주 생각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므로, 이리하여 욕의 출리(出離)와 성내지 않는 일과 해치지 않는 일을 생각한다면, 마음은 이 생각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탐, 진, 해치는 생각이 사라진다. 여름의 마지막 달에 전답의 곡식이 싹을 트기 시작하면, 소몰이는 소 떼의 행방을 지켜 보고 나무 아래 있는가 광장에 있는가 주의하여 보기 때문에 어디에 소가 있는 가를 알고 있는 법이다. 나도 그와 같이 내 마음의 행방을 지켜 보고서 이 생각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제자들이여, 나는 용감하게 또한 이런 일에 힘썼다.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항상 정념하였다. 그리하여 몸이 느긋하니 마음은 조용히 한곳에 모여 있었다.
제자들이여, 나는 모든 선정에 진입(進入)하여 고요하고도 청정하며 티없이 욕을 여의고 더러움을 없애고 언제라도 순종하며 살아갈 준비가 있고 견고하고 남에게 움직이지 않는 마음으로 도에 나아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명(無明)을 깨고 빛을 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제자들이여, 숲의 고지에 이어 크고 낮은 늪이 있고 그 가운데 사슴 떼가 살고 있다고 하자. 사슴의 불리(不利)를 꾀하는 자는 그 평안과 유쾌한 데로 이끄는 고지의 길을 막고 늪으로 내려 보낼려고 꾀하리라. 사슴은 질척한 습지에 머물러 재액과 불행을 만나 그 무리의 수효가 심히 줄게 되리라. 이와 반대로 사슴의 평안을 생각하는 사람은 저지(低地)의 길을 막고 고지에의 길을 열어 사슴 떼로 하여금 그 수가 늘도록 도모하리라.
제자들이여, 나는 사물의 도리를 알려 주기 위해 이 비유를 설했다. 크고 낮은 늪이라고 함은, 오욕, 사슴 떼라고 함은 중생들, 불리해질 것을 꾀하는 자라고 함은 악마, 저지를 향한 길이란 여덟 가지의 사도(邪道), 습지라고 함은 낙을 찾아 헤매는 일, 늪이나 못이라고 함은 무명, 평안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함은 부처, 평안과 유쾌에의 길이라고 함은 팔정도(八正道)를 말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이와 같이 나에 의해 평안과 유쾌를 향한 길이 열리고 낮고 질척한 늪과 못의 길은 닫혀있던 것이다.
제자들이여, 나는 동정과 애련으로써 그대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이루었다. 여기 나무 밑에 그늘이 있고 빈집이 있다. 고요히 생각하라. 방일하지 말라. 나중에 뉘우침을 남겨선 안 된다고 하는,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또 어느 날 세존이 말씀하시기를,
“제자들이여, 선정을 닦는 자는 항상 이 다섯 가지의 일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상(相)을 생각하여 마음에 탐욕과 진에와 우치가 생겼을 때에는 곧 그 상에서 마음을 돌리고 착한 생각을 수반하는 다른 상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상으로 마음을 돌린다면 그 때문에 탐욕과 진에와 우치는 사라지리라. 이리하여 마음이 안으로 거두어져 고요해지고 한곳에 모인다. 이것은 마치 교묘한 목수가 굵은 못을 뽑아 내기 위해 가느다란 못을 치는 것과 같다.
제자들이여, 마음을 딴 곳으로 방향을 바꾸고 아직도 탐욕 진에 우치가 수반하는 나쁜 생각이 없어지지 않을 때에는 ‘이 생각은 불선이다. 죄의 때가 있다. 괴로움의 결과를 낳는 것이다.’고 생각하라. 그 생각의 화를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조절해 가면 그 나쁜 생각은 사라지고 마음은 안으로 거두어져 고요해지고 한곳으로 모이는 법이다. 이것은 마치 젊고 아름다운 남자나 여자가 머리에 뱀이나 짐승의 썩은 고기가 감겨져 몸서리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자들이여, 만일 이와 같이 하여도 아직 그 생각이 그치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그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으로써 그 생각은 멈추고 마음은 안으로 거두어져 고요해지고 한곳으로 모이게 되리라. 마치 이것은 눈이 있는 사람이 눈앞의 것을 보지 않고 눈을 감고 또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제자들이여, 그런데도 그 생각이 계속된다면 이번에는 그 생각의 원인과 근본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그것으로써 그 생각은 멈추고 마음은 안으로 거두어져 고요해지고 한곳으로 모이게 되리라. 이것은 마치 달리고 있는 사람이 ‘어째서 나는 이렇듯 서두르고 있는 것일까, 조용히 걸으면 어떻다는 것일까’하고 생각하여 조용히 걷게 되고 ‘나는 어째서 걷고 있는 것일까. 멈춘다면 어떻다는 것일까’하고 생각하여 멈추고 ‘나는 어째서 서 있는 것일까 앉으면 어떻다는 것일까’하고 생각하여 앉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자들이여, 만일 이와 같이 그 생각의 원인과 근본을 조사해 보아도 아직 나쁜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면, 이와 이를 마주 다물고 혀를 윗턱에 끌어 붙이고 견고한 마음으로 제어하고, 억눌러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마치 힘 있는 사람이 힘이 없는 사람의 목을 붙잡아 억누르는 것과 같다. 이것으로써 그 생각은 멈추고 마음은 안으로 거두어져 고요해지고 한곳으로 모이게 되리라.
제자들이여, 이 다섯 가지의 방식으로써 나쁜 생각을 멸하는 자는 생각의 방식과 방법을 잘 아는 자라고 일컫는다. 왜냐하면 그는 내키는 대로 생각하여 나쁜 생각을 여읠 수가 잇고 갈애를 멸하고 번뇌의 계박을 끊고서 괴로움을 완전히 멸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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