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념즉보리(妄念即菩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깨달음의 본성을 여읜 妄念은 있을 수 없으므로 妄念과 깨달음은 相即不二하다는 뜻.
참고
오(悟) : ① 미(迷)에 대한 각(覺)의 의미. 미몽에서 깨어난 것. 진리를 깨닫는 것. ② 경험적 사실에 대한 논리적 이해. .....미(迷)→일체 사물의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틀린 것에 집착하는 것을 迷라고 한다. 迷에서 깨어나 명확하게 진실을 체달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거짓 形相(假相)에 집착하여 그것을
진실로 아는 妄念을 끊지 못하는 마음을 迷情·迷心이라 하고, 또 迷情에 사로잡혀 一切 사물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경지, 곧 三界를 迷界·迷境이라 한다. 또 迷悟를 生死의 江河를 건너고 건너지 않은 것에 비유하여
迷界를 迷津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하여 진실의 知見을 열어 깨달음의 도를 얻는 것을 悟道라고 한다. .....각(覺)→범어 buddha의 번역으로 佛陀라 음역.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이제까지 알지 못하던 일을 훤히 알게 됐다는 의미로부터 涅槃을 깨달음의 뜻으로 사용하며, 菩提(涅槃을 깨달은 지혜), 혹은 佛(覺者, 깨달은 이)의 譯語다. 단, 舊譯에서는 菩提를 道, 佛을 覺이라고 하고, 新譯에서는 菩提를 覺, 佛을 覺者라고 하여 法과 人을 구별한다. 또 일체의 사물을 感知한다는 뜻으로부터 널리 대강 관찰하고 추측하는(推度) 정신작용을 舊譯에서는 覺이라 하며, 新譯에서는 尋(범어 vitarka)이라고 한다.
① 起信論에서는, 萬有의 本體인 阿賴耶識에 覺과 不覺의 두 뜻이 있으며, 覺에는 本覺과 始覺의 二覺이, 不覺에는 根本不覺과 枝末不覺이 있다고 한다. 곧, 만유의 本體는 원래가 淸淨한 覺體(本覺)지만, 그러나, 無始이래로 無明·妄念에 의해 덮여서 가리워져 있는 것(不覺)이 현실이다. 그러나, 수행을 하여 觀智를 얻으면 이 不覺으로부터 깨어나 心源을 사무쳐 깨닫게 되는데, 이것을 始覺이라고 한다. 始覺은 覺의 정도에 따라서 다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究竟覺. 이것 이상은 더없는 覺知란 뜻으로 第十地菩薩의 覺知를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佛의 覺知를 究竟覺·無上覺·正覺·大覺이라고 한다.
(2) 第九地까지의 地上菩薩의 覺知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므로 隨分覺이라고도 한다.
(3) 十住·十行·十廻向(三賢)菩薩과 二乘의 覺知는 비슷한 覺知이긴 하지만 완전한 眞覺이 아니므로 相似覺이라 한다.
(4) 十信까지의 凡夫位로의 惡業은 苦果를 부른다는 業果의 道理를 覺知하고 있으므로 惡業을 짓지는 않지만, 아직도 번뇌를 끊는 智를 일으키지는 못하는 覺知이므로 不覺이라고 한다.
② 佛을 覺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았을 뿐 아니라(自覺)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覺他), 깨달음의 작용이 충만하고 있기 때문이다(覺行窮滿). 따라서 自覺은 凡夫에 대하여, 覺他는 二乘에 대하여, 覺行窮滿은 菩薩에 대하여, 이들과 다름을 나타낸 것으로 이것을 三覺이라고 한다.
③ 獨覺(緣覺)과 大覺(佛)을 二覺 또는 二覺者라고 부른다. 또 보살의 品階 五十二位중 第五十一位의 等覺과 第五十二位의 妙覺(佛果)의 두 가지, 혹은 佛의 智德과 斷德을 二覺이라고 한다.
④ 尋求推度하는 정신작용(心所)으로서의 覺(尋)은 欲界와 初禪에만 있는데, 여기에 그 性이 善인 善覺과 그 性이 惡인 不善覺(惡覺)이 있다. 欲覺(貪覺)·瞋覺(恚覺)·害覺(惱覺)을 三惡覺 또는 三不善覺이라고 한다. 또 여기에 親里覺·國土覺·不死覺·族姓覺(利他覺)·輕他覺(輕侮覺)을 합하여 八覺이라고 하며, 離欲覺(遠離覺·出離覺·出覺)·無瞋覺(無恚覺)·無害覺(無惱覺)을 三善覺이라 하는데, 이는 三惡覺에 대한 對語이다. 無瞋·無害의 二覺을 安穩覺이라고도 하고, 또 菩薩·緣覺·聲聞 같은 大力量이 있는 이가 覺知하고 思念하는 八種의 覺, 곧, 少欲覺·知足覺·遠離覺·精進覺·正念覺·正定覺·正慧覺·不戱論覺을 八大人覺(大人八念)이라고 한다. 이것도 善覺이다.
본성(本性) : ①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타고난 그대로의 것. 본래 고유의 성질. 본래의 모습. ② 만유의 본성을 말함.
망념(妄念) : 一切法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凡夫의 迷心. 그릇된 생각. 無明을 말함. 또 迷妄의 執念.
미심(迷心) : 事理를 뒤바꿔 놓는 妄心.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迷)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의 第一支가 無明支이다. 또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癡라 한다.
① 十二緣起의 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와 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를 三世兩重의 因果로 說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의 位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의 因果로 해석하고 無明과 行과 識 등의 五果의 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癡로서 善惡의 業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② 有部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相應無明과 不共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를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 또 後者는 相應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不共無明은 홀로 일어남으로 獨頭無明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不共無明을 다시 恒行不共無明과 獨行不共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는 第七 末那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일어나나 모든 凡夫의 마음속에 늘 쉬지 않고 나타나는 作用이란 점에서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과 다르기 때문에 不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後者는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남으로 獨行不共이라고 일컫는다. 이 獨行不共無明은 隨煩惱와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시 主獨行無明과 無主獨行無明으로 나눈다. 또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種子와 現行으로 나누고 늘 衆生을 따라 다니며 第八阿賴耶識 속에 숨어 잠자고 있는 無明의 種子를 隨眠無明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표면에 나타나 現在意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無明의 現行을 衆生에 붙어서 衆生을 얽어 生死(迷의 世界)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纒無明(전무명)이라 한다. 이 纒無明에는 相應하는 것과 不共이 있어서 隨眠·纒·相應·不共의 四種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四種無明(四無明)이라 부른다. 또 根本과 枝末과 共과 不共과 相應과 不相應, 迷理와 迷事, 獨頭와 俱行, 覆業과 發業과 種子子時와 行業果와 惑의 15種의 無明으로 나눌 때도 있다.
③ 勝鬘經에서는 見惑 및 三界의 修惑인 貪 등과 相應하는 相應無明을 四住地(見一處住地·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의 넷으로 처음의 一은 見惑, 뒤의 三은 三界의 修惑을 의미한다)의 惑이라고 부른다. 獨行不共의 無明을 無始無明住地의 惑이라 하고(합하여 五住地의 惑) 이 無明住地는 모두 번뇌가 일어나는 根本이며 오직 如來의 菩提智만이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④ 起信論에서는, 無明을 不覺이라고 하고 이 不覺을 根本無明과 枝末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根本無明은 根本不覺·無始無明·元品無明·忽然念起無明이라고도 한다. 또 元初一念이라고도 한다. 곧 眞如平等의 眞理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忽然히 차별·대립의 念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 元初라고 하는 것은 모든 煩惱의 元始이고 迷妄의 시작이므로 다른 煩惱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忽然」이라고 한다. 지극히 微細하므로 心王(마음)과 心所(마음의 作用)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즉 無始無明住地의 惑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枝末無明은 枝末不覺이라고도 불리우며 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난 末稍的 染汚心으로 三世微麤의 惑業이다.
⑤ 天台宗에서는 空·假·中의 三觀에 의하여 각기 見思·塵沙·無明의 三惑을 끊는다고 한다. 無明과 非有非空의 진리에 迷惑되어 中道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無明을 끊음에 있어서는, 別敎에서는 十廻向位에서 항복하여, 初地이상의 12階位에서 12品의 無明(모두 12품의 무명이 있다고 한다)을 다 끊어 마친다고 한다. 이 경우 十廻向의 最後의 第十廻向에서 처음의 無明을 끊고 初地에 들어가지만 이 처음의 無明을 또 三品으로 나누어 끊으므로 이것을 三品無明이라고도 한다. 圓敎에서는 初地 이상의 42階位에서 42품의 無明(모두 42品의 無明이 있다 한다)을 끊어 마치는데, 이 경우 제51位인 等覺의 最後心에 의해 妙覺智 또는 佛智가 나타나고 이에 의해 끊어지는 最後의 無明을 元品無明·無始無明·最後品無明이라 한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說로서 실은 圓敎에서는 三觀에는 순서와 차례를 세우지 않고 一心을 가지고 觀함으로 三惑은 동체로 동시에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망(迷妄) : 事理에 어두운 것을 迷라 하고, 空虛하여 실재하지 않는 것을 妄이라 한다.
집념(執念) : 마음에 새겨서 움직이지 않는 一念.
상즉불이(相即不二) : 상즉(相即)→두 개의 事象이 서로를 버리고 無差別의 하나가 되는 것을 相即이라 하며, 即이라고도 한다. .....불이(不二)→一實의 이치가 평등하여 피차의 분별이 없는 것. 보살은 一實平等의 이치에 깨달아 들어갔으므로 入不二法門이라 함. 維摩經에 33인이 不二法을 얻었다고 說한다(維摩經 入不二法門品). 大乘義章一에 不二는 無異를 말한다고 하였다. .....즉(即)→두 개의 事象이 融合하여 無差別의 一體가 되는 것. 相即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煩惱 即 菩提, 生死 即 涅槃, 裟婆 即 寂光 등으로 사용하며 그 뜻은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吉藏의 大乘玄論卷一에는, 即에는 두 개의 事象이 전혀 一體로서 不二의 관계에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即是의 即과 두 개의 事象의 體는 별개이긴하지만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을 제시하는 不相離의 即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知禮의 十不二門指要鈔卷上에는 即에는 二物相合即과 背面相飜即 및 當體全是即의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二物相合即은 별개의 것이면서 서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에 있는 것. 배면상번즉(背面相飜即)은 現象的인 相(모습)은 다르지만 본질적인 性(本體·實體)에 있어서는 하나의 관계인 것. 當體全是即은 두 가지 물체가 一見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그 자체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 아니고 동시에 하나인 관계인 것. 또 即을 시간적인 관계로 이해할 때, 빛이 비쳐 오면 암흑이 걷히는 것 같은 同時即과 나쁜 행위를 하면 뒤에 惡果를 초래하는 것 같은 異時即의 두 가지로 나눈다. 一乘佛敎에선 「即」은 교리의 骨子로, 또 諸宗派에선 여러 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① 화엄종에선 現象的世界의 事事物物은 그 體가 서로 融合되어 一體化 되고(相即), 그 작용(用)이 서로 작용하여 화합하므로 장애가 안되고(相入) 그대로 절대적세계의 顯現이라고(相即相入) 說하여 同體門·異體門에 대해 각각 同體相即·同體相入·異體相即·異體相入의 說(現象 위에서 相即相入을 모든 현상 상호간에 말함)을 주장하여 體의 空·有에 대해 一即十·十即一, 一即多·多即一을 주장한다.
② 천태종에선 모든 존재는 본래부터 三千諸法을 다 갖추고 있어서 體로부터 말한다면 佛도 중생도 동등하지만 수행의 階位로부터 말하면 차이가 있다고 하여서 六即說을 주장한다. 곧 (1) 모든 중생은 다 三千三諦의 理를 갖추고 있어서 완전한 것을 理即, (2) 佛法을 듣고 三千三諦의 理를 개념(名字)으로 이해하고, 佛敎를 의심하지 않는 것을 名字即, (3) 三千三諦의 理를 念念히 觀하여 가는 것을 觀行即(外凡五品弟子位), (4) 이에 의하여 三界 중에서 일으키는 見思의 惑이 다하여 六根이 청정하게 되므로 참된 깨달음과 유사한 것을 相似即(內凡六根淸淨位), (5) 三千三諦의 觀이 철저하여 無明의 惑이 점점 걷혀 밝아지므로 眞如의 일부분이 身에 나타나는 것을 分證即(分眞即이라고도 한다. 初住에서 等覺까지의 41位), (6) 완전히 깨달아 眞如의 모든 것이 나타나는 것을 究竟即(妙覺位)이라 한다.
이것에 의하여 함부로 자기가 佛과 같다고 생각하는 增上慢(우쭐해서 지나치게 자부함)에 빠지지 않고 또 자기는 佛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비굴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③ 眞言宗에선 即身成佛을 주장하여 理即의 뜻에 대하여 當體即·無礙即·常住即·相應即·輪圓即·不離即·速疾即의 7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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