ㄹ~ㅁ(리을~미음)

마야설(摩耶說)

근와(槿瓦) 2018. 10. 21. 06:12

마야설(摩耶說)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범어 maya(·化像의 뜻)에 관한 설로 그 근본을 밝히자면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은 가우다파아다(Gaudapada)의 설을 더 체계화한 것이다. 이런 마야를 현상계의 質料因으로 보는 설은 샹카라파 즉 不二一元論 이외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샹카라 철학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최고 이며 그것은 單純同一性이다. 이 무명(avidya)이라는 힘과 결합하여 현상계가 나타난다. 이것을 俗諦의 입장에서 보면 實有이지만 眞諦에서 보면 마야에 불과하다. 때문에 절대로 실유라고 할 수도 없지만 절대로 無我라고 할 수도 없다. 세계를 現出하므로 마치 幻術師가 현출하는 환상과 같은 것이다. 즉 현상세계는 化現에 불과하므로 이를 假現說이라고도 한다. 후세 샹카라파에서는 마야를 무명으로 바꾸고, 무명은 개인 (jiva)에 존재하는 일종의 힘이라 했다.

 

참고

마야(摩耶) : 범어 Maya. ·幻術이라 번역. 석존의 어머니. 拘利城主 善覺王의 누이이며, 가비라성주 정반왕의 왕비. 왕자 싣달타를 낳고 7일만에 죽다. 摩訶摩耶라고도 함.

 

대승불교(大乘佛敎) : 범어 mahayana. 대승의 교리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불교의 한 敎派. 삼론종·법상종·화엄종·천태종·진언종·종을 비롯하여 禪宗 등이 이에 속한다. 부처님이 入滅하신 후 5백년경(BC 100) 인도에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은 그 때까지 여러파로 갈라져 자기파의 주장만을 고집하여 온 불교의 존재방식을 맹렬히 비판하고, 在來佛敎小乘이라 비평하는 한편, 스스로 대승이라 칭하면서 利他的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활발하고 폭 넓게 전개하였다. 대승의 어원은 큰(maha) 수레(yana), 즉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태우는 큰 수레라는 뜻으로, 일체중생의 구제를 그 목표로 하였다. 이 운동은 종래에 출가자만의 종교였던 불교를 널리 일반 대중에게 개방하려는, 在家者를 포함한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 새로운 불교운동은 그 때까지 석존에게만 한정하였던 보살이라는 개념을 넓혀 일체 중생에게서 성불의 가능성을 인정하므로써 일체중생을 모두 보살로 보고, 자기만의 구제보다는 利他를 지향하는 보살의 역할을 그 理想으로 삼아 광범위한 종교활동을 펴 나갔다. 이 불교운동의 典據로서는 대승불교 경전이 계속 이루어져 먼저 <반야경>이 나왔다. 空思想을 강조하는 반야경은 종래의 고정관념을 깨고 동시에 일체의 집착으로부터의 해탈을 실천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어 일체를 포함하여 一乘을 설하고 久遠本佛을 세우는 법화경, 깨달음의 세계를 설하는 華嚴經, 在家居士維摩가 오히려 출가자를 설하는 維摩經, 서방정토 아미타불의 세계를 찬탄하며 일체중생의 구제를 약속하는 淨土三部經 등이 이루어져 종래의 불교를 일신하는 이 새로운 불교운동을 뒷받침하였다. 이 경전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대승이 불교의 중심세력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2~3세기에는 龍樹가 출현하여 이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이어 일체중생에 佛性을 인정하는 如來藏 사상을 설한 勝鬘經 등의 경전이 이루어졌고, 또한 일체를 마음의 흐름에 응집시키는 唯識思想에 이어 5~6세기에는 불교논리학인 因明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대승불교 초기부터 일반대중의 교화를 위해 만들어졌던 다라니를 외우고 呪法을 설하는 密敎가 성하여 7세기 이후 불교활동의 중심이 되었으나, 밀교는 대승보다는 金剛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대승불교는 나라 때 중국으로 건너가 몽고·티벳·한국·일본 등 이른바 北方佛敎의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 文咨王(491~518) 龍樹中觀論 三論을 비롯, 천태·열반 등의 교법이 들어와 대승불교에 대한 연구 및 교화가 활발하였다. 또한 吉藏(549~623)三論을 바탕으로 三論宗開宗하는 등 우리 나라에서의 대승불교는 마침내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가우다파다 : 범어 Gaudapada. (640?~690?) 인도의 베단타 학파 사람. 만듀카 우파니샤드(Ma=ndukya upanisad)을 달기 위하여 만듀카 카리카(Mandukya Karika)를 지었다. 그의 不二一元 說은 불교의 中觀派瑜伽行派와 관련이 깊고, 훗날의 샹카라의 베단타 에 영향을 주었다. 7세기 후반에 나온 바라문교의 베단타학파에 속하는 철학자. 슈카를 스승으로 하였으며, 샹카라가 그의 제자. 그가 편찬한 <만주키야카리키>는 이 학파 안에서 聖典으로 일컬어졌다. 그는 不二一元論의 입장에서 삼라만상을 ·俗 二諦로 나누고, 眞諦로서의 실재는 유일무이한 진실이지만, 俗諦의 현상은 잡다하고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현상세계는 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하여 전개한 假象에 지나지 않으며, 마음에 비친 표상 뿐인 것으로서 실재하지 않는 허망이라고 하였다. 또 실천으로서는 요가에 의하여 寂靜·涅槃·一切智가 얻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학설에는 대승불교의 中觀·唯識의 영향이 다분히 엿보이는데, 그의 주장을 계승한 샹카라는 후세에 <假面佛敎徒>라는 평을 받았다. 또 샹키야의 주석 등 몇 가지 책의 저자가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同名異人이 있어 확실히는 알 수 없다.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 범어 advaitavada. 인도 베단타(vedanta)학파 중에서 가장 유력한 이론. 絶對不二說(kevaladvaitavada)이라고도 한다. 이미 가우다파아다(Gaudapada)는 현상계가 허망이며, 유일의 실재인 (deva)의 마야(ma=ya)에 불과함을 설하였는데, 8세기 전반에 나온 샹카라(samkara)에 이르러 이 사상은 체계화되었고 그 후의 인도 사상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참 실재는 브라흐만 뿐이라 하고 그것은 그 자체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참 아트만(atman)이라고 한다. 우리들의 일상의 경험은 세속적인 下知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는 avidya에 불과하다. 즉 주관만이 절대적인 순수지이며, 객관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객관에게 의지하여 양자를 혼동하고 있다. 객관은 신의 대리인 마야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신은 전술한 바 참 실재인 브라흐만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비드야가 임시로 限定을 부탁한 결과이다. 그리고 이런 신은 下梵(aparabrahman)이며, 純知만으로 된 上梵(pa=rabrahman)만이 실재이다. 그리고 이것과 개인 존재의 근본 주체로서의 와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上梵만이(따라서 만이) 유일의 실재이며, 는 모두 허망이라는 점에서 不二一元論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현상의 허망을 주장하는 나머지 Karman 즉 행위경험의 무가치를 주장하고, 을 말하지 않았던 점 등으로 인하여 후세 다른 학파들에 의하여 몹시 비난받고 있다. 이 사상계통에는 샹카라 이후의 바아챠스파티미슈라(Vacaspatimisra)·아아난다기리(A=nandagiri)·마드바(Madhva)·마즈스다아나 등의 여러 학자가 나타났고 또 우파니샤드 가운데에서도 볼 수 있으며, 방대한 저작이 남아 있다. 이 사상은 그 후 인도사상의 主流를 점하게 되었고, 현대에도 전통을 받드는 인도철학자의 대부분이 이 학설을 지지한다고 한다.

 

() : 범어 brahman의 음역으로 梵摩·梵覽摩·婆羅賀磨라고도 하고, 寂靜·淸淨·淨潔·淨行·高淨·離欲이라 번역한다.

婆羅門敎 특히 Upanisad철학에서 말하는 우주의 근본 원리. 곧 일체 현상세계는 이 전개·변화하여 생긴 것이라 한다. 또 이 은 개체의 생명인 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에서 梵我一如라 하며 이 梵我一如의 상태를 이 에서는 解脫로 삼는다. 이런 원리에서 보면 中性 명사이지만 동시에 男性名詞로서 의 원리를 神格化, 宇宙創造梵天을 뜻한다. 梵天에 태어나기 위한 福德(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善行爲) 혹은 大梵天에 있는 福德梵福이라 한다.

에는 淸淨 등의 뜻이 있으니 淸淨行 특히 음욕을 끊는 것을 梵行, 음욕의 하는 것을 非梵行, ·보살의 絶妙한 음성을 梵音聲·梵聲·梵音이라 하며, 音響梵響이라고도 한다. 梵音相佛陀三十二相의 하나이다. 寺院佛堂伽藍梵刹, 절의 종을 梵鍾이라 한다.

범어의 뜻. 예를 들면 범어를 가지고 쓴 典籍類梵本, 그것을 貝葉에 써서 쌓아 놓은 것을 梵夾이라 부른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第一支無明支이다.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라 한다

十二緣起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三世兩重 因果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因果로 해석하고 無明 등의 五果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相應하는 로서 善惡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有部唯識宗에서는 無明相應無明不共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前者 등의 根本煩惱相應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 後者相應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不共無明은 홀로 일어남으로 獨頭無明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不共無明을 다시 恒行不共無明獨行不共無明으로 나눈다. 前者第七 末那識相應하는 無明으로 등의 根本煩惱相應하여 일어나나 모든 凡夫의 마음속에 늘 쉬지 않고 나타나는 作用이란 점에서 第六意識相應하는 無明과 다르기 때문에 不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後者第六意識相應하는 無明으로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남으로 獨行不共이라고 일컫는다. 獨行不共無明隨煩惱와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시 主獨行無明無主獨行無明으로 나눈다. 唯識宗에서는 無明種子現行으로 나누고 늘 衆生을 따라 다니며 第八阿賴耶識 속에 숨어 잠자고 있는 無明種子隨眠無明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표면에 나타나 現在意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無明現行衆生에 붙어서 衆生을 얽어 生死(世界)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纒無明(전무명)이라 한다. 纒無明에는 相應하는 것과 不共이 있어서 隨眠··相應·不共四種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四種無明(四無明)이라 부른다. 根本枝末不共相應不相應, 迷理迷事, 獨頭俱行, 覆業發業種子子時行業果15無明으로 나눌 때도 있다.

勝鬘經에서는 見惑 三界修惑 등과 相應하는 相應無明四住地(見一處住地·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의 넷으로 처음의 見惑, 뒤의  三界修惑을 의미한다)이라고 부른다. 獨行不共無明無始無明住地이라 하고(합하여 五住地) 無明住地는 모두 번뇌가 일어나는 根本이며 오직 如來菩提智만이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起信論에서는, 無明不覺이라고 하고 이 不覺根本無明枝末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根本無明根本不覺·無始無明·元品無明·忽然念起無明이라고도 한다. 元初一念이라고도 한다. 眞如平等眞理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忽然히 차별·대립의 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 元初라고 하는 것은 모든 煩惱元始이고 迷妄의 시작이므로 다른 煩惱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忽然이라고 한다. 지극히 微細하므로 心王(마음)心所(마음의 作用)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즉 無始無明住地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枝末無明枝末不覺이라고도 불리우며 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난 末稍的 染汚心으로 三世微麤惑業이다.

天台宗에서는 ··三觀에 의하여 각기 見思·塵沙·無明三惑을 끊는다고 한다. 無明非有非空의 진리에 迷惑되어 中道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無明을 끊음에 있어서는, 別敎에서는 十廻向位에서 항복하여, 初地이상의 12階位에서 12無明(모두 12품의 무명이 있다고 한다)을 다 끊어 마친다고 한다. 이 경우 十廻向最後第十廻向에서 처음의 無明을 끊고 初地에 들어가지만 이 처음의 無明을 또 三品으로 나누어 끊으므로 이것을 三品無明이라고도 한다. 圓敎에서는 初地 이상의 42階位에서 42품의 無明(모두 42無明이 있다 한다) 끊어 마치는데, 이 경우 제51等覺最後心에 의해 妙覺智 또는 佛智가 나타나고 이에 의해 끊어지는 最後無明元品無明·無始無明·最後品無明이라 한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로서 실은 圓敎에서는 三觀에는 순서와 차례를 세우지 않고 一心을 가지고 함으로 三惑은 동체로 동시에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속제(俗諦) : 三諦의 하나로 假諦 · 有諦라고도 하며, 二諦의 하나로 世俗諦 · 世諦라고도 한다.

 

실유(實有) : 그 자체로 實在하는 것을 實有라 하고 實在하지 않는 것이 因緣和合으로 에 있는 것을 假有라 한다.

 

진제(眞諦) : 는 실다운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또는 聖者가 본 참다운 진리의 가르침의 뜻으로 이것을 또한 眞諦라 한다. 원시불교의 敎義의 기초가 되고 있는 四諦 가운데 ·의 원리는 俗諦이고 眞諦이며 觀察의 정도에 따라 ·이라 통한다.

 

무아(無我) : 非我라 번역하기도 한다. 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自存하며(), 핵심적인 所有, 곧 주인공으로서(), 지배적 능력이 있는 주체()로 생각되는 영혼적 또는 本體的 實體를 의미한다. 모든 物體에는 이런 가 없고 가 아니라고 설하는 것을 諸法無我라고 하며 無我하는 것을 無我觀이라 한다. 無我는 불교의 근본교리로서 三法印의 하나인 無我印에 해당된다. 諸法無我印에서의 의 뜻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 뜻과는 구별해야 할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인도에서는 고래로 brahman교의 교설에 의해 atman() 사상이 젖어 있었기 때문에 釋尊은 일차적으로는 그런 의미의 의 관념을 부인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석존은 가 될 수 없는 것, 가 있지 않은 것, 라는 집착에서 떨어질 것, 가 아닌 것을 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으며, 라는 관념, 나의 것이라는 觀念을 배제하는 사고방식, 는 존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었다. 팔리어 聖典에서의 無我의 원어는 anattan이다. 그 뜻은 가 아니다라는 의미와 내가 있지 않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초기 佛敎에선 결코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없었다고 한다. 원래는 에 대한 집착에서 떨어진다는 뜻이다. Upanisad 철학에서는 實體視하는 것에 비해서 佛敎에서는 이런 見解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고 客體的, 기능적인 를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반대한 것이다. 存在 · 不存在라고 하는 形而上學的 문제에 대한 대답은 석존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참다운 나의 문제는 존재적 존재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므로 존재 · 非存在의 관념적 · 논리적 차원을 초월한 영역이기 때문에 석존은 일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석존께서는 다만 곧 나의 것이라는 觀念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원시불교에서는五蘊의 하나하나가 이므로 非我이다라는 敎說, 無常이므로 無我이다라는 敎說(雜阿含經 卷三)이 있다. 이것은 가 아닌 것을 , 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특히 身體를 나의 것, 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라는 觀念排除하고자 했다. 說一切有部에서는 人無我를 말하며 아를 부정하였으나 諸法實有라 하고 法無我는 말하지 않았다. 뒤에 와서 차차 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無我說이 확립되었으며, 이런 입장은 說一切有部, 초기 大乘佛敎에도 계승된다.

이렇게 하여 無我에는 人法二無我이 있게 됐다. 有情(살아 있는 것들 : 衆生) 五取蘊(凡夫의 생존을 이루는 物心의 다섯가지 요소(五蘊))假和合的 존재이므로 이런 五蘊的 假和合體實體的인 생명의 주체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人無我라고 칭한다. 또 모든 것은 因緣(結果를 내는 親因, 結果를 내는데 보조되는 것은 )에 따라 나타난 것(로 성립되는 것)이므로  그것에는 원래 고유한 獨自的 本性(自性)이 없다고 하는 것을 法無我라고 한다

阿含에는 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하며, 이에 따라 변천하고 사라져 가는 無常한 것이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므로 無我라고 한다.

有部에서는 我空法有라 하여 人無我하고 있지만,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는 각각 自性이 있다고 보아 法無我를 설하지 않는다.

成實論에서는 五蘊안에 참된 自我가 없다고 보고 人無我하는 것을 空觀, 五蘊이 다  無常이어서 참된 自性이 없다고 보아 法無我하는 것을 無我觀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無我說空觀과 관련되어 無我란 사물에서 나(영원불멸의 本體, 고정적 실체)가 없다. 無自性의 뜻이 있다고 하여(中論 卷二二 · 二三) 無我(人無我法無我 我法二空) 를 설했다. 二種無我相謂人無我及法無我 楞伽經卷一특히 唯識宗에서는 三性說에 따라 三無我를 세우고 또 阿賴耶識과 관련시켜 無我를 고찰하여서 阿賴耶識本性이므로, 諸法阿賴耶識중의 種子顯現에 불과함으로 無我라고 하고 있다. 實我實法情有理無로 참된 이 없으므로 無相無我, 依他起似我似法如幻假有로서 집착된 과는 다르므로 異相無我, 圓成實實性으로 無我의 상태에서 나타난 眞如自相이라고 하므로 自相無我라고 한다.

 

화현(化現) : ·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 가지로 모양을 변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가현(假現) :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잠시 사람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일.

 

() : 범어 atman의 번역. 본래는 呼吸의 뜻. 변하여 生命·自己·身體·他者에 대한 自我 ·自我本質·일반의 本質自性. 온갖 것의 근원에 내재해서 개체를 지배하고 통일하는 獨立 영원의 主體를 의미한다. 아트만은 인도의 思想界에서는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다. 불교에서는, 영원히 存續하고(), 자주독립하여 존재하며(), 중심적인 소유주로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등의 의미를 갖는 의 존재를 否定하고 無我說을 세웠다.

리그·베다 이래, 아트만이란 말이 쓰여졌다. 부라흐만을 인간의 생명활동의 주체인 (氣息)으로 생각했었는데, 다음에 부라나는 개개의 생명현상을 의미하게 되고, 아트만은 일층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샷타바타·브라흐만에서는, 言語·視力·聽力 등의 생명현상은 아트만을 기초로 하여 나타나고, 아트만에 의해서 통괄된다고 하고, 造物主와 완전히 同一하다고도 했다.

우파니샤드의 시대에는 아트만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하고, 혹은 아트만은 個人我(小我)인 동시에 우주의 중심원리(大我)라고도 하고, brahman(宇宙原理)과 아트만이 일체임을 구하거나,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同一하다고 하거나, 또 아트만만이 참된 實在이며 다른 것은 모두 이라고 한다

불교의 阿含에서는 인간 개체의 전체가 ((1) 五蘊我이다)라고 하거나, 혹은 개체 안의 中心生命이 되는 것을 ((2) 五蘊을 가짐)라고 하거나, 혹은 우주원리를 ((3) 중에 五蘊이 있다)라고 하거나, 혹은 존재요소가 각각 固有한 성질(自性)을 가지고 있다((4) 五蘊중에 가 있다)고 하는 有我說否定한다(後世에는 이것을 二十句有身見이라고 했으니, 위의 (1)(2)(3)(4)五蘊의 각각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我見((1)에 해당됨) 我所見((2)(3)(4)에 해당)으로 나눈다. 我所라 함은, 所有, 所屬, 와 떨어져 있지 않는 事物의 뜻). 

部派佛敎에서는 生死流轉하는 윤회의 主體無我說의 관계등과 연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을 했다. 有部에서는, 人我法我二我를 세워서, 개체의 중심생명으로서의 (人我)否定했는데, 존재의 구성요소의 실체로서 (法我)는 항상한 참된 것으로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人我見法我見二種我見이라고 한다犢子部正量部에서는, 非卽非離蘊라고 하는 가 있다고 하여, 그것은 五蘊에 의해서 잠정적으로 구성된 생명을 갖는 개체 그것(卽蘊)도 아니고, 五蘊 밖에 따로 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 것(離蘊)도 아니고, 五蘊不卽不離하게 있다고 했다. 經量部에서는 勝義補特伽羅이 있다. 성유식론 권일에는 불교이외 부파의 에 대한 , 卽蘊我(世間一般離蘊我(數論·勝論·經量部 非卽非離蘊我( 犢子部·正量部)3종의 로 분류하여 비판하고 있다.

大乘에서는, 개체로서의 (人我)否定할 뿐만 아니라, 部派에서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法我(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의 실체)까지도 否定하여, 人法二無我하고, 모든 것이 無自性空이라고 한다. 또 부파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無常이고 이고 無我이고 不淨이라고 깨달아서, 번뇌를 滅盡한 경지를 究極的인 열반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大乘에서는 모든 것은 원래 이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은 열반의 경지는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로서···을 갖는다고 한다, 凡夫가 생각하는 小我와 구별되어, 大我·眞我 등으로 설명된다.

는 또 4종의 로 분류된다.

(1) 범부의 한 마음으로부터 생긴 .

(2) 불교이외의 학파(外道)가 주장하는 神我(丈夫··原人이라고도 번역한다).

(3) 실체가 없는데 잠정적()으로 이름붙인 假我, 예컨대 五蘊으로 구성된 肉身을 거짓으로 라 부르는 경우,

(4) 如來法身을 의미하는 眞我. 그 특성을 八大自在我로서 설명하는 수도 있다

불교이외의 인도의 諸學派(外道)에서 16종으로 분류하여 十六知見, 혹은 十六神我라고 한다. 知見이라 함은 ·의 뜻으로, 에 인식하는 능력과 보는 능력이 있다고 집착하여  있다는 뜻. 16이라 함은 ·衆生·壽者·命者·生者·養育· 衆數·(作者·使作者·起者·使起者·受者·使受者·知者·見者를 말한다.(智度論 卷三十五)

 

승의보특가라(勝義補特伽羅) : 승의는 第一義·眞實라고 하며, 보특가라(補特伽羅)는 다시 태어나서 죽어가는 주체를 말하는 것으로, 外道十六知見 가운데 하나로 의 별명이라 한다. 불교에서는 無我를 말함으로 일반적으로 태어남과 죽음의 주체로서의 보특가라(勝義補特伽羅)實在하는 것을 인정치 않고 오직 편의상 사람을 거짓 보특가라(世俗補特伽羅)라고 부르는데 불과하다고 한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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