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神通)

외도와 신통

근와(槿瓦) 2019. 2. 12. 14:45

외도와 신통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은 일초 동안 추번뇌·세번뇌가 육만삼천 번을 뜁니다. 이렇게 거칠게 일어나는 번뇌를 다스려서 다소 쉬게 하면 여기에서 신통력이 나오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생각을 묶어서 집중하고 통일하면 묘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술(妖術)이라고 합니다. 불교 수행을 할 때 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무엇을 잔뜩 바라고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염불을 하거나 자기 관념을 뒤집어쓰고 망상으로 염불, 기도 등을 할 때 요술 경계가 나타납니다.

 

경전을 읽거나 기도, 염불 등을 열심히 하면 점차로 식()이 맑아집니다. 그러면 앞일도 내다보고 남의 생각도 들여다보는 능력이 생기는데, 이 능력을 자꾸 써먹게 되면 힘이 소진되어 매()하게 됩니다. 그때 힘을 달라고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외마(外魔)가 들어옵니다. 잘못하다가는 잡신(雜神)이나 귀신(鬼神)이 들려서 가시밭길을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맑아지면 욕심이 적어지는 등의 좋은 점도 있지만 이와 같은 위험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경계를 당했을 때는 선지식에게 반드시 물어가며 한 발짝씩 주의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 사상에 의지하여 바르게 염불하고 기도해나간다면 이런 경계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도들은 바른 사상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경계가 나타났을 때 여기에 탐착하고 머물러 그대로 삿된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지게 됩니다.

 

요술은 바른 도술(道術)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등록이나 여러 가지 선서(禪書)들을 보면 깨달음을 얻은 역대 조사(祖師)스님들이 가지가지 신통을 나투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중생들을 이끌어들이기 위해 방편으로써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의 신통과 능력을 보이신 것이 경전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이 보이신 능력을 도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생각 작용을 통일함으로써 나타나는 요사스러운 신통인 요술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체의 번뇌 망상을 완전히 항복받은 경지, 일체의 관념이 붙을 수 없는 본심의 자리에서 자유자재로 법을 잡아 쓴 도리이며, 깨달음에서 나오는 묘용(妙用)으로서의 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술(道術)이라고 합니다. 도를 통한 경지에서 온 우주를 뒤흔들며 법을 막 잡아 쓰는 깨달음의 작용이라는 뜻입니다. 번뇌 망상을 통일해서 나오는 삿된 힘인 요술과는 천지현격으로 다른 능력입니다.

 

요술 경계가 먼저 나오면 그것이 오히려 도를 성취하는 데 큰 장애가 됩니다. 천상세계의 신()들이 도를 닦지 못하는 것은 바로 신통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의 사람들은 오신통(五神通)이 나지 않은 것이 아주 큰 조도품(助道品)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아주 갑갑한 세 가지 신통이 났는데 모두 거기에 팔려서 공부를 못합니다. 천안통(天眼通)으로 텔레비전이 생겼고, 천이통(天耳通)으로 전화가 생겼습니다. 비행기는 신족통(神足通)에 해당합니다. 이 세 가지 신통 때문에 지구상 사람들의 공부가 잘 안 되는데, 오신통이 다 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귀신들과 사왕천, 도리천 등의 천상세계 사람들은 모두 오신통과 살기 좋은 환경에 놀아나서 공부를 못합니다. 남섬부주 이 지구상 사람들은 오신통이 안 나 있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빠릅니다. 그것이 조도품인 것입니다.

 

신통이 먼저 나는 삿된 공부를 하다가는 내생에도 그런 통이 먼저 나와서 애를 먹게 됩니다. 신통이 나면 무엇이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니까 그 이상은 공부가 안 됩니다. 천상에 날 복()을 가지고도 이 지구상에 태어나서 부처님의 정법을 만나 다시 수행하게 해달라고 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요즘 전 세계의 불자들이 모두 사견에 빠져 요술통을 구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종교에는 다 신통이 조금씩 있습니다. 그런 데 속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도()에 이익이 없습니다. 이런 삿된 신통에 팔리는 것은 독한 청계천 물에 목욕하려 드는 것과 같습니다. 청계천 물에 목욕을 하면 피부에 온통 부스럼이 나고 야단일 텐데, 어리석어서 모두가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외도들이 가지고 있는 삿된 신통은 웬만한 귀신이면 다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무당들은 그런 기운이 들어온 것입니다. 불법을 수행하는 이들도 몸은 법당에 있으나 정신은 이미 반무당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상승 화두선은 일체의 관념을 다 쳐버리고 생각이 붙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외마(外魔)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통일해 들어가는 소승선과 생각을 약20%를 용인하는 대승선은 외마가 붙습니다. 생각의 작용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이 통일되었을 때 여기에서 힘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힘을 자꾸 써먹게 되면 수행력이 소진되는데, 이때 힘을 달라고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면 잡신(雜神)이나 귀신(鬼神)이 접해서 외마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이나 기도를 하다가 귀신이 들리고 무당이 되기도 합니다. 외도 수행을 하다가 그렇게 되기도 하고 불교 수행을 하다가도 그렇게 됩니다. 안수기도를 하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삿된 능력을 많이 써먹을수록 빨리 매()합니다. 조금 간직한 사람들은 더디게 매합니다.

 

천상세계에 올라간다고 해도 소견(所見)이 다소 넓어질 뿐이지 완전히 탁 트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몸뚱이에 집착한 좁은 소견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비비상처천(非非想處天)도 번뇌 망상을 완전히 여읜 안정권에 들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해서 비비상처천까지 올라가는 실력을 얻었다고 해도 힘을 자꾸 써먹으면서 흐려져서 도로 지옥에까지 처박힙니다.

 

도로 매하지 않는 안정권, 도로 탁해지지 않고 물들지 않는 경지에 가려면 최소한 소승 4(四果) 가운데 첫 번째인 수다원과(須陀洹果)는 증()해야 합니다. 외도의 정신을 가지고 염불, 기도 수행을 한 이들에게 요술 경계, 즉 삿된 능력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써먹어서 점차 매()하는 것을 비유하자면 마치 흙탕물이 조금 가라앉았다가 도로 뒤집히는 격입니다.

 

장마철에 시뻘겋게 뒤집힌 강물을 컵에 담아 흙탕물이 80~90% 정도 가라앉게 한 뒤에 살펴보면 윗물은 그런 대로 맑습니다. 그 정도 수준으로 거친 번뇌가 가라앉은 것이 소승 수다원과 경지입니다. 그것을 다소 맑아진 윗물만 따라서 다른 컵에 옮긴 다음 또다시 80%를 가라앉혀 다른 컵에 윗물만 옮긴 것이 사다함과(斯陀含果)입니다. 수다원과보다 맑아진 것입니다. 80%를 가라앉힌 뒤에 옮기면 아나함과(阿那含果)가 됩니다. 맨 마지막에 한 번 더 옮긴 것이 아라한과(阿羅漢果)입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아주 깨끗하고 맑은 물이 됩니다. 그 물을 몇 번씩 흔들어 대고 거꾸로 뒤집어도 다시 혼탁해지지 않습니다. 맑은 물만 남아서 더는 오염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컵에 든 물을 옮겨서 계속 발전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맑은 물을 고스란히 지켜서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소승 4과의 성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그대로 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맑아지고 컵을 거꾸로 뒤집어도 탁해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외도들은 번뇌가 좀 쉬어서 맑아졌다 싶으면 거기에서 나타나는 능력을 바로 써먹습니다. 그러면 컵을 뒤흔드는 것과 같아서 출렁거려 뿌옇게 흐려지고 도로 낮은 경지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는 불자라면 모름지기 일체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외도굴에 빠지거나 부처님 법을 공부한다면서 삿된 경계에 팔려 미혹되어 있다면 자기를 그르치고 남까지 그르쳐서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기는커녕 해만 끼칩니다.

 

바른 공부를 해나가려면 반드시 선()의 사상에 의지해야 합니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예언을 하고 그러는 것들이 모두 귀신 기운인 것을 알고 선의 사상과 화두선으로 이런 경계들을 초월해나가야 합니다. 어떤 경계에도 팔리지 않고 화두만 바르게 들어나가면 곧장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출전 : 정일선사법어집()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남산정일선사 행장(南山正日禪師 行狀)***

 

스님께서는 1932년 임신(壬申)년 음력 227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365번지에서 출생하셨다.

부친은 제주 고(), 정록이셨고, 모친은 하동 정(), 간난이셨는데, 스님께서는 두 분 슬하에 21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셨다. 스님의 속명은 이득(二得)이시다.

 

여덟 살 되시던 해, 어느 날 도살장에서 죽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소의 눈망울을 보고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되었다. 그후 성장하여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한동안 형편이 어렵던 집안 일을 돌보며 지내셨다. 이때에도 어렸을 때 도살장에서 본 풍경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죽음을 초월할 방법을 계속 찾으셨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고서점에서 한 권의 불서(佛書)를 발견하시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스님께서 이후 수십 년 동안 후학들에게 수행의 거울삼아 읽을 것을 누차 강조하셨던 선서(禪書) 선가귀감이었다.

 

스님께서는 당시 그 뜻을 잘 모르면서도 선가귀감을 수십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셨다. 그런 인연으로 불교 관련 책들을 찾아 읽으시며 생사초월의 뜻을 지속적으로 품고 계셨는데, 마침 조계사 신도회장이었던 어느 친척 분의 권유가 있어 조계사로 출가하시게 되었다.

 

당시 조계사의 원주 소임을 보시던 범행(梵行)스님은 자신의 은사 스님이 되시며, 당시 총무원장이셨던 태전(太田) 금오(金烏)선사에게 스님을 안내해주셨다. 이에 스님께서는 1958년 금오선사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수계하셨다. 법명은 정일(正日)이시고 당호는 남산(南山)이시다.

 

스님께서는 은사 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전남 구례 화엄사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곳에서 1년 가량 머무시다가 사중에서 쓸 양곡을 마련하기 위해 화엄사에서 진주까지 걸어서 탁발 행각을 떠나셨는데, 이 기간에도 화두 일념하다가 동네 골목길을 잘못 들어가신 적이 무수히 많았다. 스님께서는 3개월 동안의 탁발을 마치고 화엄사로 돌아와 37일 기도를 성만하셨다.

 

이후 스님께서는 망월사 주지이셨던 춘성 스님을 찾아가셨는데, 도량의 형세가 마음에 들어 천일(千日)간의 원력을 세우고 기도를 시작하셨다.

 

당시 법당은 인법당 구조로 1층 건물이었고, 선방이 달리 없어서 법당에서 참선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 형편 때문에 수좌 스님들은 없고 재가 처사님과 보살님들만이 정진 중이었다. 스님께서는 참선과 기도를 병행하기로 하시고 수행 정진하셨다.

 

기도를 시작한 후 오백 일까지는 졸음을 쫓기 위해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냉수욕(冷水浴)을 하셨다. 그렇게 오백 일이 지나자 냉기가 뼛속 깊이 사무쳐 들어와 소화가 안 되는 등 냉병이 생겼다. 그래서 여름에도 따뜻한 화로에 기와를 구워서 배에 한참 동안 대고 있어야 소화가 될 정도였다. 그후 지나친 고행을 하거나 몸을 혹사시키는 것은 오히려 수행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느끼시고 나머지 오백 일 동안은 냉수욕을 삼가셨다.

 

그 무렵 속가의 부친께서 중풍으로 와병 중이셨는데, 당시 매우 치열한 각오를 가지고 기도 정진 중이셨던 스님께서는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출문(出門)하지 않겠다고 결신하고 일심으로 기도에 매진하셨다.

 

하지만 이때 꿈에 부모님의 좋지 않은 모습이 보이는 등 여러 가지 마장이 일어났다. 마장이 매우 드세어 스님께서는 괴로움을 크게 느끼셨고, 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화두를 드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밖에는 나지 않아서 염불 기도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참선을 시작하여 화두에 매진하셨다.

 

기도 중에 일어나는 끊임없는 마장에도 불구하고 스님께서는 기도와 염불을 매우 지극하게 잘하셨는데, 이 모습을 보고 당시 원주 스님이 좋지 못한 마음을 품었다. 그 스님은 춘성 스님께 가서, 법당에서 참선을 하는데 염불소리가 시끄럽다는 등 여러 가지 모함을 하여 스님을 절 밖으로 내쫓으려고 하였다. 이에 스님께서는 회향을 하지 않고는 제 발로 걸어나가지는 않겠다고 춘성 스님께 간절히 고하셨다. 춘성 스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시며 스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기도를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다행히 천일기도는 이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마장 경계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스님께서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목탁채에 솜을 두루고 목탁을 치셔야만 했다.

 

이때 염불 기도시간에는 오로지 염불만 하시고, 염불이 끝난 후에는 바로 참선을 하여 화두를 드셨는데, 화두를 들지 않으면 여러 가지 마장 때문에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염불과 화두를 동시에 병행하지는 않으셨다.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하면 체력적인 소진이 너무 컸기 때문에 스님께서 취하셨던 나름대로의 수행 방법이었다.

 

그렇게 천일기도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춘성 스님께서는 스님의 원만한 회향을 돕기 위해 회향 직전에 몸소 21일간 용맹정진을 하셨다. 스님께서는 그 곁에서 7일간 철야기도를 하시면서 마침내 그 어려운 천일기도를 회향하셨다.

 

천일기도를 회향하신 후 무주 구천동 토굴로 은사이신 금오 선사를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고, 그후 재차 은사 스님을 찾아 청계산 청계사로 가셨다. 그곳에서 금오 선사께서는 스님에게 원주 소임을 맡기셨다.

 

스님께서는 소임을 보시던 중, 동산(東山)스님이 조실로 계셨던 부산 범어사에서 정진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청계사에서 겨울 동안 쓸 땔감 3개월치 분량을 마련해두시고는 동안거 결제 때에 맞추어 어느 날 새벽 홀로 길을 떠나셨다.

 

범어사에서 스님께서는 본격적인 참선 수행을 시작하셨다. 시심마(是甚麽, 이 뭐꼬) 화두를 참구하셨는데, 동안거 결제 기간 중 어느 날 화두와 별개로 새벽종송에 나오는 장엄염불 중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는 대목의 뜻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또한 그날 낮에 중단 불공을 올리는데 화엄경약찬게에 나오는 육육육사급여삼(六六六四及與三)’의 뜻도 확연히 이해가 갔다. 이때부터 화두가 풀려서 의심도 없어지고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스님께서는 경계가 바뀐 것으로 이해하시고 그것이 올바른 견처(見處)인지를 점검받기 위해 해제를 하면 당시 선지식으로 이름이 높았던 전강(田岡)선사를 찾아뵙겠다고 결심하셨다. 마침내 해제가 되어 인천 주안의 용화사로 전강 선사를 찾아뵈었다. 선사께서는 스님이 묻지도 않았는데 얼굴을 한번 보시더니 상황을 다 아신 듯 스님에게 경계를 일러보게라고 말씀하셨다.

 

스님께서 경계를 이르시니 일원상(一圓相)을 그리시고는 입야타 불야타(入也打不也打)’공안을 물으셨다. 이에 스님께서 걸망을 지고 원 안으로 들어가시는 시늉을 하자 전강 선사께서는 주장자로 어깨를 한 번 치셨다. 이에 스님께서 무엇을 치셨습니까?”라고 하시니 전강 선사께서 재차 주장자를 치셨다. 이에 스님께서는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답하니 전강 선사께서 다시 치셨다.

 

이렇게 여러 번 오고간 후 전강 선사께서는 방법을 바꾸시어 의리(義理)로 일러보소라고 하셨다. 이에 스님께서는 의리라는 단어의 뜻을 몰라 꽉 막혀 잠자코 있었더니 다시 공부를 지으라고 하셨다. 전강 선사의 질문으로 인하여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화두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바른 선지식의 점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무치게 깨달으셨다.

 

이후 스님께서는 전강 선사 곁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을 하셨는데, 마침 전강 선사께서 범어사 조실로 부임하시게 되었다. 이에 스님께서도 자연히 범어사에 계속 머무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3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것을 포함하여 범어사에서 3, 인천 용화사에서 3, 수원 용주사에서 3년 등 전강 선사 문하에서만 약 10년간을 참선 수행 정진하셨다.

 

그러다가 스님께서는 당시 도광(度光)스님이 주지로 계셨던 화엄사 구층암으로 수행처를 옮겨 정진하셨다. 또한 해인사 선원장을 거쳐 통도사 극락암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셨다.

 

공부 도중 홀연히 마음의 눈이 열려 현실 경계 그대로가 실상이고 열반인 도리에 계합(契合)하시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극빈자는 이슬 맺힌 갈대숲이 좋다

홀연 한 가닥 시광이 온 대지를 투과하니

만년 전사 부처님 열반이 드러났네.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슬픔과 같이

전인 미답지가 궁금하느냐?

잔물결 이는 개울로 가서 세수나 하거라

 

그리하여 전강 선사를 친견하고자 하셨으나 때는 이미 늦어 전강 선사와의 인연이 다했는지 선사께서 입적하신 뒤였다.

그후 스님께서는 속가 어머님을 모시고 안성의 천석산 토굴에서 정진하셨고, 1970년 전라남도 해남 강진의 백련사에서 주지 소임을 약 4년간 보시면서도 속가 어머님을 모시고 정진을 계속 하셨다. 모친이 별세하신 후 문득 밝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 홀로 길을 떠나라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또한 불은(佛恩)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이에 따라 스님께서는 포교의 원력을 세우시게 되었다. 때마침 도심 포교를 해보라는 주위의 권유 등이 있어 자연스럽게 서울에서 포교하는 인연이 닿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서울로 거처를 옮기신 후 속가의 인연이 있던 도봉구를 중심으로 수행포교터를 물색하셨다. 백여 군데의 터를 둘러보셨으나 마땅한 곳이 없던 중 우연히 지나가던 어느 거사의 말을 듣고 마침내 현재의 보광사 터를 발견하시게 되었다. 스님의 원력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과 포교의 도량터는 이렇게 하여 마련되었다.

 

1979, 스님께서는 북한산 자락의 그 터에 도량을 건립하기로 원력을 세우시며 사찰명을 보광사(普光寺)라고 명명하시는 한편, 1987년 관음전 불사를 필두로 하여 요사채를 세우셨고, 1990년 보광선원, 1993년 대웅전을 조성하셨으며, 2003년에는 회관 불사를 이루어내셨다.

 

이후 스님께서는 보광사를 중심으로 도심 포교에 전념하시는 한편, 보광선원을 개설하여 조실로 주석하셨다. 또한 불교의 정맥을 이어오는 데 큰 역할을 한 대한불교 조계종의 모체(母體) 선학원 원장(1983~1985)을 역임하셨고,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선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하시면서 부처님 정법(正法)을 수호하셨다. 이사장으로 재임하시는 동안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과, 종단의 모체(母體)인 선학원과의 갈등이 격화되어 분파될 뻔하였으나, 사욕을 떠난 스님의 혼신을 다한 덕화와 화합의 노력 덕분에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지리산 정각사 죽림선원 조실(1991~2004)과 속리산 법주사 주지(1992~1994)를 역임하셨으며, 지방에도 포교의 거점을 마련하시고자 충남 금산 서대산에 선문사를 건립하셨다. 부산 김해에도 보광사를 건립하셨는데, 여기에서는 보광선원과 보광유치원이 함께 운영되고 있다.

 

또한 1999, 충북 청주에 충북불교문화회관을 건립하셨다. 그 직후에 중부권 지역의 불교 발전을 위하여 회관 일부를 청주불교방송국에 영구적으로 무상 임대하심으로써 충북 불교 포교에 핵심적인 요람으로 성장하도록 크게 뒷받침하셨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정법과 참선법을 수호하시며 수좌들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 노력하셨다.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혜명(慧命)을 이어 바른 선()을 펴기 위해 애쓰셨으며, 스스로 수행과 일상 삶에서 모범을 보이시며 평상심의 법을 대중에게 펴보이셨다.

 

스님께서는 또한 대중 교화의 방편으로 소승에서 대승, 대승에서 최상승선으로 이끄는 차제적(次梯的)인 교화법을 택하셨다. 그리하여 스님께서는 광명진언과 지장경에서부터 시작하여 관세음보살보문품·금강경·선가귀감·원각경·법화경으로 심화된 후 선가귀감으로 마무리하게 되어 있는 수행법을 널리 펴셨다.

 

스님께서 이 수행법을 펴기 시작하신 이래 무수히 많은 대중들이 이 수행법을 받아 실천하였다. 그리고 대중들은 이 수행법의 공부 과정 중에 포함되어 있는 천도재를 올림으로써 수행 공덕을 법계에 회향하였다. 이러한 공부 과정을 모두 마친 대중들은 인과의 도리와 불법의 밝은 이치를 바르게 이해하게 되었고, 그를 바탕으로 올바른 가치관과 참다운 행복을 찾았다. 또한 대중 모두가 스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밝은 진리의 세계에 더욱 가깝게 다가서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대중 속에서 더불어 함께 하시면서 염불, 간경, 참선 등 원효대사께서 보이셨던 통불교적(通佛敎的)인 수행 방법을 통하여 인간뿐 아니라 법계의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는 보살도를 행함으로써 일체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보살의 삶을 살도록 대중들을 이끄셨다.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육바라밀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도록 하셨으며, 설법을 하실 때마다 이를 특히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대승불교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화엄경보현행원품에 나오는 보현보살님의 서원에 따라 일체중생의 근기에 수순해줄 것을 강조하셨던 스님께서는, 무한히 따뜻한 자비로움으로 일체중생들을 포용하시며 진리의 밝은 세계로 인도하셨다.

 

최상승선을 수행하는 수좌들과 학인들에게는 서릿발같은 엄격함으로 질책하심으로써 후학들을 올바로 지도하셨다.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고루 갖추시고 바르고 곧으며 따뜻한 성품을 지니신 남산 정일 선사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북한산 자락의 청정도량 보광사에서 일체중생들과 더불어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시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시자를 불러 이르셨다.

 

이제 갈 곳 없는 곳을 가야만 한다.”

어디로 가신단 말씀입니까?”

창문을 열고 자세히 살펴보거라.”

不能去的也要去

到底要去何方

打開窗戶看一看

 

이렇게 말씀하시고 편안히 열반에 드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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