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쟁(無諍),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도행반야경-5쪽-1번

근와(槿瓦) 2019. 2. 10. 08:01

도행반야경-5-1번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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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1


후한(後漢) 월지국(月支國) 삼장 지루가참(支婁迦讖) 한역

 

1. 도행품(道行品) 

부처님께서 나열기성(羅閱祇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계시니, 사리불과 수보리(須菩提) 등을 비롯한 큰 비구승의 숫자도 헤아릴 수 없고, 미륵보살과 문수사리보살 등을 비롯한 마하살보살(摩訶薩菩薩)의 숫자도 헤아릴 수 없었다.
매월 보름마다 계()를 설할 때였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모든 보살들이 모였으니 반야바라밀을 설하여 보살들로 하여금 마땅히 배워서 이루도록 하여라."
그 때에 사리불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지금 수보리가 모든 보살들을 위해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한 것일까?'
수보리가 곧 사리불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꿰뚫어 보고 사리불에게 말했다.
"부처님의 제자가 설하는 법과 성취하는 법은 모두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법안에서 배우는 것으로서 한결같이 깨달음이 있고 법에 어긋남이 없으며 널리 펼치어 서로 가르치고 널리 펼치어 서로 성취하니 끝내 이 법안에서 서로 다투는 일이 없으며, 법을 설할 때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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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로 뉘우치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저로 하여금 모든 보살들을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설하여 보살들로 하여금 반드시 배워서 이루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저로 하여금 보살들에게 법을 설하도록 하셨습니다만 보살이라는 이름에 집착하기가 쉽습니다. 보살이라는 이름에는 실체가 없으니 어떤 대상에서도 보살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어서 보살이라는 존재는 끝내 보이지 않으며, 보살이라는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도 없고 보살도 보이지 않고 그 장소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보살들에게 반야바라밀을 가르치고 반야바라밀을 설해서 보살들이 이를 듣고 마음이 게으르지 않게 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하며 무서워하지 않게 하고 어려워하지 않게 하며 놀라워하지 않게 하고 보살들로 하여금 반드시 이를 배우게 하고 여기에 머무르게 하며, 반드시 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내도록 하되 마음속으로는 정작 이러한 것을 보살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 하면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원래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원래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십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마음이란 있다고 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해도 없는 것이 아니고, 붙잡을 수도 없고, 있는 곳을 알 수도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마음은 있다고 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해도 없는 것이 아니고, 붙잡을 수도 없고, 있는 곳도 알 수 없습니까? 그리고 이와 같이 있다고 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해도 없는 것이 아니라면 유심(有心)이라고 할 것도 없고, 무심(無心)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유심이라고 할 것도 없고, 무심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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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부처님을 위하고 부처님을 배우면서도 정작 육신과 지혜가 공()하다고 설한 사람은 없었는데, 육신과 지혜가 공함을 설하시니, 최고이시고 제일이십니다. 보살이 이 가르침을 따라 아유월치(阿惟越致 : 不退轉位)[범어(梵語) avinivartan ya의 음역(音譯). 불퇴(不退불퇴위(不退位불퇴전(不退轉)이라 번역한다. 불도(佛道)를 구하는 마음이 견고하여 악도(惡道)에 퇴전(退轉)하지 않는 것. 아비발치(阿鞞跋致아비발치(阿毘跋致)라 음역한다.]를 얻고 공()한 이치를 배우는데, 마침내 반야바라밀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서 아라한법(阿羅漢法)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반드시 배우고, 반드시 지니고, 반드시 지켜야 하고, 벽지불법(辟支佛法)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반드시 배우고, 반드시 지니고, 반드시 지켜야 하며, 보살법(菩薩法)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반드시 배우고, 반드시 지니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해서 보살은 그대로 따라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보살의 마음은 붙잡을 수도 없고, 있는 곳을 알 수도 없으며 어느 곳에서도 볼 수가 없습니다. 보살의 반야바라밀은 말로 미칠 수가 없고, 보살이라는 이름은 말로 미칠 수가 없으며, 또한 보살은 어느 곳에도 없기 때문에 끝내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나오는 일도 없고 들어가는 일도 없고 머무르는 일도 없고 멈추어 서는 일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보살이라는 이름에서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머무르는 일도 없고 멈추어 서는 일도 없습니다. 반야바라밀을 설할 적에 보살이 듣고서 마음이 게으르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으며,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신속히 아유월치(阿惟越致)의 지위(地位)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다 알아 다시는 반야바라밀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색()에 머무르는 것도 온당치 않고, 통상(痛痒 : )과 사상(思想 :)과 생사(生死 : )와 식()에 머무르는 것도 온당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색에 머물러서 행하는 정신 작용과 통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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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생사와 식에 머물러서 행하는 정신 작용은 온당한 정신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니, 혹시 그 가운데에 머무르는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온당치 못한 정신 작용 때문이니, 이렇게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며,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보살은 살운야(薩芸若 :一切智)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색을 받아들이지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색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색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식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느냐 하면 그림자처럼 붙잡을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어떤 이름이나 존재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며, 이러한 까닭에 삼매(三昧)에는 끝이 없고 바른 형태도 없어서 아라한과 벽지불로서는 미칠 수가 없습니다.
사리불이시여, 살운야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보살이 생각을 가지고 살운야를 바라보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가령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은 끝내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떤 수도(修道)하는 사람이 살운야조차도 믿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왜냐 하면 6()의 신상(身相)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어떤 수도하는 사람이 불법을 믿고, 불법을 믿은 뒤로도 소승도(小乘道)를 지녔습니다. 그러므로 불도(佛道)에 들어와서 그 가르침대로 어떤 대상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색도 받아들이지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또한 깨닫지도 않고 도를 이루지도 않고 지혜도 보지 않았으며, 안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고 밖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고 그 밖의 어떤 것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았으며, 또한 안의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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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고, 밖의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고, 또한 어떤 곳에서도 벗어나지 않고 배움으로써 불법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속속들이 깨달은 뒤에는 정작 이 법으로부터 물러나서 어떤 존재도 열반과 동일하다고 말했습니다.
보살은 어떤 존재에도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안과 밖에서도 존재를 보지 않아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거나 따르는 일이 없으니, 어느 누구도 존재를 붙잡을 수 없으며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며, 또한 열반이라는 생각도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의 반야바라밀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색과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받아들이지 않고, 중도(中道)도 받아들이지 않고, 완전한 열반과 부처님의 10()4무소외(無所畏)18불공법(不共法)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보살이 이미 반야바라밀에 들어가서 행할 때는 '반드시 어느 곳을 보고 있는지, 이 반야바라밀은 어느 곳에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며, 또한 반야바라밀 안에서는 어떤 존재도 붙잡을 수 없고 있는 처소도 알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이라고 일컫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듣고도 게으르지 않고 겁내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고, 이와 같이 깨달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이 어떤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을 깨닫는가 하면 색은 본래 색을 여의었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본래 식을 여의었으며, 반야바라밀도 본래 반야바라밀을 여의었다는 사실을 알면 됩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설사 이들로부터 벗어나 있더라도 살운야에 스스로 다가섭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출처 :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불교학술원)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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