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坐禪,참선)

참선 기초 수행법

근와(槿瓦) 2019. 2. 3. 23:29

참선 기초 수행법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선지식으로부터 기도법이나 수행법, 화두 등을 받아 열심히 정진하고 노력해야 그만큼 번뇌가 쉬고 정화되어 맑아지고 순수해집니다. 수행을 열심히 한 만큼 본마음이 드러나 번뇌 망식에 의지하여 허상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살던 전도몽상을 여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일찍이 부처님께서 설해놓으셨던 밝은 이치의 세계, 실상의 세계, 진리의 세계로 더 가까워집니다.

 

번뇌가 쉰 만큼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여 밝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흥겨운 콧노래가 나오고 엉덩춤이 들썩들썩 추어지며 언제나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근본 이치를 터득하고 마침내 도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이렇게 행복하고 순수하고 바르게 되면 그 영향이 가족은 물론 주변 이웃까지 퍼지게 됩니다. 더 나아가 나라와 지구, 우주까지 그 영향이 퍼져나가 온 세상이 밝아지고 행복해집니다. 이렇게 즐겁고 기쁜 삶을 살면서 항상 베풀고 나누며 나와 남이 동시에 이롭도록 노력하는 것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대중들을 위한 수행법을 마련하여 이를 단계적 프로그램으로 체계를 세워 널리 알려온 것이 있습니다. 이 공부를 착실히 해 마치면 마음에 참된 힘을 얻고 부처님 법의 이치를 바르게 깨달아 주변의 인연 있는 중생들을 제도하면 보살행을 실천하는 불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또 애쓴 만큼 업이 녹고 정화가 되어 들뜨던 망식 기운이 차분히 가라앉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최상승 참선법을 닦기 위한 기초가 착실히 닦이게 됩니다. 이 공부 과정을 마쳐야 간절하게 발심이 되며, 최상승선 화두 공부를 하기 위한 기본이 갖추어집니다.

 

1. 광명진언

2. 지장경

3. 관세음보살 보문품경

4. 금강경

5. 선가귀감

6. 원각경

7. 법화경

8. 선가귀감(再次)

 

공부 과정은 이렇게 단계적으로 경을 읽으며 한 단계가 끝날 때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천도재를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 공부 과정을 모두 마친 이는 열 살도 안 된 아들딸들에게 하듯이 조건 없이 베푸는 마음이 조금씩이나마 생겨납니다. 나름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지극하게 공부한 이는 그런 마음이 매우 크게 생겨나기도 합니다.

 

또 참으로 바르게 살겠다는 마음, 본래심(本來心)을 찾겠다는 간절한 도심(道心)이 생겨납니다. 각자 노력한 만큼 그 정도는 달라서 눈곱재기만큼 생긴 이도 있고, ‘쥐눈이콩만큼 생긴 이도 있고, ‘작두콩만큼 셍긴 이도 있습니다. 작두콩은 아주 크고 맛도 좋습니다.

 

그렇게 저마다 정도는 다르지만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도록 발심이 된 것은 갓 자라나는 어린 새순, 새파란 어린 싹과 같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작고 연약하지만 점차로 자라나서 작은 나무도 되고, 점점 더 성장하여 아주 커다란 나무도 되는 것입니다.

 

또 눈덩이에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눈사람을 만들 때처럼 연탄재에 눈을 뭉쳐 몇 번만 굴려보면 처음에는 우습게 작아 보이던 것이 한 번 구르고 나면 금세 커지고, 한 번 구르고 나면 금세 커지고, 또 한 번 구르고 나면 금세 커져서 어느새 놀랄 만큼 큰 눈덩이가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눈곱재기만큼 생겨난 발심, 행복감, 남에게 베푸는 마음이 1년 지나면 두 갑절, 2년 지나면 네 갑절, 3년 지나면 팔 갑절, 이렇게 해마다 배()로 불어납니다. 그래서 즐거움과 행복에 겨운 삶을 살다가 어느 날 탁 도가 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즐겁다고 하는 것은 들뜬 즐거움이 아니라 담담한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담담한 것이 참 즐거움입니다. 그것이 즐거움보다 더 위에 서는 것입니다. 들뜬 기운을 가라앉히는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즐거움을 지니고 무엇보다도 열 살도 안 된 아들딸들에게 그러하듯이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마음을 시부모와 남편, 그리고 아내에게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열 살도 안 된 아들딸들에게는 누구나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지극하게 잘 합니다. 아주 즐거워서 베푸는 것입니다.

 

공부 과정을 차례대로 해 마치고 나면 부처님 법의 바른 이치가 깨달아지기 때문에 상대에게 늘 무엇인가 바라던 마음, 구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진실한 태도로 시부모와 남편에게도 베풀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부터 편안해집니다.

 

열 살도 안 된 아들딸에게 베풀듯이 시부모, 남편에게도 기뻐서 베푸는 마음이 생긴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즐거워서 점점 더 잘하게 됩니다. 옛날 우리나라 조상들이 모두 이렇게 살았습니다. 시부모 공경하고 베푸는 것이 참으로 즐거워서 저절로 우러나는 마음으로 모셨습니다. 또 그것이 자기가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이었기 때문에 그 도리를 다하기 위해 언제나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이 공부 과정을 마치기 전에는 하루하루의 삶이 괴롭기만 했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보살님은 처음에 보았을 때 아무 말도 못하고 무턱대고 흐느끼기만 했습니다. 헛살았다는 생각에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중증 우울증 환자가 되어 온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이 찼는지 자기도 모르게 몇 분에 한 번씩 한숨을 있는 대로 내쉬었습니다. 화기(火氣)가 떠서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겨우 잠이 올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재수가 없다고 해서 주변에서 다들 싫어합니다. 하는 일도 잘 안 됩니다. 장사꾼이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물건을 팔면 그 가게에 어느 손님이 오겠습니까?

 

하지만 이 공부 과정을 차례로 마치면 심하게 괴롭던 그런 기운이 모두 없어집니다. 이 공부를 마친 사람 가운데 영험을 못 본 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영험이라고 하면 다들 들뜬 마음, 무엇을 잔뜩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이상한 관념들을 갖다붙이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영험은 업이 소멸되어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을 뜻합니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의지하여 사물의 이치와 인과의 도리를 깨달아 자기 삶에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되찾은 것을 표현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소원을 성취하겠다고, 대단한 영험을 보겠다고 들떠서 공부를 한 이는 참된 영험이 적게 나타납니다. 공부를 다 마치고도 들뜬 기운이 가라앉지 않아 망상이 거칠게 들뛰어 괴로움이 많이 남게 됩니다. 그래도 공부를 한 공덕이 있어서 적게나마 영험은 다 봅니다. 자기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원망과 미움, 남의 탓을 하는 마음 등이 가라앉고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좀더 많이 배워 참자아를 찾고 싶다는 발심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법을 왜 진작에 못 만났을까!’하고 기쁨에 겨운 탄식을 합니다.

 

주력(呪力)을 하고 경을 읽고 천도재를 올리면서 열심히 공부했다면 그것은 마치 예과(豫科)를 마친 것과 같습니다. 의대는 예과를 마치면 본과에 올라가서 그간 배운 것을 실습하게 되어 있습니다. 공부 과정에서 예과를 마친 분들의 경우에는 실습장이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이 도 닦는 실습장인 것입니다. 경을 읽고 법문을 듣고 배운 가르침을 집에서 실천해보는 것입니다.

 

공부 과정을 다 마치면 예전엔 죽어도 안 되던 것이 조금씩 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밉던 시부모와 남편의 장점이 보이고, 상대방의 입장이 이해가 됩니다. 비로소 사람답게, 사는 것처럼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참다운 행복의 맛을 보게 되니까 점점 더 잘하게 됩니다. 당연히 점점 더 행복해집니다. 또 삶에서 응용하는 여러 가지 지혜도 생겨납니다. 뿐만 아니라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간절한 마음과 힘이 생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입력해서 생겨나는 지혜와 진실한 마음, 그리고 힘을 가정에서 자꾸 굴려보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을 편안하게 잘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모범가정, 주변에서 모두 부러워하는 가정, 아주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함과 힘은 저절로 풍겨나는 향내와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보배 말씀을 안에 담으면 그것이 말에도 풍겨나오고 일체 행동에도 풍겨나옵니다. 무릇 자기 안에 좋은 것을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빈 깡통에 못 쓰는 모래나 쓰레기만 잔뜩 담아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좋은 곡식을 담아야 합니다. 그렇게 잘 여문 사람, 속이 꽉 찬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그 향내가 천리에 퍼집니다.

전단향을 가지고 다니면 꽁꽁 묶어서 싸매고 또 싸매어도 한 번 풀썩하면 말할 수 없이 은은하고 향기로운 전단향내가 삽시간에 퍼집니다. 반대로 썩은 생선을 묶어놓았던 지푸라기에서는 아무리 냄새를 없애려고 해도 악취가 납니다. 그것은 절대로 감출 수도 없고 속일 수도 없습니다. 스스로가 전단향 같은 사람이 되어 그것으로 중생을 제도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감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언제나 남보다 두 배는 잘 해야 절에 가는 향내가 풍기게 됩니다. 언행에서 전단향과 같은 좋은 향기, 부처님의 가르침의 향기가 베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에서도 그 전에는 가정의 화합을 깨는 소리만 했는데, 이제는 상냥하고 부드러워져 남편을 위로하고 아이들을 보듬어주는 소리를 할 줄 압니다. 일상 삶에서 그렇게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향()입니다. 부처님께 향 올리는 뜻이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집안에서 향내나는 일을 하겠습니다. 우리 집안의 모범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과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촛불을 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집안의 어두운 기운을 환히 밝히겠습니다. 참으로 좋은 가정, 화락한 가정을 만들겠습니다.’이런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서 스스로 다짐하며 맹세하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아무래도 잘 안 되니까 부처님 앞에서 그렇게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그렇게 약속을 할 때에는 장에 가서 과일도 좋은 것, 초도 좋은 것, 공양미도 좋은 것을 사서 올리고 지극한 정성을 표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지극한 정성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없는 이는 깨끗한 물을 한 잔 떠다 올려도 좋습니다. 이때에도 정성심으로 해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염불하면서 가져다 올리고 무릎이 아프도록 지극히 절을 해야 합니다. 이때는 108배로도 모자랍니다. 500배는 해야 합니다.

 

우리 집안의 가장인 남편을 잘 공경하고 사랑하겠습니다.’

이렇게 다짐하며 부처님 앞에서 500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 향을 올리는 것이며 촛불을 켜는 행()입니다.

 

이렇게 부처님 앞에서 정성스럽게 절을 하고 다짐해도 습()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남편의 얼굴을 보면 여전히 쏘는 소리가 먼저 나옵니다. 그래도 예전과는 달라서 자신이 무릎 아프도록 절을 해놓은 것이 있어서 한 번이라도 참게 됩니다. 그렇게 한 번 참고 두 번 참고 세 번을 참으면 고비는 넘어갑니다. 그러면 참는 것이 습관이 되어 더 어려운 순간도 잘 넘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스스로가 무척 장하게 보입니다. 그것처럼 기쁜 일이 없습니다. 남과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겼을 때의 기쁨이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때의 기쁨과 대견스러움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 기쁨이 원동력이 되어 다른 잘못된 버릇들도 하나씩 고쳐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이 점점 나아지고 성장하여 보살행을 실천하여 멋지게 사는 보살, 원만한 덕성을 갖춘 진짜 보살이 됩니다.

 

지장경부터 법화경까지 공부를 해 마치면 경()의 가르침이 머리에서 자꾸 돌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육바라밀을 행하면 힘을 더 많이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육바라밀은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별스럽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보통 사람들이 따라하기 어려울 만큼 힘든 것도 아닙니다. 육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그것이 바로 수행 그 자체이기 때문에 점차로 번뇌 기운이 쉬게 됩니다. 몸을 버리고 갈 때 정신차릴 수 있는 힘도 바로 여기에서 생깁니다. 그렇게 힘을 얻어 놓으면 전체가 즐거움으로 변합니다. 즐거움의 맛을 보면 더 잘하게 됩니다. 즐거워서 베푸니까 힘이 하나도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즐거움 속에서 아주 오순도순 잘사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잘 의논해서 집안을 이끌고 화목하게 살며,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자녀는 올바르게 키웁니다. 이것이 바로 자녀에게 그대로 거울이 되는 모범된 행입니다. 이런 가정에서 훌륭한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자기도 성장하면 그렇게 살겠다고 하면서 참으로 멋지게 살아갈 마음을 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이며 포교입니다.

 

이 법이 온 세상에 두루 퍼져야 합니다. 지구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귀계(鬼界)의 중생들까지도 보고 본받아서 따라하고 싶어하는 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육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즐거움을 얻고, 그래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면 그 복력(福力)이 모두 자신에게 고스란히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과의 법칙입니다. 잘되는 회사의 주인 노릇을 하면서 이익배당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육바라밀 수행법은 지금 당장 행복해서 좋고 복 받아서 좋고 번뇌가 차차로 쉬어 본마음을 찾고 도통해서 좋습니다. 이렇게 따져도 좋고 저렇게 따져도 옳은 법입니다.

 

우리의 조상님들이 바로 이 수행법을 삶 속에서 고스란히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도통(道通)한 이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또 도에 가까운 이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렇게만 해나가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도를 닦는 것이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각 가정에서, 청정한 수행처인 절에 와서 그렇게 실천하면 그것이 바로 도 닦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일이 됩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절에 나오면서 욕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아직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부끄러워 절에 갈 수가 없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는 매우 훌륭하지만, 이것은 마음의 작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욕심을 다 내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욕심이 승화되면 곧바로 서원(誓願)이 되고 생명의 원동력이 됩니다. 욕심을 잘 다스려서 멋지게 쓰면 크게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에게도 이롭고 일체 중생에게도 이로운 큰 욕심을 부려서 그것을 수월하게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어 자유자재하게 되면 온 우주를 뒤흔드는 힘을 얻고 법을 마음대로 잡아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욕심을 마음껏 부려서 나와 남이 함께 이롭고 만 중생이 동시에 이롭도록 할 수가 있습니다.

 

욕심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용심(用心)을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욕심을 매우 편협하게 해석해서 무조건 버려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욕심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승화시켜서 참으로 멋지게 써먹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그 도리가 다 들어 있으므로 잘 배워서 실천하면 욕심을 마음대로 조절하고 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욕심은 다스리고 절제해야 합니다. 욕심을 마음대로 쓴다고 해서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이기적인 욕심, 엉덩이에 뿔난 것 같은 못된 욕심을 마음대로 부리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런 욕심이 있다 해도 너무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차차로 따라하면 됩니다.

 

옛날에는 흑백 텔레비전만 해도 매우 귀중한 재산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매우 애지중지했습니다. 그러나 컬러 텔레비전이 나오자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흑백 텔레비전을 다 내다버렸습니다. 이기심도 이와 같습니다. 수행을 자꾸 해서 더 좋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푹 젖어들게 되면 이기심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리고 절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있는 그대로 다 뒤집어쓰고 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욕심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다 짊어지고 옆구리에 잔뜩 끼고 그대로 오시면 됩니다.

 

엄동설한에 바깥이 얼마나 춥습니까? 중생들은 무거운 욕심 보따리를 잔뜩 지고 그 추운 바깥을 하염없이 헤매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잡동사니를 고스란히 든 채로 법당에 들어와도 괜찮다고 부처님은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것입니다. 절이고 부처님 품이니까 항상 훈훈하게, 따뜻하게 껴안아 들이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도 내려놓고 얼어붙은 몸도 녹이고 배부르게 먹게 하는 곳이 절입니다. 그러면 꽁꽁 얼었던 마음도 어느새 스르르 녹아서 잡동사니 보따리를 풀고 그 안에 든 것을 꺼내어 모두가 나누어 가지게 됩니다. 자기 혼자 이고 지고 다니던 욕심 보따리를 풀어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도 이롭고, 참된 욕심·바른 욕심이 되어 진실로 자신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소원성취 기도법입니다.

 

이 공부 과정을 성실하게, 차례로 해서 마치면 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힘이 있습니다. 그런 힘이 있어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고 커다란 원력을 세워 실천해나가는 추진력이 됩니다.

 

아무리 참선을 하고 화두를 하고 최상승법을 닦는다 해도 실답게 공부하지 않으면 아무런 힘이 없어서 임종을 당했을 때 앞뒤가 캄캄하고 혼미할 뿐 정신을 차리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교학을 열심히 해서 팔만대장경을 가로 외우고 세로 외우고 종횡자재로 외워도 힘이 안 됩니다. 그것은 경계에 당했을 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고 폭삭 무너지는 건혜(乾慧)일 따름입니다.

 

실참실구(實參實究)한 것이라야 참다운 힘이 납니다. 그래야만 자기 앞길을 훤히 밝히고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대지혜가 됩니다. 실답게 공부해야만 부처님과 같은 대자대비한 마음이 간절하게 우러나오게 됩니다.

 

최상승 공부법에 비한다면 이 공부 과정을 밟는 것은 다소 수준이 낮아 보이지만 그것 역시 좁은 소견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공부 과정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들어가는 첫 문이 되는 것이며, 간절한 발심을 하는 과정이며, 기초를 단단히 닦고 터를 바르게 정돈하여 최상승법으로 안정되게 옮겨가는 공부입니다. 그리하여 궁극에는 자기의 참마음을 발견하게 되는 공부입니다. 부디 착실한 마음으로 정성껏 해나가야 합니다.

 

이 과정을 성실하게, 참으로 지극하고 간절하게 마쳐야 바른 신심(信心)이 싹트고 자기 자신을 찾겠다는 사무치게 간절한 마음이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저절로 우러나오게 됩니다. 그리하여 최상승법으로 옮겨간 후에는 흔들림 없이, 어떤 경계에도 미혹됨 없이 힘있게 수행을 밀고 나가 마침내는 구경각(究竟覺)을 증득하고 일체중생과 더불어 성불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사무쳐 온 우주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게 되는 것입니다.

 

-광명진언(光明眞言)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

 

공부 과정을 밟으시려면 우선은 이 광명진언(光明眞言)’21일간 하루 천 번씩 외운 후 천도재를 하면 됩니다.

 

진언(眞言)은 참되어 허망되지 않은 말이라는 뜻도 되고, 진여(眞如)의 법을 가르치는 말씀이라는 뜻도 됩니다. 진언은 신비한 뜻과 힘을 훼손하지 않기 위하여 뜻을 번역하지 않고 범어(梵語)의 음() 그대로 외웁니다.

 

선가귀감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진언을 외우는 것은 금생에 지은 업은 다스리기 쉬운 것이라 스스로의 행으로 고칠 수 있으나, 전생에 쌓은 업은 지워버리기가 어려우므로 반드시 신비한 힘을 빌어야 하기 때문이니라.’

 

바로 일초 전도 전생입니다. 현생이라는 것은 지금 당장 이 순간을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생각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는 이미 업이 되었으므로 그 업을 소멸시킴으로써 다스려 들어가야 합니다. 선가귀감의 이 대목은 바로 이런 뜻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진언은 상대성을 완전히 여의어 절대성의 경지를 드러내는 화두관이 진짜 진언입니다. 일반적으로 진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다음 가는 것으로 방편입니다. 화두관이 어려우므로 일단 방편의 진언이라도 해서 다겁생래 익힌 습관을 녹여야 합니다. 그리고 전생에 지은 죄를 지극하게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진언에 대해 깊이 있게 해석하면 이렇게 풀이해야 옳습니다.

 

광명진언은 말 그대로 광명(光明)으로, 마음을 밝게 만들어줍니다. 예부터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낸 자, 부모를 살해한 자 등의 십악 오역죄(十惡五逆罪)를 지은 이는 불법을 공부하기 어렵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무리들일지라도 광명진언만은 공부할 수 있는데, 광명진언을 외우면 그 탁한 죄가 모두 소멸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수승한 진언이 광명진언입니다.

 

-지장경(地藏經)

 

광명진언을 마친 후 천도재를 올리고 나서는 지장경300()을 하면 됩니다. 지장경은 인과의 도리를 드러낸 경전입니다. 지장경10독 하고 천도재를 올리고, 다시 90독 하고 천도재를 올리고, 다시 100독 하고 천도재를 올리고, 다시 100독 하고 천도재를 올리면 300독을 모두 마치게 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하루 한 줄이라도 반드시 읽어 거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00독을 하는 기간 중에 하루라도 거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또 경전을 읽다가 한 독()을 완전히 마치기 전에 바쁜 일이 있어 경전을 덮었을 경우, 새로 읽을 때는 읽던 자리에서부터 계속 이어서 읽되 광명진언을 일곱 번 외워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지장경을 독경하는 방법이며, 지극한 정성을 들이는 것이 됩니다.

 

어느 분은 지장경을 만 독, 십만 독을 하시려고 합니다. 자기 멋대로 그렇게 숨이 가쁘도록 벅찬 목표를 정해놓고 읽다가는 혼자서 싫증을 내고 힘들어합니다.

 

공부 과정에는 300독이라고 되어 있지만, 열심히 하신다고 정성심을 내어 천 번 이상 읽었다면 거기에 다시 매달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지장재일을 중심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천 번 읽은 실력을 잊어버리지 않게 되새겨주어야 합니다.

 

불망지(不忘知)를 얻으면 잊어버리지 않는데, 나중에 읽은 금강경이나 원각경」「법화경등에 치우쳐서 지장경에 나오는 업이나 인과의 도리를 무시하는 글에 빠집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지장경을 독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꿈자리가 사나울 때 지장경을 열 번이든 몇 번이든 읽어서 천도재를 올려주면 좋습니다.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가귀감은 서산 스님의 선법(禪法)의 종지를 바르게 드러내고, 선 수행상의 여러 가지 주의점과 선가(禪家) 오종가풍(五宗家風)의 법로(法路) 등을 간추려 선학자들의 거울이 되게끔 만들어 놓은 책입니다.

 

팔만대장경과 선사의 어록 가운데 중요한 것을 간추려 적고 거기에 휴정 스님이 직접 주해를 달고 평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선가귀감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부 과정 중에 선가귀감50독씩 두 번 읽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선가귀감100독 하면 팔만대장경의 핵심적인 내용이 비석에 글자를 새긴 것처럼 잠재의식에 깊게 새겨집니다. 비석에 깊게 새긴 글자는 천 년이 지나도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얕게 새긴 것은 비바람에 깎여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처럼 잠재의식에 바른 가르침을 깊게 새겨 후생(後生)에도 이 가르침에 의지하여 불법을 닦아나가야 합니다.

 

중생들은 번뇌 망상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참선을 해도 어떤 망상이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선가귀감의 사상이 항상 머리에서 돌아간다면 자기를 올바로 경책하게 되므로 자기 마음을 밝히는 데 참으로 큰 도움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알아야겠다는 그 신심(信心)이 놓쳐지지 않게 됩니다.

 

참고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

 


출전 : 정일선사법어집()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좌선(坐禪,참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가부좌(結跏趺坐,81)-뉴사전  (0) 2020.07.31
좌선(坐禪,2362)-뉴사전  (0) 2020.07.30
면벽(面壁)  (0) 2018.05.02
수식관   (0) 2017.11.19
결가부좌인유(結跏趺坐因由)  (0) 2017.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