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下種)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① 씨를 뿌리는 것. 佛種을 심는 것이라는 뜻. 佛이 될 수 있는 種子를 중생의 마음 속에 뿌리는 것. 佛法의 緣을 맺는 최초를 말한다. 種·熟(가리켜 기우는 것)·脫(苦에서 빠져나가게 하는 것)의 三益중 하나. 三益은 下種·調熟·解脫이라고도 한다. (法華玄義)
② 천태종에서는 圓敎를 듣고 원만한 이해가 생겨 항상 무명을 깨뜨릴 수 있는 작용을 八識으로 훈습하는 것을 일컫는다.
참고
불종(佛種) : ① 佛陀의 種性. 佛陀의 系統. ② 부처가 될 수 있는 種子. 佛性. 佛果를 얻기 위한 因. 여기에 대략 네 가지를 들 수가 있다. (1)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佛性. 곧 緣起의 이치와 中道無性의 이치 등. (2) 煩惱. 維摩經卷中에서는 번뇌밖에 따로 깨달음(菩提)이 있지 않기 때문에 온갖 잘못된 견해나 번뇌가 그대로 佛種이라고 한다. (3) 菩提心. 보리심의 因이 없으면 佛陀의 果는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4) 稱名·念佛 혹은 聞名. 이런 등의 因에 의해서 마침내 佛陀가 되기 때문이다.
불(佛) : ① 범어 buddha의 音略. 佛陀·佛駄·浮陀·浮屠·浮圖·浮頭·沒駄·勃陀·馞陀·步他 등으로 音譯하고 覺者·知者·覺이라 번역하며, 眞理를 깨달은 이의 뜻으로 스스로 깨달아(自覺)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여(覺他) 깨달음의 기능이 全知全能하게 충만하다는(覺行窮滿) 뜻이 있다. 이 自覺과 覺他와 覺行窮滿의 관계는 凡夫에 있어서는 三자가, 二乘에 있어서는 뒤의 둘이, 보살에 있어서는 최후의 하나가 모자라는 것으로, 이런 점에서 佛의 우월성을 나타낸 것이다. 또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모든 경론에 여러 가지로 설해 있고, 佛身 佛土 등에 대해서도 各宗의 異說이 있는데 대체로 대승에서는 佛果에 이르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한다.
② 불타의 덕을 찬송하는데 갖가지 佛號를 세운다. 곧 여래의 十號를 비롯하여, 一切知者·一切見者·知道者·開道者·說道者라든가, 世尊·世雄(世間에 있어서 一切의 번뇌를 끊는데 雄猛, 雄健한 者)·世眼(세간의 눈이 되어 이것을 인도하는 者)·世英(세상에 훌륭하여 뛰어난 자)·天尊(五天 가운데 가장 훌륭한 第一義天)이라든가, 大覺世尊(略하여 大覺尊)·覺王(覺皇)·法王·大尊師·大聖人·大沙門·大仙(大僊 仙人 중의 가장 높은 仙人)·大醫王(병에 따라 신묘하게 약을 주는 명의와 같이 마음의 法을 자유자재로 설하는 자)·佛天(五天 가운데 가장 뛰어난 第一義天)·佛日(불타를 태양에 비유한 말)·兩足尊·二足尊·兩足仙·二足仙(이 네 가지 이름은 두 다리를 가진 生類 중에서 가장 높은 이란 뜻. 또 二足이라 함은 願과 行을, 혹은 福과 慧를 갖추었다는 뜻)·天中天(諸天중의 最勝者)·人中牛王(불타를 牛王에 비유한 말)·人雄獅子(人中의 雄者여서 마치 獸類中의 獅子와 같은 것) 등이다. 또 부처를 能化人 곧 가리키는 이, 인도하는 이란 뜻으로 能人이라고 부르고, 그래서 아미타불을 安樂能人(安樂世界의 能人이란 뜻)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能人이라 함은 能仁으로, 能仁은 釋迦의 번역이니 釋迦佛의 이름을 빌어서 佛 일반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 불타의 특유하고 뛰어난 덕으로 하여 그 몸에는 三十二相·八十種好를 구족하고, 또 十力·四無所畏와 十八不共法 등의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또 불타의 초월성을 七항으로 묶어서 七勝事·七種最勝·七種無上 등으로 부른다. 곧 身勝·如法住勝·智勝·具足勝·行處勝·不可思議勝·解脫勝의 일곱 가지 이름이 그것이다. 불타의 定과 智와 悲는 공히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大定·大智·大悲라고 하여 斷德·智德·恩德의 三德에 배속하고 합해서 大定智悲라고 한다.
③ 過去世에 나타나신 佛(過去七佛·燃燈佛 등)을 過去佛 또는 古佛이라고 하고 미래에 사바세계에 나타나는 불타(彌勒佛 등)를 後佛, 또는 當來佛이라고 한다. 최초의 佛이라 하면 역사상의 불타는 釋尊뿐이었다고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過去七佛(釋尊은 그 일곱번 째)의 사상이 생기고 좀 늦게 未來佛로써 彌勒佛을 생각하게 되어, 현재는 釋尊과 미륵불과의 두 부처의 중간에 無佛의 세상이라고도 한다. 곧 小乘에서는 現在世에 있어서 二佛이 같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大乘에 오면 그 세계관은 확대되어 자못 크고 넓게 되고 동방의 阿閦佛이나 西方의 아미타불과 같이 현재 他方세계에 無數(恒河의 모래의 수만큼)한 佛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여, 十方恒沙의 諸佛이라고 일컫게까지 되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하면 小乘은 一佛說이고, 大乘은 多佛說인데, 小乘중에도 大衆部 같은데서는 다른 三千大千世界에 동시에 다른 一佛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며, 一界一佛·多界多佛說을 취하고, 有部 등은 多界一佛說을 취한다. 이 경우「界」라 함은 三千大千世界를 말한다. 또 三世의 모든 부처에 대해서 과거의 莊嚴劫에 千佛, 현재의 賢劫에 千佛, 미래의 星宿劫에 千佛, 합하여 三劫에 三千佛이 있다고 하며, 그 佛名은 三劫三千佛名經에 나와 있다. 佛名會는 이 經의 說에 의한 法會이다.
④ 내세에 成佛하기 위한 信佛 등의 인연을 佛因·佛緣, 또 佛道에 들어가기 위한 인연을 佛緣(예컨대 佛緣을 맺는 것 등), 佛恩에 보답하는 것을 佛恩報謝라고 한다.
종자(種子) : ① 穀類의 싹이 종자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物·心의 모든 존재 현상을 나게 하는 因種을 가리키는 말. 또 種이라고도 하며 곡류등의 종자를 外種 또는 밖의 種子(外種子)라고 하는데 대해, 唯識宗에서는 같은 이치로 우리의 마음의 종자가 아뢰야식 가운데 藏識(감추어져 있음)되어 있다고 하여 이것을 內種 또는 內種子라고 한다. 이 內種子는 生果의 功能(결과를 내는 작용)을 가리키며, 이것은 現行의 諸法(현재 나타나서 작용하는 모든 현상)에 의해서, 흡사 향을 담았던 상자에 향내가 배어서 나는 것처럼 아뢰야식 가운데 熏習되어 있는 일종의 慣習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習氣라고도 한다. 이 種子說은 하나의 비유로 阿含經에 보이며, 部派佛敎 당시에는 化地部에서 窮生死蘊의 識 가운데 物心의 種子가 항상 존재한다는 說을 세운바 있으며, 經量部에서는 色法(물질)과 心法(정신)이 상호 種子로서 다른 것(相體)을 熏附(서로 영향하고 相依함)하여 보존한다고 하여 色心互熏說을 세우기도 했다.
② 唯識宗에서는 種子는 아뢰야식 가운데 藏在해 있다고 하며 그 관계를 成唯識論 卷二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뢰야식은 體, 種子는 用, 혹은 아뢰야식은 果, 種子는 因이라고도 하며 또 그 관계는 不一不異라고 하고, 또 種子는 아뢰야식의 相分[四分→相分(주관적인 心에 인식되는 객관의 형상), 見分(相分을 인식하는 주관의 心작용), 自證分(自體分이라고도 하며 見分과 다음의 證自證分과를 證知하는 인식작용), 證自證分(自證分을 다시 證知하는 인식작용)] 가운데 존재한다고 한다.(단, 이상은 有漏種子에 대한 해석임). 또 同卷二에서, 種子는 다음의 여섯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이것을 種子六義라고 했다. 곧 (1) 刹那滅. 不動不變의 無爲法이 아니라 生滅變化하는 有爲法일 것. (2) 果俱有. 種子로부터 생긴 現行 곧 果를 여의지 않고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하면 果가 발생하는 현상과 반드시 동시에 존재하며 現前에 和合하여 떨어지지 않는 것. (3) 恒隨轉. 항상 간단 없이 轉起하여 一類相續하는 것. (4) 性決定. 種子를 熏附한 現行의 善惡을 따라서 그 種子로부터 생긴 現行의 善惡을 결정하여 索亂하지 않은 것. (5) 待衆緣. 많은 緣이 和合하는 것을 기다려서 비로소 種子가 現行을 내는 것. (6) 引自果. 色 · 心이 각각의 自果를 따로 따로 引生하는 여섯. 種子가 어떻게 하여 일어났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本有說(護月의 說) · 新熏說(難陀 · 勝軍의 說) · 新舊合生說(護法의 說)의 三說이 있어서, 이것을 주장하는 學流를 각각 本有家 · 新熏家 · 新舊合生家라고 일컫는데, 法相宗에서는 第三說을 옳다고 한다. 곧 種子에는 無始이래로 아뢰야식 가운데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本有種子(本性住種)와 후천적으로 現行의 諸法에 의해 熏附된 新熏種子(習所成種)가 있어서 이 2種의 種子가 합하여 現行法으로서의 모든 現象을 낸다고 한다. 다만 見道에 이르러 처음으로 無漏智를 내는 것은 本有無漏種子에 의한다고 하고, 또 五姓의 차별을 일으키는 것을 이 本有無漏種子의 種別이나 그 有無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本有說에 있어서는 本有種子만을 세워서 新熏種子를 인정하지 않고 現行의 熏習이 新熏種子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本有種子를 增長할 따름이라고 주장하는데 대해, 新熏說에서는 新熏種子만을 인정하고 本有種子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반으로 菩提의 因인 無漏種子의 2종의 種子가 있어서, 有漏種子에는 또 名言種子와 業種子의 2종의 種子가 있다. 名言種子는 名言(言語的表象)에 의해서 아뢰야식 가운데 熏附된 種子로서 物 · 心 일체의 현상이 현재에 나타나서 작용하는(現行의) 직접의 因이 되는데, 여기에 또 2種이 있다. 表義名言種子는 의미를 나타내는 言語(곧 表義名言)를 第六意識이 반연하여(곧 인식하여) 그 언어에 따라 諸現象을 變現할 때 熏習되는 種子를 말하며, 顯境名言種子는 心 · 心所法인 前七識의 見分(主觀)등 (곧 顯境名言)이 對境을 반연할(곧 인식)지음에 熏習된 種子를 가리킨다. 心 · 心所法이 名言은 아니지만 名言이 각각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처럼 心 · 心所가 對境을 變現하므로 顯境名言이라 한다. 대저 名言種子는 種子와 같은 종류의 現行(現象)을 생기게 하므로 等流習氣라고도 한다. 다음에 業種子는 능히 異熟(果報)을 내는 직접적인 因인 名言種子를 도와서 善惡業에 따른 異熟을 생기게 하는 작용이 있는 種子로서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善惡의 思(意志의 정신작용인 業의 體)에 의해서 熏附된다. 異熟은 無記이므로 異熟을 내는 名言種子는 無記이며 따라서 스스로 現行하는 힘은 없지만 善惡의 業種子의 힘이 강하면 그것이 增上緣이 되어 異熟을 生한다. 그러므로 業種子를 異熟習氣라고도 한다. 또 名言種子 가운데 我執에 의해서 熏習되고 그것에 의해서 自他의 차별을 감지하고 迷惑의 바탕인 我見 · 我所見을 일으키는 種子를 특히 我執習氣라 한다. 我執習氣 · 名言習氣 · 有支習氣(業種子에 해당)를 三種習氣라고 한다. 또 山河大地처럼 많은 有情에 공통한 환경을 내는 名言種子를 共相名言種子(共種子)라고 하는데 대해, 육체처럼 그 사람만이 받아 가지고 쓰는 것을 일으키는 種子를 不共相名言種子(不共種子)라고 하며, 이런 名言種子가 現行을 내기 위해서는 共業 · 不共業의 業種子의 도음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③ 種字라고도 쓰는 경우가 있다. 곧 密敎에서는 불 · 보살등의 諸尊을 表象하는 梵字를 가리킨다. 이것을 種子라고 하는 것은 一字에서 多字를 生하고 또 多字는 一字에 歸結됨을 뜻하는 말. 혹은 種字를 관하면 佛智를 깨닫고(了因), 種字로부터 三昧耶形등을 일으키며(生因), 種字는 본래의 性德이고 軌範으로서 모든 事物의 근원인 本有란 뜻이 있으며 여러 諸尊의 眞言의 一字를 사용한다. 예컨대 胎藏界의 大日如來의 種字를 अ(아)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一尊에의 種字 밖에 1類의 諸尊에 통하는 通種字도 있다. 種字만을 쓴 曼茶羅를 種字曼多羅, 種字에 의해서 觀行하는 것을 種字觀이라고 한다.
불법(佛法) : ① 부처가 說하신 敎를 佛法이라고 한다. 成實論卷一에는 여섯 가지 동의어를 들고 있다. 이것을 佛法六名이라고 한다. 곧 (1) 善說(있는대로 說하기 때문). (2) 現報(現世에 있어서 果報를 얻게 하기 때문에) (3) 無時(吉凶이 때를 가리지 않고 따라오기 때문에) (4) 能將(正行으로써 중생을 잘 이끌어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5) 來嘗(자신이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6) 智者自知(지혜있는 사람은 스스로 잘 信解하기 때문에)
② 부처가 중생을 가르쳐 인도하는 敎法. 곧 出世間의 법을 불법이라고 하는데, 국왕이 백성을 통치하기 위하여 만든 국법을 王法이라 한다. 眞宗에서는 王法爲本 · 仁義爲先이라고 해서,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국법을 준수하고 윤리도덕을 실천해야 한다고 한다.
③ 불타가 얻은 법(곧 緣起의 道理와 法界의 진리 등). 부처가 알고 있는 법(곧 一切法). 불타가 갖추고 계신 여러 가지 功德(十八不共法)을 불법이라 하는 수도 있다.
연(緣) : 범어 pratyaya.
① 협의로는 결과(果)를 끌어 일으키기 위한 직접적 내적원인을 因(內因)이라 하는데 대해서, 이것을 밖에서 돕는 간접적 원인을 緣(外緣)이라고 하는데, 廣義로는 둘을 합해서 因이라고도 緣이라고도 한다. 廣義의 緣은 四緣으로 분류된다.
(1) 因緣. 因인 緣. 因卽緣의 뜻. 果를 生하는 직접적 內的인 원인. 狹義로는 因을 말함. 六因중 能作因을 除한 다른 五因을 말한다.
(2) 等無間緣. 앞의 刹那의 마음 ․ 마음의 작용(心所)이 뒤의 찰나의 마음 ․ 心所를 生하는 원인(장소를 열어서 인도해 들임. 곧 開避와 引導)이 되는 것을 말한다.
(3) 所緣緣(緣緣). 所緣 곧 外境이 마음이 생하는 緣이 되는 것을 말한다. 唯識宗에서는 이것을 疎所緣緣(所緣의 相分을 引起하는 본질이, 동시에 見分의 所緣이 되는 것을 말한다)과 親所緣緣(所緣을 緣하는 見分과 여의지 않는 相分을 말한다)으로 나눈다.
(4) 增上緣. 一切法이 果인 一法에 대해서 모두 緣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六因중의 能作因과 같다. 또 淨土敎에서는 아미타불의 本願은 凡夫가 淨土에 往生하기 위한 增上緣이 된다고 한다. 이 경우의 增上緣은 果에 대해서 작용하는 강한 힘이란 뜻.
② 心과 心所(개별적인 마음의 작용)가 對境을 향해서 작용하고, 그 모습(相)을 취하는 것을「緣한다」고 한다. 心識은 스스로 緣하는 것이기 때문에 能緣이라고 하고, 對境은 心識에 의해서 緣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所緣이라고 한다.
조숙(調熟) : 惡을 조복시키고 善을 성숙시키는 것을 말함.
해탈(解脫) : ① 毘木叉라고 음역. 풀려오다. 번뇌에 묶인 것에서 풀려 미혹의 苦에서 풀려서 나오는 것. 미혹의 세계를 넘는다는 뜻으로 度脫이라고도 한다.
② 본래는 열반과 같이 실천도의 究極의 境地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여러 가지로 분류하여서 고찰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有爲解脫(아라한 곧 해탈한 자가 확실히 了解하여서 인정하는 마음의 작용. 곧 勝解)과 無爲解脫(열반), 혹은 性淨해탈(중생이 본래의 모습에서 번뇌의 汚染에서 벗어나서 청정한 것) 또 障盡해탈(현실에서 번뇌때문에 그 본래의 청정이 오염되어 있어 그 번뇌를 끊고 해탈할 수 있는 것) 혹은 心해탈(마음에 탐애를 여의는 것) 또 慧해탈(지혜에 의하여 무명 즉 無智에서 벗어나는 것) 혹은 慧해탈(아라한이나 아직도 滅盡定이 아닌 것)과 俱해탈(아라한이 滅盡定을 얻는 것) 혹은 時해탈과 不時해탈로 둘로 나누어 이것을 二해탈이라고 한다. 또 煩惱해탈·邪見해탈 등의 十해탈을 열거하기도 한다.
③ 귀로 불법을 듣고 해탈하므로 「귀를 기울이여 불법을 듣는다」고도 한다. 해탈의 眞味를 解脫味라고 한다. 그러나 해탈의 경지는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므로 一味라고도 한다. 소승에선 해탈하는 데 아주 빠르면 3년이 걸린다고 하며 3년 해탈이라고도 한다. 또 여래를 眞解脫(진실한 해탈)이라 일컫는 것은 아라한(소승의 해탈)은 일부분의 해탈로 진실한 해탈이 아니므로 이와 같이 해탈을 하여도 그것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자는 해탈의 깊은 구렁에 떨어진 자라고 한다.
천태종(天台宗) : 또는 天台法華宗 ∙ 天台法華圓宗 ∙ 台宗 ∙ 台家라고도 함. 중국 隋나라 때 천태산에서 天台 智顗를 開祖로 하여 창립한 대승불교의 한 파. 법화경을 근본경전으로 하며 禪定과 지혜의 調和를 宗義로 함. 智顗는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적으로 불교를 통일하고, 적극적으로 諸法實相論을 주창하며 심오한 불교학의 체계를 세워「法華文句」∙「法華玄義」∙「摩訶止觀」등 三大部를 지어서 한 宗을 이룩하였다. 그 뒤에 章安 ∙ 智威 ∙ 慧威 ∙ 玄朗 ∙ 湛然 등이 계승하고, 荊溪 湛然은 三大部의 주석을 지어 그 때에 융성하던 법상종 ∙ 화엄종 ∙ 선종 등에 맞서 천태종의 眞面目을 크게 선양하였다. 그 뒤에 道邃 ∙ 廣修 ∙ 物外 ∙ 元琇 ∙ 淸竦 ∙ 義寂 등이 전해오다가, 五代의 전란에 宗典이 흩어지고, 思潮가 떨치지 못하였다. 義寂은 그 宗典을 고려와 일본에 전하여 다시 宗義의 연구가 성행하였고, 송나라 때에는 山家 ∙ 山外의 두 파로 대립하게 되었다. 山家派는 四明知禮가 으뜸이었는데 그의 학풍은 천태종의 근본 사상인 物 ∙ 心을 같이 취급하는 사상을 굳게 지키고, 또 현재의 자기를 여의지 않고 전체를 해결하는데 치중하였다. 그리고 源淸 ∙ 宗昱 ∙ 智圓 ∙ 從義 ∙ 仁岳 등이 영도한 山外派의 학풍은 緣起論에 반하여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데 있었다. 중국에서는 明나라 때의 智旭이 종풍을 빛낸 것이 끝이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의 玄光 ∙ 法融, 고구려의 波若, 고려의 諦觀 등이 천태종을 깊이 연구하였다. 또 義天은 송나라에 유학하여 宗旨를 배워 돌아온 후 개성에 국청사를 짓고, 천태종을 설립하였다. 그 門下에는 德麟 ∙ 翼宗 ∙ 景蘭 ∙ 連妙 등이 있었다. 천태종은 법화경 ∙ 대열반경 ∙ 대품반야경 ∙ 화엄경 ∙ 금광명경 ∙ 유마경 ∙ 지도론 ∙ 중론 ∙ 법화론 등을 所依의 경전으로 삼고, 實相論의 극치를 주장하였다.
원교(圓敎) : 원만하고 완전한 敎의 뜻. 舊譯 華嚴經卷五十五에는 善伏童子에게 圓滿因緣修多羅를 說했다고 했다. 중국에서 모든 경전의 내용을 體系化해서 비판분류하는데(敎相判釋), 究極的인 敎를 가끔 圓敎라고 부른다.
① 北魏의 慧光은 漸·頓·圓의 三敎로 나누어 華嚴經을 圓敎로 했다.
② 隋의 智顗가 나눈 五時八敎의 敎判에서는, 化法四敎를 三藏敎·通敎·別敎·圓敎로 하고, 圓은 不偏의 뜻이라고 했다. 또 圓敎는 華嚴·方等·般若의 說法에 있어서도 나타나 있지만 그것은 未開顯의 圓이고 순수한 圓敎가 아니며, 순전히 圓敎만을 說한 法華가 오직 開顯의 圓敎로서 今圓이라고 한데 대해서 그것을 昔圓이라고 했다.
③ 唐의 法藏은, 小乘敎·始敎·終敎·頓敎·圓敎의 五敎判을 說하고, 華嚴經을 제5의 圓敎라 했다. 圓敎는 곧 一乘이기 때문에 同敎一乘도 別敎一乘도 함께 圓敎이긴 하지만, 그러나 別敎一乘은 모든 經을 넘어선 無盡의 佛法이기 때문에 특히 別敎一乘만을 圓敎라고 했다.
④ 唐의 元政은 眞言密敎를 가지고 一大圓敎라고 하였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迷)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의 第一支가 無明支이다. 또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癡라 한다.
① 十二緣起의 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와 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를 三世兩重의 因果로 說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의 位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의 因果로 해석하고 無明과 行과 識 등의 五果의 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癡로서 善惡의 業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② 有部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相應無明과 不共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를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 또 後者는 相應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不共無明은 홀로 일어남으로 獨頭無明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不共無明을 다시 恒行不共無明과 獨行不共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는 第七 末那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일어나나 모든 凡夫의 마음속에 늘 쉬지 않고 나타나는 作用이란 점에서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과 다르기 때문에 不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後者는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남으로 獨行不共이라고 일컫는다. 이 獨行不共無明은 隨煩惱와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시 主獨行無明과 無主獨行無明으로 나눈다. 또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種子와 現行으로 나누고 늘 衆生을 따라 다니며 第八阿賴耶識 속에 숨어 잠자고 있는 無明의 種子를 隨眠無明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표면에 나타나 現在意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無明의 現行을 衆生에 붙어서 衆生을 얽어 生死(迷의 世界)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纒無明(전무명)이라 한다. 이 纒無明에는 相應하는 것과 不共이 있어서 隨眠·纒·相應·不共의 四種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四種無明(四無明)이라 부른다. 또 根本과 枝末과 共과 不共과 相應과 不相應, 迷理와 迷事, 獨頭와 俱行, 覆業과 發業과 種子子時와 行業果와 惑의 15種의 無明으로 나눌 때도 있다.
③ 勝鬘經에서는 見惑 및 三界의 修惑인 貪 등과 相應하는 相應無明을 四住地(見一處住地·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의 넷으로 처음의 一은 見惑, 뒤의 三은 三界의 修惑을 의미한다)의 惑이라고 부른다. 獨行不共의 無明을 無始無明住地의 惑이라 하고(합하여 五住地의 惑) 이 無明住地는 모두 번뇌가 일어나는 根本이며 오직 如來의 菩提智만이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④ 起信論에서는, 無明을 不覺이라고 하고 이 不覺을 根本無明과 枝末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根本無明은 根本不覺·無始無明·元品無明·忽然念起無明이라고도 한다. 또 元初一念이라고도 한다. 곧 眞如平等의 眞理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忽然히 차별·대립의 念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 元初라고 하는 것은 모든 煩惱의 元始이고 迷妄의 시작이므로 다른 煩惱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忽然」이라고 한다. 지극히 微細하므로 心王(마음)과 心所(마음의 作用)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즉 無始無明住地의 惑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枝末無明은 枝末不覺이라고도 불리우며 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난 末稍的 染汚心으로 三世微麤의 惑業이다.
⑤ 天台宗에서는 空·假·中의 三觀에 의하여 각기 見思·塵沙·無明의 三惑을 끊는다고 한다. 無明과 非有非空의 진리에 迷惑되어 中道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無明을 끊음에 있어서는, 別敎에서는 十廻向位에서 항복하여, 初地이상의 12階位에서 12品의 無明(모두 12품의 무명이 있다고 한다)을 다 끊어 마친다고 한다. 이 경우 十廻向의 最後의 第十廻向에서 처음의 無明을 끊고 初地에 들어가지만 이 처음의 無明을 또 三品으로 나누어 끊으므로 이것을 三品無明이라고도 한다. 圓敎에서는 初地 이상의 42階位에서 42품의 無明(모두 42品의 無明이 있다 한다)을 끊어 마치는데, 이 경우 제51位인 等覺의 最後心에 의해 妙覺智 또는 佛智가 나타나고 이에 의해 끊어지는 最後의 無明을 元品無明·無始無明·最後品無明이라 한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說로서 실은 圓敎에서는 三觀에는 순서와 차례를 세우지 않고 一心을 가지고 觀함으로 三惑은 동체로 동시에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팔식(八識) : 唯識說에서 주장하는 여덟 가지 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의 5識과 제6의 意識과 제7의 末那識과 제8의 阿賴耶識. .....아뢰야식(阿賴耶識)→阿賴耶는 범어 alaya의 音譯. 阿梨耶識이라고도 쓰고, 약하여 賴耶 · 賴耶識이라고도 한다. 八識(眼·耳·鼻·舌·身·意·末那·阿賴耶의 각 識)의 하나. 九識(八識에 阿摩羅識을 더함)의 하나. 無沒識 ·藏識이라 번역하고, 제8識 · 本識 · 宅識 등 가지가지의 명칭이 있다. 無沒識이라 함은 諸法을 執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며, 藏識이라 함은 諸法展開의 의지할 바탕이 되는 근본 마음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또 八識의 최후에 두기 때문에 제8識, 諸法의 근본이기 때문에 本識이라고도 하고 따라서 諸識 중 특히 識主라고도 한다.
① 成唯識論 卷二에 의하면, 藏識의「藏」에 能藏 · 所藏 · 執藏의 三義가 있다. 이것을 賴耶三藏이라고도 藏三義라고도 한다. 能藏이라 함은 이 識이 諸法을 展開生起하는 種子(能力·原因)를 攝持하고 감춘다는 의미이며, 所藏이라 함은 이 識이 諸法을 生起하는 種子를 諸法으로 훈습하여 감춘다(藏)는 의미이며, 執藏이라 함은 이 識이 末那 곧「思量의 뜻」을 가지고 스스로를 愛著한다는 의미이다. 增一阿含經에 의거해서, 阿賴耶에 愛 · 樂 · 欣 · 憙의 四義가 있다고 說하는(이것을 四阿賴耶라고 한다)것도 , 여기서 말하는 執藏과 같은 의미라고 하겠다.
② 能藏과 所藏의 관계는, 阿賴耶識이 그 種子의 작용에 의해서 諸法 곧 우리들의 현실세계를 만들어 가매(이런 경우, 阿賴耶識의 相分 곧 對境으로서의 객관적 境界는 종자와, 眼·耳·鼻·舌·身의 五根에 의해서 드러나는 육체와, 山河大地 등의 器界이며, 이것을 種根器라고 한다), 만드(作)는 것에 의해서 逆으로 諸法에서, 다시 새로이 諸法을 창조하고자 하는 종자를 自己 중에 轉變 · 變異 · 成熟시켜, 감추어(藏) 간다고 하는 相依相待 · 展轉 · 緣起의 관계이고, 執藏은 이와 같은 아뢰야식의 轉變이, 諸法에 있어서 자기의 모습을 보려고 하는 아뢰야식 스스로의 愛著 작용을 原動力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執藏은 확실히 아뢰야식의 自相이다. 또 아뢰야식은 과거에 있어서의 善·不善의 業의 결과(곧 異熟·果報)에 의해 끌리므로 이 점은 아뢰야식의 果相이며, 그래서 아뢰야식을 異熟識(곧 果報識)이라 한다. 또 아뢰야식이, 모든 法을 生起하는 種子를 감춘(藏)다는 점에서, 그 因相으로서의 의미에 의해 아뢰야식은 一切種識(또는 種子識)이라 불리워진다. 이를 自相 · 果相 · 因相을 賴耶의 三相이라고 한다. 唯識敎學은 이상과 같은 구조아래 일체를 아뢰야식의 變現으로서 唯心論을 樹立한다. 이것은 일체를 아뢰야식에서 緣起한 것이라고 說하기 때문에, 이것을 賴耶緣起라고 한다.
③ 아뢰야식의 自相은 凡夫로부터 보살의 제7地까지, 二乘이면 有學의 聖者位에 있는 자가 갖는다고 하며, 이 자리를 我愛執藏現行位라 한다. 보살의 八地이후 또는 二乘의 無學은 我執이 없기 때문에 아뢰야식은 그 自相을 버리는데, 다만 異熟識인 果相이 남는다고 하며, 이 자리를 善惡業果位라고 한다. 佛果에 이르면 異熟識의 果相도 떨어지는데, 有情利益을 행하기 위해 일부러 諸法의 종자 및 五根을 執持하여 버리지 않고 相續케 한다고 하며, 따라서 種子識인 因相만이 남는다. 이 자리를 相續執持位라고 하다. 이상을 賴耶의 三位라 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은 범부로부터 부처가 되는 轉迷開悟의 道가 되는 것으로서, 如實히 그 相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 의지해야 할 곳이기 때문에, 아뢰야식을 所知依라고 한다.
④ 특히 아뢰야식을 轉迷開悟의 要道로 論究함에 있어 아뢰야식은 번뇌에 의해 더럽혀진 妄識인가, 自性으로서 淸淨한 眞識인가가 중국불교 敎學에서 문제가 되어, 唯識宗은 妄識의 입장을 취하고, 華嚴宗은 起信論에 의해서 眞妄和合識의 입장을 취했으며, 地論宗은 眞識의 입장을 취했다.
훈습(熏習) : 범어 vasana의 번역. 熏이라고도 번역한다. 향기를 옷에 베게 하는 것 같이 迷悟의 諸法(특히 우리에 身·口·意의 業으로, 즉 행위)이 그 세력을 다른 것에(특히 우리들의 마음 위에) 熏附시켜 남게 하는 것. 소승에서도 經量部에서는 色(物質)과 心이 서로 훈습해 합한다고 하여 色心互熏說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완성된 훈습설은 대승 唯識宗 바로 그것이다. 이 경우에 熏附하는 能熏法은 現行이고, 熏附를 받는 所熏의 法은 心이다. 所熏의 心 위에 熏附되어 남아 있는 관습의 氣分·殘氣·餘習(習氣)은 종자라고도 한다.
① 법상종에선 七轉識의 現行을 能熏의 法이라 하고 제8아뢰야식을 종자가 저장되어 있는 所熏處라 하여, 그 所熏·能熏에 관계로 아뢰야식의 因果相續을 말한다. 成唯識論 卷二에 따르면 所熏·能熏에 있어 그 자격으로 각각 네 가지 뜻을 주장한다. 이것을 所熏의 四義, 能熏의 四義라고 한다.
所熏의 四義란,
(1) 堅住性(동일성을 유지하고 견고하게 존재하여 상속하는 성질)
(2) 無記性(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성적인 성질)
(3) 可熏性(자주적인 능력을 갖고 또 堅密不變의 자체가 아니나 훈습을 수용할 수 있는 성질)
(4) 能所和合(能熏과 화합하는 성질)
이상의 四義는 다만 아뢰야식 뿐이 이것을 갖춘다.
能熏의 四義란,
(1) 有生滅(靜止하여 不動의 것이 아니고 동적인 작용을 갖고 있는 것).
(2) 有勝用(緣慮의 작용이 있고 또 그 작용이 强盛勝用인 것).
(3) 有增減(增減이 없는 佛果 같은 것이 아님).
(4) 能所和合(所熏處와 화합하는 것).
이상의 四義를 갖추고 있는 것은 七轉識뿐(및 心所)이다. 七轉識이 能熏의 작용을 하는 것은 四分 중의 어느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고래로부터 학설이 틀려서 이에 관하여 見分熏과 相分熏의 2종熏習(二種熏·二熏)을 주장할 수 있다. 또 名言習氣·我執習氣·有支習氣를 3종熏習이라고도 한다.
② 기신론에서는 4훈습을 주장한다.
(1) 無明熏習이란 무명이 진여에 훈습하여 業識 내지 分別事識의 妄心이 형성되는 것이다.
(2) 妄心熏習이란 妄心이 무명에 훈습되어 生死(곧 미혹의 세계)의 苦를 나타내는 것.
(3) 妄境界熏習이란 識의 대상인 六境(곧 妄境界)이 識에 熏習되어 我執·法執을 증가시켜 크게 하는 것. 이상 세 가지를 染法熏習이라고 한다. 染法이란 다음 淨法에 대한 말로 번뇌로 오염되어 청정하지 않은 것을 말함.
(4) 淨法熏習이란 범부·二乘 및 보살을 發心修行시키는 妄心熏習(앞에 것과는 별도임)과 청정한 법인 진여가 妄心에 훈습되어 내 몸에 진여의 법이 있는 것을 믿게 하여 열반으로 가게 하는 眞如熏習이라고 한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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