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오무지(染汚無知)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2無知의 하나. 染汚는 번뇌의 異名. 無知는 對境을 了達(解了通達의 약칭으로 이치를 사무쳐 알아서 통달하므로 밝게 精通함을 뜻함)하지 못하는 것. 染汚無知는 苦 · 集 · 滅 · 道의 4諦의 참뜻을 모르고, 萬有의 事相에 먼 無明煩惱를 말한다. 3性중에는 惡과 無記중의 有覆無記에 해당한다.
참고
이무지(二無知) : 2종의 無知. 곧 染汚無知와 不染汚無知를 말함.
염오(染汚) : 染汚라 함은 번뇌의 흐림에 물들어 더러워져 있다는 뜻. 또 雜染, 染이라고도 한다. 有漏法중, 깨달음에의 길을 방해하는 것. 곧 不善과 有覆無記를 染汚라고 하고, 善과 無覆無記를 不染汚라고 한다(俱舍論 卷七). 그렇더라도 成唯識論述記 卷二 末에는, 雜染이라고 하는 경우는, 染法(不善과 有覆無記)뿐만이 아니라, 有漏法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大乘莊嚴經論 卷三에는 染汚(雜染)에, 煩惱染汚(煩惱를 말함) · 業染汚(번뇌에 의해서 일으키는 業을 말함) · 生染汚(그 결과로서의 苦의 生存을 말한다)의 3종의 染汚(三雜染)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순차로 惑 · 業 · 苦의 三道에 해당한다. 起信論에는, 心體는 본래 淸淨한데 不覺에 의해서 無明을 일으키어 번뇌에 더럽혀지기 때문에, 染心이 된다고 말하고, 그 染心의 相에 6종(六染心)이 있다고 說한다. 곧 執相應染(我執을 말함) · 不斷相應染(分別起의 法執을 말함) · 分別智相應染(俱生起의 法執을 말함) · 現色不相應染(所取의 경계를 나타내는 妄心) · 能見心不相應染(能取의 妄心) · 根本業不相應心(迷妄한 染汚心의 자체)으로, 이것들은 수행에 의해서 차례로 끊어진다고 한다.
번뇌(煩惱) : 범어 klesa의 번역. 吉隷捨로 음역하고, 惑이라고도 번역한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하게 하여 더럽히게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 그 성질은 不善 및 有覆無記이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서 업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報를 받아 미혹의 세계(生死)에 매어 있게 된다. 이것을 惑業苦의 三道라 한다. 그래서 불교는 번뇌를 끊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번뇌는 그 작용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갖는다. 隨眠·惑(이치에 어둡고 現象의 세계에 대해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것)·染·漏·結使·結·縛·纒·軛·暴流·取·蓋·繫·使·垢·株杌·燒害·箭·稠林(번뇌의 수가 많은 것을 무성한 삼림에 비유한 것)·塵勞·塵垢·客塵·諍根(다툼의 근본)이라고도 하고, 또 번뇌의 體 그것을 正使(다만 使라고도 한다), 體를 멸해도 역시 남아있는 관습의 기운을 習氣라고 한다. 모든 번뇌는 因力(아직 번뇌가 끊기지 않은 것)·境界力(욕심 등에 순응하는 대상이 나타나는 것)·加行力(대상에 대해서 非理·作意를 일으키는 것)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한다.〔俱舍論 卷二十〕혹은 境界力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도 있다고도 한다.〔入阿毘達磨論 卷上〕
① 구사종이나 유식종에서는 번뇌를 근본번뇌와 枝末번뇌의 두 번뇌로 나눈다.
근본번뇌라 함은 번뇌의 體 그것으로서,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는 번뇌로, 本惑·根本惑 혹은 다만 번뇌라고도 부르며, 有部에서는 隨眠이라고도 한다. 단 經部에서는 隨眠을 번뇌의 종자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서 번뇌의 現行(현재에 일어나서 활동하는 것)을 纒(전)이라 한다. 유식종에서도 隨眠이란 번뇌의 종자를 가리킨다고 말하며, 근본번뇌에 貪·瞋·癡·慢·疑·見(惡見)의 六번뇌(六隨眠)가 있는데, 見을 有身見·邊執見·邪見·見取見·戒禁取見의 五見으로 나누어 貪 등의 다섯과 합해서 十번뇌(십隨眠, 十使)라고 한다. 이 가운데 貪 등의 다섯은 推察尋求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그 작용이 느리고 둔하기 때문에 五鈍使(五惑), 五見은 推察尋求하는 성질이 있고 그 작용이 빠르고 날카롭기 때문에 五利使라고 한다. 또 六隨眠 가운데 貪을 欲界의 탐과 上二界(색계·무색계)의 貪으로 나누어 이것을 각각 欲貪·有貪이라고 하며 합하여 七隨眠(七使)이라 하고, 혹은 十隨眠 중에 貪을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로 나누어 欲貪·色貪·無色貪으로 하고 十二隨眠(十二使)이라고도 한다. 唯識宗에서는 십종의 근본번뇌 가운데 제七識과 상응하여 항상 일어나는 我癡(無我의 이치에 미혹하여 나의 相에 어두운 번뇌로 無明을 말함)·我見(我執을 말하며 有身見의 일부)·我慢(나를 집착하고 나를 믿고 우쭐하는 거만)·我愛(나를 집착하여 나에 탐착하는 것)의 넷을 四煩惱(四根本煩惱, 四惑)라고 한다. 또 탐·진·치는 모든 악을 낳게 하는 근본(즉 因)이며, 대표적인 번뇌이기 때문에, 三不善根·三毒·三垢·三縛 등이라고 한다.
지말번뇌라 함은 근본번뇌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종속적인 번뇌로, 隨惑·枝末惑·隨煩惱라고도 한다. 단 수번뇌란 말은「心王에 붙어다니는 번뇌」란 뜻으로 풀어 근본번뇌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지말번뇌에는, 구사종에서는 放逸·懈怠·不信·惛沈·掉擧·無慚·無愧·忿·覆·慳·嫉·惱·害·恨·諂·誑·憍·睡眠·惡作의 十九를 말하며, 유식종에서는 睡眠·惡作을 버리고 失念·散亂·不正知를 더하여 二十으로 하기도 한다.
② 俱舍宗 등에서는 迷理·迷事의 二惑을 나누어, 불교의 보편적인 진리 곧 四諦의 이치에 迷惑하고 있는 思想上의 知的인 번뇌를 迷理의 惑이라 하고, 구체적인 개개의 事象에 미혹한 바의, 곧 인간성에 바탕한 情意的인 번뇌를 迷事의 惑이라고 한다. 또 自相·共相이 二惑을 나누어서, 色·聲 등 각자 개개의 특수한 고유의 相(곧 自相)을 迷해서 각각의 법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번뇌를 自相의 惑이라 한다. 空·無我 등 三世의 모든 것에 공통된 相(곧 共相)을 迷함으로 많은 법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번뇌를 共相의 惑이라 한다. 앞의 것에는 貪·瞋·慢 또는 貪·瞋·慢·嫉·慳이 있고 뒤의 것에는 五見·疑·無明이 있다고 한다. 唯識宗에서는 煩惱障·所知障의 二障을 나누어, 我執에 의해 일어나서 중생을 미혹의 세계(生死)에 流轉시킴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惑을 煩惱障이라고 하며, 法執에 의해 일어나서 알아야 할 대상인 진리를 막음으로 보리를 깨닫는 길을 방해하는 惑을 所知障이라 한다. 번뇌장은 일체의 번뇌를 體로 하고 반드시 所知障을 수반한다. 번뇌장은 所知障을 依支處로 하기 때문이다. 所知障은 함께 번뇌를 體로 하지만, 반드시 번뇌장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또 業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惑을 發業의 惑(주로 다음에 말하는 分別起의 혹으로 특히 제六意識相應의 無明이 그것이다)이라고 하고 이에 대해서 迷界의 중생을 윤택하게 하고 삼계의 중생을 받게 하는 혹을 潤生의 혹(다음에 말하는 俱生起의 번뇌로 특히 제六意識相應의 貪을 主로 한다)이라고 한다. 또 어떻게 해서 번뇌가 일어나는가 하는 점에서 나누면, 二障 공히 각기 분별기와 구생기가 있다. 邪師·邪敎·邪思惟 등 밖으로부터의 緣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을 분별기의 혹이라고 하며,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일어나는 본능적인 것을 구생기의 혹이라고 한다. 十근본번뇌중에서, 의심과 邪見과 見取見과 戒禁取見과의 四는 분별기뿐이며, 다른 六과 二十隨惑은 양쪽에 모두 공통한다.
③ 번뇌를 끊어야 할 수행단계의 相異에 따라 번뇌를 나누면 見惑과 修惑(思惑)의 二惑이 있다. 전자는 見道에 의해서 없애야 할 번뇌(見道所斷의 惑)이며 후자는 修道에 의해서 끊어야 될 번뇌(修道所斷의 惑)이다. 俱舍宗에서는 迷理의 惑을 見惑, 迷事의 惑을 修惑이라고 하고, 唯識宗에서는 分別起의 惑을 見惑, 俱生起의 惑을 修惑이라 한다. (1) 俱舍宗에서는 三界 四諦의 각각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見惑에 총 八十八이 있다. 欲界의 苦諦에 관해서는 貪 등 十근본번뇌와 集諦와 滅諦에 관해서는 身見·邊見·戒禁取見을 뺀 七근본번뇌, 道諦에 관해서는 戒禁取見을 더하여 八근본번뇌가 있으므로, 합하면 欲界의 三十二, 色界·無色界에는 瞋이 없기 때문에 四諦의 하나하나에 瞋을 뺀 각 二十八, 計 八十八이 된다. 이것을 見惑八十八使라고 한다. 修惑은 欲界에 貪·瞋·癡·慢의 四, 色界·無色界에 각기 貪·癡·慢의 셋이 있어 합하면 열이 되므로 여기에 見惑의 八十八을 더하면 九十八隨眠 또는 九十八使라고 한다. 단 修惑은 성질이 遲鈍애매하여 분명히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九地의 각 위에 강약의 정도에 따라 九品(上上品에서 下下品까지의 아홉 品階)의 구별을 세워, 九地九品의 思惑, 修惑 八十一品 등이라고 한다. 이 九十八使를 遍行과 非遍行으로 나눈다. 遍行의 惑이라 함은, 三界九地 중에서 自界自地의 五部(見道에 있어서 四諦의 觀行과 이것을 거듭하여 닦는 修道)에 널리 작용하여 五部의 法을 더럽히는 惑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 五部 중의 自部에만 작용하는 惑을 非遍行의 惑이라고 한다. 곧 九十八隨眠 중에서 널리 五部의 모든 有漏法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고, 널리 그것들과 隨順하고 그것들에 의해서 더욱 더 增長하고(곧 隨增하고), 因이 되어서 널리 五部의 染法(번뇌 등의 染汚法)을 낳게 하는 힘이 강한 惑은 遍行의 惑으로 三界의 각각에 있어서 苦諦의 理에 헤매는 五見·疑·無明과 集諦의 理에 헤매는 邪見·見取見·疑·無明과의 十一이 있다. 이것을 十一遍行의 惑이라 한다. 이 중 身·邊의 二見은 다만 自界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自界緣의 惑이라고 하지만 나머지 다른 아홉은 自界는 물론 또 다른 上界까지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他界緣의 惑이라고 하고, 이 아홉은 上界上地까지도 緣이 있다고 하는 의미로 九上緣의 惑이라고도 한다. 또 九十八使를 有漏法을 대상으로 하는 有漏緣의 惑과 無漏法을 대상으로 하는 無漏緣의 惑으로 나누면 滅道二諦의 理에 迷한 邪見과 疑와 癡(邪見·疑에 상응해서 일어나는 相應無明과 및 독립으로 일어나는 不共無明)의 六惑은 無漏緣이며, 그밖의 것은 有漏緣이다. (2) 唯識宗에서는, 見惑에는 欲界의 四諦 각각에 十근본번뇌(欲界四十), 색계·무색계에 성냄(瞋)을 뺀 九근본번뇌(色界三十六·無色界三十六) 계 百十二번뇌를 들고, 修惑에는 欲界에 疑·邪見·見取見·戒禁取見을 뺀 六근본번뇌, 색계·무색계에 각기 다시 瞋을 뺀 각 五근본번뇌, 計 十六번뇌를 들므로 見修二惑을 합하여 百二十八번뇌가 된다.
④ 知的인 惑 즉 五利使와 見惑 등을 見煩惱라고 하고, 情意的인 惑 곧 五鈍使와 修惑 등을 愛번뇌라 하며, 합하여 見愛(二)번뇌, 見著二法, 愛見이라고 한다. 그 體는 虛假(헛소리)이기 때문에, 또 見假·愛假라고도 한다. 勝鬘經에는 四住地번뇌의 說이 있다. 곧 見번뇌는 見道에 있어서 한때에 끊겨지기 때문에 見一處住地(一切見住地)의 惑이라고 부르고 愛번뇌는 이것을 三界에 나누어 각기 欲愛住地의 惑, 色愛住地의 惑·有愛住地의 惑이라 부른다. 또 이 넷에 다시 모든 惑의 근본이 되는 無明(無明住地의 惑)을 더하여 五住地번뇌, 五住地惑이라 한다. 唯識宗에서는 五住地번뇌 중 앞의 넷은 煩惱障의 종자이며, 뒤의 하나는 所知障의 종자라고 한다. 天台宗에서는 전자를 界內見思의 惑, 후자를 界外의 惑이라고 한다. 대개 住地라 함은 다른 모든 惑이 일어나고 의지처가 되며(住) 잘 惑을 일으키는 因이 된다는 뜻이다. 智度論 卷七에는, 자신에 집착하는 번뇌를 內著번뇌, 外境에 집착하는 번뇌를 外著번뇌라 하며, 전자는 五見·疑·慢 등, 후자는 婬·瞋에 속한다고 한다.
⑤ 天台宗에서는 見思·塵沙·無明의 三惑(三障·三垢)을 말함. 곧 우선 見惑과 修惑(思惑)을 見思의 惑이라고 부르며, 다음에 티끌(塵)이나 모래(沙)에도 비유할 만큼의 무수한 사물의 하나하나의 事理에 迷한 劣慧(번뇌의 習氣로 不染汚無知라고도 한다)를 體로 하고, 다른 것을 化導하는 것을 막는 惑을 塵沙의 惑이라고 부른다. 다음에 모든 惑의 근본으로, 中道 第一義諦의 도리를 迷한 가장 적은 번뇌를 無明의 惑이라 부른다. 각각 空觀·假觀·中觀에 의해서 끊긴다고 한다. 이 三惑을 번뇌장·소지장에 配對하면 見思는 번뇌장, 塵沙·無明은 소지장에 해당한다. 또 見思는 三乘에 공통하는 惑이므로 通惑·塵沙·無明은 특히 보살만이 끊는 惑이기 때문에 別惑이라고 부르고(通別二惑), 見思는 三界안에서 일으키는 惑이므로 界內의 惑, 無明은 三界를 넘은 곳에 있는 惑이기 때문에 界外의 惑, 塵沙는 양쪽 모두 통하므로 界內界外의 惑이라고 한다. 또 見思의 惑은 空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사물의 相을 집착하여 취하는 번뇌이기 때문에 따로 取相의 惑이라고 말하는데, 넓은 뜻으로는 뒤의 二惑도 또한 取相의 惑이라고 한다.
⑥ 번뇌에는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 (1) 三縛. 貪縛·瞋縛·癡縛. 이상의 차례로 樂·苦·捨의 三受의 對境을 향해서 일어난다. (2) 三漏. 欲漏(癡를 뺀 欲界繫의 근본번뇌 및 十纏)·有漏(癡를 뺀 上二界繫의 근본번뇌로 이 경우의 有는 有身의 뜻. 身의 존재를 말한다. 無漏에 대한 有漏는 아니다)·無明漏(三界의 癡). (3) 三結. 有身見結·戒禁取結·疑結. 五見 및 疑의 六근본번뇌가 이 중에 포함된다. 「三結이 다하면 預流果에 이른다」라고 한 經說에 따라 三結이 다하면 그 때 見惑의 모든 것이 끊어진다고 한다. (4) 四暴流(四流). 欲暴流·有暴流·見暴流·無明暴流. 三漏의 분류법에서 見을 독립시킨 것. (5) 四軛. 四漏. 欲·有·見·無明의 넷으로 惑體는 四暴流와 같다. (6) 四取. 欲取·見取·戒禁取(戒取)·我語取. 俱舍宗에서는 欲界의 五鈍使 및 十纏을 欲取, 五利使 중 앞의 넷을 見取, 戒禁取見을 戒(禁)取, 上二界의 貪·慢·癡·疑를 我語取라고 한다. 이어라 함은 내신(자기의 몸)을 말한다. 내신에 의해서 나를 설하기 때문이다. 상이계의 번뇌는 대개 내신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아어취라고 부른다. (7) 四身繫(四身縛·四縛·四結이라고도 한다). 貪欲身繫(貪欲身縛·欲愛身縛)·瞋恚身繫(瞋恚身縛)·戒禁取身繫(戒禁身縛)·此實執取身繫(我見身縛). (8) 五蓋. 欲貪蓋·瞋恚蓋·惛眠蓋·掉悔蓋·疑蓋. 疑가 섞이지 않는 것을 疑蓋無雜이라고 하는 말도 여기에 연유한다. (9) 五(順)下分結. 有身見·戒禁取見·疑·欲貪·瞋恚. 下分이라 함은 欲界란 뜻. (10) 五(順)上分結. 色貪·無色貪·掉擧·慢·無明. 上分이라 함은 上二界란 뜻. (11) 五結. 貪·瞋·慢·嫉·慳. (12) 六垢(六煩惱垢). 惱·害·恨·諂·誑·憍. 煩惱垢라 함은 근본번뇌에서 흘러나와 그 모습이 더러워지고 거칠다는 뜻. (13) 七流. 見諦所滅流·修道所滅流·遠離所滅流·數事所滅流·捨所滅流·護所滅流·制伏所滅流(華嚴孔目章 卷三 등) (14) 九結. 愛結·恚結·慢結·無明結·見結·取結·疑結·嫉結·慳結. (15) 十纏. 無慚·無愧·嫉·慳·惡作·睡眠·掉擧·惛沈·忿·覆 등의 十. 忿·覆을 빼고 八纏이라 하는 경우가 있다. 枝末번뇌 중에 六垢는 가볍고, 十纏은 무겁다. 九十八隨眠에 十纏을 더해서 百八번뇌가 된다고 하고, 또 모든 번뇌를 다 말하면 八萬四千의 번뇌가 있다고도 한다.
⑦ 번뇌를 여의는 것을 離垢, 번뇌가 없는 것을 無垢, 번뇌가 다한 것을 漏盡이라고 한다. 아라한을 漏盡比丘, 또 漏盡하여 마음에 진리를 了解하는 것을 盡漏意解라고 한다.
무지(無知) :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을 染汚無知와 不汚無知의 두 無知로 나눈다. 染汚無知는 染無知라고도 하며, 그 성질이 染汚(不善과 有覆無記)된 無知라는 뜻이니 곧 진리를 덮어 지혜를 방해하는 번뇌로서의 無知를 말하고 無明을 體로 한다. 不染汚無知는 不染無知·不染愚라 하며, 번뇌로 더럽힌 것이 없어진 無知를 말함. 대상에 대하여 집착하지는 않지만 杌(나무를 베고난 그루터)을 보고 사람이라 생각하듯 여러 가지 사물을 확실히 알 수 없는 劣慧이며 有漏이긴 하지만 善 또는 無覆無記어서 無明과 꼭 같지는 않다. 이것은 또 所知障에 해당하는데, 대승에서는 無明을 體로 한다고 설한다. 有部에선「성문의 아라한이나 연각은 染汚無知를 다 단절해 버리지만 不染汚無知는 끊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現行하는 것)」고 하며, 佛陀만이 두 無知를 완전히 단절하여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한다.」고 한다.
대경(對境) : 경(境)→六根·六識의 대상. 六根이 이것을 상대하여 六識을 일으킨다. 인간의 마음이 이 대상을 상대하여 마음이 더럽혀지기 때문에 塵이라고도 한다. 또, 眼根·眼識의 對境을 色境이라고 하고, 耳根·耳識의 對境을 聲境이라고 하며, 똑같이 鼻·舌·身·意에 대해서 각기 香·味·觸·法의 境이 있으므로 이것을 합하여 六境 또는 六塵이라고 한다. 단, 意根·意識의 對境은 六根 전체에 관련한다. 六根과 六境을 十二處라고 하며 그중, 六根은 主觀에 속하기 때문에 六內處, 六境은 客觀에 속하기 때문에 六外處라고 한다. 六根·六境·六識을 합하여 十八界라고 한다.
요달(了達) : 解了通達의 약칭으로 이치를 사무쳐 알아서 通達하므로 밝게 精通함을 뜻함.
사제(四諦) : ① 諦는 범어 satya, 파리어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란 뜻. 자세히는 四聖諦·四眞諦라 하며 4가지의 틀림없는 진리를 말한다. 四諦는 대체로 12緣起의 뜻을 교리적으로 조직화한 것으로 원시불교의 교리의 대강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最勝法說’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석존 최초의 설법(곧 初轉法輪)에서 설한 것이라고 한다. 4가지 진리의 제1은 「迷惑의 이 세상은 다 苦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2는 「苦의 因은 구하고 탐하여도 그치지 않는 執着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다. 제3은 그 執着을 완전히 끊어 없애 버림으로 苦를 멸한 때가 궁극의 理想境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4는 「이와 같이 苦가 없는 열반경에 도달하기 위하여 八正道의 옳은 修行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이 4가지는 순서와 같이 苦聖諦·苦集聖諦·苦滅聖諦·苦滅道聖諦라고 불리운다. 이를 약하여 苦諦·集諦·滅諦·道諦라고도 한다. 이 苦·集·滅·道의 四諦 가운데 苦와 集은 迷妄의 세계의 因果를 나타내고, 滅과 道는 證悟의 세계의 인과를 나타낸다. 四諦의 이치가 三段階인데 여기에 각각 4가지의 行相을 붙여서 說할 때 이것을 三轉十二行相이라고 한다. 곧 三轉이란 제1轉 「이것은 苦諦(集·滅·道諦)이다」라고 하는 示轉, 제2轉은 「이 苦諦(集·滅·道)는 徧知(永斷·作證·修習)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勸轉, 제3轉은 「이 苦諦(내지 道諦)는 이미 徧知(내지 修習)되었다」고 하는 證轉이 그것이다. 12行相이란 이 三轉에 각각 眼·智·明·覺(옳은 智慧에 의한 이해를 뜻하는 4개의 同義語)의 四行相을 假設하고 각각의 諦에 12行相이 있다고 한 것. 그러나 다른 견해에 따르면 眼·智·明·覺을 고려하지 않고 一諦에 三轉이 있어 四諦全體로서 모두 12行相이 있다고도 해석한다.
② 有部敎學의 修證論에서는 우선 四善根位에서 4諦의 하나를 觀하는데 4種의 行相이 있으므로 합하여 十六行相을 가지고 四諦를 觀한다. 곧 苦諦에서 非常·苦·空·非我(恒存性이 없는 苦이며 假의 존재로 實體性이 없다)의 四行相, 集諦에서는 因·集·生·緣(執着을 苦의 원인으로 하여 苦를 모으고 생기게 하는 苦의 助緣이다)의 四行相, 滅諦는 滅·靜·妙·離(苦滅의 理想境은 繫縛을 끊고 번뇌를 가라앉혀서 殊妙의 境地에 이르러 災禍를 여읜다고 함)의 四行相, 道諦에는 道·如·行·出(苦滅의 聖道는 聖者實踐의 正道이고 正과 理가 합하여 迷의 生存을 超出하는 것이다)의 四行相이 그것이다. 이 四善根位의 다음에 見道에 들어 無漏의 眞智를 가지고 四諦를 現觀한다. 이 見道는 預流向에 속하는 일로서 預流果 이후로는 修道에 속하는데 이 預流向·預流果를 통하여 16心으로 四諦를 現觀한다. 이것을 聖諦現觀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최후의 제16心만이 預流果에 속하고 앞의 제15心은 見道에 속한다. 먼저 欲界의 四諦를 觀하는 智를 法智라 하고 上2界(色界와 無色界)의 四諦를 觀하는 智를 類智라고 하는데 이 法智와 類智에 각각 忍과 智가 있다. 곧 無間道에서 忍을 가지고 煩惱를 끊고(斷惑) 解脫道에서는 智를 가지고 진리를 깨닫는(證理)다. 苦諦에는 苦法智忍(약하여 苦法忍이라고도 하며 이에 따라 欲界의 苦諦를 現觀함으로 苦諦에 迷惑되어 있는 煩惱를 끊는다)·苦法智(이것으로 欲界의 苦諦를 現觀함으로 苦諦의 이치를 깨닫는다)·苦類智忍(약하여 苦類忍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가지고 上2界의 苦諦를 現觀함으로 번뇌를 끊는다)·苦類智(이것으로 上2界의 苦諦를 現觀함으로 진리를 깨닫는다)의 四心을 가지고 苦諦를 現觀한다. 集·滅·道의 三諦에도 앞에서와 같이 集法(智)忍·集法智·集類(智)忍·集類智·滅法(智)忍·滅法智·滅類(智)忍·滅類智·道法(智)忍·道法智·道類(智)忍·道類智의 각각의 4心을 說하여 모두 16心이 된다. 이것을 八忍八智라고도 한다. 또 四諦를 觀하는 無漏淸淨의 智를 諦에 따라 나누면 苦智·集智·滅智·道智가 되어 法智ㆍ類智 등과 같이 10智로 된다.
③ 大乘佛敎에 따르면 顯揚星敎論 卷七에서는 四諦의 내용을 전개시켜 行苦諦·壞苦諦·苦苦諦·流轉諦(이상은 苦諦의 展開)·雜染諦(苦集 2諦에 해당)·流息諦(滅諦에 해당)·淸淨諦(滅道 2諦에 해당)·正方便諦(道諦에 해당)라고 하여 8諦를 들었다. 또 小乘의 四諦觀은 불완전하므로 有作四涕라 하여 낮추었으며 大乘四諦觀은 완전하므로 無作四諦라고 하고 이를 八諦라 했다. 또 天台宗에서는 제1의 生滅 四諦(四諦의 因果 그대로 生이 있고 滅이 있다고 觀하는 四諦觀)·제2의 無生四諦(또는 無生滅四諦라고도 한다. 四諦迷悟의 因果는 다같이 空無하여 生滅하는 일이 없다는 四諦觀)·제3의 無量四諦(一切의 現象은 無明에서 생기므로 無量의 차별이 있고 따라서 四諦에도 無量의 相이 있다고 하는 四諦觀)·제4의 無作四諦(迷와 悟와 같은 對立矛盾 상태 그대로가 矛盾이 아니라고 觀하는 四諦觀)등을 주장하여 이것을 四種의 四諦라고 하며, 이것을 또 藏·通·別·圓의 四敎에 배당한다. 法相宗에서는 四諦 가운데 滅諦에 自性滅·二取滅·本性滅의 三滅諦, 道諦에 徧知道·永斷道·作證道의 三道諦를 세우는데, 이것은 滅諦와 道諦에 각 三性(遍計所執性·依他起性·圓成實性)을 갖추고 있는 것에 연유한다(成唯識論 권8).
만유(萬有) : 우주간에 있는 삼라만상[森羅萬象. 우주 사이에 벌여 놓은 온갖 사물과 현상. 만휘군상(萬彙群象)].(국어사전)
사상(事相) : ① 本體 眞如에 대하여 現象界의 하나하나의 차별된 모양. ② 밀교에서는 敎相에 대해 造壇·灌頂·印契 등의 威儀行法을 말한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迷)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의 第一支가 無明支이다. 또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癡라 한다.
① 十二緣起의 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와 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를 三世兩重의 因果로 說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의 位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의 因果로 해석하고 無明과 行과 識 등의 五果의 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癡로서 善惡의 業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② 有部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相應無明과 不共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를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 또 後者는 相應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不共無明은 홀로 일어남으로 獨頭無明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不共無明을 다시 恒行不共無明과 獨行不共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는 第七 末那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일어나나 모든 凡夫의 마음속에 늘 쉬지 않고 나타나는 作用이란 점에서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과 다르기 때문에 不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後者는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남으로 獨行不共이라고 일컫는다. 이 獨行不共無明은 隨煩惱와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시 主獨行無明과 無主獨行無明으로 나눈다. 또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種子와 現行으로 나누고 늘 衆生을 따라 다니며 第八阿賴耶識 속에 숨어 잠자고 있는 無明의 種子를 隨眠無明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표면에 나타나 現在意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無明의 現行을 衆生에 붙어서 衆生을 얽어 生死(迷의 世界)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纒無明(전무명)이라 한다. 이 纒無明에는 相應하는 것과 不共이 있어서 隨眠·纒·相應·不共의 四種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四種無明(四無明)이라 부른다. 또 根本과 枝末과 共과 不共과 相應과 不相應, 迷理와 迷事, 獨頭와 俱行, 覆業과 發業과 種子子時와 行業果와 惑의 15種의 無明으로 나눌 때도 있다.
③ 勝鬘經에서는 見惑 및 三界의 修惑인 貪 등과 相應하는 相應無明을 四住地(見一處住地·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의 넷으로 처음의 一은 見惑, 뒤의 三은 三界의 修惑을 의미한다)의 惑이라고 부른다. 獨行不共의 無明을 無始無明住地의 惑이라 하고(합하여 五住地의 惑) 이 無明住地는 모두 번뇌가 일어나는 根本이며 오직 如來의 菩提智만이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④ 起信論에서는, 無明을 不覺이라고 하고 이 不覺을 根本無明과 枝末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根本無明은 根本不覺·無始無明·元品無明·忽然念起無明이라고도 한다. 또 元初一念이라고도 한다. 곧 眞如平等의 眞理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忽然히 차별·대립의 念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 元初라고 하는 것은 모든 煩惱의 元始이고 迷妄의 시작이므로 다른 煩惱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忽然」이라고 한다. 지극히 微細하므로 心王(마음)과 心所(마음의 作用)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즉 無始無明住地의 惑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枝末無明은 枝末不覺이라고도 불리우며 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난 末稍的 染汚心으로 三世微麤의 惑業이다.
⑤ 天台宗에서는 空·假·中의 三觀에 의하여 각기 見思·塵沙·無明의 三惑을 끊는다고 한다. 無明과 非有非空의 진리에 迷惑되어 中道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無明을 끊음에 있어서는, 別敎에서는 十廻向位에서 항복하여, 初地이상의 12階位에서 12品의 無明(모두 12품의 무명이 있다고 한다)을 다 끊어 마친다고 한다. 이 경우 十廻向의 最後의 第十廻向에서 처음의 無明을 끊고 初地에 들어가지만 이 처음의 無明을 또 三品으로 나누어 끊으므로 이것을 三品無明이라고도 한다. 圓敎에서는 初地 이상의 42階位에서 42품의 無明(모두 42品의 無明이 있다 한다)을 끊어 마치는데, 이 경우 제51位인 等覺의 最後心에 의해 妙覺智 또는 佛智가 나타나고 이에 의해 끊어지는 最後의 無明을 元品無明·無始無明·最後品無明이라 한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說로서 실은 圓敎에서는 三觀에는 순서와 차례를 세우지 않고 一心을 가지고 觀함으로 三惑은 동체로 동시에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삼성(三性) : ① 모든 존재의 본성이나 事物의 존재하는 상태(性相)를 有無·假實이라고 하는 점에서 세 가지로 나눈 것을 三性이라고 하고, 三性이 각각 無自性空이라고 하는 것을 三無性이라고 한다. 解深密經卷二의 一切法相品등에 근거한 說로서, 인도 唯識學派에서 說하고, 중국에서는 法相宗의 근본 敎義의 하나로 되고 있으며, 화엄종 등에서도 인용된다. 三性은 三自性·三性相·三種自性·三相등으로도 말하고, (1) 遍計所執性·(2) 依他起性·(3) 圓成實性의 셋을 말한다. 略해서 遍依圓이라고도 하고, 異譯에서는 (1) 虛妄分別相·(2) 因緣相·(3) 第一義相 또는 (1) 分別性·(2) 依他性·(3) 眞實性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三無性은 三種無自性性·三無自性·三種無性 등이라고도 하고, (1) 相無性·(2) 生無性·(3) 勝義無性의 셋을 말한다.
② 법상종의 說. 成唯識論卷八에,
(1) 遍計所執性이라 함은, 가지가지의 緣으로 생긴, 實體가 없는 존재를 實我實法이라고 하여 집착하는 迷한 마음(能遍計)과, 그 識의 대상인 境(所遍計)과, 이 識과 境에 의해서 心外에 實在한다고 그릇되게 인식하는 존재의 모습(遍計所執)을 말한다고 하고, 그 존재의 모습은 迷한 마음에 있어서 나타난 相이기 때문에 當情現相이며, 진리를 인식하는 참다운 경지에서는 實在하지 않는 情有理無의 것이고, 전연 실체가 없는 體性都無라는 것이다. 遍計所執性에 대해서, 인도의 論師들 사이에 異說이 있는데, 법상종에서는 護法의 說을 취한다. 곧 能遍計를 安慧는 有漏의 全8識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護法은 제 6·7識이라고 하고, 所遍計를 難陀는 實我實法으로 誤認하고 있는 當情現相이라 한다. 반면에 護法은 依他起性으로서의 似我似法이고, 또한 진여는 迷情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점에서는 所遍計라고 할 수 없으나, 依他起的 존재의 本體라고 하는 점에서는 所遍計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또 遍計所執을 安慧는 見相二分(→四分)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護法은 見相二分 위에 迷情에 의해서 나
타난 當情現相이라고 한다.
(2) 依他起性이라 함은, 他 곧 갖가지 緣에 의해서 일어난 것을 말하고, 緣이 합하면 생기고 여의면 없어지므로 꼭두각시와 같아서, 고정적인 영원불변의 實在는 아니기 때문에 如幻假有·假有實無이니, 진리를 깨달은 지혜에 의해서만 알게 될 뿐 迷情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理有情無이다. 여기에 染分依他起性과 淨分依他起性이 있는데, 染分은 有漏의 모든 것, 淨分은 無漏有爲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단 淨分의 依他는 번뇌를 여의고 있다는 점에서 圓成實性에 포함시키며, 染分依他를 依他起性으로 한다.
(3) 圓成實性이라 함은, 依他起性의 진실한 體인 진여를 말하는 것으로, 온갖 것에 원만하게 두루하여 不生不滅하고, 그 體는 거짓이 아니므로(眞實) 圓成實이라고 한다. 진여는 모든 相을 여의어 無相이고, 모든 것의 本體로서 진실하기 때문에 진공묘유이며, 진리를 깨닫는 지혜로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理有情無이다.
이 三性의 관계는 不卽不離이며, 蛇縄麻의 비유에 의해서 說해진다. 곧 어리석은 사람(能遍計)이 캄캄한 밤에 새끼줄을 보고 뱀(實我의 相으로서 변계소집성)으로 착각하고 놀라고 두려워 했는데, 覺者(불·보살)의 가르침에 의하여, 뱀이 아니고(生空) 뱀과 같은 새끼줄인(의타기성이 假我인 것)것을 알고, 다시 참말로 있다고 집착하고 있는 새끼줄(實法의 相으로서의 변계소집성)도 참다운 의미로 보면 실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法空), 그 본질은 麻이며(원성실성), 새끼줄(의타기성)이라 함은 여러 가지의 緣에 의해서 삼(麻)이 임시로 새끼줄이라고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것과 같다.
다음에 三無性이라 함은 불타의 密意의 說로서, 三性의 說에 의해서 중생이 有에 집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三性에 대해서 空의 의미가 있는 것을 보인 것이다.
成唯識論卷九에,
(1) 相無性이라 함은 변계소집성에 대해서 말하고, 實我實法으로서 집착되어 있는 바의 모습은 迷情 위에 나타나는 것으로, 예컨대 눈병이 있는 자가 헛보게 되는 허공의 꽃처럼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2) 生無性이라 함은 의타기성의 속성을 말한다. 가지가지 緣이 생기어 거짓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緣生)이기 때문에 일정한 성질이 없고, 또 불교이외의 學派나 범부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우연히 홀로 생긴(自然性)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들이 집착하는 것과 같은, 그 자체가 갖는 그런 성질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마치 幻과 같다는 뜻.
(3) 勝義無性이라 함은 원성실성을 가리킨다. 眞如는 根本無分別智의 대상이 되는 뛰어난 진리이며, 그것은 모든 것의 참된 본질이기는 하나, 어떠한 특정의 성질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고, 我·法에 집착이 없는 虛空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三無性 중, 生無性·勝義無性은 의타기·원성실의 二性에 대해서 無性이라고 說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體는 空無라고는 할 수 없다. 이상의 三性·三無性의 說에 의해서 非有非空의 中道를 說하고, 三性이 不卽不離의 관계에 있으며 더우기 변계소집성은 情有理無, 의타기성·원성실성은 理有情無이기 때문에 三性을 합쳐서 中道를 밝히는 것을 三性對望의 中道, 또 三性이 각각 情有理無·假有實無·眞空妙有(無相과 眞實)인 점에서 하나하나에 대해 中道를 說하는 것을 一法中道라고 한다.
또 三性에 대해서 모든 것이 唯識無境임을 觀하는 것을 唯識三性觀, 三性觀行이라고 한다. 곧 변계소집성은 虛妄의 唯識性, 원성실성은 진실의 唯識性을 보이고, 또 의타기성은 세속의 唯識性, 원성실성은 勝義의 唯識性을 보이는 것으로, 이 三性을 觀하는 순서방법을 밝힌 것이 五重唯識觀이다. 더욱 三性을 깨닫는 순서에는 遍依圓· 依遍圓·圓依遍의 三種이 있다고도 한다.
③ 화엄종의 설. 법상종에서는 모든 것에 대해 그 本性과 상태를 구별해서 說하는 性相隔別의 입장에서 三性說을 세웠는데, 이에 대해 화엄종에서는 性相融會의 입장에 서서 三性을 論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말하여 모든 것은 진여의 나타남에 불과하다고 한다.
곧 원성실성인 진여에는 不變과 隨緣의 두 내용에 있어서, 生滅을 여의고 있는 것(不變)과 더불어 染淨의 緣에 따라서 가지가지의 존재가 일어난다(隨緣)고 하고,
의타기성은 그 본체적 입장에서 말하면 진여이므로 생멸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無性인데, 그러나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이므로 似有라고 한다.
변계소집성은 범부의 妄情에 의해서 心外에 實我實法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情有인데, 그러나 그 我·法의 相은 理로서는 있을 수 없고, 또 진여에는 妄染이 없기 때문에 理無라고 하여, 이 不變·無性·理無의 뜻으로부터의 本三性이라 하고, 隨緣·似有·情有의 뜻으로부터 末三性이라 한다. 三性의 同異에 대해서, 本三性의 의미로는 진여의 隨緣으로서의 모든 현상(諸法)은 곧 진여이기 때문에 三性不異이고, 末三性의 의미에서 말하더라도, 진여가 隨緣 해서 諸法이 된 것이기 때문에 三性不異이다. 그러나 本三性은 諸法卽眞如, 末三性은 眞如卽諸法을 의미하기 때문에, 本末의 三性은 不一인 것이다(華嚴五敎章卷中).
④ 眞諦譯의 攝大乘論에서는, 分別性은 所分別의 境, 依他性은 能分別의 識을 의미하고, 이 分別性으로서의 境이 없기 때문에 依他性도 不可得이며, 그 不可得은 有로서의 眞實性이 있다고 說했다.
⑤ 모든 것의 성질을 종교의 윤리적 입장에서 善·不善(惡)·無記의 三性으로 나누고, 이 三性에 의해서 事物의 성질을 구별해서 밝히는 것을 三性分別이라고 한다.
악(惡) : 不善의 뜻. 道理에 배반하여 自他를 손해하고, 현재 및 장래에 괴로움을 초래하는 因이 되는 성질. 善 · 惡 · 無記(非善非惡)의 三性으로 나누는 경우의 하나. 이런 때는 자세히는 惡性이라고도 하는데, 또 造惡을 좋아하는 성질까지도 惡性이라고 한다.
① 살생(殺生) · 투도(偸盜) · 사음(邪婬) · 妄語(兩舌 · 惡口 · 綺語를 포함) · 飮酒를 五惡이라 한다(無量壽經 卷下).
② 惡時 · 惡世界 · 惡衆生 · 惡見 · 惡煩惱 · 惡邪無信盛時를 六惡이라 하고, 十惡 · 五逆 · 四重罪 · 破戒 · 破見 · 謗法 · 一闡提를 七惡이라고 한다.(愚禿鈔 卷下).
무기(無記) : ① 善도 아니고 不善도 아닌 것. 善 등으로 기록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단「無記는 異熟果를 끌어들이지 않아서 異熟果(善惡의 과보)를 기록하지 않으므로 無記라고 한다」는 說도 있으나 이것은 有漏法에만 타당한 해석일 뿐 일반적인 說은 아니다. 無記的인 法을 無記法이라고 하고 이에 대해 善 또는 不善의 法을 有記法이라고 한다. 無記를 有覆 · 無覆의 二無記로 나눈다. 有覆無記란 無記이므로 異熟果를 끌어들이지는 않지만 聖道를 덮어 씌워서 방해하고 마음을 가려서 不淨하게 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上二界의 번뇌나 欲界의 번뇌에도 身見 邊見같은 것은 이에 해당하며 不善과 더불어 汚染性이 있는 것이다. 또 無覆無記는 淨無記라고도 하며 순수한 無記임을 뜻하며, 聖道를 덮어 가리거나 방해하거나 마음을 不淨하게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欲界의 無覆無記心을 넷으로 나눠 四無記라 한다. 곧 (1) 異熟無記는 異熟生心 · 報生心을 말한다. 前世의 業因에 의해서 招來된 果報로서의 心을 말한다. (2) 威儀(또는 威儀路)無記는 威儀心 · 威儀路心을 말하며, 行 · 住 · 坐 · 臥 등의 威儀動作을 일으키고 혹은 이것을 緣으로 하는 心을 가리킨다. (3) 工巧(工巧處)無記는 工巧心 · 工巧處心을 말하며, 身 · 語의 工巧(工作 · 회화 · 詩歌)를 말하고 혹은 그것을 緣으로 하는 心을 말한다. (4) 通果無記는 變化無記라고도 하고 能變化心 · 變化心 · 通果心을 말한다. 定에 들어간 결과로서 얻은 神通自在한 작용을 일으키는 心을 말한다. 다시 여기에 自性無記(山河大地와 같은 色 · 香 · 味 · 觸)와 勝義無記(虛空과 非擇滅의 두가지 無爲法)등을 더하고 有覆無記를 합해서 七無記라고 한다. 또 唯識宗에서 모든 無記法을 能變無記(心 · 心所) · 所變無記(色法과 種子) · 分位無記(不相應行法) · 勝義無記의 넷으로 나누어 四無記라고도 하며, 成實論卷八에서는 無記法의 번뇌를 가르쳐 隱沒無記라 한다.
② 물음에 대하여 그 可否를 답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 경우가 있다. 外道로부터 열네가지 물음 곧 14難에 대한 물음을 받고 釋尊은 말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하여 可否를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을 十四無記(十四不可記)라고 하며, 四記答 가운데 捨置記에 해당한다. 열네가지 問難이란 (1) 世界 및 我는 常(시간적으로 無限)인가, (2) 無常(시간적으로 有限)인가, (3) 常이고 無常인가, (4) 常도 無常도 아닌가, (5) 有邊(공간적으로 有限)인가, (6) 無邊(공간적으로 無限)인가, (7) 有邊인 동시에 無邊인가, (8) 有邊도 無邊도 아닌가, (9) 如來(여기에서는 중생을 의미한다)는 死後에 有인가, (10) 無인가, (11) 有인 동시에 無인가, (12) 有도 無도 아닌가, (13) 命과 身은 동일한 것인가, (14) 다른가의 열넷이 그것이다. 이상에서 (3)(4)(7)(8)을 빼고 四類十問을 열거하는 수도 있다.
유부무기(有覆無記) : (1) 善도 아니고 惡도 아니지만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점에서 더럽혀져 있는 것.[欲界의 煩惱중 身見(五蘊이 거짓으로 화합한 身體를 常一主宰하는 뜻이 있는 我로 妄執하는 것) 및 邊見(我는 死後에도 상주한다고 생각하는 常見과 我는 死後에는 단절된다고 생각하는 斷見)] 번뇌에 가려져 있으나 선악이라고 명기할 수 없는 것은 무부무기. (2) 눈에는 안보이나 가려져 있는 것. <俱舍論>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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