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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말불각(枝末不覺)

근와(槿瓦) 2018. 7. 14. 00:26

지말불각(枝末不覺)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根本無明에 의하여 無明業相·能見相·境界相三細가 일어나는 것을 가리킴.

 

참고

근본무명(根本無明) : 根本不覺·無始無明이라고도 한다. 모든 번뇌의 근본인 不覺迷妄의 마음을 말함.

 

무시무명(無始無明) : 勝鬘·本業·起信의 모든 경전에는 無始無明이라 하고 菩提心論에는 無始間隔이라 하며, 生死流轉의 근본 惑體이다. 평등한 法界의 이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평등의 理性과 격리된 것을 無明이라 하며, 또는 間隔이라 함. 이 어둠의 마음은 에 지혜의 밝음이 없으므로 無明이라 하며, 어둠의 마음은 이성과 격리되었으므로 間隔이라 한다. 이 무명의 간격에 의하여 여러 가지 번뇌를 일으키며, 여러 가지 을 지어서 여러 가지 를 받는다.

無始라고 한 것은 세가지 해석이 있다.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의 이치에 따라 해석하는 것,

惑體가 서로 의지하는 뜻에 따라 해석하는 것,

眞妄同體의 이치에 따라 해석하는 것 등이다.

(1) 첫째번은 일체 有爲法因緣에 따라 생기는 것. 현재의 는 전생의 에 의해 발생하며 전생의 는 다시 그 전생의 에 의하여 발생한다. 이같이 추구하면 처음과 시작은 없다. 만약 처음과 시작이 있다고 하면 이는 無因에서 생기는 것으로 佛法 아니다. 열반경의 四柱偈攝論의 글 등에서 한 것이 있으며, 大乘論의 통설이다. (2) 둘째번 것은 枝末無明根本無明에 의하고 근본무명은 眞如에 의하는 연기법을 말한다. 이때 무명은 번뇌()의 근본이 되고 무명의 앞에는 처음이 되는 惑法이 없으므로 無始라 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無始라는 말은 곧 根本의 다른 이름이 되어 無明無始의 뜻을 이루게 된다. 起信論홀연히 생각해 내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하고, 천태종에서는 元品無明이라 하며, 기신론의 해석에서 근본무명을 말하여 忽然·元品·根本이라 함은 모두 有始의 다른 이름이다. 원각경에일체중생은 無始에서부터 無明을 일으키며 자기를 주재한다. 일체의 중생은 살아서도 지혜의 눈이 없으니 ··등이 모두 無明이다하였고, 本業經下에는四住地 앞에는 다시 법이 일어남이 없으므로 無始無明住地라 한다하였다.

 

불각(不覺) : 萬有眞相을 깨닫지 못하는 중생의 밝지 못한 마음. 根本不覺·枝末不覺이 있다.

 

근본불각(根本不覺) : 無始無明이니 眞如實性을 깨닫지 못하는 不覺.

 

삼세(三細) : (1) 無明業相. 眞如無明에 의해 차별적 현상을 내게 되는 첫걸음으로서, 주관과 객관이 나뉘어지기 전의 상태를 말함. (2) 能見相. 無明業相이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져 대립될 때에, 그 주관적 방면을 말한다. (3) 境界相. 能見相主觀의 앞에 나타나는 객관적 대상의 境界를 말한다. 眞如本性契合하지 않는 虛妄한 상태를 말한다.

 

무명업상(無明業相) : 三細의 하나. 또는 業相. 은 움직인다는 뜻이다. 아뢰야식의 근본 動相, 主觀 · 客觀이 대립하기 이전 주관과 객관이 나뉘지 않은 순수한 動的 상태. 이것은 眞如無明和合하여 차별적인 현상을 내게 되는 첫 걸음.

 

진여(眞如) :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물의 本體로서 진실로 영원불변한 것이란 의미로 眞如라고 이름한 것이다. 如如 · 如實 · 등으로 부르며, 대승에서는 萬有本體를 일컫는다.

阿含에서는 緣起理法이 영원불변의 진리임을 진여라고 한듯하다. 異部宗 輪論에 의하면 化地部에서는 九無爲를 설하는 가운데 善法眞如 · 不善法眞如 · 無記法眞如 · 道支眞如 · 緣起眞如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 · 無記三性이나 八聖道緣起理法이 진실로 영원불변한 일을 진여라고 한다.

대승에서는 모든 존재의 본성이 人法二無我이며 모든 차별적인 을 초월해서 절대의 하나인 것을 진여라 이름했으며, 또 이것을 여래의 법신의 自性으로 삼는다. 佛地經論卷七에는 진여란 모든 현상(諸法)實性이라고 하고 그 一味이지만 을 따라서 종종의 구별이 있으며 일체법과 不一不異로서 그 를 보고자 하면 사고도 언어도 미치지 못하는 경지지만 모든 거짓이나 그릇된 견해를 여의고 있다는 점에서 억지로 진여라 이름했다. 또 모든 이 의지하는 바가 되므로 法界, 損減을 여의었으므로 實有, 增益을 여의었으므로 空無, 다만 이것만이 진실이므로 實際, 無分別智의 깨달음이므로 勝義라고 거짓 이름했다고 한다.

진여의 異名으로 大般若經卷三百六十에는 眞如 · 法界 · 法性 · 不虛妄性 · 不變異性 · 平等性 · 離生性 · 法定 · 法住 · 實際 · 虛空界 · 不思議界十二名이라 함.

大乘阿毘達磨雜集論卷二에는, 眞如 · 空性 · 無相 · 實際 · 勝義 · 法界六名,

法華玄義卷八下에서는, 實相 · 妙有 · 眞善妙色 · 實際 · 畢竟空 · 如如 · 涅槃 · 虛空 · 佛性 · 如來藏 · 中實理心 · 非有非無中道 · 第一義諦 · 微妙寂滅14종의 이름을 들고 있다. 一如 · 一如法界 · 法界 · 眞如實相 · 眞如一實 · 眞實際 · 眞勝義등으로도 이름하며 그 모습이 절대평등함을 뜻하며 一相이라고도 한다.

解深密經卷三에는 七眞如를 설하고,

(1) 緣起理法流轉眞如.

(2) 諸法實性實相眞如.

(3) 萬法唯識理法了別眞如.

(4)~(7) · · · 도의 를 차례로 安立眞如 · 邪行眞如 · 淸淨眞如 · 正行眞如라고 하는데 實相眞如이외의 6종을 진여라고 일컫는 의미에 대해서는 그 각각의 理法이 그 자체 그대로 영원불변 하므로 진여라고 한다는 설과 그 理法자체를 진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實相眞如의 나타난 모습의 種別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法相宗說. 成唯識論卷九에서는 진여란 허망한 분별법을 여읜 人法二無我의 본성으로 三性 가운데 圓性實性에 해당한다고 했다. 에서는 모든 현상은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진여는 현상을 초월한 絶對靜的한 것으로 그 자체는 결코 현상이 될 수 없는 것(眞如凝然不作諸法)이라고 한다. 成唯識論卷十에는 보살은 初地에 이르러서 비로소 진여의 진리를 깨닫고 차례로 十地에 이르기까지 그 깨달음의 내용이 깊어지게 되기 때문에 十眞如의 구별을 세운다. ,

(1) 遍行眞如. 널리 萬有에 미치는 二空의 이치.

(2) 最勝眞如. 를 몸에 완전히 익힘으로 해서 깨달은 진여로 거짓이 없는 을 구족하게 갖추고 있으므로 최승이라고 한다.

(3) 勝流眞如. 진여로부터 流出는 그렇지 않은 다른 교보다 수승하다는 뜻이며 그 교의 근본이 되는 진여란 뜻.

(4) 無攝受眞如.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

(5) 類無別眞如. 생사와 열반 등의 구별이 없는 迷悟一如의 뜻.

(6) 無染淨眞如. 진여는 본래 染淨을 초월했다는 뜻.

(7) 法無別眞如. 진여는 생멸의 을 여의었으므로 諸種에 갖가지로 說示되어 있지만 그 는 하나란 뜻.

(8) 不增減眞如. 번뇌의 더럽힘을 끊었지만 줄지 않고 청정한 법을 닦지만 더하지 않는, 집착을 여의었다는 뜻. 대번에 이 진여를 깨달으면 자유자재로 종종의 모습이나 국토를 나타낼 수 있으므로 相土自在所依眞如라고도 한다.

(9) 智自在所依眞如. 四無碍智에 의해 자재를 얻는다는 뜻

(10) 業自在等所依眞如모든 神通 · 總持 · 禪定 등에 있어서 · · 의 활동의 자재를 얻는다는 뜻.

이상의 10은 차례로 初地로부터 十地까지 十波羅蜜을 행하여 十重障을 끊고 깨닫는다고 한다. 人無我의 진리를 人空眞如, 法無我의 진리를 法空眞如, 이 둘을 합해서 二空眞如라고 하며 二乘人空眞如만을 깨닫지만 보살은 二空眞如를 깨닫는다고 한다.

地論宗에서는 제八阿賴耶識, 攝論宗에서는 제九阿摩羅識은 그 자체가 청정한 自性淸淨心 곧 진여라고 하고, 이 무명의 熏習을 받아서 染淨諸現象을 나타낸다고 한다.

기신론에서는 진여를 중생심의 본체라고 하고 그것은 언어나 사유를 초월해서 여의었으므로 離言眞如, 그것을 억지로 언어로 표현한 것을 依言眞如, 둘을 합하여 二眞如라고 하며, 依言眞如에 있어서 그 본체가 迷惑된 마음을 여의고 한 점을 如實空(空眞如)이라고 한다. 또 중생심 곧 진여에는 절대부동의 心眞如門과 그것이 무명의 에 의해서 染淨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心生滅門이 있어서 不動인 진여를 不變眞如, 그것이 을 따라 나타나는 染淨의 현상을 隨緣眞如라 하며 합해서 二眞如라라 한다. 일반으로 萬有生起하는 방법을 진여의 不變 · 隨緣에 의해서 설명하는 것을 眞如緣起(如來藏緣起)라고 한다. 또 이 二眞如라고 하는 같은 의미의 말에 淸淨眞如 · 染淨眞如, 혹은 非安立眞如 · 安立眞如(安立이란 만유를 내고 그 각각의 존립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가 있다.

화엄종에서는 본체 즉 현상을 性起說에 입각해서 진여 그대로가 萬法, 萬法 그대로가 진여라고 했다. 또 진여를 一乘眞如三乘眞如로 나누고 前者別敎眞如 · 同敎眞如, 後者頓敎眞如 · 漸敎眞如가 있다고 하며, 이것은 진여의 이해의 방법이 諸敎說에 따라서 같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

천태종에서는 性具說을 세워서 진여에도 본래부터 染淨善惡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諸佛自性인 진여를 無垢眞如 혹은 出纏眞如라고 하고 중생의 體性인 진여는 번뇌에 더럽혀 있으므로 有垢眞如 혹은 在纏眞如라 하며 둘을 합하여 兩垢眞如라 한다.

釋摩訶衍論卷三에는 始覺 · 本覺二智를 깨달음의 로 하여 性眞如虛空에 입각하여 淸淨虛空라는 뜻으로 無障碍義 · · 平等義 · 廣大義 · 無相義 · 淸淨義 · 不動義 · 有空義 · 空空義 · 無得義十義가 있다고 하고 이것을 性虛空十義라고 한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第一支無明支이다.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라 한다

十二緣起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三世兩重 因果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因果로 해석하고 無明 등의 五果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相應하는 로서 善惡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有部唯識宗에서는 無明相應無明不共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前者 등의 根本煩惱相應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 後者相應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不共無明은 홀로 일어남으로 獨頭無明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不共無明을 다시 恒行不共無明獨行不共無明으로 나눈다. 前者第七 末那識相應하는 無明으로 등의 根本煩惱相應하여 일어나나 모든 凡夫의 마음속에 늘 쉬지 않고 나타나는 作用이란 점에서 第六意識相應하는 無明과 다르기 때문에 不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後者第六意識相應하는 無明으로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남으로 獨行不共이라고 일컫는다. 獨行不共無明隨煩惱와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시 主獨行無明無主獨行無明으로 나눈다. 唯識宗에서는 無明種子現行으로 나누고 늘 衆生을 따라 다니며 第八阿賴耶識 속에 숨어 잠자고 있는 無明種子隨眠無明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표면에 나타나 現在意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無明現行衆生에 붙어서 衆生을 얽어 生死(世界)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纒無明(전무명)이라 한다. 纒無明에는 相應하는 것과 不共이 있어서 隨眠··相應·不共四種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四種無明(四無明)이라 부른다. 根本枝末不共相應不相應, 迷理迷事, 獨頭俱行, 覆業發業種子子時行業果15無明으로 나눌 때도 있다.

勝鬘經에서는 見惑 三界修惑 등과 相應하는 相應無明四住地(見一處住地·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의 넷으로 처음의 見惑, 뒤의  三界修惑을 의미한다)이라고 부른다. 獨行不共無明無始無明住地이라 하고(합하여 五住地) 無明住地는 모두 번뇌가 일어나는 根本이며 오직 如來菩提智만이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起信論에서는, 無明不覺이라고 하고 이 不覺根本無明枝末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根本無明根本不覺·無始無明·元品無明·忽然念起無明이라고도 한다. 元初一念이라고도 한다. 眞如平等眞理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忽然히 차별·대립의 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 元初라고 하는 것은 모든 煩惱元始이고 迷妄의 시작이므로 다른 煩惱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忽然이라고 한다. 지극히 微細하므로 心王(마음)心所(마음의 作用)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즉 無始無明住地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枝末無明枝末不覺이라고도 불리우며 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난 末稍的 染汚心으로 三世微麤惑業이다.

天台宗에서는 ··三觀에 의하여 각기 見思·塵沙·無明三惑을 끊는다고 한다. 無明非有非空의 진리에 迷惑되어 中道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無明을 끊음에 있어서는, 別敎에서는 十廻向位에서 항복하여, 初地이상의 12階位에서 12無明(모두 12품의 무명이 있다고 한다)을 다 끊어 마친다고 한다. 이 경우 十廻向最後第十廻向에서 처음의 無明을 끊고 初地에 들어가지만 이 처음의 無明을 또 三品으로 나누어 끊으므로 이것을 三品無明이라고도 한다. 圓敎에서는 初地 이상의 42階位에서 42품의 無明(모두 42無明이 있다 한다) 끊어 마치는데, 이 경우 제51等覺最後心에 의해 妙覺智 또는 佛智가 나타나고 이에 의해 끊어지는 最後無明元品無明·無始無明·最後品無明이라 한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로서 실은 圓敎에서는 三觀에는 순서와 차례를 세우지 않고 一心을 가지고 함으로 三惑은 동체로 동시에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능견상(能見相) : 3의 하나로 見相 · 轉相이라고도 한다. 眞如無明에 의하여 처음 일어나는 것을 業相이라 하고, 業相 위에서 主觀客觀2이 서로 대립되는 경우에 그 主觀的인 부문을 能見相이라 한다. 이것은 唯識4으로는 見分에 해당한다.

 

경계상(境界相) : <起信論>에서 三細의 하나. 또는 現相 · 現識이라 함. 能見相으로 인식하는 對境. 主觀 앞에 나타나는 객관계를 말함. 즉 대상의 모습을 의미하는 말. 특히 <기신론>에서 마음의 生滅相을 설명할 때, 三細 · 六麤로 세분하여 말하는 가운데의 三細의 셋째 상. 三細란 우리의 생각이 움직이는 미세한 상, 즉 기본적 양상을 의미한다. 중생의 마음의 근본에는 無明業識이 있어서 그것이 능동적으로 움직여 轉識이 되고, 轉識은 객관적 대상을 의식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나타난 대상을 境界라 하며, 境界의 출현으로 대상화된 의식을 現識이라고 한다. 現識에 의하여 드러난 境界相, 轉識의 모습을 能見相, 無明業識의 모습을 無明業明이라고 한다. 轉識現識의 분열은 · 의 분열현상과 같다. 이것은 중생들의 무명업식을 바탕으로 일어나며, 이렇게 하여 주관이 객관적 대상을 인식하는 시초가 된다. 또 나아가 주 · 객관의 더욱 복잡한 대립관계가 의식 속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六麤, 智相 · 相續相 · 執取相 · 計名字相 · 起業相 · 業繫苦相 등의 여섯 가지의 거친 상으로 설명된 과정이 바로 그 복잡하여진 주 · 객 대립의 양상으로 설명되고 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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