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四修)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修行하는 방법을 네 가지로 나눈 것이다.
① 聖道門의 說.
(1) 無餘修. 福慧의 두 가지 資糧을 닦아 남음이 없는 것.
(2) 長時修. 3大阿僧祗劫 동안을 修行하여 게으름이 없는 것.
(3) 無間修. 精進 노력하여 순간순간마다 닦아 쉬지 않는 것.
(4) 尊重修. 三寶를 공경하고 존중하는 것.
② 淨土門의 說.
(1) 恭敬修. 아미타불을 비롯한 一切聖衆을 恭敬하고 예배하는 것.
(2) 無餘修. 一心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一切聖衆을 恭敬禮拜하고, 잡된 行을 하지 않는 것.
(3) 無間修. 마음과 마음이 相續하여 다른 業이 섞이지 않으므로 貪 · 瞋 번뇌가 끼어들지 않는 것.
(4) 長時修. 앞의 3修를 목숨이 있을 때까지 修行하여 중단하지 않는 것을 말함.
참고
수행(修行) : 敎法을 몸에 지녀 갈고 닦아 실천하는 일.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찾는 마음을 발하여(發心), 그 願望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행하고, 그 결과로서 깨달음을 펼친다고 한다. 수행이란 특히 頭陀苦行 또는 廻國巡禮란 뜻으로 쓰고 이를 행하는 사람을 修行者, 또는 行者라 부르기도 한다. 성문 · 연각 · 보살이 각각 究極의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에 대하여 성문은 三生六十劫, 연각은 四生百劫, 보살은 三祇百劫을 요한다고 한다.
(1) 三生六十劫이란, 성문이 아라한과에 이르기까지 가장 빠른 것은 세번 태어나는 기간을 지내고, 가장 늦는 것은 60劫(이 劫은 刀兵등의 1小劫)을 지낸다고 한다. 제一生 또는 처음 20劫에는 順解脫分을 일으키고, 제二生 또는 다음의 二十劫에는 未至定에 의하여 順決擇分의 慧를 일으키고, 제三生 또는 마지막 20劫에는 根本定에 의하여 다시 順決擇分의 慧를 일으켜 見道에 들고 마침내는 無學果를 증명한다고 한다. 그러나 제三生에서 처음으로 順決擇分의 慧를 일으킨다고 하는 說도 있다. 또한 빠른 것은 利根, 늦은 것을 鈍根이라 하나, 거꾸로 늦은 것은 오랜 鍛鍊을 참아낼 수 있는 練根으로서의 利根이라고 할 수도 있다.
(2) 四生百劫이란 연각이 辟支佛果에 이른는데 가장 빠른 것은 四生, 가장 늦은 것은 百劫을 요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俱舍論> 권十二에는, 麟角喩獨覺(緣覺)은 반드시 百大劫 기간에 깨달음의 바탕을 닦는다고 설명하고, 四生의 說을 설명하지 않는다.
(3) 三祇百劫이란, 三祇는 3아승지겁(三僧劫, 三祇劫이라고도 함), 百劫은 百大劫의 약어로서 三僧劫百大劫이라고도 하고, 보살은 3아승지겁에 걸쳐 波羅蜜을 닦고 그후의 百大劫에 있어서 부처가 갖출 수 있는 뛰어난 姿形(즉 32相 · 80種好)의 씨앗이 되는 相好業을 심는다고 하고 이들 수행을 三祇의 修行, 이 수행을 거쳐 성불하는 것을 三祇成佛이라 한다.
<大毘婆沙論> 권百七十八에는, 보살이 初아승지겁에 7만5천佛, 제二아승지겁에 7만6천佛, 제三아승지겁에 7만7천佛이라는 수많은 부처님을 섬겨 깨달음에 이르는 근본으로 삼고, 계속하여 91劫에 6佛을 섬겨 異熟業을 닦아 왕궁에 태어난 후, 34心斷結成道를 설하였고,
<智度論> 권二十七 같은 데에도 三祇百劫의 說이 있으며,
<攝大乘論> 권下에서는 三祇만을 설하고 百劫을 별도로 說하지 않고 있다.
法相宗에서는 初아승지겁은 五位 중의 資量 · 加行의 二位이며, 여기에서는 一行 속에서 一行을 닦고, 제二아승지겁은 通達位 및 修習位의 1部, 즉 初地에서 7地까지이며, 여기에서는 一行 속에서 一切行을 닦고, 제三아승지겁은 修習位의 나머지 즉 8地에서 10地의 滿心까지이며, 여기에서는 一切行 속에서 一切行을 닦는다. 그리하여 10地의 滿心에 있어서 等覺의 位에 올라 여기에서 비로소 成佛을 위한 方便의 行을 닦는 것이 百劫의 行에 해당된다. 또한 三祇의 수행중에 열심히 노력하여 뛰어난 사람은 중간 단계를 뛰어 넘어 높은 修行階位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하여 이것을 超劫이라고 하는데 初地 이상에서는 超劫이 없다고 하는 說도 있다.
화엄종이나 천태종에서는, 三祇百劫의 說은, 小乘 및 下根인 사람을 위한 方便的인 敎로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兩宗이 각각 圓敎라고 하는 최고의 차원에서 본다면, 중생은 본래적으로 부처이므로 三祇라는 시간의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眞言宗에서는 三劫의 妄執(三妄執)을 一念으로 초월할 것을 설하고, 淨土敎에서는 本願의 힘에 의해 왕생하여 成佛이 되는 것이므로 三祇의 修行을 설하지 않는다.
성도문(聖道門) : 불교를 크게 둘로 나누어 이 세상에서 성자가 되어 깨달음을 얻는 길(此土入聖)과 阿彌陀佛의 힘으로 그 淨土에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는 길(彼土入證)로 구별한다. 此土入聖을 聖道門, 彼土入證을 淨土門이라 한다. 이 구별은 원래 唐의 道綽이 安樂集卷上에 서술했다. 淨土敎에서는 이 說에 따라 佛敎를 聖道 · 淨土의 2門으로 나눈다
무여수(無餘修) : ① 4修의 하나. 福德·智慧의 2種 資糧을 모두 닦아서 남은 것이 없는 것. ② 4修의 하나. 한결같이 淨土往生의 5種 正行만을 닦고, 다른 業을 함께 닦지 아니하는 것이다.
복혜(福慧) : 福과 지혜. 福智라고도 한다.
자량(資糧) : 범어 sambhara의 번역으로 必需品·準備의 뜻을 갖는 말. 곧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데 밑천이 되는 것. 金光明最勝王經 卷六과 大寶積經 卷五十二 등에는 福德資糧(布施 持戒 등)과 智德資糧(智慧資糧이라고도 함. 般若의 지혜를 닦는 것)의 二種資糧을 들고 있으며, 瑜伽論 卷二十九에는 여기에 先世資糧(過去世에 닦은 善)과 現法資糧(이 세상에서 닦은 善)을 더해 4種 資糧을 들기도 한다. 또 唯識宗 등에서는 수행의 階位를 5位로 나누고 그 제1位를 資糧位라고 하기도 한다.
장시수(長時修) : 四修의 하나. ① 三大阿僧祇劫을 지내도록 게으름이 없이 수행하는 것. ② 아미타불과 일체성중을 공경예배하고 마음에 끊임없이 염불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中止함이 없는 것을 말함.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 : 보살이 佛位에 이르기까지 수행하는 기간. 아승지겁은 번역하여 한량없이 긴 시간이라 한다. 보살의 계위는 50位가 있고 이를 三期로 구분한 것. 十信·十住·十行·十廻向의 40位는 제1아승지겁이 되며, 十地 가운데 初地로부터 제7地까지가 제2아승지겁이 되고, 제8地에서부터 제10地가 제3아승지겁이 된다. 제10地를 마치면 곧 佛果다.
무간수(無間修) : ① 4修의 하나. 어떤 곤란을 만나더라도, 용기를 다하여 조금도 쉬지 않고 수행하는 것. ② 往生淨土의 行業인 5종의 正行을 항상 끊임없이 수행하고 正行 이외의 행업이나 탐·진·치 등의 번뇌를 위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
정진(精進) : 범어 virya의 번역으로 6바라밀 · 10바라밀의 하나. 毘梨耶 · 毘離耶라 음역. 勤 · 勤精進이라고도 번역하며 약하여 進이라고도 한다. 부지런히 善을 향해 용감하게 노력하는 끊임없는 활동.
① 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 俱舍宗에서는 十大善地法의 하나로, 唯識宗에서는 十一善心法의 하나로 한다.
② 勤의 心所를 體로 하는 가운데 四精勤 · 五根 · 五力 · 七覺支 · 八聖道중 精進根 · 精進力 등이 있음이 그것.
③ 六바라밀 · 十바라밀의 하나로서 精進바라밀이 있다. 특히 보살이 佛道의 성취를 위해 닦는 精進을 일반의 바라밀과 구별하여 精進바라밀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④ 智度論卷十六에는, 보살의 身精進바라밀과 心精進바라밀이 2種精進바라밀을 論示한다. 또 成唯識論卷九에서는 被甲(甲은 勇猛을 상징) · 攝善(善法을 닦는 것) · 利樂(중생을 饒益하는 것)의 3종精進을 說한다. 이밖에 종종의 精進을 여러 佛典에 記述하고 있음을 본다.
⑤ 세상에서는 身心을 단속하고 酒肉을 끊는 것을 精進 · 精進潔齋라고 한다.
존중수(尊重修) : 四修의 제4. 恭敬修라고도 한다. 배운 바를 공경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닦아서 게으르지 않는 것.
삼보(三寶) : 불교도가 존경하고 공양할 佛寶와 法寶와 僧寶의 셋을 말한다. 佛은 우주와 진리와 인생의 참다운 모습을 깨닫고 이에 의해서 다른 이를 가리켜 인도하는 覺者로 불교의 敎主, 法은 그 불타가 스스로의 깨달음에 바탕하여 중생을 가르치기 위해 설한 敎, 僧은 그 法을 따라 修學하는 불타의 제자의 집단이다. 이 셋은 거룩하고 최상의 威德이 있어 변하지 않으므로 세속의 보배와 같기 때문에 寶라고 한다. 삼보에 대해서는 보통, 3종의 구별이 있다고 한다.
① 別相三寶. 階梯삼보라고도 하고, 불보와 법보와 승보가 각각 다른 존재인 측면에서 말한 것.
② 一切三寶. 同體삼보·同相삼보라고도 한다. 의미상으로는 불보·법보·승보의 셋으로 구별하지만, 그 본질은 다름이 없는 一體인 것을 말한다. 예컨대, 佛은 깨달은 사람이란 뜻으로 불보라 했고 불타의 덕은 깨달음의 軌範으로 할만하기 때문에 법보라고 이름하며, 僧은 다툼이 완전히 없는 화합의 상태에 있는 생활이므로 승보라고 하는데, 하나의 불보 안에 삼보가 구비하여 있고, 하나의 법보·승보 안에 삼보가 있음을 일체삼보라고 한다.
③ 住持三寶. 후세에 불교가 머물 수 있도록 전하여 가는 삼보란 뜻이니, 佛像과 經卷과 出家의 比丘 등을 말한다. 대승에서는 八相成道를 住持의 佛로 해석하고, 세상을 제도하는 온갖 敎를 住持의 법으로 삼으며, 法에 의해 敎化되어서 성립된 三乘의 대중을 住持의 僧으로 한다. 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근원이 됨으로 삼보에 歸依하는 것을 三歸 또는 三歸依라고 하여 入信 곧 최초의 入門의 요건으로 삼는다.
공경(恭敬) : 삼가 존경하고 우러러 본다. 恭은 내 몸을 겸손하여 낮추는 것, 敬은 상대의 德을 존중함을 말한다.
존중(尊重) : 높이고 중히 여김.(국어사전)
정토문(淨土門) : 아미타불의 힘에 의해 극락정토에 일단 往生하여 깨달음을 얻는(곧 彼土入證)법을 淨土門이라 하며, 이에 대해 이 세상에서 깨달음을 얻어 聖者가 되고자 하는 此土入證의 宗門을 聖道門이라 한다.
공경수(恭敬修) : 수행하는 형태를 넷으로 나눈 四修의 하나. 아미타불과 일체 聖衆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것.
아미타불(阿彌陀佛) : 범어 Amitabha Buddha, Amitayus Buddha.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처님의 한분. 阿彌陀婆(無量光, amitabha)·阿彌陀庾斯(amitayus, 無量壽)라 음역한다. 이 중에서 婆(abha)는 光明의 뜻이며, 庾斯(ayus)는 壽의 뜻이다. 또는 無量淸淨佛·無量·阿密㗚多(Amrta, 甘露)·盡十方無碍光如來라고도 한다. 阿彌多·阿弭跢·阿弭嚲라고도 쓰며 서방극락세계의 敎主의 이름이다. 이 부처님과 그곳의 극락정토를 주로하여 無量壽經·觀經·阿彌陀經에 說하며, 화엄·법화·열반 등의 대승경전 이외에도 2백 수 십부의 경전에 설해지고 있다.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世自在王佛의 감화를 받은 法藏이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를 기원. 또 48원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장구한 수행을 지나 성불하였으니 이가 바로 아미타불이다. 오랜 옛적에 성불한 아미타불(本佛)에 대하여, 이 부처님을 10겁 전에 성불한 아미타불(迹佛)이라 한다.
성중(聖衆) : 聖者의 群衆이란 뜻으로 佛 및 聲聞·緣覺·보살을 말함. 사람의 목숨이 다할 때에, 정토에서 아미타불 및 聖衆이 마중 오시는 것을 聖衆來迎이라 하고 그 相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을 聖衆來迎圖라고 한다.
예배(禮拜) : 공경하는 뜻을 신체적 동작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가지가지의 방법이 있다. 法苑珠林 卷二十에는, 부처님께 예배하는데 일곱가지가 있다고 한다(七種禮佛). 곧 我慢憍心禮·唱和求名禮(명예 등을 구하기 위하여 한다)·身心恭敬禮·發智淸淨禮·徧入法界禮(부처도 중생의 마음도 모든 것이 상통하고 있는 法界의 이치에 통달하여 一佛을 禮할 때 諸佛에 통하는 禮拜)·正觀修誠禮(불타께 절하는 것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있는 佛性에 절하는 禮拜)·實相平等禮(예배하는 대상까지도 空한 自他不二의 禮拜)이다. 世親의 淨土論에는 五念門의 하나로 禮拜門, 善導의 觀經疏散善義에는 五正行의 하나로 禮拜正行을 들었다.
일심(一心) : ① 우주의 근본원리로서 萬有의 實體인 절대 無二의 心性. 眞如, 如來藏心을 말한다. 舊譯의 화엄경 卷二十五의 十地品에「三界는 허망하여 다만 이 한 마음의 所作이다」라고 說한 것은 이런 뜻에 근거한 것이다. 또 宗密의 화엄경 行願品鈔 卷二에는, 華嚴宗의 五敎에 一心의 說을 배속하고, 小乘에서는 마음 밖에 外境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이름은 있어도 實다움이 없고(假說의 一心), 大乘權敎에서는 異熟阿賴耶識(事의 一心), 大乘實敎에서는 如來藏藏識(理事無礙의 一心), 大乘頓敎에서는 染淨을 함께 뛰어넘은 절대적인 一心 別敎一乘에서는 萬有를 다 거두어 들인 萬有總該의 一心을 말한다고 하고, 別敎의 一心은 一眞法界, 一心法界라 함과 같이 우주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곧 事事物物이 그대로 서로 장애하지 않고 절대적인 존재, 萬有를 만드는 眞如心에 거두어 一心으로 한다.
천태종에서는 一心三觀, 一念三千의 說이 있어, 범부가 항상 일으키는 미혹의 一心에 우주의 전부가 원만히 갖추어 있다고 한다. 더욱이 一心이라고 하는 때는 主로 보는 자의 마음, 一念이라고 하는 때는 보는 대상에 대해서 말한다.
② 唯一의 根本識의 뜻. 곧 온갖 것을 變現시키는 마음으로서의 阿賴耶識. 成唯識論 卷二에는 이 의미에 따라서 一心이라고 한다.
③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集注하여 생각을 어지럽게 하지 않는 마음. 雜念이 섞이지 않고, 一心으로 바르게 불타를 念하는 것을 一心正念, 불타를 念하여 오로지 하는 것을 一心專念이라고 하고, 淨土敎에서는 一心으로 彌陀를 念하는 것을 重視한다. 良忠의 選擇傳弘決疑鈔 卷二에는, 一心에 理 · 事, 定 · 散, 安心 · 起行의 구별이 있다고 하고, 理의 一心은 平等한 心性, 事의 一心은 定心과 散心중의 一心으로, 이것은 다 같이 起行에 속한다. 그리고 安心의 一心이라 함은, 無量壽經에 說하는 至心 · 信樂 · 欲生我國의 三信, 觀無量壽經에 說하는 至誠心 · 深心 · 廻向發願心의 三心, 阿彌陀經에 說하는 一心不亂의 一心을 가리키고, 이것들은 다 本願을 의심하지 않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는 마음이다.
명호(名號) : 주로 불·보살의 이름을 말한다. 찬양하는 寶號·尊號·德號·嘉號 등을 말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일컫는 이름이므로 果名·果號·果上名號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 慧遠의 大乘義章卷二十 끝에는 體를 나타내는 것을 名, 德을 나타내는 것을 稱, 名과 稱이 외부에 나타나서 천하에 널리 알려지는 것을 號라고 한다고 했다. 諸經典에는 聞名, 稱名 등의 德을 말하고 있다. 淨土敎에서는 專的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말하고 南無阿彌陀佛(6字의 名號)을 부르며 혹은 名號의 作用을 몸에 받음으로서 淨土에 태어난다고 한다. 아미타는 無量壽(amitayus)·無量光(amitabha)의 뜻이 있으므로 나무아미타불을 번역하여 歸命無量壽如來·南無不可思議光如來(九字名號)·歸命盡十方無礙光如來(十字名號) 등으로 말한다. 淨土宗에서는 九字·十字의 名號를 六字名號와 같이 本尊으로 사용하는 일도 있다.
잡행(雜行) : 唐의 善導가 세운 敎義로 淨土의 行業에 있어 5종의 正行과 5종의 雜行이 있음을 판별했다. 淨土所依의 經을 읽고(讀誦), 아미타불을 관상하며(觀像), 아미타불께 예배하고(禮拜), 아미타불을 부르며(稱名), 아미타불을 찬양·공양하는 것(讚歎供養)을 五正行이라 하고, 이 밖의 불·보살·신중 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雜行이라 했다. 또 이 아미타의 五正行 이외의 善行은 三乘과 人天의 果報를 얻는 因行도 겸하여 되므로 雜行이라 하고, 극락정토 이외의 十方의 淨土에 往生하는 因行이므로 雜行이라 한 것이며, 또한 三學·六度 등의 보살萬行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雜行이라고 한 것이다.
상속(相續) : 因은 果를 내고, 果는 또한 因이 되어 또 다른 果를 내므로 이렇게 因果가 차례로 연속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
업(業) : 범어 karman의 번역. 羯磨라 音譯한다. 造作의 뜻. 行爲·所作·意志에 의한 身心의 활동. 意志에 의한 身心의 생활을 의미한다.
➀ 일반으로 業을 身·語·意의 三業으로 나눈다. 有部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이러한 것을 하려고 하는 뜻이 意業이고, 그 의지를 신체적 행동과 言語的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 身業과 語業(口業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한다. 또 業을 意志의 활동인 思業과 思業이 끝나고서 행하는 思已業의 二業으로 나누는데 이 경우, 思業은 意業이고, 思已業은 身·語 二業이다. 三業으로서의 작용의 本體(業體·業性)에 대해서, 有部등에서는 意業은 思(意志), 身·語業은 色法(物質的인 것)이라고 하고, 經量部나 大乘에서는 모두 思(意志)라고 한다. 불교 본래의 입장은 후자라고 생각된다.
➁ 有部등에서는 物質的인 것을 本體로 하는 業(色業) 곧 身業과 語業으로, 表(作·敎)와 無表(無作·無敎)가 있다고 한다. 表業은 밖으로 표현되어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것, 無表業은 無表色이라 이름 지어지는 일종의 色法(보통의 물질과 같이 粗雜하지 않다)을 本體로 하고, 강한 善惡의 業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그 業은 身表業과 語表業과 및 定등이다. 이 無表業에 3종이 있다. 受戒와 定(어느 것이나 다 善)에 의해서 일어난 律儀와, 습관적이고 특히 강한 결단을 가지고 한 惡業에 의해서 일어난 바의 不律儀와, 그 이외의, 때에 따라 선악의 업에 의해서 일어난 非律儀非不律儀(處中의 無表)의 3종이 그것이다. 律儀無表는 戒를 버리고 定에서 나오기까지 계속되고, 그 밖에 無表는 특별한 障害가 없는 한 일생동안 계속된다. 이들 無表 중에서 善한 無表에는 惡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고, 惡한 無表에는 善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어서, 각기 그 사람의 後天的 성격을 형성한다고 한다. 또 身·語의 각기 無表 및 無表業에 意業을 더하여 五業이라고 한다.
➂ 선악의 업을 지으면, 그것에 의해서 그에 상응한 고락의 갚음(果報·異熟)이 생긴다. 이것을 業因에 의해서 業果가 생긴다고 한다. 非善非惡의 無記業은 果를 끄는 힘이 없다. 이 業因과 業果의 관계를, 有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業 그것은 三世에 實在하는 것으로서, 업이 현재에 있을 때 이것이 因이 되어서 어떠한 未來의 果를 끌것인가가 결정되고(이것을 取果라고 한다), 업이 지나가 버림으로부터 果에 힘을 주어서 果를 현재에 이끌어 낸다(이것을 與果라고 함). 또한 經量部에서는, 業은 순간에 없어져 버리는데, 그 業은 果를 생하는 종자를 識위에 심어 주어, 그 종자가 果를 끌어 일으킨다고 한다. 이 종자의 思想은 有部의 無表業說과 같은 것이다.
④ 業을 여러 가지로 분류한다. 總體로서의 일생의 果報(갚음)를 이끄는 業. 곧 人間界라든가 畜生界에 태어나게 하는 강한 힘이 있는 業을 引業(牽引業·總報業·引因)이라 하고, 人間界등에 태어난 자에 대해서 개개의 구별을 주어서 개체를 완성시키는 業을 滿業(圓滿業·別報業)이라고 한다. 引業의 갚음을 總報, 滿業의 갚음을 別報라고 하여, 이 二業을 總別二業이라고 한다. 더욱 有部에서는 하나의 引業에 의해서 一回의 生을 받아 다시 그 위에 많은 滿業에 의해서 이 生이 완성된다고 說하고, 多業이 일생을 이끌거나, 一業이 多生을 끌거나 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또 業에는, 山河大地(器世間)와 같은, 많은 生物에 공통하는 果報를 끌어 일으키는 共業과, 개개의 生物의 신체와 같은, 개개의 생물에 固有한 果報를 引起하는 不共業이 있다.
⑤ 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善業(安穩法)과, 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不善業(惡業 ․ 不安穩法)과, 善惡 어떤 것도 아닌 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無記業의 셋을 三性業이라고 한다. 惡業은 罰하지 않으면 안되는 業이기 때문에 罰業 ․ 罰이라 하고, 身·口·意의 三罰業 또는 三罰이 있다. 中阿含經 권三十二에는 身·口·意의 三業중에서 意業이 가장 重하다고 說하여, 불교가 動機論에 입각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자이나敎에서는 身·口·意의 三罰중 身罰을 가장 重하다고 하여, 結果論에 빠져 있다. 또 熟慮한 뒤에 決斷하여 일부러 한 故思業(故作業)과 그렇지 않고 뜻밖에(無意識的) 잘못한 不故思業은 그것만으로는 갚음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故思業중에 적극적으로 한 강하고 중대한 業을 增長業이라고 하고, 소극적으로 한 약하고 가벼운 故思業은 不增長業이라고 한다. 점점 강하게 되는 業은 增上業 혹은 增長業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造作業이라고 한다. 欲界의 惡業과 같이, 眼·耳·鼻·舌·身의 五識으로 받는 苦만을 受의 果報로 가져오는 業을 身受業, 色界·無色界(初禪天을 除함)의 善業과 같이 제六意識으로 받는 樂만을 受果報로 가져오는 業을 心受業이라 하고, 합하여 二受業이라 한다. 또 苦受와 樂受와 捨受(不苦不樂受)의 果報는 각기 欲界의 惡業과 欲界에서 色界 第三禪까지의 善業과, 色界 第四禪 이상의 善業에 의해서 오기 때문에, 이 세 業을 각기 順苦受業·順樂受業·順不苦不樂受業이라 하고, 합하여 三受業이라고 한다. 또 欲界의 善業은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福樂, 欲界의 惡業은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에 非福業, 色界·無色界의 善業은 그 禪定의 힘에 의해서 갚음(報)이 정해져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不動業이라 하고, 합하여 福등의 三業(또는 三行)이라고 한다. 또 惡業은 黑業, 善業은 白業이라고도 하고, 여기에 異熟의 좋아함직(白)한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黑)에 배당하면, 欲界의 不善業은 성질이 不善하여 異熟도 좋아하지 않는 黑黑異熟業, 色界·無色界의 善業은 성질은 善하고 異熟도 좋아하기 때문에 白白異熟業, 欲界의 善業은 성질도 異熟도 黑白相雜하여 있기 때문에 黑白黑白異熟業, 번뇌와의 관계가 斷切된 無漏業은 상대적인 黑白을 초월하여 異熟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非黑非白無異熟業이라 하고, 이것 둘을 합하여 四業이라 한다. 四業중에 앞의 3은 有漏業으로, 이것들은 최후의 無漏業에서 斷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內心을 남 모르게 감추고 아첨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業을 曲業이라고 하고, 또한 성냄에 의해서 일어나는 業을 穢業이라 한다. 탐냄으로 의해서 일어나는 業을 濁業이라고 하고, 이것들을 합하여 曲穢濁의 三業이라고 한다. 八聖道의 第四支는 正業으로, 그 반대는 邪業이다.
⑥ 業에 의해서 그 갚음을 받는 시기에 다름(異)이 있기 때문에, 順現業(順現法受業)·順生業(順次生受業)·順後業(順後次受業)의 三時業을 나누어, 각각 이 세상에서 지은 業에 응해서, 그 갚음을 이 세상에서 받는 것. 다음 태어난 세상에서 받는 것, 제3生 이후에 받는 것으로 구분한다. 이 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不定業(順不定受業)이라 하고, 거기에 三時業을 더하여 四業이라고 한다. 또 不定業을 갚음의 내용(異熟)의 定·不定에 의해서 時不定異熟定業과 時不定異熟不定業의 둘로 나누고, 여기에 三時業을 더하여 五業으로 하며 또 三時業을 각기 時定異熟定과 時定異熟不定으로 나누어 6으로 하고 둘의 不定業을 더하여 八業이라고도 한다.
⑦ 業이 작용할 또는 의지할 곳이 되는 것. 혹은 有情을 苦樂의 果報(갚음)에 인도하는 通路가 되는 것을, 業道(根本業道)라 하는데, 여기에 十善業道와 十惡業道가 있다. 有部에서는, 十善·十惡에는 業인 것과 業이 아닌 것(無貪·無瞋·正見, 貪·瞋·邪見)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意志(思)가 거기에 작용하는 바의 의지할 곳이 되기 때문에 業道라 한다고 했다. 經量部나 大乘에서는, 十善·十惡은 모두 業이어서 意志(思)를 體로 하는데, 처음의 七業道에 있어서는 身·口를 發動하는 意志(思)가, 思惟하여 결정하는 意志(思)의 작용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業道라 하고, 또 그 發動의 생각에 의해서 생긴 생각의 종자도 業道라 한다. 뒤의 셋 곧 貪·瞋·癡 등은 順次로, 또 交互로 생기기 때문에, 앞의 것은 뒤의 것 때문에 業의 道가 되고, 또 有情을 지옥등의 惡趣등에 인도되는 道가 되기 때문에 業道라고 說함. 또 業에는 준비적 행위(加行)와 목적을 수행하는 그 순간의 행위(根本)와 完遂한 뒤의 종속적인 행위(後起)가 있는데, 이 가운데 근본만을 業道라고 한다.
⑧ 煩惱道·業道·苦道(→三道).
⑨ 業은 갚음(果報, 異熟)을 내는 因이 되기 때문에 業因·因業이라 하고, 業에 의한 갚음을 業果, 業報라 한다. 또 業因에는 業을 일으키는 원인(번뇌등)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고, 因業에는 因과 業(主因과 助緣)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다. 業果를 끌어 당기는 힘을 業力, 業에 의한 괴로운 갚음, 또는 業과 그 苦인 갚음을 業苦라고 한다. 惡業과 번뇌를 아울러서 業結·業惱라고 한다. 惡業 때문에 생긴 가리움, 障害를 業障·業累라고 한다. 業에 의해서 갚음을 받는 것은 業感, 過去世(前生·前世)에 지은 業은 宿業 또는 前業, 宿業에 의해서 받은 壽命은 業壽·業受. 宿業에 의한 벗을 수 없는 중한 病은 業病, 宿業에 의해 재앙은 業厄이라고 한다. 業이 갚음을 生하는 도리는 天道와 같이 必然이기 때문에 業天, 業은 그림자와 같이 몸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業影, 업은 중생을 迷界에 묶어 놓기 때문에 業繫(繫業이라고 하여도 거의 같다)·業羂·業縛·業繩이라 한다. 業은 그물과 같이 사람을 붙잡아서 迷界에 머물게 하므로 業網, 惡業은 때나 먼지와 같이 몸을 더럽히기 때문에 業垢·業塵이라고 한다. 또 惡業의 작용을 火·魔·賊에 비유해서 業火·業魔(十魔의 1)·業賊등이라 하고, 지옥에는 중생의 선악의 業을 비추어 내고 재고 기록하는 業鏡·業秤·業簿 등이 있다고 한다. 惡業의 힘을 바람에 비유해서 業風이라고 하는데, 또 惡業에 의해서 招來된 猛風(지옥등의)도 業風이라고 한다. 宿業에 의한 神通力으로서 業通(報通)이 있다.
⑩ 無間地獄의 갚음을 부르는 것을 無間業, 有情을 欲界등의 三界에 매어두는 業을 三界繫業이라고 한다. 번뇌는 業을 일으켜서 有情을 가지가지의 세계에 태어나게 한다. 곧 生을 윤택하게 하고, 이 미래의 生을 부르는 業을 潤業·潤生業이라고 한다. 또 자기의 지은 業의 갚음을 자기가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自業自得이라고 한다.
⑪ 十二緣起의 第十支인 有를 해석하는데, 후대에 와서는(阿毘達磨에서는) 業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것을 業有라고 한다.
⑫ 觀無量壽經에는 施·戒·行의 三福은 淨土에 往生하기 위한 正因으로, 淨業(淸淨業)이라고 說해져 있다. 일반으로 염불해서 彌陀의 淨土에 往生하고자 원하는 것을 淨業이라 한다.
탐(貪) : 貪은 貪欲이라고도 貪愛라고도 하고, 일반으로 나의 좋아하는 대상을 향하여 탐내어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고, 번뇌의 근본적인 것의 하나로 한다.
① 범어 lobha의 번역으로 三不善根(세 가지의 根本惡德, 三毒)의 하나. 이에 대해서 마음에 탐냄이 없으며 또는 탐냄의 반대를 無貪이라고 하고 心所(마음의 작용)의 이름으로, 구사종에서는 10大善地法의 하나로 하며, 유식종에서는 善의 心所의 하나로 한다. 三善根의 하나.
② 貪은 범어 raga의 번역. 心所의 이름으로 구사종에서는 不宗地法의 하나로 하며, 유식종에서는 번뇌의 心所의 하나로 한다. 또 六根本煩惱의 하나. 5頓使의 하나. 일반으로 貪을 없애는데 不淨觀을 닦음을 요한다. 欲界의 貪을 欲貪이라고 하고, 色界 無色界의 貪을 有貪이라고 하고, 또 有貪을 둘로 나누어, 여기에 欲貪을 더해서 欲貪·色貪·無色貪의 셋으로도 한다. 이 중에서 欲貪은 五下分結의 하나. 나머지는 한가지로 五上分結의 하나이다. 欲界의 貪은 5蓋의 하나. 또 顯色貪(色彩에 집착하는 貪)·形色貪(姿·形·용모 등에 집착하는 貪)·妙觸貪(피부에 부딪치는 촉각에 집착하는 貪)·供奉貪(走居動作에 집착하는 貪)의 네 가지의 貪으로 나눈다. 貪에 의해서 생기는 身·口·意의 業을 濁業이라고 한다.
③ 범어 abhidhya의 번역. 10惡의 하나. 특히 타인의 재물에 대해서 함부로 부정한 욕망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無貪은 10善의 하나.
④ 그러나 이상 세 가지의 구별은 반드시 명확하지 않다. 上座部의 法集論에서는 이들의 말을 같은 말로 쓰고 있다.
진(瞋) : 瞋恚·怒라고도 번역한다. 心所(心의 활동)의 이름. 有情(산 존재)에 대해서 미워하고 성내는 것. 俱舍宗에서는 不定地法의 하나, 唯識宗에서는 煩惱位의 心所의 하나라고 한다. 諸惑의 體인 六根本煩惱의 하나로 推察尋求하는 것(見)은 아니고 그 작용이 둔하고 느리므로 五鈍使의 하나로 한다. 貪·痴와 함께 三毒(三不善根)의 하나로, 또는 十惡이나 五蓋의 하나로 친다. 瞋은 다만 欲界繫의 번뇌로서 色界·無色界는 아니고 貪이 可意의(心에 즐거움) 對境을 향해서 일어나는 것인데 대해 瞋은 不可意(違逆)의(心에 맞지 않는 것) 對境을 향해서 일어난다. 佛道를 닦는 位에 최대의 障害가 되는 것으로 智度論卷十四 같은 데서는「瞋恚의 허물은 가장 깊은 것이어서 三毒중에 最重하고, 九十八使중 最堅하며 모든 心病 가운데 가장 다스리기 어렵다」고 했다. 無瞋은 瞋의 반대로 境界에 대해 분노하여 害할 마음을 갖지 않을 뿐 아니라 瞋을 對治하는 정신작용으로, 구사종에서는 十大善地法의 하나, 유식종에서는 善의 心所의 하나로 한다. 無瞋은 無貪·無癡와 함께 三善根의 하나로 셈하고 또 四無量의 하나로 慈無量心의 體가 된다.
번뇌(煩惱) : 범어 klesa의 번역. 吉隷捨로 음역하고, 惑이라고도 번역한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하게 하여 더럽히게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 그 성질은 不善 및 有覆無記이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서 업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報를 받아 미혹의 세계(生死)에 매어 있게 된다. 이것을 惑業苦의 三道라 한다. 그래서 불교는 번뇌를 끊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번뇌는 그 작용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갖는다. 隨眠·惑(이치에 어둡고 現象의 세계에 대해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것)·染·漏·結使·結·縛·纒·軛·暴流·取·蓋·繫·使·垢·株杌·燒害·箭·稠林(번뇌의 수가 많은 것을 무성한 삼림에 비유한 것)·塵勞·塵垢·客塵·諍根(다툼의 근본)이라고도 하고, 또 번뇌의 體 그것을 正使(다만 使라고도 한다), 體를 멸해도 역시 남아있는 관습의 기운을 習氣라고 한다. 모든 번뇌는 因力(아직 번뇌가 끊기지 않은 것)·境界力(욕심 등에 순응하는 대상이 나타나는 것)·加行力(대상에 대해서 非理·作意를 일으키는 것)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한다.〔俱舍論 卷二十〕혹은 境界力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도 있다고도 한다.〔入阿毘達磨論 卷上〕
① 구사종이나 유식종에서는 번뇌를 근본번뇌와 枝末번뇌의 두 번뇌로 나눈다.
근본번뇌라 함은 번뇌의 體 그것으로서,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는 번뇌로, 本惑·根本惑 혹은 다만 번뇌라고도 부르며, 有部에서는 隨眠이라고도 한다. 단 經部에서는 隨眠을 번뇌의 종자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서 번뇌의 現行(현재에 일어나서 활동하는 것)을 纒(전)이라 한다. 유식종에서도 隨眠이란 번뇌의 종자를 가리킨다고 말하며, 근본번뇌에 貪·瞋·癡·慢·疑·見(惡見)의 六번뇌(六隨眠)가 있는데, 見을 有身見·邊執見·邪見·見取見·戒禁取見의 五見으로 나누어 貪 등의 다섯과 합해서 十번뇌(십隨眠, 十使)라고 한다. 이 가운데 貪 등의 다섯은 推察尋求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그 작용이 느리고 둔하기 때문에 五鈍使(五惑), 五見은 推察尋求하는 성질이 있고 그 작용이 빠르고 날카롭기 때문에 五利使라고 한다. 또 六隨眠 가운데 貪을 欲界의 탐과 上二界(색계·무색계)의 貪으로 나누어 이것을 각각 欲貪·有貪이라고 하며 합하여 七隨眠(七使)이라 하고, 혹은 十隨眠 중에 貪을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로 나누어 欲貪·色貪·無色貪으로 하고 十二隨眠(十二使)이라고도 한다. 唯識宗에서는 십종의 근본번뇌 가운데 제七識과 상응하여 항상 일어나는 我癡(無我의 이치에 미혹하여 나의 相에 어두운 번뇌로 無明을 말함)·我見(我執을 말하며 有身見의 일부)·我慢(나를 집착하고 나를 믿고 우쭐하는 거만)·我愛(나를 집착하여 나에 탐착하는 것)의 넷을 四煩惱(四根本煩惱, 四惑)라고 한다. 또 탐·진·치는 모든 악을 낳게 하는 근본(즉 因)이며, 대표적인 번뇌이기 때문에, 三不善根·三毒·三垢·三縛 등이라고 한다.
지말번뇌라 함은 근본번뇌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종속적인 번뇌로, 隨惑·枝末惑·隨煩惱라고도 한다. 단 수번뇌란 말은「心王에 붙어다니는 번뇌」란 뜻으로 풀어 근본번뇌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지말번뇌에는, 구사종에서는 放逸·懈怠·不信·惛沈·掉擧·無慚·無愧·忿·覆·慳·嫉·惱·害·恨·諂·誑·憍·睡眠·惡作의 十九를 말하며, 유식종에서는 睡眠·惡作을 버리고 失念·散亂·不正知를 더하여 二十으로 하기도 한다.
② 俱舍宗 등에서는 迷理·迷事의 二惑을 나누어, 불교의 보편적인 진리 곧 四諦의 이치에 迷惑하고 있는 思想上의 知的인 번뇌를 迷理의 惑이라 하고, 구체적인 개개의 事象에 미혹한 바의, 곧 인간성에 바탕한 情意的인 번뇌를 迷事의 惑이라고 한다. 또 自相·共相이 二惑을 나누어서, 色·聲 등 각자 개개의 특수한 고유의 相(곧 自相)을 迷해서 각각의 법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번뇌를 自相의 惑이라 한다. 空·無我 등 三世의 모든 것에 공통된 相(곧 共相)을 迷함으로 많은 법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번뇌를 共相의 惑이라 한다. 앞의 것에는 貪·瞋·慢 또는 貪·瞋·慢·嫉·慳이 있고 뒤의 것에는 五見·疑·無明이 있다고 한다. 唯識宗에서는 煩惱障·所知障의 二障을 나누어, 我執에 의해 일어나서 중생을 미혹의 세계(生死)에 流轉시킴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惑을 煩惱障이라고 하며, 法執에 의해 일어나서 알아야 할 대상인 진리를 막음으로 보리를 깨닫는 길을 방해하는 惑을 所知障이라 한다. 번뇌장은 일체의 번뇌를 體로 하고 반드시 所知障을 수반한다. 번뇌장은 所知障을 依支處로 하기 때문이다. 所知障은 함께 번뇌를 體로 하지만, 반드시 번뇌장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또 業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惑을 發業의 惑(주로 다음에 말하는 分別起의 혹으로 특히 제六意識相應의 無明이 그것이다)이라고 하고 이에 대해서 迷界의 중생을 윤택하게 하고 삼계의 중생을 받게 하는 혹을 潤生의 혹(다음에 말하는 俱生起의 번뇌로 특히 제六意識相應의 貪을 主로 한다)이라고 한다. 또 어떻게 해서 번뇌가 일어나는가 하는 점에서 나누면, 二障 공히 각기 분별기와 구생기가 있다. 邪師·邪敎·邪思惟 등 밖으로부터의 緣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을 분별기의 혹이라고 하며,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일어나는 본능적인 것을 구생기의 혹이라고 한다. 十근본번뇌중에서, 의심과 邪見과 見取見과 戒禁取見과의 四는 분별기뿐이며, 다른 六과 二十隨惑은 양쪽에 모두 공통한다.
③ 번뇌를 끊어야 할 수행단계의 相異에 따라 번뇌를 나누면 見惑과 修惑(思惑)의 二惑이 있다. 전자는 見道에 의해서 없애야 할 번뇌(見道所斷의 惑)이며 후자는 修道에 의해서 끊어야 될 번뇌(修道所斷의 惑)이다. 俱舍宗에서는 迷理의 惑을 見惑, 迷事의 惑을 修惑이라고 하고, 唯識宗에서는 分別起의 惑을 見惑, 俱生起의 惑을 修惑이라 한다. (1) 俱舍宗에서는 三界 四諦의 각각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見惑에 총 八十八이 있다. 欲界의 苦諦에 관해서는 貪 등 十근본번뇌와 集諦와 滅諦에 관해서는 身見·邊見·戒禁取見을 뺀 七근본번뇌, 道諦에 관해서는 戒禁取見을 더하여 八근본번뇌가 있으므로, 합하면 欲界의 三十二, 色界·無色界에는 瞋이 없기 때문에 四諦의 하나하나에 瞋을 뺀 각 二十八, 計 八十八이 된다. 이것을 見惑八十八使라고 한다. 修惑은 欲界에 貪·瞋·癡·慢의 四, 色界·無色界에 각기 貪·癡·慢의 셋이 있어 합하면 열이 되므로 여기에 見惑의 八十八을 더하면 九十八隨眠 또는 九十八使라고 한다. 단 修惑은 성질이 遲鈍애매하여 분명히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九地의 각 위에 강약의 정도에 따라 九品(上上品에서 下下品까지의 아홉 品階)의 구별을 세워, 九地九品의 思惑, 修惑 八十一品 등이라고 한다. 이 九十八使를 遍行과 非遍行으로 나눈다. 遍行의 惑이라 함은, 三界九地 중에서 自界自地의 五部(見道에 있어서 四諦의 觀行과 이것을 거듭하여 닦는 修道)에 널리 작용하여 五部의 法을 더럽히는 惑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 五部 중의 自部에만 작용하는 惑을 非遍行의 惑이라고 한다. 곧 九十八隨眠 중에서 널리 五部의 모든 有漏法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고, 널리 그것들과 隨順하고 그것들에 의해서 더욱 더 增長하고(곧 隨增하고), 因이 되어서 널리 五部의 染法(번뇌 등의 染汚法)을 낳게 하는 힘이 강한 惑은 遍行의 惑으로 三界의 각각에 있어서 苦諦의 理에 헤매는 五見·疑·無明과 集諦의 理에 헤매는 邪見·見取見·疑·無明과의 十一이 있다. 이것을 十一遍行의 惑이라 한다. 이 중 身·邊의 二見은 다만 自界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自界緣의 惑이라고 하지만 나머지 다른 아홉은 自界는 물론 또 다른 上界까지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他界緣의 惑이라고 하고, 이 아홉은 上界上地까지도 緣이 있다고 하는 의미로 九上緣의 惑이라고도 한다. 또 九十八使를 有漏法을 대상으로 하는 有漏緣의 惑과 無漏法을 대상으로 하는 無漏緣의 惑으로 나누면 滅道二諦의 理에 迷한 邪見과 疑와 癡(邪見·疑에 상응해서 일어나는 相應無明과 및 독립으로 일어나는 不共無明)의 六惑은 無漏緣이며, 그밖의 것은 有漏緣이다. (2) 唯識宗에서는, 見惑에는 欲界의 四諦 각각에 十근본번뇌(欲界四十), 색계·무색계에 성냄(瞋)을 뺀 九근본번뇌(色界三十六·無色界三十六) 계 百十二번뇌를 들고, 修惑에는 欲界에 疑·邪見·見取見·戒禁取見을 뺀 六근본번뇌, 색계·무색계에 각기 다시 瞋을 뺀 각 五근본번뇌, 計 十六번뇌를 들므로 見修二惑을 합하여 百二十八번뇌가 된다.
④ 知的인 惑 즉 五利使와 見惑 등을 見煩惱라고 하고, 情意的인 惑 곧 五鈍使와 修惑 등을 愛번뇌라 하며, 합하여 見愛(二)번뇌, 見著二法, 愛見이라고 한다. 그 體는 虛假(헛소리)이기 때문에, 또 見假·愛假라고도 한다. 勝鬘經에는 四住地번뇌의 說이 있다. 곧 見번뇌는 見道에 있어서 한때에 끊겨지기 때문에 見一處住地(一切見住地)의 惑이라고 부르고 愛번뇌는 이것을 三界에 나누어 각기 欲愛住地의 惑, 色愛住地의 惑·有愛住地의 惑이라 부른다. 또 이 넷에 다시 모든 惑의 근본이 되는 無明(無明住地의 惑)을 더하여 五住地번뇌, 五住地惑이라 한다. 唯識宗에서는 五住地번뇌 중 앞의 넷은 煩惱障의 종자이며, 뒤의 하나는 所知障의 종자라고 한다. 天台宗에서는 전자를 界內見思의 惑, 후자를 界外의 惑이라고 한다. 대개 住地라 함은 다른 모든 惑이 일어나고 의지처가 되며(住) 잘 惑을 일으키는 因이 된다는 뜻이다. 智度論 卷七에는, 자신에 집착하는 번뇌를 內著번뇌, 外境에 집착하는 번뇌를 外著번뇌라 하며, 전자는 五見·疑·慢 등, 후자는 婬·瞋에 속한다고 한다.
⑤ 天台宗에서는 見思·塵沙·無明의 三惑(三障·三垢)을 말함. 곧 우선 見惑과 修惑(思惑)을 見思의 惑이라고 부르며, 다음에 티끌(塵)이나 모래(沙)에도 비유할 만큼의 무수한 사물의 하나하나의 事理에 迷한 劣慧(번뇌의 習氣로 不染汚無知라고도 한다)를 體로 하고, 다른 것을 化導하는 것을 막는 惑을 塵沙의 惑이라고 부른다. 다음에 모든 惑의 근본으로, 中道 第一義諦의 도리를 迷한 가장 적은 번뇌를 無明의 惑이라 부른다. 각각 空觀·假觀·中觀에 의해서 끊긴다고 한다. 이 三惑을 번뇌장·소지장에 配對하면 見思는 번뇌장, 塵沙·無明은 소지장에 해당한다. 또 見思는 三乘에 공통하는 惑이므로 通惑·塵沙·無明은 특히 보살만이 끊는 惑이기 때문에 別惑이라고 부르고(通別二惑), 見思는 三界안에서 일으키는 惑이므로 界內의 惑, 無明은 三界를 넘은 곳에 있는 惑이기 때문에 界外의 惑, 塵沙는 양쪽 모두 통하므로 界內界外의 惑이라고 한다. 또 見思의 惑은 空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사물의 相을 집착하여 취하는 번뇌이기 때문에 따로 取相의 惑이라고 말하는데, 넓은 뜻으로는 뒤의 二惑도 또한 取相의 惑이라고 한다.
⑥ 번뇌에는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 (1) 三縛. 貪縛·瞋縛·癡縛. 이상의 차례로 樂·苦·捨의 三受의 對境을 향해서 일어난다. (2) 三漏. 欲漏(癡를 뺀 欲界繫의 근본번뇌 및 十纏)·有漏(癡를 뺀 上二界繫의 근본번뇌로 이 경우의 有는 有身의 뜻. 身의 존재를 말한다. 無漏에 대한 有漏는 아니다)·無明漏(三界의 癡). (3) 三結. 有身見結·戒禁取結·疑結. 五見 및 疑의 六근본번뇌가 이 중에 포함된다. 「三結이 다하면 預流果에 이른다」라고 한 經說에 따라 三結이 다하면 그 때 見惑의 모든 것이 끊어진다고 한다. (4) 四暴流(四流). 欲暴流·有暴流·見暴流·無明暴流. 三漏의 분류법에서 見을 독립시킨 것. (5) 四軛. 四漏. 欲·有·見·無明의 넷으로 惑體는 四暴流와 같다. (6) 四取. 欲取·見取·戒禁取(戒取)·我語取. 俱舍宗에서는 欲界의 五鈍使 및 十纏을 欲取, 五利使 중 앞의 넷을 見取, 戒禁取見을 戒(禁)取, 上二界의 貪·慢·癡·疑를 我語取라고 한다. 이어라 함은 내신(자기의 몸)을 말한다. 내신에 의해서 나를 설하기 때문이다. 상이계의 번뇌는 대개 내신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아어취라고 부른다. (7) 四身繫(四身縛·四縛·四結이라고도 한다). 貪欲身繫(貪欲身縛·欲愛身縛)·瞋恚身繫(瞋恚身縛)·戒禁取身繫(戒禁身縛)·此實執取身繫(我見身縛). (8) 五蓋. 欲貪蓋·瞋恚蓋·惛眠蓋·掉悔蓋·疑蓋. 疑가 섞이지 않는 것을 疑蓋無雜이라고 하는 말도 여기에 연유한다. (9) 五(順)下分結. 有身見·戒禁取見·疑·欲貪·瞋恚. 下分이라 함은 欲界란 뜻. (10) 五(順)上分結. 色貪·無色貪·掉擧·慢·無明. 上分이라 함은 上二界란 뜻. (11) 五結. 貪·瞋·慢·嫉·慳. (12) 六垢(六煩惱垢). 惱·害·恨·諂·誑·憍. 煩惱垢라 함은 근본번뇌에서 흘러나와 그 모습이 더러워지고 거칠다는 뜻. (13) 七流. 見諦所滅流·修道所滅流·遠離所滅流·數事所滅流·捨所滅流·護所滅流·制伏所滅流(華嚴孔目章 卷三 등) (14) 九結. 愛結·恚結·慢結·無明結·見結·取結·疑結·嫉結·慳結. (15) 十纏. 無慚·無愧·嫉·慳·惡作·睡眠·掉擧·惛沈·忿·覆 등의 十. 忿·覆을 빼고 八纏이라 하는 경우가 있다. 枝末번뇌 중에 六垢는 가볍고, 十纏은 무겁다. 九十八隨眠에 十纏을 더해서 百八번뇌가 된다고 하고, 또 모든 번뇌를 다 말하면 八萬四千의 번뇌가 있다고도 한다.
⑦ 번뇌를 여의는 것을 離垢, 번뇌가 없는 것을 無垢, 번뇌가 다한 것을 漏盡이라고 한다. 아라한을 漏盡比丘, 또 漏盡하여 마음에 진리를 了解하는 것을 盡漏意解라고 한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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