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국문학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佛法을 전하는 쇠북의 메아리가 우리 東方에 번지자 흥겨웁던 우리의 국문학은 가락으로나 내용으로나 자못 은은해졌다. 따라서 유교의 道德文學과 도교의 誇張文學도 이 자비로 가다듬겨져 拜天을 으뜸으로 받들던 배달의 사상감정을 마름하기에 이르렀다. 곧 넘나는 放逸을 벼리기 위해 다투어 절을 찾았고, 眞如의 가녁을 더위잡기 위해 한결같이 불경을 외웠다.
이 추세는 그 믿음을 찬송으로 기치게 하였고, 그 높깊은 그윽을 글월로 기리는 보람을 누리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불교와 국문학의 거리는 날로 도타와져 못내는 나라와 겨레의 歸依處로 섬기는 지경을 다지게 하였다.
이 정착을 위해 殉敎의 사무침과 聖蹟의 순례로 부처님의 거룩을 證道하기에 心身을 바쳤고, 護國의 발원과 중생의 제도가 큰스님들의 법어와 게송으로 아롱졌고, 精舍의 기운이 사바의 티를 가시어 문화와 사상을 다잡아 차분한 불교문학을 빚어내었다.
한편 藏經의 판각과 集傳의 번역으로 인한 傳燈 또한 가멸차 드디어는 국문학의 구름다리가 되었다. 이에 다달아 삼보의 가르침은 국문학의 바탕을 고롭히는 동시에 겨레의 사상적 支柱가 되고 나라가 받드는 종교가 되었다. 따라서 煩惱를 佛心으로 도사려 苦空無我의 경지를 우러르는 날이 되고 씨가 되어 깊이 민간에 파고 들었다.
그러므로 온갖 고행을 법으로 씻고, 無常의 眞諦를 몸받아 佛의 세계를 노닌 작품은 단연 他를 넘짚는 성황을 자아내어 신라와 고려의 불교문학을 남겼다. 위로는 저「삼국유사」에 전한 忠談스님의 <讚耆婆郞歌>와, 月明스님의 <도솔가>와 廣德스님의 <願往生歌>등이 각각 신라의 그제를 수놓았고, 내려와서는 均如스님의 <普賢十願歌>가 고려의 초기를 찬란히 빛냈다. 이밖에도 하고한 淸信徒들의 문자와 이에 비긴 선비들의 작품에도 으늑한 풍경소리가 文集 속에 지천이니, 오랜 누리를 누빈 불교의 내음은 사뭇 겨레의 중심사상이 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太學에서의 儒書의 가르침과, 使節의 잦은 내왕과, 遊學의 잇따른 出入과, 詩賦의 貢課 등은 마침내 性理學을 받아들여 儒學에의 심취를 가져와 이른바「崇儒斥佛」의 새로운 경향을 낳게 하였다. 이는 천년을 국교로 받든 불교를 시새우는 外道들의 반발도 탓이었지만, 沙門 자체의 해이한 움직임도 적지 않은 원인의 하나였다. 그리고 번거로운 外憂內患을 틈탄 異端들의 야료와 儒敎에 빌붙는 선비들의 거역 또한 커다란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사회의 혼란과 민심의 동요가 겹쳐 <靑山別曲>의 불안과 <雙花店>의 조롱까지 취재되는 문학을 낳았다.
그렇지만 고려文學의 저류는 여전히 불교가 바탕이었으니, 오늘에 전하는 여러 기록에 돋보이는 法悅의 소재가 다 이를 방증하는 호젓한 고명들이다. 내려와 근세조선에 접어들자 불교문학은 커다란 암초에 부딪쳤다. 곧 유교를 높이고 불교를 배척함을 國是로 내세운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조상물림의 善根이 단번에 가실 수는 없었다.
더구나 世宗과 世祖의 信佛은 佛法을 불러일으키는 기틀이 되었으니, 진실로 奇緣이다. 곧 <訓民正音>의 반포를 전후해서 그 효용과 그 상용을 위해 부처님의 교화와 그 일대기를 註譯한「釋譜詳節」과 그 대목대목을 찬송한「月印千江之曲」을 비롯해서 여러 經集의 번역이 뿌린 씨앗은 불교와 국문학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당겨 勃興의 빌미가 되었고, 中興의 모태가 되었음에서다.
이 방대한 譯經事業은 經典을 특수층의 독점에서 개방시켜 보편화하고, <훈민정음>을 보급하려는 世宗의 영단으로 해서 오붓한 軌道를 찾았다. 바꾸어 말하면, 알기쉽고 쓰기에 편한 <훈민정음>을 日用함으로써 漢字로 文盲이 된 平民의 눈을 뜨게 하는 동시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民心의 허전을 채우게 하려는 英明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지식을 총동원한 번역의 감칠맛은 국문학의 보금자리를 보다 은근하고 보다 차분하게 하는 알뜰한 밑바대가 되기에 아쉽지 않았다.
본시 우리의 詩文學은 유교에서보다도 불교에서 그 계통이 이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 主流가 스님들로 해서 陶冶되었다. 따라서 신라는 물론 고려와 조선초의 성황도 실은 方丈에서 쌓여진 탑이며, 또한 그에서 물려진 열매임을 크게 주목할 것이다.
이 悠久한 學統이 도가니가 되어 信眉스님을 비롯한 여러 大德과 金守溫을 비롯한 儒學者들에 의해 國譯佛典이 완성되었고, 한편 義砧스님의 훈수로「杜詩諺解」도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창적인 印刷文化도 누비옷을 입은 스님들의 손으로 先場을 차지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불교가 우리 국문학에 미친 영향은 모름지기 무량에 값한다.
그러나 漢文만 숭상하고 儒學만 치키는 다스림이 누대를 잇자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훈민정음>은 한갓 兒女子의 문자로 구겨지는 사태를 자아내었음은 생각사록 천추의 한이다. 이 尙文好學은 儒學을 크게 발전시키고 漢文學을 불꽃처럼 일으켜 끝내는 穆陵盛際의 찬란까지 낳았다.
따라서 깊이 四衆에 침투한 불교는 서리를 맞아 차마 山間佛敎로 낙착되는 비운에 빠졌다. 그래서 민중과의 사이에 금이 그어지고, 동시에 문학과의 거리까지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비록 普雨스님의 法力으로 부흥은 되었으나, 워낙 유교의 집중공세를 배제하기에는 그네들의 극성이 너무나 시퍼랬다. 그러나, 명산대찰에서 간단없이 퍼지는 禪味는 끝내 문학의 본밑이 되어 시조와 가사와 소설에 함초롬히 얼룩져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특히 임진란으로 인한 僧軍의 출진과, 西山 · 四溟 두 스님의 忠君愛國을 소재로 삼은「壬辰錄」은 물론, 시국을 걱정하고 임금을 그리는 詩歌로의 앙금인「松江歌辭」에 조차 淨土를 그리고 永生을 바라는 노래가 散見됨은 민간신앙으로 뿌리박힌 불교의 감화가 얼마나 도타왔음을 명증하는 감이며, 내려와「靑丘永信」과「海東歌謠」에서도 讚佛의 대문은 찾기에 번거롭지 않다.
이 경향은 儒家의 詩文集에서도 한가지다. 그렇지만 조선초의 대견과 임진왜란을 전후한 풍성에 비기면 오직 명맥을 이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다못 古板本의 重刊으로 興法을 꾀하는가 하면 자기의 閑適과 淸遊를 보태는 방편으로 격하되었으니, 儒流의 排佛이 어떠했음을 웅변하는 실증이다. 이 흐름은 實學思想의 擡頭로 더욱 두드러졌다.
여기에서 깊이 민중에 파고 들었던 불사가 오직 信徒들만의 도량으로 밀려, 신앙보다도 사사로운 祝禱만이 행세하는 고장으로 錯認되는 風潮를 낳았다. 따라서「俗客不到處」가 아닌 富貴를 비는 고장이라는 구설까지 듣게 되었다. 이 세태는 正祖의 문예부흥으로 해서 더욱 드세어졌다. 이 漢字숭상의 기풍은 17세기에야 눈이 터서 바야흐로 꽃이 핀 평민문학에까지 크게 작용되어 국문학의 발전에도 다대한 가로걸림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신흥하는 기풍에 짓눌려 小說이나 詩調나 歌辭에서 조촐하게 다루어지던 불교가, 아예 조소와 비방의 文字로 바뀌었음은 아무리 시대의 반영이라지만 그저 딱하기 그지없다. 이 벌어져가는 佛敎와의 거리는 좀처럼 당겨지지 않았다.
거기에 과학사상의 전래는 自我의 발견까지 짝하여 자연과 인생의 문제를 과학으로 다루려는 새로운 풍조마저 나돌게 하였다. 이에 호응한 선비들의 孤高와 권세를 둘러싼 당쟁에 지친 민중은 차라리 현실도피를 꾀하는 익살과 諦念에 흘러 염불의 문학은 도외시된채 호화로운 과거를 녹슬리고 말았다. 다만 草衣스님의 솜씨와 金正喜의 찬불이 샛별처럼 빛났고, 萬海스님의 자상이 그 계통을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상을 종합하건대 불교와 국문학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면서도 무언가 높다란 장벽이 가로막혀 있어 서로의 提携를 헤살짓고 있었다. 비록 국가와 민족의 歸依處로 천년을 누렸지만 뚜렷한 시대문학의 깃발을 흩날리지는 못했고, 儒敎에 들볶일 時代에 오히려 찬란한 빛을 보였으니 연꽃의 가르침이 거기에 맞는다 하겠다. 그러나 그 기운도 워낙 극성을 다한 유교문학 등살에 휘감기고, 삶의 苦樂을 외친 생활문학에 말려 약빠른 타협보다는 가부앉음의 오롯한 자세로 내일을 그리다가 福田마저 흐리는 오늘을 낳았다.
그러니까 佛敎가 國文學의 底流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얄궂은 환경에 팔려 빗나가는 國文學을 佛敎의 울에로 당기기엔 그 자세가 너무 예로와 날로 일깨워가는 民度와의 평행을 보여 그 紐帶를 흐리지 않았는가 한다.
출처 : 동국역경원[李耘虛,筆者(李丙疇,1967.05.25)]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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