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단(對治斷)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斷惑 四因의 하나로 無漏道를 닦음으로써 번뇌를 끊는 일. 道를 닦아 惑을 끊는데 있어서, 上品의 惑을 끊음에는 下下品의 道로써 하고 下下品의 惑을 끊음에는 上上品의 道로써 對症療法的인 방법으로 끊는 것을 말한다.
참고
단혹사인(斷惑四因) : 見惑과 修惑을 끊는 4종의 因. 遍知所緣斷·能緣斷·所緣斷·對治斷. 見惑은 앞의 3因으로, 修惑은 제4因으로 끊는다.
단혹(斷惑) : 有漏 · 無漏의 道力에 의하여 번뇌 즉 의혹을 제거하고 惑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斷結 · 斷障 · 離染이라고도 한다. 곧 無間道에 의하여 번뇌를 끊고 解脫道에 의하여 열반의 진리를 證得하므로 이 둘을 합하여 斷惑證理라 한다.
① 部派(小乘)불교에서는 번뇌를 끊어서 阿羅漢果를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見道에 의하여 思想상의 잘못인 知的 迷惑 곧 이치를 迷한 惑을 끊고 修道를 통해 인간성에 뿌리한 惡德인 情意的 迷惑 곧 事(현실)에 迷한 惑(修惑 곧 번뇌)을 끊는다. 이 경우 見惑은 짧은 시간에 속히 끊어지지만 修惑은 긴 시간에 걸친 수행에 의해 점차로 끊어지는 것이므로 전자의 경우를 頓斷이라 하고 후자를 漸斷이라 한다.
번뇌를 끊음으로써 聖者가 되어 無漏智를 일으키게 되는데, 철저하게(혹은 種子까지도) 끊는 경우와 범부가 有漏의 六行觀을 닦아 上地와 下地를 상대적으로 보고 下地의 번뇌를(혹은 번뇌의 現行을 억제하고) 끊는 경우가 있으므로 전자를 無漏斷(혹은 畢竟斷)이라 하고 후자를 有漏斷(혹은 損伏斷)이라 한다. 俱舍論 卷第二에는, 모든 존재(곧 18界)를 斷惑이라는 입장에서 본 見所斷(見道에서 끊는 것. 見道所斷·見斷이라고 함) · 修所斷(修道位에서 끊는 것. 修道所斷·修斷이라고 함) · 非所斷(無漏法과 같이 끊음 없이 끊어지는 것, 非斷·不斷이라 함)의 三段으로 분류한다.
또 번뇌는 어떻게 하면 끊어지는가에 대해 네 가지 구별이 있으니, 이것을 斷惑의 四因이라 한다. (1) 見惑중 苦集二諦 이하의 自界緣의 惑(자기가 사는 境界만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惑)과 滅道二諦 이하의 無漏緣의 惑(無漏法인 滅道二諦를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惑)은 언제든지 四諦의 道理에 迷惑되는 것이기 때문에 所緣(迷의 대상)인 道理를 遍知하면 따라서 惑도 끊어지므로 이것을 遍知所緣斷이라 한다. (2) 苦集二諦 이하의 他界緣의 惑(예를 들면 欲界에 있는 사람이 色界등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惑)은 自界緣의 惑의 대상(所緣)이기 때문에 能緣인 自界緣의 惑을 끊으면 所緣인 他界緣의 惑은 저절로 끊어지므로 이것을 能緣斷이라고 한다. (3) 滅道二諦이하의 有漏緣의 惑은 無漏緣의 惑을 대상(所緣)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所緣인 無漏緣의 惑을 끊으면 저절로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所緣斷이라고 한다. (4) 修惑은 단지 對治道를 일으키어 對症療法的 방법으로만 끊어지는 惑이므로 이것을 對治斷이라 한다. 또 斷惑은 그 성질에 따라서 二斷으로 한다. 즉 번뇌의 경우처럼 성질이 더럽혀진(染汚) 것은 그 자체만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면 끊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自性斷이라고 한다. 有漏의 善이나 色法처럼 다른 번뇌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의하여 그 번뇌에 속박되는 것은 그것 자체를 끊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속박하고 있는 번뇌를 끊음으로써 비로소 해방되게 되므로 이것을 緣縛斷(所緣斷·離縛斷)이라 한다.
② 唯識宗에서는 邪師 · 邪敎 · 邪思惟에 의하여 일으킨 分別起의 번뇌를 見所斷으로 하고 태어난 선천적 · 본능적 번뇌, 곧 俱生起의 번뇌를 修所斷으로 한다. 그리하여 見所斷의 번뇌의 종자까지 끊는 것은 初地에 들어가 見道하는 位에서, 修所斷의 번뇌의 종자까지 끊는 것은 金剛喩定을 얻는 때에 달성된다고 한다. 구사종에서는 有漏智에 의한 斷惑은 인정하지만 經部와 唯識宗에서는 有漏智로서는 번뇌의 現行을 숨게 하는 것일 뿐 그 종자마저 끊는 것은 아니라고 구별하고 있다. 구사종이 有漏 · 無漏의 無間道는 한가지 惑만을 끊으므로 斷道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유식종에서는 加行智와 有漏道는 伏道(움추릴 뿐)여서 斷道는 아니며 根本智·後得智와 無漏道는 伏道이기도 하고 斷道이기도 하다고 한다. [斷道는 對治道로 번뇌를 끊는 道를 말한다] 또 成唯識論 卷八에는 自性斷 · 離縛斷 · 不生斷의 三斷을 說하고 각각 순차로 染汚와 有漏의 善 · 無覆無記 그리고 모든 惡趣와 無想定을 끊는다고 하였다. 또 自性斷 · 相應斷(그 자체가 染汚는 아니지만 번뇌와 상응하는 것에 의하여 染汚로 된 有漏의 八識등은 상응의 번뇌를 끊을 때 번뇌의 束縛으로부터 해방된다). 緣縛斷 · 不生斷의 四斷으로 하기도 한다.
③ 삼론종 · 법상종 · 천태종에서는 모든 존재가 그 진실한 본연의 자세로는 깨달음 그것이어서 번뇌를 끊는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끊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④ 眞言宗에서는 顯敎의 斷惑은 전체의 번뇌를 過患으로 보고 道를 닦아 始覺의 智로 끊는 이른 바 過患斷이지만, 밀교의 斷惑은 번뇌도 本覺의 德 밖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고 그 本無(본래는 無)를 깨닫는 이른 바 功德斷이라고 한다.
수혹(修惑) : 事物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번뇌. 惑은 번뇌를 말함.
진상(眞相) : ① 범어 jati-laksana. 本來面目과 같음. ② 사물의 참된 내용이나 모습. 참모습. ③ 실제의 모양이나 형편.
견혹(見惑) : 惑은 마음의 迷惑, 곧 번뇌의 별명이며, 또한 見惑이란 것은 見道에 의해 消滅되는 惑이란 뜻이고, 修惑(思惑이라고도 한다)은 修道에 의해 消滅해 없어지는 惑이다. 俱舍宗에서는 四諦의 진리(즉, 佛敎의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 眞理를 모르는 惑을 見惑, 現象的인 사물에 집착하고 迷한 迷事의 惑을 修惑이라 했으며, 唯識宗에서는 邪道의 이단자가 邪敎 등의 誘導에 의해, 또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분별함을 따라 일으키는 후천적인 번뇌(分別起)를 見惑, 태어남과 동시에 저절로 생기는 선천적인 번뇌(俱生起)를 修惑이라 한다고 했다. 또한 天台宗에서는 見 · 思의 二惑은 空觀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이므로 塵沙惑 · 無明惑과 구별했으며 합해서 三惑이라 했다. 그 가운데 見 · 思의 惑은 모두 三界안의 사물에 의해 상대적으로 일어나고, 三界의 生死(즉, 迷的 生存)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界內의 惑이라 했고, 三乘이 공통으로 끊지 않으면 안되는 惑이므로 通惑이라 한다.
① 俱舍宗에서는 見惑에 八十八이 있다고 하여 見惑 八十八使(使 : 번뇌의 다른 이름)라 한다. 즉, 見道함으로 없어지는 근본번뇌는, 五利使(身見 · 邊見 · 邪見 · 見取見 · 戒禁取見)와 五鈍使(貪 · 瞋 · 癡 · 慢 · 疑)이지만, 이것을 각각 四諦에 맞춰, 三界에 해당시킬 때 欲界에 三十二, 色界 · 無色界에 各 二十八이 되므로 합하여 八十八이 된다. 또한 修惑에 八十一이 있다고 하여, 修惑 八十一品이라 했으니, 곧 修道에 의해 없어질 근본번뇌로, 欲界에서는 貪 · 瞋 · 癡 · 慢, 色界 · 無色界에서는 각각 貪 · 癡 · 慢의 十種이지만 이것들을 각각 일괄하여, 九地에 配對하고, 다시 각각 번뇌의 강약에 따라 上上品에서 下下品까지의 九種으로 나누어 八十一品으로 한 것이다. 見惑의 八十八使와 修惑의 十種을 합하여 九十八隨眠이라 한다.
② 唯識宗에서는 見惑을 百十二, 修惑을 十六으로 나누고 합하여 百二十八의 근본번뇌를 세운다.
대치도(對治道) : 染法을 끊는 無漏道.
염법(染法) : 染汚法의 준말. ① 惡性과 有覆無記와의 諸法을 말함. ② 迷妄의 諸法을 말함. 이것이 淨法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염오(染汚) : 染汚라 함은 번뇌의 흐림에 물들어 더러워져 있다는 뜻. 또 雜染, 染이라고도 한다. 有漏法중, 깨달음에의 길을 방해하는 것. 곧 不善과 有覆無記를 染汚라고 하고, 善과 無覆無記를 不染汚라고 한다(俱舍論 卷七). 그렇더라도 成唯識論述記 卷二 末에는, 雜染이라고 하는 경우는, 染法(不善과 有覆無記)뿐만이 아니라, 有漏法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大乘莊嚴經論 卷三에는 染汚(雜染)에, 煩惱染汚(煩惱를 말함) · 業染汚(번뇌에 의해서 일으키는 業을 말함) · 生染汚(그 결과로서의 苦의 生存을 말한다)의 3종의 染汚(三雜染)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순차로 惑 · 業 · 苦의 三道에 해당한다. 起信論에는, 心體는 본래 淸淨한데 不覺에 의해서 無明을 일으키어 번뇌에 더럽혀지기 때문에, 染心이 된다고 말하고, 그 染心의 相에 6종(六染心)이 있다고 說한다. 곧 執相應染(我執을 말함) · 不斷相應染(分別起의 法執을 말함) · 分別智相應染(俱生起의 法執을 말함) · 現色不相應染(所取의 경계를 나타내는 妄心) · 能見心不相應染(能取의 妄心) · 根本業不相應心(迷妄한 染汚心의 자체)으로, 이것들은 수행에 의해서 차례로 끊어진다고 한다.
유부무기(有覆無記) : (1) 善도 아니고 惡도 아니지만 智慧의 발생을 방해하는 점에서 더럽혀져 있는 것. 煩惱에 가려져 있으나 善ㆍ惡이라고 明記할 수 없는 것은 無覆無記. (2) 눈에는 안보이나 가려져 있는 것.
무기(無記) : ① 善도 아니고 不善도 아닌 것. 善 등으로 기록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단「無記는 異熟果를 끌어들이지 않아서 異熟果(善惡의 과보)를 기록하지 않으므로 無記라고 한다」는 說도 있으나 이것은 有漏法에만 타당한 해석일 뿐 일반적인 說은 아니다. 無記的인 法을 無記法이라고 하고 이에 대해 善 또는 不善의 法을 有記法이라고 한다. 無記를 有覆 · 無覆의 二無記로 나눈다. 有覆無記란 無記이므로 異熟果를 끌어들이지는 않지만 聖道를 덮어 씌워서 방해하고 마음을 가려서 不淨하게 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上二界의 번뇌나 欲界의 번뇌에도 身見 邊見같은 것은 이에 해당하며 不善과 더불어 汚染性이 있는 것이다. 또 無覆無記는 淨無記라고도 하며 순수한 無記임을 뜻하며, 聖道를 덮어 가리거나 방해하거나 마음을 不淨하게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欲界의 無覆無記心을 넷으로 나눠 四無記라 한다. 곧 (1) 異熟無記는 異熟生心 · 報生心을 말한다. 前世의 業因에 의해서 招來된 果報로서의 心을 말한다. (2) 威儀(또는 威儀路)無記는 威儀心 · 威儀路心을 말하며, 行 · 住 · 坐 · 臥 등의 威儀動作을 일으키고 혹은 이것을 緣으로 하는 心을 가리킨다. (3) 工巧(工巧處)無記는 工巧心 · 工巧處心을 말하며, 身 · 語의 工巧(工作 · 회화 · 詩歌)를 말하고 혹은 그것을 緣으로 하는 心을 말한다. (4) 通果無記는 變化無記라고도 하고 能變化心 · 變化心 · 通果心을 말한다. 定에 들어간 결과로서 얻은 神通自在한 작용을 일으키는 心을 말한다. 다시 여기에 自性無記(山河大地와 같은 色 · 香 · 味 · 觸)와 勝義無記(虛空과 非擇滅의 두가지 無爲法)등을 더하고 有覆無記를 합해서 七無記라고 한다. 또 唯識宗에서 모든 無記法을 能變無記(心 · 心所) · 所變無記(色法과 種子) · 分位無記(不相應行法) · 勝義無記의 넷으로 나누어 四無記라고도 하며, 成實論卷八에서는 無記法의 번뇌를 가르쳐 隱沒無記라 한다.
② 물음에 대하여 그 可否를 답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 경우가 있다. 外道로부터 열네가지 물음 곧 14難에 대한 물음을 받고 釋尊은 말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하여 可否를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을 十四無記(十四不可記)라고 하며, 四記答 가운데 捨置記에 해당한다. 열네가지 問難이란 (1) 世界 및 我는 常(시간적으로 無限)인가, (2) 無常(시간적으로 有限)인가, (3) 常이고 無常인가, (4) 常도 無常도 아닌가, (5) 有邊(공간적으로 有限)인가, (6) 無邊(공간적으로 無限)인가, (7) 有邊인 동시에 無邊인가, (8) 有邊도 無邊도 아닌가, (9) 如來(여기에서는 중생을 의미한다)는 死後에 有인가, (10) 無인가, (11) 有인 동시에 無인가, (12) 有도 無도 아닌가, (13) 命과 身은 동일한 것인가, (14) 다른가의 열넷이 그것이다. 이상에서 (3)(4)(7)(8)을 빼고 四類十問을 열거하는 수도 있다.
무루도(無漏道) : 出世間道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허물을 여읜 無漏智로써 닦는 觀行. 小乘에서는 見道位 이후의 聖者가 四諦의 이치를 16行相으로써 觀하는 지혜를 말하고, 大乘에서는 眞如의 이치를 본 根本智와 根本智에서 나와서 萬有諸法의 모양을 보는 後得智와 같은 것을 말한다. 이 道로써 見惑과 修惑을 모두 끊어 버린다.
번뇌(煩惱) : 범어 klesa의 번역. 吉隷捨로 음역하고, 惑이라고도 번역한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하게 하여 더럽히게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 그 성질은 不善 및 有覆無記이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서 업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報를 받아 미혹의 세계(生死)에 매어 있게 된다. 이것을 惑業苦의 三道라 한다. 그래서 불교는 번뇌를 끊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번뇌는 그 작용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갖는다. 隨眠·惑(이치에 어둡고 現象의 세계에 대해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것)·染·漏·結使·結·縛·纒·軛·暴流·取·蓋·繫·使·垢·株杌·燒害·箭·稠林(번뇌의 수가 많은 것을 무성한 삼림에 비유한 것)·塵勞·塵垢·客塵·諍根(다툼의 근본)이라고도 하고, 또 번뇌의 體 그것을 正使(다만 使라고도 한다), 體를 멸해도 역시 남아있는 관습의 기운을 習氣라고 한다. 모든 번뇌는 因力(아직 번뇌가 끊기지 않은 것)·境界力(욕심 등에 순응하는 대상이 나타나는 것)·加行力(대상에 대해서 非理·作意를 일으키는 것)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한다.〔俱舍論 卷二十〕혹은 境界力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도 있다고도 한다.〔入阿毘達磨論 卷上〕
① 구사종이나 유식종에서는 번뇌를 근본번뇌와 枝末번뇌의 두 번뇌로 나눈다.
근본번뇌라 함은 번뇌의 體 그것으로서,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는 번뇌로, 本惑·根本惑 혹은 다만 번뇌라고도 부르며, 有部에서는 隨眠이라고도 한다. 단 經部에서는 隨眠을 번뇌의 종자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서 번뇌의 現行(현재에 일어나서 활동하는 것)을 纒(전)이라 한다. 유식종에서도 隨眠이란 번뇌의 종자를 가리킨다고 말하며, 근본번뇌에 貪·瞋·癡·慢·疑·見(惡見)의 六번뇌(六隨眠)가 있는데, 見을 有身見·邊執見·邪見·見取見·戒禁取見의 五見으로 나누어 貪 등의 다섯과 합해서 十번뇌(십隨眠, 十使)라고 한다. 이 가운데 貪 등의 다섯은 推察尋求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그 작용이 느리고 둔하기 때문에 五鈍使(五惑), 五見은 推察尋求하는 성질이 있고 그 작용이 빠르고 날카롭기 때문에 五利使라고 한다. 또 六隨眠 가운데 貪을 欲界의 탐과 上二界(색계·무색계)의 貪으로 나누어 이것을 각각 欲貪·有貪이라고 하며 합하여 七隨眠(七使)이라 하고, 혹은 十隨眠 중에 貪을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로 나누어 欲貪·色貪·無色貪으로 하고 十二隨眠(十二使)이라고도 한다. 唯識宗에서는 십종의 근본번뇌 가운데 제七識과 상응하여 항상 일어나는 我癡(無我의 이치에 미혹하여 나의 相에 어두운 번뇌로 無明을 말함)·我見(我執을 말하며 有身見의 일부)·我慢(나를 집착하고 나를 믿고 우쭐하는 거만)·我愛(나를 집착하여 나에 탐착하는 것)의 넷을 四煩惱(四根本煩惱, 四惑)라고 한다. 또 탐·진·치는 모든 악을 낳게 하는 근본(즉 因)이며, 대표적인 번뇌이기 때문에, 三不善根·三毒·三垢·三縛 등이라고 한다.
지말번뇌라 함은 근본번뇌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종속적인 번뇌로, 隨惑·枝末惑·隨煩惱라고도 한다. 단 수번뇌란 말은「心王에 붙어다니는 번뇌」란 뜻으로 풀어 근본번뇌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지말번뇌에는, 구사종에서는 放逸·懈怠·不信·惛沈·掉擧·無慚·無愧·忿·覆·慳·嫉·惱·害·恨·諂·誑·憍·睡眠·惡作의 十九를 말하며, 유식종에서는 睡眠·惡作을 버리고 失念·散亂·不正知를 더하여 二十으로 하기도 한다.
② 俱舍宗 등에서는 迷理·迷事의 二惑을 나누어, 불교의 보편적인 진리 곧 四諦의 이치에 迷惑하고 있는 思想上의 知的인 번뇌를 迷理의 惑이라 하고, 구체적인 개개의 事象에 미혹한 바의, 곧 인간성에 바탕한 情意的인 번뇌를 迷事의 惑이라고 한다. 또 自相·共相이 二惑을 나누어서, 色·聲 등 각자 개개의 특수한 고유의 相(곧 自相)을 迷해서 각각의 법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번뇌를 自相의 惑이라 한다. 空·無我 등 三世의 모든 것에 공통된 相(곧 共相)을 迷함으로 많은 법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번뇌를 共相의 惑이라 한다. 앞의 것에는 貪·瞋·慢 또는 貪·瞋·慢·嫉·慳이 있고 뒤의 것에는 五見·疑·無明이 있다고 한다. 唯識宗에서는 煩惱障·所知障의 二障을 나누어, 我執에 의해 일어나서 중생을 미혹의 세계(生死)에 流轉시킴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惑을 煩惱障이라고 하며, 法執에 의해 일어나서 알아야 할 대상인 진리를 막음으로 보리를 깨닫는 길을 방해하는 惑을 所知障이라 한다. 번뇌장은 일체의 번뇌를 體로 하고 반드시 所知障을 수반한다. 번뇌장은 所知障을 依支處로 하기 때문이다. 所知障은 함께 번뇌를 體로 하지만, 반드시 번뇌장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또 業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惑을 發業의 惑(주로 다음에 말하는 分別起의 혹으로 특히 제六意識相應의 無明이 그것이다)이라고 하고 이에 대해서 迷界의 중생을 윤택하게 하고 삼계의 중생을 받게 하는 혹을 潤生의 혹(다음에 말하는 俱生起의 번뇌로 특히 제六意識相應의 貪을 主로 한다)이라고 한다. 또 어떻게 해서 번뇌가 일어나는가 하는 점에서 나누면, 二障 공히 각기 분별기와 구생기가 있다. 邪師·邪敎·邪思惟 등 밖으로부터의 緣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을 분별기의 혹이라고 하며,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일어나는 본능적인 것을 구생기의 혹이라고 한다. 十근본번뇌중에서, 의심과 邪見과 見取見과 戒禁取見과의 四는 분별기뿐이며, 다른 六과 二十隨惑은 양쪽에 모두 공통한다.
③ 번뇌를 끊어야 할 수행단계의 相異에 따라 번뇌를 나누면 見惑과 修惑(思惑)의 二惑이 있다. 전자는 見道에 의해서 없애야 할 번뇌(見道所斷의 惑)이며 후자는 修道에 의해서 끊어야 될 번뇌(修道所斷의 惑)이다. 俱舍宗에서는 迷理의 惑을 見惑, 迷事의 惑을 修惑이라고 하고, 唯識宗에서는 分別起의 惑을 見惑, 俱生起의 惑을 修惑이라 한다. (1) 俱舍宗에서는 三界 四諦의 각각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見惑에 총 八十八이 있다. 欲界의 苦諦에 관해서는 貪 등 十근본번뇌와 集諦와 滅諦에 관해서는 身見·邊見·戒禁取見을 뺀 七근본번뇌, 道諦에 관해서는 戒禁取見을 더하여 八근본번뇌가 있으므로, 합하면 欲界의 三十二, 色界·無色界에는 瞋이 없기 때문에 四諦의 하나하나에 瞋을 뺀 각 二十八, 計 八十八이 된다. 이것을 見惑八十八使라고 한다. 修惑은 欲界에 貪·瞋·癡·慢의 四, 色界·無色界에 각기 貪·癡·慢의 셋이 있어 합하면 열이 되므로 여기에 見惑의 八十八을 더하면 九十八隨眠 또는 九十八使라고 한다. 단 修惑은 성질이 遲鈍애매하여 분명히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九地의 각 위에 강약의 정도에 따라 九品(上上品에서 下下品까지의 아홉 品階)의 구별을 세워, 九地九品의 思惑, 修惑 八十一品 등이라고 한다. 이 九十八使를 遍行과 非遍行으로 나눈다. 遍行의 惑이라 함은, 三界九地 중에서 自界自地의 五部(見道에 있어서 四諦의 觀行과 이것을 거듭하여 닦는 修道)에 널리 작용하여 五部의 法을 더럽히는 惑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 五部 중의 自部에만 작용하는 惑을 非遍行의 惑이라고 한다. 곧 九十八隨眠 중에서 널리 五部의 모든 有漏法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고, 널리 그것들과 隨順하고 그것들에 의해서 더욱 더 增長하고(곧 隨增하고), 因이 되어서 널리 五部의 染法(번뇌 등의 染汚法)을 낳게 하는 힘이 강한 惑은 遍行의 惑으로 三界의 각각에 있어서 苦諦의 理에 헤매는 五見·疑·無明과 集諦의 理에 헤매는 邪見·見取見·疑·無明과의 十一이 있다. 이것을 十一遍行의 惑이라 한다. 이 중 身·邊의 二見은 다만 自界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自界緣의 惑이라고 하지만 나머지 다른 아홉은 自界는 물론 또 다른 上界까지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他界緣의 惑이라고 하고, 이 아홉은 上界上地까지도 緣이 있다고 하는 의미로 九上緣의 惑이라고도 한다. 또 九十八使를 有漏法을 대상으로 하는 有漏緣의 惑과 無漏法을 대상으로 하는 無漏緣의 惑으로 나누면 滅道二諦의 理에 迷한 邪見과 疑와 癡(邪見·疑에 상응해서 일어나는 相應無明과 및 독립으로 일어나는 不共無明)의 六惑은 無漏緣이며, 그밖의 것은 有漏緣이다. (2) 唯識宗에서는, 見惑에는 欲界의 四諦 각각에 十근본번뇌(欲界四十), 색계·무색계에 성냄(瞋)을 뺀 九근본번뇌(色界三十六·無色界三十六) 계 百十二번뇌를 들고, 修惑에는 欲界에 疑·邪見·見取見·戒禁取見을 뺀 六근본번뇌, 색계·무색계에 각기 다시 瞋을 뺀 각 五근본번뇌, 計 十六번뇌를 들므로 見修二惑을 합하여 百二十八번뇌가 된다.
④ 知的인 惑 즉 五利使와 見惑 등을 見煩惱라고 하고, 情意的인 惑 곧 五鈍使와 修惑 등을 愛번뇌라 하며, 합하여 見愛(二)번뇌, 見著二法, 愛見이라고 한다. 그 體는 虛假(헛소리)이기 때문에, 또 見假·愛假라고도 한다. 勝鬘經에는 四住地번뇌의 說이 있다. 곧 見번뇌는 見道에 있어서 한때에 끊겨지기 때문에 見一處住地(一切見住地)의 惑이라고 부르고 愛번뇌는 이것을 三界에 나누어 각기 欲愛住地의 惑, 色愛住地의 惑·有愛住地의 惑이라 부른다. 또 이 넷에 다시 모든 惑의 근본이 되는 無明(無明住地의 惑)을 더하여 五住地번뇌, 五住地惑이라 한다. 唯識宗에서는 五住地번뇌 중 앞의 넷은 煩惱障의 종자이며, 뒤의 하나는 所知障의 종자라고 한다. 天台宗에서는 전자를 界內見思의 惑, 후자를 界外의 惑이라고 한다. 대개 住地라 함은 다른 모든 惑이 일어나고 의지처가 되며(住) 잘 惑을 일으키는 因이 된다는 뜻이다. 智度論 卷七에는, 자신에 집착하는 번뇌를 內著번뇌, 外境에 집착하는 번뇌를 外著번뇌라 하며, 전자는 五見·疑·慢 등, 후자는 婬·瞋에 속한다고 한다.
⑤ 天台宗에서는 見思·塵沙·無明의 三惑(三障·三垢)을 말함. 곧 우선 見惑과 修惑(思惑)을 見思의 惑이라고 부르며, 다음에 티끌(塵)이나 모래(沙)에도 비유할 만큼의 무수한 사물의 하나하나의 事理에 迷한 劣慧(번뇌의 習氣로 不染汚無知라고도 한다)를 體로 하고, 다른 것을 化導하는 것을 막는 惑을 塵沙의 惑이라고 부른다. 다음에 모든 惑의 근본으로, 中道 第一義諦의 도리를 迷한 가장 적은 번뇌를 無明의 惑이라 부른다. 각각 空觀·假觀·中觀에 의해서 끊긴다고 한다. 이 三惑을 번뇌장·소지장에 配對하면 見思는 번뇌장, 塵沙·無明은 소지장에 해당한다. 또 見思는 三乘에 공통하는 惑이므로 通惑·塵沙·無明은 특히 보살만이 끊는 惑이기 때문에 別惑이라고 부르고(通別二惑), 見思는 三界안에서 일으키는 惑이므로 界內의 惑, 無明은 三界를 넘은 곳에 있는 惑이기 때문에 界外의 惑, 塵沙는 양쪽 모두 통하므로 界內界外의 惑이라고 한다. 또 見思의 惑은 空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사물의 相을 집착하여 취하는 번뇌이기 때문에 따로 取相의 惑이라고 말하는데, 넓은 뜻으로는 뒤의 二惑도 또한 取相의 惑이라고 한다.
⑥ 번뇌에는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 (1) 三縛. 貪縛·瞋縛·癡縛. 이상의 차례로 樂·苦·捨의 三受의 對境을 향해서 일어난다. (2) 三漏. 欲漏(癡를 뺀 欲界繫의 근본번뇌 및 十纏)·有漏(癡를 뺀 上二界繫의 근본번뇌로 이 경우의 有는 有身의 뜻. 身의 존재를 말한다. 無漏에 대한 有漏는 아니다)·無明漏(三界의 癡). (3) 三結. 有身見結·戒禁取結·疑結. 五見 및 疑의 六근본번뇌가 이 중에 포함된다. 「三結이 다하면 預流果에 이른다」라고 한 經說에 따라 三結이 다하면 그 때 見惑의 모든 것이 끊어진다고 한다. (4) 四暴流(四流). 欲暴流·有暴流·見暴流·無明暴流. 三漏의 분류법에서 見을 독립시킨 것. (5) 四軛. 四漏. 欲·有·見·無明의 넷으로 惑體는 四暴流와 같다. (6) 四取. 欲取·見取·戒禁取(戒取)·我語取. 俱舍宗에서는 欲界의 五鈍使 및 十纏을 欲取, 五利使 중 앞의 넷을 見取, 戒禁取見을 戒(禁)取, 上二界의 貪·慢·癡·疑를 我語取라고 한다. 이어라 함은 내신(자기의 몸)을 말한다. 내신에 의해서 나를 설하기 때문이다. 상이계의 번뇌는 대개 내신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아어취라고 부른다. (7) 四身繫(四身縛·四縛·四結이라고도 한다). 貪欲身繫(貪欲身縛·欲愛身縛)·瞋恚身繫(瞋恚身縛)·戒禁取身繫(戒禁身縛)·此實執取身繫(我見身縛). (8) 五蓋. 欲貪蓋·瞋恚蓋·惛眠蓋·掉悔蓋·疑蓋. 疑가 섞이지 않는 것을 疑蓋無雜이라고 하는 말도 여기에 연유한다. (9) 五(順)下分結. 有身見·戒禁取見·疑·欲貪·瞋恚. 下分이라 함은 欲界란 뜻. (10) 五(順)上分結. 色貪·無色貪·掉擧·慢·無明. 上分이라 함은 上二界란 뜻. (11) 五結. 貪·瞋·慢·嫉·慳. (12) 六垢(六煩惱垢). 惱·害·恨·諂·誑·憍. 煩惱垢라 함은 근본번뇌에서 흘러나와 그 모습이 더러워지고 거칠다는 뜻. (13) 七流. 見諦所滅流·修道所滅流·遠離所滅流·數事所滅流·捨所滅流·護所滅流·制伏所滅流(華嚴孔目章 卷三 등) (14) 九結. 愛結·恚結·慢結·無明結·見結·取結·疑結·嫉結·慳結. (15) 十纏. 無慚·無愧·嫉·慳·惡作·睡眠·掉擧·惛沈·忿·覆 등의 十. 忿·覆을 빼고 八纏이라 하는 경우가 있다. 枝末번뇌 중에 六垢는 가볍고, 十纏은 무겁다. 九十八隨眠에 十纏을 더해서 百八번뇌가 된다고 하고, 또 모든 번뇌를 다 말하면 八萬四千의 번뇌가 있다고도 한다.
⑦ 번뇌를 여의는 것을 離垢, 번뇌가 없는 것을 無垢, 번뇌가 다한 것을 漏盡이라고 한다. 아라한을 漏盡比丘, 또 漏盡하여 마음에 진리를 了解하는 것을 盡漏意解라고 한다.
도(道) : 범어 marga의 번역으로 末伽라고 음역하며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通路. 밟아 행해야 할 길(軌路)을 뜻하는 말이다. 俱舍論卷二十五에는, 道라 함은 涅槃(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고 열반의 果를 얻기 위해 마땅히 의지할 바라고 했다. 이와 같이 道는 주로 불교의 궁극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행의 법칙을 의미한다. 또 널리 果에 이르게 하는 通路의 뜻도 있다.
예컨대 智度論卷八十四에는, 人天 · 聲聞 · 연각 · 보살의 4종의 道가 있다. 사람이나 하늘은 十善이나 布施를 道로 하여 세간적인 福樂을 구하고, 二乘은 三十七道品을 道로 하여 열반을 구하고, 보살은 삼십칠도품이나 六波羅蜜을 道로 하여 佛果를 구한다고 했다.
이상과 같은 의미의 道와는 달리 惑 · 業 · 苦를 三道라고도 하는데 이때의 惑은 業을, 業은 苦를, 苦는 惑을 가져오는 通路로서, 이 三者는 서로 바퀴와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三惡道 · 五道 · 六道라고 할 때의 道는 善惡의 業에 의해 지옥 등의 果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는 道며, 그것은 應報가 業을 따라 각각 다르고 순환하는 道인 것이다. 또 菩提(깨달음의 지혜)를 道로 번역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구별하여 菩提를 果道라 하며 그 이전의 道를 因道라 부르기도 한다.
①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번뇌를 制伏하거나 혹은 이것을 끊는 道가운데에 有漏道와 無漏道의 二道가 있다. 유루도는 世間道 · 世俗道라고도 하며, 앞에서의 人天의 道도 이에 해당된다. 또 三界 · 九地 가운데 有頂地를 제외한 下八地의 修惑을 끊기 위한 見道의 前에 加行位(加行道라고도 함)에서 유루지를 가지고 六行觀을 닦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구사종에서는 이와 같이 유루도에 있어서도 번뇌를 끊을 수가 있다고(有漏斷)하여 유루도도 斷道라고도 하나, 유식종에서는 유루도는 번뇌의 現行을 조복하는 번뇌의 種子까지도 끊을 수 없다고 하며, 이것을 伏道(能伏道)라고 한다. 무루도는 出世間道 · 聖道라고도 하며 未至 · 中間 · 四根本 · 下三無色의 九地를 所依로 하여, 무루지에 의해서 번뇌를 끊는(無漏斷)道로서, 유식종에서는 이것을 斷道에서도 伏道라고 한다. 여기 斷道란 能斷道의 뜻으로서 對治道 · 能治道라고도 한다. 이 유루 · 무루의 道를 見 · 修 · 無學의 三道에 配對하면, 見道와 無學道는 반드시 무루도로서, 修道에는 무루도도 유루도도 있다.
② 번뇌를 끊어서 해탈의 진리를 증득하는 과정을 구사종이나 유식종에서는 四道(四種道)로 나눈다.
(1) 加行道. 方便道라고도 하며, 번뇌를 끊기 위한 준비적 실천(가행위를 다시 가행도라고도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
(2) 無間道. 無礙道라고도 하며, 바로 번뇌를 끊는 道로서 앞에 말한바와 같이 斷道란 것이다. 이 道의 直後(곧 無間)에 번뇌가 끊어졌으므로 無間隔의 의미로 無間이라 한다.
(3) 解脫道. 번뇌를 끊어서 해탈의 진리를 증득하는 道.
(4) 勝進道. 勝道라고도 하며, 다시 나아가서 다른 이의 번뇌를 끊기 위하여(이 때는 승진도는 다음의 번뇌를 끊기 위한 가행도가 된다), 혹은 만족해서 이미 끊어진 것을 觀察하는 道.
③ 기타 敎道 · 證道, 難行道 · 易行道라고 하는 熟語가 있으나, 또한 聖道 또는 無上道(佛의 悟道)를 得하는 것을 得道(得度)라 하고, 禪宗에서는 道를 辦別하는 뜻으로 참선해서 心眼을 여는 것을 辦道라고 한다.
④ 또 菩提의 번역이다.
혹(惑) : 깨달음을 장애하는 迷妄의 마음. 證悟와 반대되는 것. 곧 번뇌를 말한다. 번뇌는 우리의 마음을 의혹하는 것이므로, 惑이라 한다. 仁王經合疏 中에「惑이라 하는 것은 미망의 마음이다」하였음.
대증요법(對症療法) : 병원(病源)을 다스리기 곤란한 경우 겉으로 나타난 증상만을 치료하는 법. .....병인요법(病因療法)→병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다스려 병인(病因)에 따라 치료하는 법.(국어사전)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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