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영(處英)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조선시대 승려. 호는 雷黙. 서산대사 淸虛의 제자.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전라도에서 승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워 전공이 많다. 1794년 왕명으로 대흥사의 표충사와 묘향산 수충사에 서산·사명과 함께 그 진영을 봉안케 하였다.
참고
청허(淸虛) :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법호. .....휴정(休靜)→(1520~1604) 이조 선조 때의 승려. 휴정은 법명. 속성은 崔씨. 자는 玄應, 호는 淸虛 · 西山, 본관은 完山. 평안도 安州에서 9세에 어머니를 그리고 10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안주목사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 泮齋에서 공부하였으나 마음에 맞지 않으므로 동급생 열 사람과 같이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 드디어 禪家의 법을 깨닫고, 崇仁에게 출가하다. 21세에 靈觀대사에게 인가를 얻고 촌락으로 돌아다니다가 정오에 닭울음소리를 듣고 홀연히 心神을 깨달았다. 30세에 禪科에 합격하고, 大選에서 兩宗判事에까지 이르러 승직을 버리고 금강산에 들어가서 三夢詞를 짓고 향로봉에 올라가「만국의 도성들은 개미 집이요, 고금의 호걸들은 바구미 벌레 같네. 창에 비친 밝은 달빛 아래 청허하게 누우니 끝없는 송풍의 운치가 별미로다. (萬國都城如지蟻 千家豪傑等蛭鷄 一窓明月淸虛枕 無限松風韻不齊)」라는 시를 지었는데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옥사에 요승 無業이 무고하여 체포되었으나 선조가 그 억울함을 알고 석방하였을 뿐 아니라 시를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에서 선조께 뵙고 각지의 노약자로 하여금 기도케 하고 나머지 승려들을 데리고 적군을 몰아내겠다고 하여 8도 16종 都摠攝이 되었다. 義僧 5천을 모집하여 인솔하고 관군을 도와 공을 세우고 왕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 늙음을 이유로 군사를 유정과 처영에게 맡기고 산으로 되 돌아가 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름이 더욱 높았으며, 금강 · 두륜 · 묘향 등의 산으로 왕래하니 따르는 제자가 천여명이요 유명한 제자가 70여인에 이르렀다. 묘향산 원적암에 제자들을 모아 설법을 하고 글을 그 영정뒤에 써서 유정 · 처영에게 주고 입적하다. 저서로는 禪敎釋 · 禪敎訣 · 雲水壇 · 三家龜鑑 · 淸虛堂集 8권 · 禪家龜鑑 · 心法要 · 說禪儀文 · 諸山壇儀文 등이 있다.
승병(僧兵) : 전쟁에 참가하던 승려. 僧軍이라고도 한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수도승이 많아짐에 국가 유사시 그들은 출전을 하게 되었다. 원래 불교는 살생을 금하나 한국 불교는 호국신앙과 결부되어 金剛明經·仁王經·藥師經 등을 존중, 국가 유사시 군사로 출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승병은 삼국시대 고구려에 唐太宗이 침입함에 3만의 승병을 출전시켰다는 것이 高麗史 崔瑩傳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때는 사원에 모두 隨院僧徒라는 것을 두어 勞役에 종사시켰는데 국가의 비상시에는 이들 인적 자원을 이용, 승병을 조직하여 降魔軍이라 하였다.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임진왜란(1592~1597) 때로 休靜과 惟政이 각각 승병을 이끌고 싸웠으며 靈圭·處英 등 유명한 승병장이 나와 金山과 행주산성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호국신앙(護國信仰) : 우리 나라 불교의 일관된 신앙으로, 崇信으로 호국한다는 사상. 불교를 굳게 믿음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생각하는 이른바 現世佛敎的 신앙에서 나왔다. 불교와 왕권은 이 호국신앙과 굳게 결부되어 있었고, 그리하여 역대 제왕들은 더욱 불교를 숭상하고 장려해 왔다. 이와 같은 신앙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우리의 정신계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탑이 왕조의 무궁함을 바라는 호국기원에서 세워졌고, 문무왕이 당나라 군사의 내침을 물리치고 백제고구려의 옛땅을 통합한다는 사상에 입각하여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 또한 전설에, 문무왕이 평소 知義法師에게 「내가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大龍이 되어 불법을 숭봉하고 우리 나라를 수호하고 싶다」고 한 사실 등은 모두가 호국신앙에 그 근본을 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일관되었는데, 사원은 불교 자체를 위하기보다 국가를 위한 裨補寺院으로서 의의가 컸다. 고려 태조의 十訓要 제1조에 「우리 국가의 대업은 반드시 諸佛護衛의 힘에 의존한다」라고 한 것이라든지 文宗 때 불교의 법력에 의하여 국가의 복리를 증진한다는 의미에서 흥왕사를 세운 것 등은 이같은 사상에서 연유된 것이다. 또 외침을 막기 위하여 대장경을 간행한 것은 더욱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抑佛策으로 불교의 부흥을 보지 못하였으나 임진왜란 때에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승군의 활동은 모두 호국신앙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정(惟政) : (1544~1610) 조선 승려. 자는 離幻. 호는 松雲. 또는 四溟. 속성은 任씨. 밀양에서 출생. 13세에 孟子를 읽다가 출세할 뜻을 품었고, 뒤에 황악산 직지사 信黙에게 승려가 되다. 18세에 禪科에 급제. 32세에 선종의 주지가 되었으나 굳이 사양. 묘향산에서 청허의 정법을 받다. 금강산 보덕사에서 3년을 지내고, 또 청량산·팔공산·태백산으로 다녔다. 43세에 옥천산 상동암에서 하룻밤 소낙비에 뜰에 있는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상을 절실히 깨달아 문도들을 보내고 오랫동안 참선.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에 있다가 逆獄에 그릇 걸렸으나 무죄 석방. 이듬해 금강산에서 3년을 지내다.
1592년 왜구가 침입함에 의병을 모집. 順安에 가서 청허의 휘하에서 활약. 청허가 늙어서 물러난 뒤 승군을 통솔하여 명나라 장수와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다. 권율을 따라 영남 의령에 주둔하였다. 1594년에는 명나라 총병 劉綎과 의논하여 왜장 청정을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 왜적의 뱃 속을 송두리째 뽑아 보았다. 그때 청정이「조선에 보배가 있는가?」하니 스님이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다.」하였다. 청정이「웬말인가?」스님이「지금 우리 나라에서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생각하고 현상하였으니 보배가 일본에 있는 것 아닌가?」하니, 청정은 놀라 찬탄하였다.
선조께서 스님을 대궐로 불러서 보고 평생의 일을 묻고「지금 국세가 이러하니 대사가 만일 퇴속한다면 百里의 책임을 맡기고 3군을 통솔하게 하리다.」하니 스님은 사양하고 영남으로 돌아가서 용기산성·팔공산성·금오산성 등을 쌓고 양곡과 무기를 저축한 후 印信과 戰馬를 도로 바치고 산으로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지 아니하다. 1597년 명장 麻貴를 따라 울산의 도산에 이르고, 이듬 해 또 劉綎을 따라 순천의 曳橋에 이르러 큰 공을 세웠다. 1604년 國書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德川家康을 보고「두 나라 백성들이 오랫동안의 전란에 시달렸으매 내가 그 고난을 구제하러 왔노라」하였다. 덕천가강도 신심을 내어 부처님같이 대우하여 강화를 맺고 포로되어 갔던 사람 3500명을 찾아 데리고 이듬해 돌아오다.
선조는 가상히 여겨 嘉義大夫를 시키고 御馬와 紵絲表裏를 하사하였다. 그때는 청허가 입적한 이듬해여서 스님이 묘향산에 가서 상례를 치르고, 1607년 치악산으로 갔다가 선조의 부고를 듣고 서울에 와서 배곡. 후에 병이 나서 해인사로 갔다가 광해주 2년 8월 26일 입적하다. 시호는 慈通弘濟尊者라 하였다. 해인사에 홍제존자비가 있다. 저서로는 奮忠紓難錄·사명집 등이 있다.
진영(眞影) : 고승이나 善知識의 초상을 가리키며 탱화와 등상의 구별이 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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