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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佛敎美術)

근와(槿瓦) 2018. 6. 7. 00:43

불교미술(佛敎美術)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불교미술의 기원은 석존께서 성도하신 후 건립한 기원정사나 죽림정사와 같은 건축물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를 반드시 본격적인 조형활동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본격적인 불교미술의 전개는 敎主 석가모니불께서 입멸하신 후 화장(다비)하여 얻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架構物의 축조에서부터 비롯된다.

이때 인도에서는 舍利紛爭 根本八塔을 건립하게 했다. 이 탑의 시원은 곧 불교적 조형화의 출발점인 동시에 신앙활동의 주요 예배대상이 되었다. 그 후 아쇼카(B.C. 298~B.C. 232)왕이 佛塔을 많은 곳에 건립하여, 불교적 조형활동이 활발해지는 시대를 맞았다. 이때 無佛像時代의 갖가지 조형물을 낳게 하였다. 또 탑의 건립 이외에 석존사원의 출현도 있게 되었다. 1세기경에 이르러 비로소 불타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이 조성되었다. 인도의 마투라(Mathura)지방을 중심으로 한 재래적 조각 양식과 간다라지방을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문화 등 유럽의 영향을 받은 조각 양식 등이 발달을 보았다. 점차 불상조각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종래의 탑 중심 신앙형태 또한 불상으로 옮겨가는 양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즉 사원의 중심축이 탑에서 서서히 불상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교세의 확장은 더욱 빈번한 사원건축의 출현을 낳게 하면서 각 분야에 걸쳐 화려하고도 다양한 조형활동을 가능하게 하며 불교미술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창출하였다. 불교미술의 부분을 크게 건축 조각 회화 공예로 구분하여 설명하면,

① 건축. 불교미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건축이다.

가람의 배치에서 탑과 법당 등 佛殿을 중심으로 하여 사찰은 구성된다. 원래 사찰을 의미하는 절()은 중국에서 외교사절을 관장하는 관청을 뜻하였다. 이것은 불교가 처음으로 수용될 때의 사정을 짐작하게 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일반 민간건축과는 달리 사원과 궁정의 건축물이 동일한 양식을 가진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람배치의 형태는 각기 특색을 이루고 있으나, 크게 보면 대부분 탑 金堂 僧院 등의 복잡한 형식이다.

感恩寺의 경우, 中門을 지나 雙塔이 있으며 중심부에 金塔을 세우고 뒤에 강당건물을 건립하는 한편 그 주위에는 회랑을 구축하고 있다. 고대 사원 건축의 유례로는 月城 斷石山神仙寺를 비롯한 석굴사원이 있으며 평지와 산지에 각종 사원이 건립되었다. 이것은 대개 목조건축물인데, 고려시대의 유례로 浮石寺 무량수전과 조사당 및 안동 鳳停寺의 극락전 등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가람배치의 여러 양상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특성을 달리하면서 발전되었다. 그 가운데도 탑의 존재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탑은 원래 범어의 스투파(stu=pa)와 파리어의 투파(thupa)漢字音譯한 것이다. 따라서 塔婆라는 말의 시원이기도 하다.

탑은 쉽게 말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무덤이다. 다만 불교도들의 주요 예배 대상이 되면서 사원의 중심부를 이루어 그 聲價가 높아간 것이다. 印度塔의 경우는 覆鉢形으로 탑의 기본 양식은 基壇部塔身部, 그리고 相輪部로 구성되어 있다. 탑의 재료는 금 동을 비롯한 금속 이외에 나무나 돌 또는 흙벽돌 등 다채롭게 사용되었다. 그것은 나라별로도 특성을 가져 일반적으로 중국이 塼塔, 일본이 木塔을 즐겨 건립한 반면, 한국은 石塔의 나라라고 일컬을 만큼 석탑의 건립이 많다. 현재 확인된 석탑의 수효만 해도 1,500기 정도에 이르고 있다. 석조건축의 핵심을 이루는 석탑의 시원 양식은 전라북도 익산군의 미륵사지 석탑으로 본다. 일찍부터 동양의 大塔이라고 불릴 정도로 규모가 큰 이 탑은 石材로 목탑양식을 충실하게 모방하여 건립한 우리 나라 석탑의 始原形이다. 이러한 한국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은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에서도 볼 수 있다. 백제탑의 경우 이외에 신라탑은 塼塔을 모방한 분황사탑이 있으며, 다음으로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의 전형 양식이 있다. 대개 석탑은 화강석을 재료로 사용하여 건립한 한국의 독자적인 조형양식이다.

 조각. 불상조각에는 如來像을 비롯하여 보살상이나 神將像 祖師像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불상들은 금이나 은 구리 철과 같은 금속 이외에 돌이나 나무 또는 흙 등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조성하였다. 불상의 표현에는 32吉相 80種好라는 의궤방식이 따로 있어 보통 인간의 신체상과는 다른 佛格 특징의 차별상이 있다.

여래상에는 교주인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화엄세계를 주재하는 비로사나불과 서방정토의 아미타불, 그리고 藥師佛 등이 있다. 보살상에는 문수 보현을 비롯, 관음 대세지 미륵 지장보살 등이 있다. 또한 갖가지의 나한상이 있으며, 팔부중이나 사천왕 혹은 祖師像 등이 있다. 불상의 형식은 佛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臺座라는 자리가 있고 뒤에는 발산되는 빛의 상징인 광배가 있다. 또한 불상의 명호는 대개 손의 모습인 手印으로 구별하는데, 그 종류는 석가의 근본 5으로서 禪定印 降魔觸地印 轉法輪印施無與願印, 그리고 天地印 등이 있다. 또한 阿彌陀九品印智拳印 등이 있다. 한국 불상은 여래상 보살상 반가사유보살상의 3대 양식으로 나누어진다. 또 여기에 獨尊像三尊像이 있는 외에 바위에 새긴 磨崖像이라는 특이한 양식도 있다.

회화. 불교회화의 대종은 尊像畵이겠으나, 넓은 의미로 불교세계를 조형화한 회화는 모두 포괄된다. 불타재세시에도 불화 제작의 사례가 있은 듯하지만 현존 최고의 예는 BC 2세기 경의 인도 아잔타 벽화이다. 불화는 흙이나 나무 종이 비단 등의 재료에 자유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또한 건축물에 직접 그려진 벽화가 있는데 榮州 浮石寺의 조사당 벽화가 바로 그 예이다. 그러나 불화의 주축은 탱화나 經畵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敎化와 예배, 또는 사원의 장엄을 위해 제작되는 것이 상례이다. 주제에 따라 석가모니 後佛畵로서 법화경의 變相인 영산회상도나 석가의 일생을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가 있다. 이밖에 비로사나불의 불화와 아미타불의 불화 등 조각에서 조성되는 내용을 대개 그림으로도 표현하였다. 우리 나라 고대 불화의 경우, 그 수준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고 있어 고구려의 담징과 같은 화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특히 각종 古墳壁畵의 불교적 요소는 흥미있는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공예. 불교공예품은 각종 儀式具로부터 사찰의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편이다. 그 내용은 범종과 같은 法具를 비롯하여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는 향로나 정병 등이 있다. 이밖에 佛壇의 장엄을 위하여 제작된 것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는 四寶 또는 四物이라 하여 종 목어 운판을 포함시키는데, 이것들은 모두 예불이나 의식 때 소리를 내어 치는 의식구이다. 그 중에서도 범종은 매우 중요하다. 종 역시 중생제도를 위한 신앙적인 의미와 함께 실용성을 지니고 있다. 종의 양식은 중국 주나라 때의 古銅器나 악기, 또는 청동기의 에서 연유했다는 설이 있다.

 한국의 불교미술. 한국에서는 불교가 처음 전래된 4세기에 이르러서야 그 조형미술의 출현이 있게 되었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順道는 불상과 함께 불경을 가지고 왔으며, 375(소수림왕 5)에는 肖門寺라는 최초의 사원이 건립되었다. 한국의 불교는 고구려를 기점으로 하여 백제와 신라에도 잇달아 전해지면서 곧 한반도의 사상체계와 신앙을 하나로 일체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불교미술은 이 땅에서 이룩된 최초의 시각혁명으로서 한국미술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불교 자체가 외래종교이기는 하였으나 독자적인 전개방식을 펼치는 가운데 그 조형활동 역시 독특한 양상을 보이며 발전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미술은 한국 불교미술의 최절정기를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며, 신라미술의 찬란한 조형적 성과는 불교미술의 滿開로서 가능할 수 있었다.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 역시 불교를 국교로 하여 다양한 불교미술의 새로운 전개를 보게 하였다. 다만 禪宗의 대두와 더불어 이 시대의 조형물은 특징을 달리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였다. 러므로 고려미술의 특색 또한 불교미술이라는 커다란 민족미술의 한 주류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숭유억불시대인 조선시대에 불교미술의 쇠퇴를 가져왔고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戰禍로 말미암아 수천년의 경통을 이어온 민족문화재가 수난을 당해 황폐화하는 시련기를 거치게 되었다.

 

참고

석존(釋尊) : 범어 Sakyamuni. (BC 623~544) 불교의 교조로 존칭한 석가세존을 일반적으로 석존이라 부른다. 또는 석가 · 석가모니 · 瞿曇佛陀라고도 부른다. 석가는 그 분이 속한 종족 sakya의 명칭이고 muni는 성자의 뜻이며, 瞿曇은 석존의 성이고 悉達多(Siddhartta)는 그 분의 어릴 때 이름이다. 그 분의 德號로는 阿羅漢 · 明行足 · 如來 · 佛陀 · 世尊 등의 尊號가 있다. 석존께서는 약 2500년 전 지금의 네팔(Nepal)의 가비라(Kapila)에서 탄생하였다. 아버지는 淨飯, 어머니는 摩耶로서 인도 최고대의 七仙人이라 일컬어지는 瞿曇仙의 혈통을 가진 종족에 속하였고 대대로 왕통을 계승하여 내려왔다. 석존께서 탄생한 후 7일만에 마야부인이 죽고 그의 이모인 마하파사파제가 양육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일곱살 때부터 학문과 무술을 습득하여 능히 통달하였고 점점 장성할수록 사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진리에 대하여 명상을 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16세 때에 拘利(Koliya)족의 선각왕의 딸 야수다라와 결혼하여 라후라를 낳았다. 석존의 출생 연대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현재 불교도들은 일반적으로 B.C. 623년에 탄생하여, B.C. 595(29)에 출가하고 B.C. 589(35)에 성도하고, B.C. 544(80)入滅하였다는 설을 통용하고 있다. 그러나 19세에 출가, 30세에 성도, 81入滅說도 있다.

석존께서는 종교적 실천과 철학적 사색에 잠기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자 권속과 부왕, 그 밖의 여러 사람에게 대해서도 애착이 매우 강하여 영구히 함께 살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강하여 도리어 세상의 무상을 느끼게 되어 출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고대의 여러 釋尊傳의 일치된 견해에 의하면 석존께선 이미 출가 전에 모든 종교에 대한 개념적 지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출가함으로써 자기가 탐구해야 할 일은 어떻게 그것을 현실적 · 체험적인 것으로 이룰 수 있는가 라는 점에 集注되었다고 한다.

석존께선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당시 유명한 哲人이며 종교가인 아라라가라마와 울다가라마자에게 가서 배웠다. 그러나 이들의 가르침에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었고 그밖의 당시의 인도 종교가들로부터도 지도 받을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자 석존께선 수년간 철저한 고행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心身만 쇠약해졌다. 그러나 다행히 석존은 어린 시절 正坐思惟했던 일을 생각하였다 · 이 동시에 없는 禪定妙理를 자각하여 이때부터 용맹정진을 계속한 것이다. 그 결과 석존의 심중에서는 父王과 사랑하는 처자 권속은 물론 이 세상의 일체 만상의 애착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을 成道라고 부르며 이곳은 간지스(Ganges)강의 支流인 네에란자라의 근처에 있는 한 보리수 나무 아래였다. 그곳은 오늘 날 불타가야(Buddhagaya)라고 부른다.

석존께서 성도하실 때 그는 보리수를 등져 동쪽을 향하여 정좌하고 吉祥草로 만든 방석 위에 앉아서내가 만일 도를 이루지 못하면 나의 피와 살이 메마르고 말 것이다라고 하는 큰 결심을 하고 金剛座에 앉은 것이다. 그후 77일 만에 大覺成道하였으며, 이때부터 瞿曇悉達多는 소위 佛陀(Buddha)가 되어 一切智를 성취하여 모든 번뇌를 여의고 涅槃하고 해탈하여 如來 · 世尊이 되신 것이다. 세존이 되신 후 그는 과거에 고행을 같이 한 바 있는 다섯 명의 수행자 陳如 · 摩訶男 · 婆師波 · 阿說示 · 婆提에게 최초로 법을 전하였으니 그 장소는 녹야원이며 이것을 初轉法輪이라고 부른다. 다섯 제자에게 법을 설한 내용은 中道 · · 八正道로서 이것은 그 후에 석존의 설교양식의 근본이 되었다.

이때부터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설교로 일관하여 보내셨다. 먼저 마갈타국의 왕사성에서 교화활동을 한 뒤에 고향인 가비라성에 돌아가는 도중에 그의 德化로 가섭 3형제와 그들의 100명의 제자를 귀의하도록 하셨고, 사리불과 목건련의 두 제자 및 그들의 제자 1250명을 제도하셨다. 그리고 고국에 도착하시어 부왕과 가족과 석가 출신인 우파리 · 아나율 · 아난타 · 제바달다 등을 제자로 삼았다. 또한 석존께서는 구사라(Kosala)국 사위성에 가서 급고독 · 기타 장자를 제도하고 어린 시절 부처님을 양육하신 마하파사파제와 과거에 자기의 였던 야수다라를 제자로 만드시니 여성 수행자 비구니도 나타나게 되어 비구, 우바새, 우바니의 사부대중이 완비하게 되었다. 석존께서는 계속하여 50년을 교화하시다가 구시나가라의 사라(Sala) 숲에 들어가서 80세에 入滅하셨다. 입멸 후 7일만에 수제자 마하가섭의 주재로 구시나가라밖에서 화장하여 舍利八分하여 여덟 종족의 국왕에게 분배하여 봉안하게 하였다.

 

성도(成道) : 佛道를 완성한다는 뜻. 成佛 · 得佛 · 得道 · 成正覺이라고도 한다. 보살이 수행을 완성하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펴는 것(八相成道). 석존은 보리수 밑에서 成道한 것으로 전해 오지만 그 年月日時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중국에서는 臘月(128)설이 행해지고 있다. 이날 행하는 법회를 成道會 · 臘八會라 하여 이날을 특히 선종에서 지키고 있다. 天台宗에서는, 三乘敎의 보살은 초 · 2 · 3 阿僧祗劫 百大劫의 네 단계의 수행계단을 거친뒤 成道하므로 四階成道라 한다. 有部 등의 小乘敎에서는 이것을 (1) 3阿僧祗劫 (2) 百大劫 (3) 菩薩最後身에서 九地下八地의 번뇌를 끊는 것. (4) 三十四心斷結成道4단계가 있다.

 

다비(茶毘) : 파리어 jhapeti의 음역. 闍維·闍毘耶維·耶旬이라고도 쓰고, 燒燃·燒身·梵燒라고도 번역하며, 火葬을 말한다. 茶毘를 하는 火葬場茶毘場이라고 한다.

 

사리(舍利) : 實利 · 設利羅라고도 쓴다. 身體 · · 身骨 · 遺身이라고 번역하며 死屍 또는 유골의 뜻으로 보통 석존의 遺骨(佛骨 · 佛舍利)을 말한다. 이런 뜻에서 舍利駄都(라 번역. 要素의 뜻)라고 한다. 佛舍利를 안치한 보탑을 舍利塔, 佛舍利를 안치한 병을 舍利甁, 佛舍利供養하는 法會舍利會 또는 舍利講 · 舍利報恩講이라 한다. 舍利全身舍利(死屍)碎骨舍利(遺骨)의 두 가지 舍利로 나누고 또 佛陀遺骨生身舍利(身骨舍利), 佛陀가 남긴 敎法舍利에 비유해서 法身舍利(法頌舍利)라 하여, 이것을 두 가지 舍利라고도 한다.

 

기원정사(祇園精舍) : 범어 Jetavana-Vihara. 또는 祇洹精舍. 祇陀園林須達精舍의 약칭. 중인도 사위성에서 남쪽으로 1마일. 기수급고독원에 지은 절 이름. 수달장자가 정사를 지어 부처님과 제자들께 공양함.

 

사위성(舍衛城) : 사위(舍衛)범어 Sravasti. 의 이름이었으나 國號가 되었음. 室羅筏 · 室經筏悉底 · 尸羅婆提라고도 음역하며, 聞者 · 聞物 · 豊德 · 好道 등이라 번역한다. 중인도 교살라국의 都城으로 부처님이 계실 때는 바사닉왕 · 유리왕이 살았다. 남쪽에는 유명한 기원정사가 있었다. 또 사위를 나라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남쪽의 교살라국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름을 나라 이름으로 한 것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지형, 또는 유물의 발견에 의하여 지금의 콘다주의 세트 마헷트인 것이 대개 증명되었다.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 또는 祇多樹給孤獨園. 줄여서 祇樹園 · 祇園 · 給孤獨園이라 함. 중인도 사위성에서 남쪽으로 1마일 지점에 있다. 기원정사가 있는 곳으로 부처님이 설법한 유적지. 이것은 본래 바사익왕의 태자 祇陀가 소유한 동산이었으나, 급고독장자가 그 땅을 사서 부처님께 바치고 태자는 또 그 숲을 부처님께 바쳤으므로,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같이 이름함.

 

수달(須達) : 범어 Sudatta. 須達多·蘇達多라고 음역하고, 善施·善授·善溫이라 번역함. 바사닉왕의 主藏吏로 사위성의 부호이고, 기원정사를 지어 부처님께 드렸다. 또 가난한 이에게 많은 보시를 하였다고 하여 給孤獨이라 한다.

 

죽림정사(竹林精舍) : 범어 Venuvana. 중인도 마갈타국 가란타촌에 있던 절. 석존께서 成道하신 뒤에 가란타 장자가 부처님께 귀의하여 竹林園을 바치고, 빈바사라왕이 그 곳에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위하여 큰 精舍를 지었다. 이것이 불교 최초의 절인 竹林精舍이다.

 

아쇼카 : 아육왕(阿育王)범어 Asoka. 인도 마우리아 왕조 제3대 왕(B.C. 268~B.C. 232년간 재위한 것으로 추정). 구역은 阿恕伽라 하며, 신역은 阿輸伽라 한다. 無憂라 번역. B.C. 2세기에 전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를 보호한 왕. 남전과 북전에 그 기록이 꼭 같지 않으나, 왕은 B.C. 321년경에 인도에 공작 왕조를 개창한 찬드라 굽타 대왕의 손자며, 빈두사라왕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서 부왕의 사랑이 없었다. 영토인 덕차시라국에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정복하여 귀순케 하다. 부왕이 죽은 후 배다른 형인 수사마를 죽이고 즉위하다. 광폭함을 그치지 아니하여 신하와 여자들을 마구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沙門의 설법을 받았다고도 하며, 돌에 새긴 글에 의하면 즉위 8년에 칼링가를 정복하여 포로 15, 살육 10만의 무수한 죽음의 대참사를 목격하고, 부처님께 귀의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는 무력에 의한 정복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倫理Dharma()에 의한 정치를 理想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는데 진력하였다. 부모 · 어른에게 순종, 살생을 삼가는 등의 윤리를 백성들에게 장려하고, 지방관이나 신설된 관리에게 명령하여 백성들이 윤리를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또 도로 · 灌漑 등의 공공 사업을 전개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당시 인도에는 그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없었고, 북서 국경의 그리이스 세력도 그들 내분 때문에 다른 지방을 침략할 힘이 없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모든 생활 양식이 다른 광대한 영토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가 취한 정책은 매우 현명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면에는 원시불교의 영향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정치 이념은 인도 제국이나 모든 민족에게까지 전파되어 그의 사절이 이집트 · 마케도니아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왕은 84천의 절과, 84천의 보탑을 건축하고 正法의 선포를 위하여 바위와 石柱 등에 글을 새기어 스스로 부처님의 유적을 순례하였다. 그의 영토는 북쪽은 설산, 남쪽은 마이소루, 동쪽은 벵갈만, 서쪽은 아라비아해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였다. , 즉위 17년에 화씨성에서 제3차의 결집을 하고, 희랍 5국에 전도승을 파견하고, 26년 동안에 26회의 特赦를 내리는 등, 정법을 융성케 하였다. 이와 같은 왕의 정책은 36년 간의 통치 후에는 쇠퇴해 갔으나, 그의 치세 중에는 불교를 비롯한 갠지스강 유역의 고도의 문화가 다른 지방에 급속히 퍼져 문화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퇴위한 후에는 매우 불우하였다고 전한다.

 

() : 범어 stupa. 팔리어 thupa. 바르게는 塔婆라 음역. 또는 兜婆 · 窣都婆 · 藪斗婆 · 私倫簸 · 蘇倫婆라고도 음역. 方墳 · 圓塚 · 歸宗 · 高顯 · 聚相이라 번역. 본래는 부처님 사리를 묻고, 그 위에 돌이나 흙을 높이 쌓은 무덤. 또는 를 말하는 것. 유골을 묻지 않고 다만 특별한 靈地임을 표시하기 위하거나, 또는 그 덕을 앙모하여 은혜를 갚고 공양하는 뜻으로 세워진 것은 制底 · 支提 · 質底라 하여 탑파와는 판연히 구별하였으나, 후세에는 두 가지를 혼동하게 되다. 탑을 만드는 것은 옛적부터 행하여졌으니 석존이 가섭불의 사리를 위하여 흙을 쌓아 탑을 만들었다 하며, 또 석존의 사리는 여덟 곳에 나누어 탑을 쌓았고, 2~3세기 무렵에는 아육왕이 84천의 탑을 쌓았다고 한다. 이 때의 탑은 半球형으로 쌓았고 꼭대기에서 수직으로 구멍을 뚫어서 지평면에 이르게 하고 그 밑바닥에 사리 등의 유물을 장치하고 주위에 예배하는 길을 만들고 바깥에는 돌로 난간을 둘렀다. 후세에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여 伏鉢塔 · 屋塔 · 露塔 · 柱塔 · 相輪塔 · 無縫塔 · 雁塔 · 三重塔 · 七重塔 · 五輪塔 · 龕塔 등의 구조로 발달하다. 만드는 재료에도 돌 · 벽돌 · 금속 · 나무 등 여러 가지를 사용한다. 특히 중국에서는 벽돌로 만든 塼塔, 우리 나라에서는 石造塔, 일본에서는 木造塔이 특수하게 발달하였다.

 

불상(佛像) : 부처의 形像을 말함. 널리 보살·羅漢·明王·諸天 등의 도 포함해서 말하는 수도 있다. 彫塑像·畵像(繪像)의 두 가지가 있는데, 前者만을 국한해서 佛像이라고 하고, 後者圖像이라고 일컫는 수가 있다. 인도에서는 옛날에는 불타의 모습을 彫畵하는 것은 神聖을 모독하는 것이라 하여, Sanchi등의 古彫刻에는 法輪·菩提樹·佛足跡 등을 가지고 불타를 상징하는데 그쳤는데, 大乘佛敎가 일어남과 동시에 佛像彫畵가 행하여지게 되어, 모든 大乘經典에는 造像의 인연이나 功德 등을 말하고 있다.

彫塑像에는 鑄像(金佛鎚鍱像(押出像·金屬板으로 母型에 떠서 만든다木像(木佛石像·塑像(泥像夾紵像(乾漆像. 麻布를 굳게 한다紙泥像·磚像·蠟像 등이 있다. 圓像에는 絹本·紙本에 그리는 것 외에, 壁畵·刺繡(繡佛像織成 등이 있다. 鑄像에는 材料에 의해서 金像·銀像·金銅像·鍮石像·鐵像 등의 종류가 있고 木像에는 만드는 법에 의해서 一木造寄木造가 있고, 用材(御衣木이라 한다)栴檀(香木의 일종)하며, 더욱이 鍍金하고, 혹은 金箔을 누루고 혹은 金泥·彩色을 칠하는 수가 있다.

佛像은 그 威儀에 따라 立像·坐像·倚像·臥像·飛行像 등으로 구별되고, 身長에 따라 丈六像(불타의 身長은 보통사람의 배로 一丈六尺이라고 하는 데에 근거한다半丈六像(丈六半分. 八尺大佛像(丈六 이상의 大像等身像(願主와 동등인 身長胎內等身像(丈六像 등의 胎內安置하는 一磔手半 一尺二三寸)이라 한다.

如來像은 대개 出家男形으로 袈裟를 입고 寶冠瓔珞 등을 머리에 얹지 않지만, 誕生佛(불타가 降誕할 때, 바른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은 땅을 가리킨 형용의 불상)과 같이 裸形像인 것도 있고, 보살상은 숭고한 장부 또는 온화한 여자모양으로 寶冠瓔珞 등을 몸에 걸친 在家居士形을 본뜨고 羅漢像出家形으로 비구 수련의 을 나타냈으며 明王像忿怒形, 諸天像武裝形·女形·神形·鬼形·天人形·童子形 등을 하고 있다. ·菩薩像 등의 印契·持物·身色·衣色 등은 각기 다르고, 西藏에서는 불·보살 등의 얼굴의 치수의 비율을 정하여 佛滿月面·菩薩雞子面(새의 알과 같아 慈愛이 있는 얼굴佛母芝蔴面·明王四方面 등의 형으로 한다.

牡形으로 金屬板으로 본을 만들어서 佛像板佛하고, 圓板의 중앙에 半肉彫佛像을 부착시켜 매어 달은 것을 懸佛, 屋外에 있는 露佛濡佛, 불타가 미소짓는 상을 한 것을 笑佛 등이라 한다.

斗帳으로 감추어서 모습을 볼 수 없게 한 것을 秘佛, 같은 모양의 小佛像을 무수히 만들어서 安置한 것을 千體佛, 佛像胎內에 수용한 小佛像胎內佛이라고 한다.

佛像安置하는 牀座臺座라고 하며, 師子座(부처를 人中師子라고 하기 때문에 부처의 坐所師子座라 하는 수도 있다蓮華座·荷葉座(잎의 臺座須彌座(須彌山形臺座) 등이 있다.

 

불상기원(佛像起源) : 增一阿含經 28이나 止觀輔行 1 등의 경전상의 기록에 의하면 석가 재세시에 코삼비국(憍賞彌國)의 우전왕(優塡王)과 코살라국의 파사닉왕(波斯匿王)이 각기 旃檀木紫磨金을 사용하여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는 불멸후 500여 년간은 불상이 조성되지 않았고 예배대상은 탑 · 보리수 · 金剛寶座 등의 상징적인 대용물이었다고 한다. 불상출현 이전의 이 시기를 無佛像時代라 한다. 불상의 발상지는 간다라 지방이라는 설과 머투라 지방설의 논쟁이 있으나 최근에는 간다라와 머투라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거의 동시에 발생하여 점차 전파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사원(寺院) : 불상을 安置하고, 僧尼가 사는 곳. 寺刹·佛寺·僧寺·精舍·道場·佛刹·梵刹·蘭若·淨住舍·法同舍·出世間舍·淸淨無極園·遠離惡處·親近善處·叢林·栴檀林·檀林·紺園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寺院에 해당하는 범어로 viharasamgharama가 있으니, 앞의 것은 毘訶羅라 음역하고 住處·遊行處라 번역하며, 뒤의 것은 僧伽藍摩·伽藍이라 音譯하고 衆園이라 번역하는데, 어떤 것이나 흔히 精舍라고 번역한다.

精舍는 수행을 精練하는 자가 있는 집을 의미한다. 漢語는 공공기관이란 뜻이니, 외국인의 접대를 맡은 鴻臚寺에 처음으로 西域에서 스님이 왔을 때에, 묵었기 때문에, 뒤에는 중이 머무는 곳을 모두 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우리의이란 말은 절(chyol 禮拜)에서, 日本語데라라는 말도 우리말의 절(禮拜) 또는 (범어 laksata)訛傳이라고도, 혹은 巴利語의 데라 thera(長老)에서 왔다고도 하나 분명하지는 않다. 漢語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주위에 둘러친 담을 말하고, 변하여 周垣 또는 回廊이 있는 건물을 의미했으며, 官舍의 이름에도 쓰여졌다. 唐代勅命에 의해서 大慈恩寺 등에 翻經院을 세운 것이, 불교에 관한 건물에 라고 이름붙이게 된 효시인 것 같다. 唐末에는 이라고 불리우는 佛寺가 많았고, 宋代에는 官立大寺院號가 붙게 되었다. 蘭若阿蘭若略語, 阿練若·練若라고도 하고, 범어 ara=nya音譯이다. 無諍·空閑處라 번역하고, 村落(동네)에서 떨어진, 조용한 수행에 알맞은 장소라는 것이 원래의 의미였는데, 후세에는 寺院寺號, 院號외에 山號가 붙여지기도 했다. 이것은 원래 寺院중에 세워졌을 때, 山名寺名을 아울러서 부른 것이 처음으로, 평지에 세워진 寺院에도 山號를 붙여서 寺院別稱으로서 쓰여지는 수가 있었다. 寺院이라고도 하는데, 이란 區劃·區院의 뜻으로, 많은 僧房이 있는 구역을 의미하기 때문에 毘訶羅譯語로서 인용하게 됨으로 寶坊·僧坊 등으로 쓰였다. 원래 은 조그마한 의 뜻으로, 僧侶가 평소 起居하는 방을 가리키고, 에는 넓이나 건축방식이 정해져 있다. 뒤에는 널리 殿舍樓閣들도 이라고 했다. ·寺院건축양식으로는 東西北의 세 방면에 僧侶가 머무는 寮舍를 두었었기 때문에 이것을 三面僧房이라고 한다.

寺院이라고 하는 것은 은 범어 laksata訛傳으로 幡竿을 의미하며, 일반으로 佛堂의 앞에 을 세우는 전통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禪宗에서는 寺院叢林·禪林·禪閣 등으로도 부른다. 衆僧이 모여서 相磨琢鍊하며 화합하여 修道를 잘 하는 것을 숲속의 나무가 곧게 잘 자라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叢林 중 그 스승으로부터 을 전해받은 弟子住持하는 것을 法門叢林(度弟院·徒弟院)의 뜻. 자기가 제도한 弟子住持로 시킨 寺院). 넓은 천하의 덕높은 고승을 불러서 住持케 하고 徒弟掛塔을 시키지 않는 것을 十方叢林(十方刹)이라고 한다. 祖師을 전하는 根本寺院本寺, 本山 그 관할하의 末寺·末山. 大寺院境內에 있어서 그 寺院에 속하는 小寺子院·支院·枝院·寺中·寺內·塔頭라 한다. 塔頭라 함은 본래는 祖師이 있는 곳을 일컫는 말이니, 祖師奉祀하기 위해 설립한 小院廟處이기 때문에 후세에 寺域내의 支院塔頭라고 부르게 되었고 塔中이라고도 하게 되었다. 寺院大小·高下·創立由緖 등에 의해서 그 격식등급을 정한 것을 寺格, 寺班이라 하는데, 중국에서는 이것이 제도화 되었다. 寺院을 주관하는 宗團 등을 기준으로 분류하기도 했으니, 宋代에는 禪院(禪宗敎院(天台·華嚴등의 諸宗律院(律宗)이라 하고, 明代에는 禪寺(禪宗講寺(經論)硏究所敎寺(세속의 敎化所)라 했다. 다음에 절의 설립자에 의해서도 구분한다. 官府에 의해서 건립된 것을 官寺, 개인에 의해서 造營되는 것을 私寺라 하고 公刹(宗團所有私刹(개인소유)의 명칭이 있는가 하면, 주거하는 대중의 남녀의 구별에 따라 僧寺尼寺로 분류한다. 僧尼2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세우도록 되어 있다. 寺院住職住持·院主라고 하며, 또 큰 절에서는 住持 외에 절의 대중을 비롯한 4부대중 전체의 정신적 歸依處로서 祖室·方丈을 추대하는 경우도 있다.

 

() : 佛像安置하고 僧尼가 머물며 修道하는 곳을 일컫는다. 범어 vihara는 곧 修行하는 道場이란 뜻으로 · 등으로 음역하고 住處 · 遊行處 등으로 번역하며, 또 범어 samgharama僧伽藍摩 · 伽藍이라 음역하고 衆園이라 번역하며, 위의 두 경우 다 精舍라고 번역한다. 이 밖에 절() 에 해당하는 범어는 아직 발견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본래 官舍를 의미하는 "마을사"자로 불교의 사찰의 이름은 아니다. 중국에서 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곳이었으며 西域에서 迦葉摩騰 · 竺法蘭의 승이 옴에 우선 에 머물게 했고 뒤에 洛陽精舍를 세우고 이름을 白馬寺라 한데서 불교의 精舍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精舍""이라고 한 것은 ""에서 절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했다고 하는데 불교의 절이 들어 오기 전부터 기도처에서는 절을 많이 했고 그곳을 ""이라고 했을 수 있으며, 일본에서 절을 "데라"라고 하는 말도 우리 나라의 절에서 건너갔다고 한다.

 

가람(伽藍) : 범어 samgharama音略으로 僧伽藍도 그 음역임. 衆園이라 번역하며 僧園·僧院이라고도 한다. 본래는 僧衆하는 園林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뒤에는 僧侶들이 사는 寺院·堂舍의 용어로도 되었다. 후세에 한 伽藍7종의 건물을 갖추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이것을 七堂伽藍이라 하기도 했다. 七堂의 명칭과 배치는 시대와 宗派에 따라서 일정하지 않았다. 南向으로 세우는 것이 통상이고, 學問을 중심으로 하는 寺院(講院)에서는 (佛舍利安置金堂(佛殿이라고도 하며, 本尊佛安置하여 과 더불어 伽藍의 중심을 이루는 건물講堂(經法講說하는 곳鍾樓(鍾閣, 梵鍾을 달아 두는 곳經閣(經藏·經堂이라고도 하며 一切經을 두는 僧房(僧坊이라고도 하며 僧衆常住하는 곳. 講堂東西北 三面에 있는 것을 三面僧房이라 함食堂(齋堂이라고 하며 食事를 하는 ) 등으로 구성된다. 禪宗에서는 佛殿·法堂(하는 으로 講堂에 상당하며 佛殿 後方에 둔다僧堂(禪堂·雲堂·選佛場이라고도 하며 僧侶坐禪하고 居處하는 곳. 중앙에 文殊菩薩像安置한다庫院(庫裡·廚房·庖廚·食廚라고도 하며 식사를 조리하는 곳山門(三門이라고도 하며 세 개의 門扉가 있는 樓門. ·無相·無願三解脫門을 표한다西淨(東司·淨房이라고도 하며 便所를 가리킴浴室(溫浴을 하므로 溫室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僧堂·西淨·浴室談話를 금하는 곳이므로 三黙堂이라고도 함]七堂이라 한다. 伽藍守護하는 護伽藍神·伽藍神이라 하며 伽藍神祭祀하는 伽藍堂·土地堂·鎭守堂이라고도 한다. 伽藍은 곧 절의 통칭이다.

 

광배(光背) : 불상의 背面에 광명을 표현한 것. 머리 위의 원형의 것은 頭光. 등 뒤의 타원형의 것은 身光이라 함. 또는 後光·御光이라고도 한다. 불교미술에서는 1세기에 시작된 간다라 미술에서 취급되었다. 카니시카왕 시대의 화폐에서는 왕이나 神像은 원광 뿐인데 비해 부처님상에는 원광과 거신광을 병용하고 있다. 굽타 왕조 때는 한 가운데에 연꽃을, 그 둘레에는 唐草紋淨彫한 화려한 意匠으로 표현되어 있다. 火焰光은 아프가니스탄이나 중앙 아시아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형식들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다채로운 전개를 보였고, 그 영향은 한국과 일본에까지 미쳤다. 또한 우리 나라 삼국시대에 光背에는 광배의 外緣에 탑모양이나 飛天을 안배한 것들이 많다.

 

수인(手印) : 密敎에서 불·보살의 서원을 표시하는 手相·結印을 일컬음.

 

탱화(幀畫) : ·보살·善神 등을 그린 초상화. 예를 들면 불상 뒤의 그림을 佛幀畵라고 한다.

 

불화(佛畵) : 불타의 畵像이란 뜻. 畵像·繪像이라고도 하고, 繪畵·織繡 등에 의해서 ·보살의 등을 그린 것. 여기에 本尊으로서 만들어진 것과, 傳說·敎義圖解나 장식으로 만들어진 것, 兩者를 겸한 것 등이 있다. 인도로부터 행해졌고 아잔타의 壁畵는 그 최고의 것 가운데 하나다. 密敎가 일어남과 동시에 曼茶羅 등이 만들어지고, 圖畵法도 정해졌다.

 

사물(四物) :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장종(丈鐘). ···풍의 四大를 말함.

 

범종(梵鐘) : 절에서 시각을 알리거나 사람을 모이게 하기 위해서, 혹은 절에 의식이나 행사 등으로 치는 종으로, 鯨鐘 · 撞鐘 · 釣鐘이라고도 한다.

범종의 신앙적인 의미는 종소리를 듣는 순간만이라도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따라서 종소리를 듣고 法門을 듣는 자는 오래도록 生死苦海를 넘어 佛果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범종은 불교적인 금속공예품 가운데서도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는 특수한 종류이다. 여러 불교국가에서는 예로부터 크고 작은 종들이 숱하게 조성되어 왔는데, 그 재료는 주로 구리를 사용하였다. 古代鐘의 화학성분을 분석해 보면, 대개 구리(Cu)80%에 주석(Sn)13% 정도의 組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종의 强度硬度의 최적 상태는 주석이 15% 내외로 함유되었을 때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니 선인들의 지혜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범종은 學名으로까지한국종이라고 불릴 만큼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신라종의 우수성은 국내외에도 널리 상찬되고 있을 만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존하는 한국 범종의 상당수는 일본으로 반출되어 이곳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만 해도 20여 구를 헤아리게 하고 있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범종으로 밝혀진 것은, 오대산의 상원사 銅鐘이다. 銘文에 따르면, 통일신라 전기에 해당하는 725(성덕왕 24)년에 제작된 것으로 한국종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聖德大王神鐘은 현존하는 고대의 종 가운데 최대의 것으로 구리 12만 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무게는 18톤이다. 현존하는 최대의 종은 토함산 석굴암의 統一大鐘으로 23톤이며 범종사에서(1988) 주조하였다.

한국종의 양식적인 특징은 무엇보다 우아하고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며 그 소리도 매우 은은하고 맑다. 구체적인 예로는 첫째 鐘頂部單頭龍圓筒을 들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범종양식이 雙頭龍임에 비해 한국의 경우는 한 마리의 용이 생동감 있는 자세로 허리를 구부리게 조각되어 있다. 이는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의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더욱 특이한 것은 대나무 형태의 원통이다. 이것은 신라종에서 확립된 독특한 양식으로서, 최근에 이르러 학계에서는 신라 東海口萬波息笛 설화와 연관하여 신라의 국보였던 神笛의 형태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종 상하의 鐘肩鐘口에는 唐草紋이나 寶相華紋의 섬세한 紋樣帶가 형성되어 있고, 종견의 문양대에는 네 곳에 대칭으로 네모꼴이 乳廓이 있으며, 유곽안에는 9개씩 모두 36개의 가 있다. 鐘身에는 종을 치기 위한 撞座가 구획되어 있고 특히 飛天像浮彫되어 있다. 이것은 신라종의 우수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의 범종 양식이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부분적으로 변화를 가져와 전체적인 형태에 담긴 긴장감이라든지 세련된 선은 오히려 둔화된 듯한 느낌을 주게 된다. 세부적으로는 종견 위에 立花장식이 마련되며 종구가 넓어지는 경향을 띠고 있다. 고려시대의 범종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天興寺銅鐘과 내소사동종 등이 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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