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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업자득(自業自得)

근와(槿瓦) 2018. 5. 24. 02:24

자업자득(自業自得)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자기가 지은 선악의 업은 자기 자신이 받지 않으면 안되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자업자득이라 한다. 自因自果業道를 일컫는 말.

 

참고

자업(自業) : 각각의 감각기관의 작용.

 

자득(自得) : 스스로 한 일에 대해 갚음을 받음.(국어사전)

 

선(善) : 不善과 無記(善도 不善도 아닌 것)를 더하여 三性이라고 한다. 현재 · 미래에 걸쳐서 自他에 이익을 주는 白淨의 法을 善이라 하고, 이에 反하는 것을 不善(惡)이라고 한다.

앞에 것을 白, 뒤에 것을 黑이라고도 한다.

① 二善. (1) 有漏善과 無漏善을 일컬음. 有漏善이라 함은 번뇌의 더러움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世間의 善으로, 이로 인하여 미래에 즐거운 果報를 받지만, 有漏善은 法性의 이치에 꼭 들어맞지는 않으며 차별적인 相을 취해서 닦는 有相善이기 때문에, 그 의미로 相善이라고도 한다. 無漏善이라 함은 번뇌의 더러움과는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出世間의 善으로, 이것에 의하여 미래의 과보를 받게 되는 수는 없다. 더욱 無漏善은 涅槃(이것도 마찬가지로 無漏善이다)의 깨달음을 얻는 데에 필수의 善이다. (2) 止善(소극적으로 不善을 물리쳐 制止하는 것)과 行善(적극적으로 善을 행하는 것)을 말함. (3) 定善(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고 산란한 妄念을 그쳐서, 곧 定心에 의해서 닦는 善과 散善(산란한 마음, 곧 평상시의 마음가짐으로 惡을 그치고 善을 닦는 것)의 일컬음.

② 世福 · 戒福 · 行福의 三福을 각기 世善(世俗善) · 戒善 · 行善이라고도 한다.

③ 三善. 初善 · 中善 · 後善을 일컬음.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법화경의 序分 · 正宗分 · 流通分의 三分(三段)을 善이라고도 한다.

④ 四種善. 勝義善(涅槃을 말함)과 自性善(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善인 것. 곧 無貪 · 無瞋 · 無癡의 三善根과 慚 · 愧의 2)과 相應善(自性善과 相應하는 것에 의해서 善이 되는 心 · 心所)과 等起善(自性善과 상응하는 善으로부터 引起)되어 善이 되는 身 · 語의 二業 및 得 · 四相 · 二無心定)을 일컬음.

⑤ 四種不善. 四種善의 반대. 勝義不善 · 自性不善 · 相應不善 · 等起不善을 일컬음.

⑥ 七種善. 生得善(先天的으로 가지고 있는 善)과 聞善과 思善과 修善(이상의 3은 聞法과 思惟와 禪定의 노력의 결과로서 얻어진 이른바 加行得善)과 學善(有學位에서 일으키는 善)과 無學善(無學位에서 일으키는 善)과 勝義善(涅槃)의 일컬음. 이 가운데 前四는 見道(비로소 無漏智가 생기는 자리)에서 앞의 凡)夫 때 일으키는 善으로 有漏善이며, 後三은 見道 이후의 聖者가 일으키는 善으로 無漏善이다(俱舍論光記卷二).

⑦ 七善. 頓敎가 가진 7종의 善. 時善(時節善이라고도 한다. 前出의 三善과 같은 것으로 序分 · 正宗分 · 流通分이 善인 것) · 義善(의미가 深遠) · 語善(言語가 巧妙) · 獨一善(純一無雜의 敎) · 圓滿善(완전 圓滿의 敎) ·  調柔善(極端으로 편벽된 더러움이 없음) · 無緣慈善(淸淨한 無緣의 자비의 相이 있음)<法華文句 卷七>.

⑧ 十一善. 唯識宗에서 세우는 11종 善의 心所. 信 · 慚 · 愧 · 無貪 · 無瞋 · 無癡 · 勤 · 輕安 · 不放逸 · 行捨 · 不害의 일컬음.

⑨ 기타 雜善(他力念佛에 대한 自力의 諸善), 雜毒의 善(三毒 곧 貪 · 瞋 · 癡의 번뇌를 섞인 凡夫의 善), 世善(世俗善이라고도 한다. 有爲의 善, 有漏善, 世福을 말함) 등이 있다.

    


() : 不善의 뜻. 道理에 배반하여 自他를 손해하고, 현재 및 장래에 괴로움을 초래하는 이 되는 성질. · · 無記(非善非惡)三性으로 나누는 경우의 하나. 이런 때는 자세히는 惡性이라고도 하는데, 造惡을 좋아하는 성질까지도 惡性이라고 한다.

살생(殺生) · 투도(偸盜) · 사음(邪婬) · 妄語(兩舌 · 惡口 · 綺語를 포함) · 飮酒五惡이라 한다(無量壽經 卷下).

惡時 · 惡世界 · 惡衆生 · 惡見 · 惡煩惱 · 惡邪無信盛時六惡이라 하고, 十惡 · 五逆 · 四重罪 · 破戒 · 破見 · 謗法 · 一闡提七惡이라고 한다.(愚禿鈔 卷下).

 

() : 범어 karman의 번역. 羯磨音譯한다. 造作의 뜻. 行爲·所作·意志에 의한 身心의 활동. 意志에 의한 身心의 생활을 의미한다.

일반으로 ··三業으로 나눈다. 有部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이러한 것을 하려고 하는 뜻이 意業이고, 그 의지를 신체적 행동과 言語的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 身業語業(口業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한다. 意志의 활동인 思業思業이 끝나고서 행하는 思已業二業으로 나누는데 이 경우, 思業意業이고, 思已業·語 二業이다. 三業으로서의 작용의 本體(業體·業性)에 대해서, 有部등에서는 意業(意志), ·語業色法(物質的인 것)이라고 하고, 經量部大乘에서는 모두 (意志)라고 한다. 불교 본래의 입장은 후자라고 생각된다.

有部등에서는 物質的인 것을 本體로 하는 (色業) 身業語業으로, (·)無表(無作·無敎)가 있다고 한다. 表業은 밖으로 표현되어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것, 無表業無表色이라 이름 지어지는 일종의 色法(보통의 물질과 같이 粗雜하지 않다)本體로 하고, 강한 善惡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身表業語表業과 및 등이다. 無表業3종이 있다. 受戒(어느 것이나 다 )에 의해서 일어난 律儀, 습관적이고 특히 강한 결단을 가지고 한 惡業에 의해서 일어난 바의 不律儀, 그 이외의, 때에 따라 선악의 업에 의해서 일어난 非律儀非不律儀(處中無表)3종이 그것이다. 律儀無表를 버리고 에서 나오기까지 계속되고, 그 밖에 無表는 특별한 障害가 없는 한 일생동안 계속된다. 이들 無表 중에서 無表에는 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고, 無表에는 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어서, 각기 그 사람의 後天的 성격을 형성한다고 한다. ·의 각기 無表 無表業意業을 더하여 五業이라고 한다.

선악의 업을 지으면, 그것에 의해서 그에 상응한 고락의 갚음(果報·異熟)이 생긴다. 이것을 業因에 의해서 業果가 생긴다고 한다. 非善非惡無記業를 끄는 힘이 없다. 業因業果의 관계를, 有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것은 三世實在하는 것으로서, 업이 현재에 있을 때 이것이 이 되어서 어떠한 未來를 끌것인가가 결정되고(이것을 取果라고 한다), 업이 지나가 버림으로부터 에 힘을 주어서 를 현재에 이끌어 낸다(이것을 與果라고 함). 또한 經量部에서는, 은 순간에 없어져 버리는데, 를 생하는 종자를 위에 심어 주어, 그 종자가 를 끌어 일으킨다고 한다. 이 종자의 思想有部無表業說과 같은 것이다.

을 여러 가지로 분류한다. 總體로서의 일생의 果報(갚음)를 이끄는 . 人間界라든가 畜生界에 태어나게 하는 강한 힘이 있는 引業(牽引業·總報業·引因)이라 하고, 人間界등에 태어난 자에 대해서 개개의 구별을 주어서 개체를 완성시키는 滿業(圓滿業·別報業)이라고 한다. 引業의 갚음을 總報, 滿業의 갚음을 別報라고 하여, 二業總別二業이라고 한다. 더욱 有部에서는 하나의 引業에 의해서 一回을 받아 다시 그 위에 많은 滿業에 의해서 이 이 완성된다고 하고, 多業이 일생을 이끌거나, 一業多生을 끌거나 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에는, 山河大地(器世間)와 같은, 많은 生物에 공통하는 果報를 끌어 일으키는 共業, 개개의 生物의 신체와 같은, 개개의 생물에 固有果報引起하는 不共業이 있다.

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善業(安穩法), 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不善業(惡業 不安穩法), 善惡 어떤 것도 아닌 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無記業의 셋을 三性業이라고 한다. 惡業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기 때문에 罰業 이라 하고, ··三罰業 또는 三罰이 있다. 中阿含經 三十二에는 ··三業중에서 意業이 가장 하다고 하여, 불교가 動機論에 입각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자이나에서는 ··三罰身罰을 가장 하다고 하여, 結果論에 빠져 있다. 熟慮한 뒤에 決斷하여 일부러 한 故思業(故作業)과 그렇지 않고 뜻밖에(無意識的) 잘못한 不故思業은 그것만으로는 갚음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故思業중에 적극적으로 한 강하고 중대한 增長業이라고 하고, 소극적으로 한 약하고 가벼운 故思業不增長業이라고 한다. 점점 강하게 되는 增上業 혹은 增長業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造作業이라고 한다. 欲界惡業과 같이, ····五識으로 받는 만을 果報로 가져오는 身受業, 色界·無色界(初禪天)善業과 같이 제六意識으로 받는 만을 受果報로 가져오는 心受業이라 하고, 합하여 二受業이라 한다. 苦受樂受捨受(不苦不樂受)果報는 각기 欲界惡業欲界에서 色界 第三禪까지의 善業, 色界 第四禪 이상의 善業에 의해서 오기 때문에, 이 세 을 각기 順苦受業·順樂受業·順不苦不樂受業이라 하고, 합하여 三受業이라고 한다. 欲界善業은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福樂, 欲界惡業은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에 非福業, 色界·無色界善業은 그 禪定의 힘에 의해서 갚음()이 정해져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不動業이라 하고, 합하여 등의 三業(또는 三行)이라고 한다. 惡業黑業, 善業白業이라고도 하고, 여기에 異熟의 좋아함직()한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에 배당하면, 欲界不善業은 성질이 不善하여 異熟도 좋아하지 않는 黑黑異熟業, 色界·無色界善業은 성질은 하고 異熟도 좋아하기 때문에 白白異熟業, 欲界善業은 성질도 異熟黑白相雜하여 있기 때문에 黑白黑白異熟業, 번뇌와의 관계가 斷切無漏業은 상대적인 黑白을 초월하여 異熟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非黑非白無異熟業이라 하고, 이것 둘을 합하여 四業이라 한다. 四業중에 앞의 3有漏業으로, 이것들은 최후의 無漏業에서 斷滅하지 않으면 안 된다. 內心을 남 모르게 감추고 아첨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曲業이라고 하고, 또한 성냄에 의해서 일어나는 穢業이라 한다. 탐냄으로 의해서 일어나는 濁業이라고 하고, 이것들을 합하여 曲穢濁三業이라고 한다. 八聖道第四支正業으로, 그 반대는 邪業이다.

에 의해서 그 갚음을 받는 시기에 다름()이 있기 때문에, 順現業(順現法受業)·順生業(順次生受業)·順後業(順後次受業)三時業을 나누어, 각각 이 세상에서 지은 에 응해서, 그 갚음을 이 세상에서 받는 것. 다음 태어난 세상에서 받는 것, 3이후에 받는 것으로 구분한다. 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不定業(順不定受業)이라 하고, 거기에 三時業을 더하여 四業이라고 한다. 不定業을 갚음의 내용(異熟)·不定에 의해서 時不定異熟定業時不定異熟不定業의 둘로 나누고, 여기에 三時業을 더하여 五業으로 하며 또 三時業을 각기 時定異熟定時定異熟不定으로 나누어 6으로 하고 둘의 不定業을 더하여 八業이라고도 한다.

이 작용할 또는 의지할 곳이 되는 것. 혹은 有情苦樂果報(갚음)에 인도하는 通路가 되는 것을, 業道(根本業道)라 하는데, 여기에 十善業道十惡業道가 있다. 有部에서는, 十善·十惡에는 인 것과 이 아닌 것(無貪·無瞋·正見, ··邪見)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意志()가 거기에 작용하는 바의 의지할 곳이 되기 때문에 業道라 한다고 했다. 經量部大乘에서는, 十善·十惡은 모두 이어서 意志()로 하는데, 처음의 七業道에 있어서는 ·發動하는 意志(), 思惟하여 결정하는 意志()의 작용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業道라 하고, 또 그 發動의 생각에 의해서 생긴 생각의 종자도 業道라 한다. 뒤의 셋 곧 ··등은 順次, 交互로 생기기 때문에, 앞의 것은 뒤의 것 때문에 가 되고, 有情을 지옥등의 惡趣등에 인도되는 가 되기 때문에 業道라고 . 에는 준비적 행위(加行)와 목적을 수행하는 그 순간의 행위(根本)完遂한 뒤의 종속적인 행위(後起)가 있는데, 이 가운데 근본만을 業道라고 한다.

煩惱道·業道·苦道(三道).

은 갚음(果報, 異熟)을 내는 이 되기 때문에 業因·因業이라 하고, 에 의한 갚음을 業果, 業報라 한다. 業因에는 을 일으키는 원인(번뇌등)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고, 因業에는 (主因助緣)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다. 業果를 끌어 당기는 힘을 業力, 에 의한 괴로운 갚음, 또는 과 그 인 갚음을 業苦라고 한다. 惡業과 번뇌를 아울러서 業結·業惱라고 한다. 惡業 때문에 생긴 가리움, 障害業障·業累라고 한다. 에 의해서 갚음을 받는 것은 業感, 過去世(前生·前世)에 지은 宿業 또는 前業, 宿業에 의해서 받은 壽命業壽·業受. 宿業에 의한 벗을 수 없는 중한 業病, 宿業에 의해 재앙은 業厄이라고 한다. 이 갚음을 하는 도리는 天道와 같이 必然이기 때문에 業天, 은 그림자와 같이 몸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業影, 업은 중생을 迷界에 묶어 놓기 때문에 業繫(繫業이라고 하여도 거의 같다)·業羂·業縛·業繩이라 한다. 은 그물과 같이 사람을 붙잡아서 迷界에 머물게 하므로 業網, 惡業은 때나 먼지와 같이 몸을 더럽히기 때문에 業垢·業塵이라고 한다. 惡業의 작용을 ··에 비유해서 業火·業魔(十魔1)·業賊등이라 하고, 지옥에는 중생의 선악의 을 비추어 내고 재고 기록하는 業鏡·業秤·業簿 등이 있다고 한다. 惡業의 힘을 바람에 비유해서 業風이라고 하는데, 惡業에 의해서 招來猛風(지옥등의)業風이라고 한다. 宿業에 의한 神通力으로서 業通(報通)이 있다.

無間地獄의 갚음을 부르는 것을 無間業, 有情欲界등의 三界에 매어두는 三界繫業이라고 한다. 번뇌는 을 일으켜서 有情을 가지가지의 세계에 태어나게 한다. 을 윤택하게 하고, 이 미래의 을 부르는 潤業·潤生業이라고 한다. 또 자기의 지은 의 갚음을 자기가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自業自得이라고 한다.

十二緣起第十支를 해석하는데, 후대에 와서는(阿毘達磨에서는) 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것을 業有라고 한다.

觀無量壽經에는 ··三福淨土往生하기 위한 正因으로, 淨業(淸淨業)이라고 해져 있다. 일반으로 염불해서 彌陀淨土往生하고자 원하는 것을 淨業이라 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 : 모든 것은 因果法則으로 支配된다는 원리. 善因에는 善果, 惡因에는 惡果가 반드시 있다고 하는 것. 에 상응한 果報는 현세에서도 받고 혹은 來世에서도 받는다고 한다. 윤회전생 사상과 결부되어 사람으로 태어나 받기도 하고 六道에 윤회하며 받기도 한다.

 

인과(因果) : 원인과 결과를 말함.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 이고 그 에 의해 생기는 것이 이다. 시간적인 因果 관계로 볼 때 은 앞에 있고 는 뒤에 있으므로 因果異時라 한다. 그러나 묶은 갈대를 서로 의지해서 세우는 것은 넓은 의미의 인과관계이니 이와같은 인과관계에서 보면 因果同時이다. 唯識派에선 種子에서 종자가 생기는 관계는 因果異時이고 종자에서 現行이 생기고 現行에 의해 종자를 하는 관계는 因果同時라 한다. 六因 · 五果 중에서 異熟因異熟果와의 관계 및 同類因 · 遍行因等流果와의 관계는 어느 것이나 因果異時俱有因 · 相應因士用果와의 관계는 因果同時이다. 能作因增上果와의 관계는 양쪽에 다 통한다. 同類因等類果와의 관계는 前生의 자기가 이 되어 後世의 자기를 낳게되는 관계임으로 이것을 自類因果라 한다

우리의 行爲(에 대해서 異時因果를 세울 때 業因에는 반드시 果報가 있고 業因에는 반드시 果報가 있다. 이것을 善因善果 · 惡因惡果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善因樂果 · 惡因苦果라고 해야 될 것으로 본다. 으로 이 생겨 善業이 계속할 경우도 있다. 이는 바로 善因善果이다. 善惡業因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에 相應하는 苦樂果報가 있다. 因果의 이치가 엄연해서 조금도 흩어지지 않는 것을 因果應報라고 한다. 因果의 이치를 무시해서 인정치 않고 邪見에 빠지는 것을 因果撥無한다고 한다.

因果關係를 실천수도상에서 본다면 수행의 에 의해서 깨달음의 를 얻게 됨으로 이것을 修因得果 · 修因感果 · 酬因感果라고 한다. 이란 를 불러 들이는 것이다.

모든 外道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外道四執 또는 四執이라 함. 邪因邪果萬物生起의 원인을 大自在天能力으로 돌리는 것. 無因有果는 현재의 現象的 世界로서 인정하고 그 에 대한 은 결국은 얻기 어려움으로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有因無果는 현재의 현상적 세계를 으로 인정하고 그 에 대한 는 얻기 어렵다고 부정하는 것. 無因無果는 그 양쪽을 다 부정하여 因果撥無하는 것. 또 따로 두 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因中有果論婆羅門敎 數論에서 주장하는 로서 나타난 현상적 현상세계는 반드시 가운데 들어 있다. 따라서 는 성질이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 이에 대해 因中無果論婆羅門敎에 대립하는 소위 일반사상계 및 勝論에서 주장하는 로 독립한 많은 요소()가 결합해서 현상적세계()가 되었다고 봄으로 는 성질이 같지 않고 가운데 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차라리 果中有因論이라고 하여도 된다.

善惡業因에 의해서 樂苦를 가지고 오는 것을 나타내는 異熟因 · 異熟果와 그 중에서 특히 福德(世間的善業)에 의해 · 樂果를 가져오는 福因 · 福果, 智慧修習하여 깨달음의 결과를 가져오는 智因 · 智果의 세 가지 因果關係三因三果라 한다.

 

응보(應報) : 善惡의 행위(業因)에 응해서 갚음이 나타나는 苦樂의 결과.

 

법칙(法則) : 꼭 지켜야만 하는 규범. 전칙(典則). 언제 어디서나 일정한 조건하에 성립하는 보편적·필연적 관계.(국어사전)

 

선인(善因) : 善根善果를 부르는 을 말함.

 

선과(善果) : 五戒·十善 등의 善業을 지어 받는 좋은 果報를 일컫는 것.

 

악인(惡因) : 나쁜 결과를 받을 .

 

악과(惡果) : 惡業에 의해 받는 나쁜 果報.

 

() : 狹義로는 결과()를 가져오는 직접 내적 원인을 (內因)이라 하고, 이것을 외부에서 도우는 간접적 원인을 (外緣)이라 하지만, 廣義로는 두 가지를 합해서 이라고도 하고 이라고도 한다. 을 여러 가지로 분류한다.

能生因方便因, 正因了因, 正因緣因 등의 2의 분류는 狹義로서의 並稱하는 이름이다. 이 밖에 習因(慣習 · 同類因)報因(善惡, 異熟因), 引因 또는 牽引因(未來世果報를 끌어 당기는 種子)生因 또는 生起因(가까운 未來世果報를 끌어당기는 種子), 通因(흔히 결과에 대한 공통으로 이 되는 것)別因(하나의 결과만 특별히 이 되는 것) 등의 두 가지 의 분류가 있다.

5· · · · 의 다섯가지 으로 能造四大種(···)으로 하고 所造色로 할 때 4大種所造色에 대한 5의 뜻이라고 한다. 生因이란 4에서 所造가 생기는 것. 依因이란 4所造하는 所依가 되는 것. 立因이란 4所造한 것을 保持하는 것. 持因이란 4所造하는 것을 지속시키는 것. 養因이란 4所造할 수 있도록 育成하는 것을 말함. 또 일체의 을 나눠 生因 · 和合因 · 住因 · 增長因 · 遠因5으로 하기도 한다.

有部宗(俱舍宗)에서는 6을 말한다. (1) 能作因. 이외의 일체의 有爲法은 그 법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혹은 적극적인 힘을 주고(有力能作因), 혹은 소극적으로 그 법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無力能作因)을 모두 그 법에 대한 (能作因)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廣義이다. (2) 俱有因. 두 개 이상의 법이 동시에 서로 같이 존재할 때, 諸法은 서로가 俱有因이라 한다. 여기에는 同一果(를 같이함)互爲果(서로 가 되는 것)외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3) 同類因. 같은 이 연속해서 생기는 경우. 앞의 법을 뒤 법의 同類因이라 한다. (4) 相應因. 俱有因 중에서 특히 心所와의 관계를 相應因이라 한다. (5) 遍行因. 同類因 중에 특히 힘이 강한 번뇌 곧 遍行惑에 관해 말할 경우를 따로 말하는 것. (6) 異熟因. 不善業有漏善業이 되어 無記를 끌어당기는 경우 이것을 異熟因이라 한다. 또 따로 當有因 · 相續因 · 相因 · 能作因 · 顯了因 · 待因6이라고도 한다.

유식종에서는 10을 말한다.

(1) 隨說因. 말은 사물을 표현함으로 말은 곧 사물의 이다.

(2) 觀待因. 잘 받들리는 것. 예를 들면 손을 들어서 물건을 잡는 동작을 행할 때 손을 잡는 물건의 이다.

(3) 牽引因. 種子가 먼 미래에 스스로 를 끌어 당기는 것.

(4) 攝受因. 種子 이외의 여러 가지 .

(5) 生起因. 種子로부터 가까운 미래에 자신의 가 생긴다.

(6) 引發因. 種子 혹은 現行同類의 훌륭한 를 끌어당기는 것.

(7) 定別因. 일체의 有爲法이 자신의 를 끌어 오지만 亂雜하지 아니함.

(8) 同事因. 和合하는 것.

(9) 相違因. 사물이 생기는데 障碍가 되는 것.

(10) 不相違因. 함께 장애가 되지 않는 것.

십습인이란 가끔 어떤 일에 탐익해서 미래에 지옥에 가는 열 가지 악업.

因明(論理學)의 용어. (命題) · (例證)와 같이 三支(三要素)를 만든다. 다음에 위치해서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

 

상응(相應) : 범어 samprayukta의 번역. 평등하게 화합한다는 뜻. 이 서로 和合하여 떨어지지 않는 관계에 있는 것. 특히 마음과 心所간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수가 많다. 六因 중의 相應因은 이것이며, 俱舍論 卷六五義平等相應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것이다. 雜集論 卷五에는, 서로 떠날 수 없는(不相應), 화합하는(和合), 모이는(聚集), 同時하고, 同時하는(俱有), 목적을 같이 하는(所作), 心所가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한결같이 작용하는(同行) 것의 6相應. 이 중에서 앞의 5종은 주로 色法(물질)에 대해서 말한 것. 이 밖에, 과 뚜껑과 일치하는 것을 函蓋相應, 를 받는 ()가 일치하는 것을 機敎相應이라고 한다.

 

과보(果報) : 異熟이라고도 한다. 으로서의 業因으로 말미암아 얻는 보답의 결과. 여기에 二報가 있다.

(1) 總報引業(總報業)에 의하여 引出되는 總體로서의 果報를 말한다. 예를 들면 일단 인간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그 인간으로서의 공통된 생존을 누리게 됨을 말한다.

(2) 別報滿業(別報業)에 의하여 引出되는 차별의 果報로서 滿果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같은 인간으로 태어난 경우에도 · · · 의 차가 있게 되는 등이 그것이다. 三時業에 대한 각각의 果報를 합하여 三報라 한다.

(1) 順現報現報라고도 하며, 금생에 을 지어 금생에 받는 果報,

(2) 順生報生報라고도 하며 금생에 을 지어 다음에 받는 果報,

(3) 順後報는 금생에 을 지어 次生을 넘어 未來世 이후에 받는 果報를 받는다. 六趣 가운데 人趣天趣果報五戒 十善에 의하여 받는 훌륭한 이므로 人天勝妙善果라고 한다. 그렇지만 아직 凡夫迷惑의 경계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顚倒善果라 부른다.

 

자인(自因) : 자기 원인.

 

업도(業道) : 이 작용하는 장소가 되는 것(所行의 뜻). 有情苦樂果報(異熟)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는 것(能通의 뜻)業道라 한다. 여기에 十善業道 · 十惡業道가 있다. 有部에선 業道所行의 뜻으로 해석하여 十善 · 十惡 중에서 身語에 관한 각 일곱가지는 그 자체가 으로서 그 思業(意志 · 意業)의 작용하는 바가 되므로 業道라 한다. 에 관한 각 세가지(無貪 · 無瞋 · 正見 ·  ·  · )는 그 자체가 은 아니지만 그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서 思業이 그것들을 장소로 하여 그 곳에서 활동함으로 業道라고 한다. 經量部에선 十善道는 모두 인 동시에 業道라 한다. 곧 이 중에서 身語7業道에 대해서 그 行爲()를 일으키는 動發思身語이며 그 審慮思決定思를 작용케 하는 바가 됨으로 이 되고 겸하여 業道가 된다고 한다. 또 이와 같은 現行(현재 생겨서 작용하는 )熏習種子業道라 한다. ·  · 의 세가지는 그 자체가 이지만 이것을 業道라 함은 에 의해 이 생기고 에서 가 생기는 것처럼 전자는 후자를 위한 가 되고 혹은 서로가 가 된다. 이렇게 하여 다시 惡趣善趣에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되는 까닭이라 한다. 唯識宗도 거의 經部와 같아서 所行能通에 두가지 뜻으로 業道를 해석한다. 특히 이 業道이 수행되는 결과를 加行(준비적 행위) 根本(완수행위) · 後起(부수적 종속적 행위)3단계로 분류하는 중에서 根本 根本業道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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