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법중도(一法中道)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法相宗에서 말하는 中道의 하나. (1) 北寺의 傳에서는 遍計所執性·依他起性·圓成實性의 三性은, 각기 妄情에서 말하면, 情有·假有·無相이지만, 理에서 말하면, 理無·實無·無有이다. 이 각기의 一法에도 中道의 뜻이 있다고 한다. (2) 南寺傳에서는, 圓成實性을 體로 하는 依他起上의 一法, 곧 一色一香에 中道의 理가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함.
참고
법상종(法相宗) : 唯識宗 · 應理圓實宗 · 普爲乘敎宗 · 唯識中道宗 · 中道宗이라고도 하며, 이 宗의 所依經典은 解深密經 · 成唯識論 · 瑜伽師地論이다. 佛滅 후 1천년경 북인도 사람인 無着과 世親이 세우고, 중국에서는 인도의 戒賢論師에게 법을 배운 玄奘이 窺基에게 전하다. 窺基는 慈恩寺에서 주석하였으므로 慈恩宗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의 圓測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玄奘에게 瑜伽論과 唯識論을 배우고 唯識疏抄를 저술하였다. 또한 경덕왕 때에는 眞表律師가 金山寺에서 戒法과 占察法을 수행하고 법상종의 宗旨를 寶宗 · 永深 · 信芳 등에게 전하여 法住寺와 桐華寺에서 크게 성하였다. 이 宗은 우주 만유의 本體보다도, 현상을 자세히 분류 설명하였으므로 법상종이라 하고, 유식종이라 함은 일체 萬有는 오직 識이 변해서 이루어 진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불교의 唯識論으로서 萬有는 오로지 아뢰야식으로 緣起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 緣起의 本體인 能變의 처음은 제 8識이요, 2能變은 제 7識, 3能變은 通 6識이라 하고, 이것들은 모두 內心으로 外境을 變現하는 것이므로 三界唯一心과 心外無別法이라 말한다. 萬有를 분류하여 五位百法으로 정하며, 만유의 진정한 理 · 事 · 迷 · 悟를 밝히기 위하여 遍計所執性 · 依他起性 · 圓成實性의 3性을 말한다. 識이 外境을 인식하는 과정에 나아가서는 이것을 4分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萬法唯識의 이치를 깨달아 알게 하는 방법으로 5重唯識觀을 세웠다. 중생의 해탈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중생의 성품에는 선천적으로 菩薩定性 · 緣覺定性 · 聲聞定性 · 三乘不定性 · 無性有情의 5性이 각각 다르므로 영구히 해탈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 宗의 三乘敎만이 옳고, 다른 종파의 一乘敎는 假說이라 하므로 이 宗을 權大乘이라 부른다.
중도(中道) : 二邊. 곧 양극단이 따로 떨어지므로 얻을 수 있다. 치우치지 않는 中正인 道의 뜻. 中路 혹은 단순히 中이라고도 함. 中道는 佛敎의 근본적 입장을 말하고 있어 대승 · 소승에 걸쳐서 중요시되고 있다. 따라서 그 뜻하는 바에도 深淺이 있지만 각 종파에서 이 語句를 가지고 교리의 핵심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중도의 意義를 中道義, 중도의 眞理를 중도의 理, 중도의 敎說을 中道敎(三時敎의 하나), 중도를 종지로 하는 종단을 中道宗(법상종에선 唯識中道를 주장하므로 자신이 中道宗이라 한다), 중도를 觀하는 것을 中道觀(자세히 말하면 中道第一義諦觀이라 하여 三觀의 하나)이라고 한다. 또 중도는 우주만유의 진실상을 나타내므로 중도는 곧 實相이라는 뜻에서 中道實相이라 한다.
① 阿含의 八聖道의 실천은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로 치우친 생활태도를 버리고 중도에 의해 지혜를 완성하여 열반의 證得으로 가는 도이므로 팔성도를 中道라 한다(中阿含經卷五十六). 또 十二緣起의 진리를 옳게 이해하는 것은 常見(중생의 생명의 주체인 我는 영원히 존속한다는 생각)과 斷見(死後엔 아주 滅無로 돌아간다는 생각). 또 有見(자연적입장, 世間의 상식)과 無見(허무주의)등과 같은 치우친 견해로부터 떠나는 것으로, 십이연기를 옳게 觀하는 것이 중도의 正見에 住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잡아함경 권십이등). 초전법륜에서 석존이 설한 것인데 前者는 실천상의 중도이며 後者는 思想上의 중도이다.
② 部派불교의 중도. 大毘婆沙論卷四十九나 成實論卷十一등에서 아함의 교설을 받아 들여 중도는 斷 · 常의 二見을 떠난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③ 대승의 中觀派에서는 般若波羅密을 근본적인 조건이라 하고 모든 집착이나 분별의 경지를 떠난 無所得의 상태에 있는 것을 중도라 한다. 中論 卷一 觀因緣品에, 緣起의 理法은 生 · 滅 · 斷 · 常 · 一 · 異 · 去 · 來의 여덟 가지의 잘못된 견해(八邪 · 八迷 · 八過 · 八計 · 八謬 · 八事 · 八迷의 戱論)를 타파하여 空의 진리를 밝힌 것이다. 萬有는 그 緣起의 道理에 순응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원래 八邪를 여의었으며 실체가 없어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밝힌다. 이와 같이 八邪가 떨어져 無得正觀(無所得의 바른 견해)에 住하는 것을 중도라 하고 이것을 八不中道 · 八不正觀 · 無得中道 · 八不中觀이라 한다. 여기에 八不이란 생멸 등의 八邪를 否定하는 不生 · 不滅 · 不斷 · 不常 · 不一 · 不異 · 不去 · 不來를 가리킨다. 이에 의하여 모든 邪執이 파멸되어 諸法이 그대로 實相인 도리가 나타난다. 八不중에서도 不生 · 不滅이 그 근본이다. 특히 팔불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不生이 팔불 속에 들어갈 수 있다 한다. 吉藏의 中論疏卷二에 의하면 不生은 嬰兒闡提, 不滅은 邪見闡提, 不斷은 斷見의 聲聞, 不常은 常見의 聲聞, 不一 · 不異는 外道, 不來와 不去는 獨覺 및 初發心 보살들의 각각의 邪執을 파괴시킨다고 한다. 삼론종은 八不中道의 설에 입각하여 세 가지 중도를 주장한다. 즉 中論疏 卷一에는 八不中道를 二諦에 關係시켜 설명한다.
(1) 因緣에 의해 거짓 존재하는 現象面으로 말하면, 모든 사물은 실체가 아니고 空이면서 거기다 거짓 현상으로 존재하므로 無生滅의 生滅이니 生이나 不生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을 俗諦中道 · 世諦中道라고 일컫는다.
(2) 사물의 진실한 실재의 측면 곧 본체면으로부터 말하면 모든 사물은 거짓 현상으로 존재하면서 또 그 本體는 空이기 때문에 生滅의 無生滅로서 不生이라고도 非不生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하여 이것을 眞諦中道라고 한다. 이 두 가지를 二諦各論中道라고 한다.
(3) 그렇지만 無生滅의 生滅, 生滅의 無生滅이란 실은 生滅도 아니고 無生滅도 아닌 言語와 思慮를 여읜 究極的인 空이라고 하여 이것을 二諦合明中道 · 非俗非眞中道라 일컫는다. 또 三論玄義卷下에 중도에 一中 내지 四中의 구별이 있다고 했다. 곧 중도가 유일의 청정한 도인 것을 一中, 중도를 二諦에 대해 논하여 「世諦의 中」과「眞諦의 中」으로 분류하는 것을 二中, 그「二諦의 中」에「非眞非俗의 中」을 더하여 三中이라 한다. 四中이란 다음 네 가지이다. (1) 對偏中. 斷 · 常의 偏見에 대해서 설한 中. (2) 盡偏中. 그들 偏見이 滅盡되어 중도의 意義가 나타난 것. (3) 絶對中. 거기 나타난 中은 언어와 사려를 초월한 不偏不中인데,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中이라 한 것. (4) 成假中. 非有非無인 絶對中에 의해 현상으로서의 거짓 존재(有無)를 성립시켜 중생을 교화하는 수단(方便)을 말한다.
④ 천태종에서는 空 · 假 · 中의 三諦의 설을 주장하여 모든 존재를 一面으로만 생각하는 空 · 假를 초월한 절대적인 본체는 언어와 사려의 대상이 아님을 中諦라고 한다. 이 중제는 化法의 四敎중 別 · 圓의 二敎로 설명된다. 그러나 別敎에선 三諦를 각각 독립된 진리라고 생각하고(隔歷三諦), 空 · 假의 二諦는 현상면, 中諦는 본체면으로부터 말한 것이라 하여 但中, 圓敎의 三諦는 서로가 개별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一諦중에 三諦를 갖추고 있어 셋이 별개가 아니고 융합되어 있다고 보며(圓融三諦), 卽空 · 卽假 · 卽中으로서의 中諦이므로 이것을 不但中이라고 한다. 또 通敎에선 三諦의 설은 없지만 거기서 주장하고 있는 空理 가운데 중도가 들어 있다고 설명되고 있으므로 통교를 含中敎라고도 한다. 그리고 천태종에서는 중도의 理는 우주의 진실한 모습인 만큼 이 진리를 깨달으면 佛 내지 地獄의 十界를 敎化시키는 대상자에게 맞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應化의 本源이 중도에 있다는 뜻에서 中道應本이라고 한다. 藏敎와 通敎의 보살은 이것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 前者는 本惑을 끊지 못하고 남겨 두어 三界에 남아 있고 後者는 誓願을 세워 煩惱의 習氣를 붙들어 三界에 태어나고 중생을 교화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⑤ 유식종에선 有 · 空 · 中의 三時敎의 敎判을 세워서 解深密經 등의 설처럼 有 · 空의 二邊(兩極端)을 여의고 非有非空의 중도의 진리를 완전하게 나타낸 敎를 中道了義敎라 하고, 有 · 空에 치우친 敎를 不了義敎라고 한다. 그 중도란 소위 唯識中道로서 곧 (1) 범부가 실재한다고 본 바의, 有情의 실체적 생명으로서의 我나 萬有의 구성요소로서의 法은 迷情의 집착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情有理無의 非有이다. (2) 萬有는 인연의 假有的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 아뢰야식의 變現이므로 즉 識은 理有情無의 非無이다. (3) 또 만유는 고정된 본성(自性)이 없고 空이므로 자유자재로 현상될 수 있는 것으로 곧 공은 眞空妙有의 非無라고 한다. 이와 같이 宇宙의 眞相은 非有非無(非有非空)의 중도로 파악되는데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中道了義敎라고 한다. 三性說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我와 法은 遍計所執性에 해당하고 識은 依他起性, 空은 圓成實性에 해당한다(成唯識論 卷七). 우리 나라의 원효는 그의 梵網經菩薩戒本私記卷上에서, 「非有非無는 가(邊)를 여읜 중도의 戒를 나타낸 말이니, 그러므로 戒의 體를 말하면 因緣을 따라 생긴 것이지만 그 인연의 본체를 추구해 들어가면 戒의 自性을 얻을 수 없으므로 非有며, 戒가 비록 非有라고 하지만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므로 토끼 뿔이 없는 것처럼 아주 없는 것은 아니므로 非無라 한 것이다.」라고 하여 戒를 非有非無의 중도의 원리에 입각해서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원효는 이어서 「만일 戒의 業을 말하면 막는다는데 戒의 뜻이 있는 것이니 그 막아야 할 대상은 곧 罪다. 그러므로 계는 결국 인연을 따라서 생기지만 그러나 그 인연의 본체를 추구하여 들어가 따지고 보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얻어질 실재의 客觀은 없다.」고 하고 한 걸음 나아가 계를 중도에 契合시키는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전개했다. 「마음자리를 두고 논하면 뿌리의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므로 죄될 요소가 따라 붙을 수 없다. 따라서 그릇됨을 막는다고 하지만 실은 그 절대적인 객관화된 본질적 표준(罪性)이 있음도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罪性은 마음의 근본바탕에는 없다. 그렇지만 또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여기에 戒가 중도에 들어 맞는 도리가 있는 바이다.」원효가 一切法에 無碍自在한 一大理論으로 千經萬論을 막힘이 없이 꿰뚫은 것도 다 철두철미하게 一貫 中道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또 華嚴經序에 「원래 無障無碍한 法界의 法門은 法이란 것도 없고 법아닌 것도 없으며 門이 아니고 門 아님도 없도다. 그것은 大도 小도 아니요 促도 奢도 아니며 動도 靜도 아니며 一도 多도 아니다.」라고 했고, 金剛三昧經論序에 「破할 것도 없고 破하지 않을 것도 없으며 세울 것도 없고 세우지 않을 것도 없으니 이른바 아무 이치가 없는 것 같지만 지극한 이치이고 그렇지 않으면서 크게 그러하다」고 했다. 이러한 圓融無碍한 절대의 원리에 입각하여 性 · 相 · 空 · 有 · 一 · 異의 일체의 相對性을 會通시킴으로 立 · 破 · 開 · 合에 조금도 걸림이 없는 중도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고려의 義天도 「대저 法에는 말이나 형상이 없으며 말이나 형상을 여읜 것도 아니니 말이나 형상을 여의면 뒤집힌 迷惑이요, 말과 형상을 집착하면 참으로 迷한 것이다」라고 했고, 「敎學者는 안을 버리고 밖으로 구하며 習禪人은 因緣法을 모르고 안으로만 밝혀서 偏執하므로 二邊을 다 읽는다」고 하여 역시 중도가 究竟임을 누누히 밝혀 주고 있어서, 원효의 중도설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일본에 있어서는 執空說을 취하는 南寺傳의 중도설과 體空說을 취하는 北寺傳의 중도설과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먼저 집공설의 입장을 주장하는 남사전에 의하면 三性對望의 중도설을 주장한다. 곧 진여인 원성실성(眞有)에 의해 의타기성(假有)으로서의 현상이 있다. 그 現象의 相을 實有라고 집착하는 것이 변계소집성(理無)이므로 변계소집은 非有, 의타기와 원성실은 非無이다. 또 三性은 一法上의 三性이므로 三性을 상대로 하여 볼 때 여기에 非有非無인 하나의 중도가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體空說을 취하는 북사전에서는 一法中道說을 주장한다. 예를 들면 변계소집성은 情有이므로 非無, 理無이므로 非有로서 곧 중도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三性이 각각 하나하나 다 중도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고 나아가서 情有도 단순한 有가 아니라고 하여 많은 一法中道를 주장한다. 단 일법중도설 가운데서 변계소집성은 범부의 迷情이므로 중도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설도 있다. 三性을 상대로 중도를 설명하는 것은 言說로 설명한 중도이므로 言詮中道라 한다. 一法中道는 모든 존재가 본래적인 진실한 相으로는 언어와 사려를 끊어버린 非有非空의 중도라 하여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도이므로 離言中道라고 하여 이들을 합해서 二重中道라고 한다. 이것은 중도에 따로 두 개가 있는 것은 아니라 前者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중도, 後者는 자기 스스로의 깨달음의 내용으로서의 중도이다. 또 중도란 말은 能觀의 智를 가리키는 경우에도, 所觀의 理를 가리키는 경우에도 사용된다.
삼성(三性) : ① 모든 존재의 본성이나 事物의 존재하는 상태(性相)를 有無·假實이라고 하는 점에서 세 가지로 나눈 것을 三性이라고 하고, 三性이 각각 無自性空이라고 하는 것을 三無性이라고 한다. 解深密經卷二의 一切法相品등에 근거한 說로서, 인도 唯識學派에서 說하고, 중국에서는 法相宗의 근본 敎義의 하나로 되고 있으며, 화엄종 등에서도 인용된다. 三性은 三自性·三性相·三種自性·三相등으로도 말하고, (1) 遍計所執性·(2) 依他起性·(3) 圓成實性의 셋을 말한다. 略해서 遍依圓이라고도 하고, 異譯에서는 (1) 虛妄分別相·(2) 因緣相·(3) 第一義相 또는 (1) 分別性·(2) 依他性·(3) 眞實性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三無性은 三種無自性性·三無自性·三種無性 등이라고도 하고, (1) 相無性·(2) 生無性·(3) 勝義無性의 셋을 말한다.
② 법상종의 說. 成唯識論卷八에,
(1) 遍計所執性이라 함은, 가지가지의 緣으로 생긴, 實體가 없는 존재를 實我實法이라고 하여 집착하는 迷한 마음(能遍計)과, 그 識의 대상인 境(所遍計)과, 이 識과 境에 의해서 心外에 實在한다고 그릇되게 인식하는 존재의 모습(遍計所執)을 말한다고 하고, 그 존재의 모습은 迷한 마음에 있어서 나타난 相이기 때문에 當情現相이며, 진리를 인식하는 참다운 경지에서는 實在하지 않는 情有理無의 것이고, 전연 실체가 없는 體性都無라는 것이다. 遍計所執性에 대해서, 인도의 論師들 사이에 異說이 있는데, 법상종에서는 護法의 說을 취한다. 곧 能遍計를 安慧는 有漏의 全8識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護法은 제 6 · 7識이라고 하고, 所遍計를 難陀는 實我實法으로 誤認하고 있는 當情現相이라 한다. 반면에 護法은 依他起性으로서의 似我似法이고, 또한 진여는 迷情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점에서는 所遍計라고 할 수 없으나, 依他起的 존재의 本體라고 하는 점에서는 所遍計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또 遍計所執을 安慧는 見相二分(→四分)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護法은 見相二分 위에 迷情에 의해서 나타난 當情現相이라고 한다.
(2) 依他起性이라 함은, 他 곧 갖가지 緣에 의해서 일어난 것을 말하고, 緣이 합하면 생기고 여의면 없어지므로 꼭두각시와 같아서, 고정적인 영원불변의 實在는 아니기 때문에 如幻假有·假有實無이니, 진리를 깨달은 지혜에 의해서만 알게 될 뿐 迷情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理有情無이다. 여기에 染分依他起性과 淨分依他起性이 있는데, 染分은 有漏의 모든 것, 淨分은 無漏有爲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단 淨分의 依他는 번뇌를 여의고 있다는 점에서 圓成實性에 포함시키며, 染分依他를 依他起性으로 한다.
(3) 圓成實性이라 함은, 依他起性의 진실한 體인 진여를 말하는 것으로, 온갖 것에 원만하게 두루하여 不生不滅하고, 그 體는 거짓이 아니므로(眞實) 圓成實이라고 한다. 진여는 모든 相을 여의어 無相이고, 모든 것의 本體로서 진실하기 때문에 진공묘유이며, 진리를 깨닫는 지혜로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理有情無이다.
이 三性의 관계는 不卽不離이며, 蛇縄麻의 비유에 의해서 說해진다. 곧 어리석은 사람(能遍計)이 캄캄한 밤에 새끼줄을 보고 뱀(實我의 相으로서 변계소집성)으로 착각하고 놀라고 두려워 했는데, 覺者(불 ·보살)의 가르침에 의하여, 뱀이 아니고(生空) 뱀과 같은 새끼줄인(의타기성이 假我인 것)것을 알고, 다시 참말로 있다고 집착하고 있는 새끼줄(實法의 相으로서의 변계소집성)도 참다운 의미로 보면 실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法空), 그 본질은 麻이며(원성실성), 새끼줄(의타기성)이라 함은 여러 가지의 緣에 의해서 삼(麻)이 임시로 새끼줄이라고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것과 같다.
다음에 三無性이라 함은 불타의 密意의 說로서, 三性의 說에 의해서 중생이 有에 집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三性에 대해서 空의 의미가 있는 것을 보인 것이다.
成唯識論卷九에,
(1) 相無性이라 함은 변계소집성에 대해서 말하고, 實我實法으로서 집착되어 있는 바의 모습은 迷情 위에 나타나는 것으로, 예컨대 눈병이 있는 자가 헛보게 되는 허공의 꽃처럼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2) 生無性이라 함은 의타기성의 속성을 말한다. 가지가지 緣이 생기어 거짓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緣生)이기 때문에 일정한 성질이 없고, 또 불교이외의 學派나 범부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우연히 홀로 생긴(自然性)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들이 집착하는 것과 같은, 그 자체가 갖는 그런 성질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마치 幻과 같다는 뜻.
(3) 勝義無性이라 함은 원성실성을 가리킨다. 眞如는 根本無分別智의 대상이 되는 뛰어난 진리이며, 그것은 모든 것의 참된 본질이기는 하나, 어떠한 특정의 성질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고, 我·法에 집착이 없는 虛空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三無性 중, 生無性·勝義無性은 의타기·원성실의 二性에 대해서 無性이라고 說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體는 空無라고는 할 수 없다. 이상의 三性·三無性의 說에 의해서 非有非空의 中道를 說하고, 三性이 不卽不離의 관계에 있으며 더우기 변계소집성은 情有理無, 의타기성·원성실성은 理有情無이기 때문에 三性을 합쳐서 中道를 밝히는 것을 三性對望의 中道, 또 三性이 각각 情有理無·假有實無·眞空妙有(無相과 眞實)인 점에서 하나하나에 대해 中道를 說하는 것을 一法中道라고 한다.
또 三性에 대해서 모든 것이 唯識無境임을 觀하는 것을 唯識三性觀, 三性觀行이라고 한다. 곧 변계소집성은 虛妄의 唯識性, 원성실성은 진실의 唯識性을 보이고, 또 의타기성은 세속의 唯識性, 원성실성은 勝義의 唯識性을 보이는 것으로, 이 三性을 觀하는 순서방법을 밝힌 것이 五重唯識觀이다. 더욱 三性을 깨닫는 순서에는 遍依圓·依遍圓·圓依遍의 三種이 있다고도 한다.
③ 화엄종의 설. 법상종에서는 모든 것에 대해 그 本性과 상태를 구별해서 說하는 性相隔別의 입장에서 三性說을 세웠는데, 이에 대해 화엄종에서는 性相融會의 입장에 서서 三性을 論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말하여 모든 것은 진여의 나타남에 불과하다고 한다.
곧 원성실성인 진여에는 不變과 隨緣의 두 내용에 있어서, 生滅을 여의고 있는 것(不變)과 더불어 染淨의 緣에 따라서 가지가지의 존재가 일어난다(隨緣)고 하고,
의타기성은 그 본체적 입장에서 말하면 진여이므로 생멸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無性인데, 그러나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이므로 似有라고 한다.
변계소집성은 범부의 妄情에 의해서 心外에 實我實法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情有인데, 그러나 그 我·法의 相은 理로서는 있을 수 없고, 또 진여에는 妄染이 없기 때문에 理無라고 하여, 이 不變·無性·理無의 뜻으로부터의 本三性이라 하고, 隨緣·似有·情有의 뜻으로부터 末三性이라 한다. 三性의 同異에 대해서, 本三性의 의미로는 진여의 隨緣으로서의 모든 현상(諸法)은 곧 진여이기 때문에 三性不異이고, 末三性의 의미에서 말하더라도, 진여가 隨緣 해서 諸法이 된 것이기 때문에 三性不異이다. 그러나 本三性은 諸法卽眞如, 末三性은 眞如卽諸法을 의미하기 때문에, 本末의 三性은 不一인 것이다(華嚴五敎章卷中).
④ 眞諦譯의 攝大乘論에서는, 分別性은 所分別의 境, 依他性은 能分別의 識을 의미하고, 이 分別性으로서의 境이 없기 때문에 依他性도 不可得이며, 그 不可得은 有로서의 眞實性이 있다고 說했다.
⑤ 모든 것의 성질을 종교의 윤리적 입장에서 善·不善(惡)·無記의 三性으로 나누고, 이 三性에 의해서 事物의 성질을 구별해서 밝히는 것을 三性分別이라고 한다.
망정(妄情) : 虛妄不實한 情識을 말함. .....정식(情識)→凡夫의 미혹한 마음의 견해를 말함.
정유(情有) : 三性의 하나인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말함. 중생들의 妄想으로 생각한 모든 境界는 理는 없으나 오직 情만 있으므로 情有라고 한다. .....정(情)→①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친절하고 사랑하는 마음. ② 혼탁한 망념. ③ 有情이란 것. ④ 인식의 機官. ⑤ 性이 일어나는 곳.
가유(假有) : 또는 俗有라고도 함. 거짓 존재라는 뜻. 萬象의 모든 법은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假有라 한다. 가유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小乘部波에서는 有部 등에서 내세우는 法數의 하나하나에 대하여 假와 實의 논쟁이 있다.
(2) 般若經, 中觀派, 三論宗, 天台宗 등 空觀系의 여러 종파에서는 일체의 법은 모두가 인연화합의 緣起이므로 이를 假有라 한다.
(3) 成實論에서는 因成假·相續假·相待假의 셋으로 구분한다.
(4) 法相宗에서는 聚集假·相續假·分位假의 셋으로 나누고, 또 범부 중생이 망상하는 無體의 존재(無體隨情假)와 불교가 세상법으로서 내세우는 有體의 존재(有體施設假)로도 구분한다.
무상(無相) : ① 眞如 法性은 迷한 생각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현상의 모양이 없는 것.
② 生滅 변천하는 모양이 없는 無爲法.
③ 모든 執着을 여읜 경계.
④ 客觀의 속박을 벗어나 萬法이 幻術과 같은 줄로 아는 온갖 無漏心.
⑤ 初地 이상의 菩薩이 無漏心으로 닦는 空觀.
이(理) : 理는 진리·理性의 뜻. 事는 현상적 事象·事法·차별적인데 대해 理는 平等的·本體的인 뜻을 가짐. 또 경험적 인식을 초월한 本性의 境地. 事는 일체 차별의 모양, 곧 現象界를 말함.
이무(理無) : 정유이무(情有理無)→三性의 하나인 遍計所執性을 가리킨다. 중생의 주관인 情意(번뇌에 의한 현재의식)로는 實在하는 것으로 보지만 실제의 객관적 진리로 보면 없다는 뜻으로 이름한 것. 곧 달밤에 새끼줄을 뱀으로 잘 못보고 놀라는 것과 같은 것.
실무(實無) :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무유(無有) : ① 있는 것이 없음. ② 있을 수 없음.
일법(一法) : 一事·一物. 만법에 대해서 말한 것. 법은 법칙이 아니라 존재 사물의 의미. 하나의 일. 하나의 사물.
원성실성(圓成實性) : ① 圓滿 · 成就 · 眞實을 구족한 것. 完成된 것. 萬有眞實의 本性 · 眞如와 같음. 唯識에서 말하는 三性 곧 遍計所執性(妄有) · 依他起性(假有) · 圓成實性(實有)의 하나. ② 원만과 성취와 진실의 三義를 具有하는 不生不滅의 無爲眞如.
체(體) : ① 범어 dhatu의 번역으로 䭾都라 음역하며 體 · 界 · 性으로 번역한다. 一定不變하는 사물의 근본으로 차별과 支分 곧 現象界의 所依 · 本體를 일컫는다. ② 體信 · 體達 · 體會의 뜻이 있다. 곧 體는 통달의 뜻. 곧 이치를 통달함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의타기(依他起) : 갖가지 다른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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